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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 깊숙한 곳에서 60mm 박격포와 M60 기관총을 갖추고 라오스 강을 도하하는 해칫포스 중화기 분대원들)


해칫포스는 SOG의 강습 부대로, 월맹군 시설을 공격하거나 정찰팀이 발견한 은닉처를 점거하는 신속 대응 소대 및 중대였다.


또한 전쟁 후반에는 장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계획된 작전을 수행했다.


해칫포스 소대는 42명의 현지 대원과 4명의 그린베레 부사관 및 1명의 중위로 구성되었으며, 해칫포스 중대는 그린베레 대위가 지휘하는 미군 중심의 중대 본부 아래에 3개 소대를 통합하여 구성됐다.


SOG의 세 가지 주요 FOB(CCN, CCC, CCS)에는 각각 1개 이상의 해칫포스 중대가 있었다.


해칫포스 현지 부대원은 처음에는 중국계 넝족이었지만, 1970년에 약 9개 중대에 달해 전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에는 모두 몽타냐드 산악 부족민이었다.


라오스에서 해칫포스는 적진 뒤에서 자주 레이드 임무를 했지만, 미국 정책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1970년까지 캄보디아의 "다니엘 분" 지역에서의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CCS 중대들은 월남 쪽 국경에서 활동했다.


그럼에도 CCS 중대들은 1969년 3월, 미 해병대의 듀이 캐니언 작전을 위해 케산 남서쪽의 라오스 국경을 감시하는 동안 보았던 것과 같은, 격렬한 전투를 여럿 목격했다.


딕 미도우즈가 이끄는 SOG CCS 태스크포스는 훌륭하게 싸웠고, 빌 오루크 중위, 밥 킬레브루 중위, 톰 투미 상사, 제리 슈라이버 중사, 나다니엘 존슨 중사 이렇게 5명의 미군이 부상을 입었다.


전쟁 내내 해칫포스의 작전은 헬기 부족으로 인해 제한되었다.


열댓명의 병력을 수송하는 휴이나 킹비가 1개 중대를 투입하는 데 이용됐고, SOG 대원들은 나머지 동료들이 조금씩 도착하는 동안, 투입 LZ 옆에 몇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그들이 현장에 있는 내내 헬기들은 해칫포스를 투입하도록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더욱이 며칠 동안 비행할 수 없는 날씨가 이어지면 월맹군이 해칫포스를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었기에, 큰 규모의 작전은 일반적으로 날씨가 좋은 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전 및 기후 제약 하에서, 각 FOB는 연간 약 2개의 중대 규모 작전을 수행했다.


해칫포스 레이드


초기 해칫포스 작전은 대부분 신속 대응 레이드였으며, 이는 해칫포스를 조직한 SOG 사령관인 도널드 블랙번 대령이 고안한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이러한 단기 강습은, 1967년 초, 빌 "컨트리" 그라임스 상사가 이끄는 소대가 라오스의 110번 고속도로 근처의 언덕에 착륙했을 때와같이, 대개 이득이 될 만한 적 표적을 발견하고 이루어졌다.


짧은 전투 끝에 그라임스의 소대는 무려 250톤(트럭 100대 분량)의 쌀을 확보했다.


큰 성공을 거둔 후, 월맹군은 비축물을 분산시키고 모든 은닉처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또 다른 성공은 케산에서 북서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진, 월맹의 중간 기지에 대한 중대 규모의 레이드였다.


SOG 해칫포스는 적 기지를 압도하는 것 외에도 비축된 대공 기관총 마운트를 확보했고, 부대는 이를 폭발물로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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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에서 북서쪽으로 25마일 떨어진 월맹군 중간 기지를 점령한 메키 슐러 대위의 해칫포스 중대. 표지판에는 "미제 침략자들과 월남 반역자들을 물리쳐라"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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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러의 부대에 의해 파괴된 대공 기관총 마운트 은닉처)


또한 크림슨 타이드 작전 중 포로 구출 시도와 같은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와 B-52 폭격 이후 목표에 대한 BDA 임무를 수행했다.


1967년 중반, SOG는 해칫포스 BDA와 레이드가 결합된 임무를 시도하여, 라오스 호치민 트레일 전체를 감독하는 월맹군 본부에, B-52 폭격 직후, 100인 중대를 투입했다.


