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G는 미군 포로들에게 보상을 제공한다는 수백만 개의 팸플릿을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공중 살포했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중개인들의 연락에도 불구하고 거래는 전혀 성사되지 못했다)
SOG는 자체 항공기 및 급습 부대, 정찰 부대, 해상 병기로 동남아 전역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유일한 미군 조직이었기에, 미 합동참모본부는 SOG를 일반적인 수색 구조 작업이 끝난 후 포로나 적에게 쫓기는 이들을 추적하고 구출하는 주요 기관으로 임명했다.
이 구조 프로그램의 코드명은 브라이트 라이트였다.
이러한 활동에서 외부 기관과 협력하기 위해서는 MACV 예하에 합동 인명 구조 센터(JPRC/Joint Personal Recovery Center)라는 자체 커버가 필요했다.
미 공군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특수전 장교 중 한 명이자, 브라이트 라이트의 첫 책임자인 해리 "헤이니" 아더홀트 대령은 1950년대에 티베트 게릴라들에게 극비 공수 임무를 지휘한 것을 포함하여 CIA에서 극비 파병 임무를 경험했다.
아더홀트 대령은 미군 비행사가 우호적인 곳으로 비상탈출 할 수 있도록 하노이 서쪽 월경지에 있는 월맹 게릴라군을 모집할 것을 제안했다.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이를 거절했고, SOG에게 라오스 인근의 게릴라가 확보한 비상탈출 지역을 제안했다.
한편 라오스 주재 미국 대사는 SOG 작전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포로에 대한 많은 보고에도 불구하고, 라오스에서 SOG의 일반적인 20km 제한을 넘어서는 포로 구출 임무가 단 한 건도 승인되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여줬다.
SOG는 추락한 승무원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여전히 최선을 다했다.
일례로 정찰대원인 밥 하워드는 월맹 국경에 있는 라오스 계곡을 탐사하여 사람들이 라오스로 탈출할 수 있는, 험준한 지형을 지나는 길을 찾았다.
그리고 SOG는 공중투하가 가능한 생존 키트를 개발했다.
초기 브라이트 라이트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는 SOG의 가장 까다로운 작전 중 하나가 되었다.
월맹으로의 첫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는 전설적인 1-0인 딕 미도우즈가 이끌었으며, 빈과 하노이 중간 지점인 월맹 중심부 깊숙한 곳에 추락한 미 해군 파일럿 딘 우즈 대위의 구조 임무였다.
USS 인터피드에서 해군의 씨킹 헬기에 탄 RT 아이오와는 우즈 대위로부터 약 800야드 떨어진 곳에 투입되었지만, 얼마 안 가 월맹군이 막 우즈 대위를 붙잡았다.
미도우즈는 월맹군 장교라도 생포하려고 시도하여 짧은 총격전을 벌였고, 적 3명을 사살하자 철수할 때가 됐다.
RT 아이오와가 탄 헬기는 철수 중 총격을 받아 구축함 근처 수면에 불시착해야 했으나 모두가 생존했다.
(미도우즈의 작전지)
(월맹에서 미 해군 딘 우즈 대위를 구출하려는 시도를 마치고 막 돌아와 USS 인터피드의 갑판에 서 있는 딕 미도우즈, 척 컨스 및 RT 오하이오 팀원들)
(미도우즈가 탔던 씨킹 헬기는 비틀거리다 사진과 유사한 구축함 옆에 불시착했다)
같은 날 사이공에서 한 베트콩 전향자가 미국 심문관에게 자기가 있던 메콩 삼각주 수용소에 미군 포로가 있다고 말했다.
거기서 '잭슨'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칼 잭슨 공군 대위는 1965년 6월 사이공 남서쪽에 C-123이 격추된 이후 행방불명 상태였다.
SOG는 임무 지휘관 프랭크 야크스 대위의 지휘하에 하트멋 "멕키" 슐러 대위가 이끄는 중대 규모의 해칫포스 구출 작전인 크림슨 타이드 작전을 준비했다.
반복된 지연 끝에 마침내 이 부대는 메콩 삼각주의 주둔 기지에서 출발했지만, 브리핑은 거의 없었고 파편적인 정보만 있었다.
야크스와 슐러는 이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SOG 대원들이 투입되자 공격이 날아들었고, 2개 대대의 베트콩의 대규모 매복이었다!
한 해칫포스 소대를 향해 공격이 정면으로 날아와, 거의 모든 넝족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그린베레 지휘자인 찰스 베셀스와 프레드 "허클베리" 루이스 중사가 모두 사망했다.
잭슨 대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한 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대가를 치렀다.
(크림슨 타이드 작전지)
(메키 슐러 대위의 해칫포스 중대 패치)
(크림슨 타이드 작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베트콩 전향자와 프랭크 야크스 대위)
(크림슨 타이드 작전의 주요 초점이자 1965년 C-123이 격추된 이후 실종된 칼 잭슨 대위. 그는 여전히 실종 상태이다)
(크림슨 타이드 해칫포스 지휘관, 메키 슐러 대위(운전석))
(프레드 루이스 중사는 밀짚모자를 좋아해서 '허클베리'로 알려졌다. J.D. 배스는 루이스에 대해 "그는 시골스러운 느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허클베리와 찰리 베셀스 및 그들이 이끌던 거의 모든 넝족들은 크림슨 타이드 작전에서 학살당했다)
(메콩 삼각주로 가기 위해 콘툼 비행장에서 C-130을 기다리는 슐러 대위의 넝족들. 해 질 녘까지 이들 중 1/3이 사망했다)
(크림슨 타이드 작전 이후 영현 가방. 소대 전체가 학살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찰스 베셀스와 프레드 루이스 중사가 있다)
일주일 후, SOG는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의 첫 성공을 거두었다.
F-105 썬더치프 파일럿은 라오스 남부에 월맹군이 들끓는 지역에서 비상탈출 했고, SOG의 휴이가 순식간에 파일럿에게 도달했다.
SOG 의무병 루크 낸스는 "그 파일럿이 헬기에 탔을 때, 정말 행복해했다"고 말했다.
그 F-105 파일럿은 SOG에 의해 구조된 수십 명의 비행사 중 첫 파일럿이었지만, 일급 기밀의 SOG 팀이 라오스와 월맹에서 그들을 구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비행사는 거의 없었다.
(미군 포로들이 갇혀 있던 우리. 그러나 구조 시도가 있기 전에 급히 비워졌다)
브라이트 라이트 팀
SOG는 결국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를 위해 정찰팀을 일주일에 한 번씩 출동 대기 상태로 유지하고, 짐을 챙기고 하루 24시간 내내 준비하여 졸리 그린 헬기나 C-130에 신속하게 탑승하고 구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1-0들은 12명의 팀원 모두와 M60 기관총 및 60mm 박격포와 같은 중화기, 넉넉한 탄약, 추가 응급 처치 장비, 레펠링 하네스 및 로프 철수 장비와 함께 "중무장"해서 갔다.
강력한 화력으로 신속하게 공격해 추락한 비행사를 구출하고 빠져나간다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구조 임무는 지속적으로 위험했는데, 대공포가 즐비한 지역에 팀을 배치하거나, 때로는 잘 준비된 적군이 매복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종종 지대공 미사일과 미그기를 포함하는 적 방어의 정교함을 고려하면, 월맹에서의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는 항상 최악이었다.
(월맹과 무지아 패스 근처에서의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는 SAM과 미그기의 위험을