1967년 6월 3일의 그 임무는 케산에서 남서쪽으로 약 23마일 떨어진 '오스카-8' 목표에서 이루어졌으나, CCN 해칫포스가 착륙한 순간, 지하 벙커에서 나온 수백 명의 월맹군의 공격에 의해 부대는 LZ에 고립되었다.


끊임없는 적의 공격과 두꺼운 대공포 사격으로 약 1개의 소대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오스카-8 레이드에서 SOG 대원, 미 공군 파일럿, 미 해병대 헬기 승무원 등 총 23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보다 두 배나 많은 넝족이 목숨을 잃었다.


해칫포스의 빌리 래니와 론 덱스터를 포함하여 6명의 미군이 실종자가 되었지만, 하노이는 해병대 도어거너인 프랭크 E. 시우스 주니어 상병, 단 한 명만 생포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시우스는 1973년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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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해칫포스 작전들)


B-52 폭격을 따라 급습하는 해칫포스의 전술은 1969년 4월 24일, 캄보디아에 있는 적의 가장 중요한 본부인 COSVN에서 다시 시도되었으나, SOG 전설인 제리 "매드독" 슈라이버의 사망을 포함하여, 이전과 똑같이, 강습 부대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3

많은 SOG 대원들은 이 두 가지 주요 레이드가 사이공 SOG 본부에 있는 적 스파이에 의해 발각되었다고 의심했다.


찰스 윌클로우의 시련


1967년 6월 3일, 오스카-8 목표로의 레이드는 해칫포스 부대원들이 LZ에 고립되고, 몇몇 철수 헬기가 격추되는 등 끔찍한 재앙으로 판명됐다.


추락한 헬기 한 대에는 찰스 윌클로우 중사가 탑승했고 오른쪽 다리에 심각한 총상을 입었다.


해병대의 CH-46의 잔해에서 나온 윌클로우는 몇 야드를 기어가다가 쓰러져 수십 명의 적군에게 둘러싸였다.


비무장 상태였고 너무 약해서 움직일 수 없었기에 윌클로우는 바로 생포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월맹군은 그저 윌클로우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를 그곳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윌클로우는 기절했다.


윌클로우가 깨어나자, 그는 오렌지색 패널이 옆에 놓여 있는 공터로 끌려간 상태였다.


월맹군 기관총이 그 지점에 깔렸고, 기관총 사수들은 미군 헬기가 윌클로우를 구하러 오기를 바랐다.


윌클로우는 하루 종일 열대의 태양 아래,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고, 아무도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죽은 것처럼 보여야겠다고 결심했다.


둘째 날, 윌클로우는 몹시 목이 말랐지만 월맹군은 그에게 물을 제공하지 않았다.


아마도 죽을 것이었지만, 윌클로우는 진흙 웅덩이에서 물을 핥았다.


적군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웅덩이에 소변을 보고 낄낄거리며 걸어갔다.


셋째 날, 윌클로우는 죽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비가 내렸고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몸을 떨었다.


넷째 날, 윌클로우는 몸을 웅크리고 몸을 떨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월맹군은 그의 유용성은 거의 끝났고, 아마도 하루 정도 더 미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날 밤, 윌클로우의 기력은 약해졌고, 그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윌클로우는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서 아내와 세 자녀를 다시 볼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신에게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윌클로우는 다시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고 억지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몸이 허약해지고 열이 나서 여러 번 기절했지만, 계속 깨어나 다시 기어갔다.


해가 뜰 때쯤, 그는 거의 2마일 정도 기어갔으나, 완전히 지쳐서 의식을 잃었다.


윌클로우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SOG의 레스터 페이스 하사가 그를 헬기로 끌고 가고 있었다.


다낭으로 비행하는 동안, 윌클로우는 몸을 떨고 흐느끼며 말하려고 했지만 가족들만 생각나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리고 윌클로우는 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의 탈출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찰스 윌클로우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SOG 그린베레 57명 중 유일하게 돌아온 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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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 구금 중 탈출한 유일한 SOG 대원인 찰스 윌클로우 중사)


위력 정찰


정찰팀이 목표물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해칫포스는 발견한 거의 모든 것을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화력을 가지고 적진 뒤를 배회하며 자체적으로 위력 정찰 작전을 수행했다.


일반적으로, 이는 적의 주요 고속도로 근처에 중무장한 소대가 투입된 다음, 월맹군을 만날 때까지 길을 걷는 식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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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호치민 트레일 갓길을 따라 이동하는 해칫포스 부대원)


적군이 없을 때, SOG 대원들은 수십 개의 대물 지뢰와 대전차 지뢰를 매설했다.


만약 적군이 강하게 나오면, 전술 항공 지원으로 강타하고 SOG 대원들은 포위되기도 전에 구출될 것이었다. 현실은 몰라도 적어도 이러한 개념이었다.


각 FOB는 매년 약 15회의 소대 규모 월경 작전을 실시했으며, 대부분은 위력 정찰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은 1969년 초, 일주일 동안 케산 서쪽 정글을 배회한 CCN 해칫포스 소대의 임무였다.


중대장인 짐 스토터 대위와 함께, 피터 맥머레이와 빈센트 사바티넬리 중위는 적의 트럭 주차장을 발견하고 공습으로 파괴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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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트레일 트럭 주차장에 있는 CCN 해칫포스, 존 앨런 하사. 트럭 운전석에 새로 생긴 총알구멍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에 대한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해칫포스 중위는 해당 임무 후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


1968년에 SOG는 SLAM(search, locate, annihilate, and monitor/수색, 위치 파악, 섬멸 및 감시) 임무로 중대 규모의 위력 정찰 개념을 수정했다.


SLAM 작전은 지속적인 대규모 공습의 지원을 받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월남에서 미군이 수행하는 수색 및 파괴 임무와 유사했다.


5월 1일에 시작된 첫 중대 규모 SLAM은 유진 맥칼리 대위가 지휘했으며, 두 개의 정찰 팀이 동행했으며 그중 하나는 1-0, 로버트 밴 홀과 1-1, 데이비드 체니가 지휘하는 팀이었다.


해칫포스는 며칠 동안 110번 고속도로를 걸으며 월맹군과 전투를 벌였다.


어느 순간, 조셉 슈리브 중위가 RPG 로켓으로 사망했다. 


상황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맥칼리 대위는 고속도로에 폭발물을 쌓고 폭파하여 20피트 깊이의 구덩이를 만든 뒤 병력을 철수시켰다.


SLAM-I에 참가한 미군 12명 중 8명이 퍼플 하트를 수훈했다.


당시 부상자로 유진 맥칼리, 데이비드 데이비슨, 존 프로바트, 호레이스 포드, 테리 햄릭, 데이비드 하우스, 데이비드 체니가 있었다.


6개월 후인 1968년 11월 중순, 110번 고속도로를 따라 SLAM-II가 다시 수행되었다. 


해칫포스 중대는 8일 동안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며 전투를 벌였으나, 압도적인 월맹군의 수로 인해 수렁에 빠지고 포위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절반 이상의 미군이 부상을 입었다.


밥 하워드는 해당 전투에서의 그의 행동으로 명예훈장을 추천받았으나 은성훈장으로 강등당했다.


당시 부상자에는 밥 하워드, 리 스웨인, 로버트 프라이스, 윌리엄 그로브스, 토니 도프, 조 파너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빌 켄달이 재보급 도중 부상을 입었다.


또한 로이드 오다니엘스, 리 스웨인, 로버트 프라이스는 은성 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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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CCC 해칫포스 B중대. 중앙에 있는 인물은 마이크 셰퍼드 하사이다)


트레일 차단


대담함에 있어서, 1969년, 1970년 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110번 고속도로를 따라 수행된 해칫포스의 도로 차단에 필적할 다른 작전은 없었다.


이 3개의 중대 규모 작전마다, SOG 헬기는 100명 이상의 병력을 언덕 정상에 투입했고 부대원들은 즉시 격하게 땅을 파고 전기톱으로 나무를 쓰러뜨렸다.


해 질 녘이 되자, SOG 부대원들은 완벽하게 배치된 사선과 함께, 기관총, 박격포, 무반동총으로 도로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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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m 떨어진 110번 고속도로를 향한 해칫포스의 도로 차단(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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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참호와 벙커를 파낸 해칫포스는 도로를 차단했고, 1969년과 1970년에 이들이 확보한 언덕 정상을 점령하려는 모든 적의 시도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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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의 해칫포스 진지에서 본 110번 고속도로 전망)


바레 R. 맥클렐런드 대위가 지휘하는 CCC의 A중대가 실시한 첫 도로 차단은 1969년 3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일주일 동안 110번 고속도로를 차단했다.


A중대가 배치되자, 적군이 밤낮으로 박격포와 경포로 공격을 가했으나, 트럭 한 대나 자전거 한 대는 물론, 심지어 짐꾼 한 명조차도 도로를 지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월맹군의 공격으로 인해 A중대의 유일한 90mm 무반동총 사수가 부상을 입자, RT 사우스 캐롤라이나 1-0, 톰 와스코비치가 자원하여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후 와스코비치는 여러 월맹군 트럭을 파괴했다.


적 트럭이 몰래 지나가려고 할 때마다 SOG 대원들은 AC-119와 AC-130 건쉽을 호출했다.


A중대가 철수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이번에는 바비 에반스 대위가 부대를 이끌고 같은 언덕으로 다시 들어가 일주일 동안 도로를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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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라오스 110번 고속도로를 봉쇄한 부대인, CCC A중대의 패치)


도로 차단으로 인해 수십 대의 월맹군 트럭이 110번과 92번 고속도로를 따라 멀리 정체되었으며, 지역 월맹군 부대는 저장 공간의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보급품을 개활지에 쌓아야 했고, 이는 완벽한 폭격 목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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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칫포스 도로 차단 지원으로, 110번 고속도로에 트럭을 폭격하는 F-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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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 도로 차단으로 인해 갇힌 월맹군 트럭과 보급품에 투하되는 폭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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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차단 작전지에서 서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진 곳에서 파괴된 월맹군 트럭과 물자)


당시 A중대 부상자에는 에반스 대위, 헨리 켐프, 톰 플린, 에드 가벳, 프랭클린 로와 약 25명의 몽타냐드가 있었다.


유일한 사망자는 몽타냐드들 뿐이었다.


또한 과로한 의무병인 베를론 캔트렐 병장은 에반스 대위, 로이 램피어, 헨리 켐프와 마찬가지로 은성 훈장을 수훈했다.


1년 후인 1970년 2월 23일, SOG는 스핀다운 작전으로 이전의 성공을 되풀이하려고 시도했으며, CCC의 해칫포스 B 중대가 자매 중대가 점거했던 언덕 위에 다시 배치되어 110번 고속도로를 차단했다.


전투기의 주간 지원과 AC-130 및 AC-119의 야간 지원 외에도 B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벤헷의 미 육군으로부터 수백 발의 175mm 포격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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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에서 선회하며 도로 차단 진지 바로 바깥에 있는 월맹군 참호를 향해 공격하는 코브라 건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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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적 위치로 공습을 요청하는 해칫포스. 1970년 도로 차단 작전 중 리치 라이언(오른쪽)이 이곳에서 관측과 함께 공습을 조정했다)


그러나 전년보다 더 빠르게 대응한 월맹군은 곧 박격포와 무반동총으로 B중대의 거점을 공격하고 지역에 대공포를 배치했다.


그런 다음, 신호 감청을 통해 1,500명으로 구성된 월맹군 제27보병연대 전체가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파악했고, 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해칫포스가 철수할 때가 되었다, 


코비 라이더였던 로이드 오다니엘스는 32대의 F-4 팬텀과 함께 200톤의 무장을 이용하여 B중대가 1km 떨어진 철수 LZ까지 행군하는 것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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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당하고 해칫포스 경계선으로 오토로테이션한 H-34 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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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차단 작전 중 가장 중화기인 60mm 박격포를 사용하는 브링크마이어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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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잠잠한 동한 기관총 탄띠를 준비하며 웃는 프랭크 론게이커 중위)


이러한 지속적인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월맹군은 움직이거나 부대의 철수를 방해할 수 없었다.


B중대의 미군 대원 절반 정도가 부상을 입었고, 빌리 포터 중위는 AK에 심한 총상을 입었다.


미군 사망자 한 명은 그린베레 의무병 빌 보일이었는데, 킹비가 부상당한 SOG 대원을 후송하려다가 격추됐으며,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또한 두 대의 킹비의 승무원과 약 10명의 몽타냐드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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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윌리엄스 대위(왼쪽), 명예훈장 수훈자 프레드 자비토스키, 배우인 마사 레이와 함께 서 있는, 헬기 격추로 사망한 그린베레 의무병 빌 보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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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보일이 탑승하고 있던 H-34 킹비. H-34는 테일붐이 떨어져 나가 격하게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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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전투기들은 해칫포스가 도로 차단 경계선(오른쪽)에서 달려와, 보일과 승무원을 구출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해당 지역을 폭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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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H-34는 폭발하여 불탔고, 몇 분 만에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었다. 보일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미 공군 사진 분석가는 B중대가 800명 정도의 월맹군 사상자를 냈고 교통을 방해한 것으로 인정했다.


작전 중, 빌 블랜켄버그는 그의 용감한 공로로 은성훈장을 수훈했다. 


단 6개월 후, 이 B중대는 많은 사람들이 SOG 역사상 가장 큰 해칫포스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작전인 테일윈드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해당 작전은 다음 장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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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칫포스의 도로 차단 작전지에서 불과 15마일 떨어진 포위된 벤헷 특수부대 기지. 완전히 차단되어 공중 재보급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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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칫포스가 110번 고속도로를 차단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벤헷을 공격했던, 완파된 월맹군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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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칫포스 전투 강습을 준비하고 휴이에 걸터앉은 브루족 대원인 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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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칫포스 몽타냐드와 함께 라오스 고속도로에서 매복으로 월맹군을 막 죽인, 밥 도너휴 병장(가운데 왼쪽)과 밥 시펜. 후방에 있는 경계를 서고 있는 대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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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라오스에서 위험한 작전을 수행한 후, 헬리패드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CCC 해칫포스의 그린베레 대원들. 뒷줄 왼쪽 두 번째에 있는 대원이 리차드 카네기 일등상사, 그 오른쪽에 있는 대원은 켄 "슈박스" 카펜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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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다낭 기지의 CCN 해칫포스 미군들. 지휘관은 척 파이퍼 대위(무릎을 꿇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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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 부대기에 7개의 캠페인기를 단 CCS 해칫포스의 제1 전과확대 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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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긴장을 푼, 쉘쇼크를 받은 해칫포스 몽타냐드. 헬멧의 파편 손상과 CAR-15 핸드가드의 총알구멍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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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성공 기념 파티. 1969년 9월 라오스 작전 후 노획한 AK와 소련제 12.7mm 중기관총을 들고 있는 잰 브레이디 병장(왼쪽)과 얼 새비지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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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작전을 준비하는 CCN 해칫포스)


잃어버린 해칫포스 지휘관들


넝족, 몽타냐드, 동료 그린베레 대원과 함께 싸우면서, 세 명의 해칫포스 중대장이 큰 대가를 치렀다.


딕 레가테 대위의 중대는 1967년 3월 25일 라오스에서 최근에 버려진 적군 기지를 조사하던 중 빨랫줄에 걸려 있는, 갓 세탁된 월맹군 군복을 발견했다.


정보 가치를 염두에 두고 레가테 대위가 촬영하던 중, 숨은 월맹군이 총격을 가했고, 레가테 대위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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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3월 25일, 해칫포스 작전에서 사망한 딕 레가테 대위)


로널드 굴레이 대위는 CCC 정찰 중대 지휘관이었지만, 사무 업무 시간이 너무 많아, 자원하여 해칫포스 B중대를 이끌었다.


열정적이고 두려움이 없던 그는 1969년 9월 24일, 추락하여 불타고 있는 킹비에서 마이크 셰퍼드를 구해내 그의 생명을 구했다.


이틀 후, 그의 부대가 라오스에서 대규모 적의 은닉처를 점거한 후, 굴레이는 그의 옆에서 RPG가 폭발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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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26일, RPG에 의해 사망한 로널드 굴레이 대위)


정찰팀이 캄보디아에서 월남의 플레이 트랩 계곡으로 보급품을 운반하는 3륜 자전거 호송대를 발견하자, 프레드 크루파 대위의 해칫포스는 적 군수품 비축지로 추정되는 지점을 급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71년 4월 27일, 크루파 대위는 선두 휴이에 타고 있었고, 첫 타자로 LZ에 발을 디딜 준비가 된 순간, 적의 총격이 그가 탄 헬기를 강타했다.


크루파는 부상을 입고 LZ로 떨어진 데다, 적의 거센 총격이 손상된 휴이를 몰아냈다.


구조 임무를 수행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프레드 크루파는 생사불명으로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크루파는 SOG의 유일한 실종된 해칫포스 중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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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110번 고속도로 옆에 누워 적 호송대를 매복하기 위해 대기하는 프레드 크루파 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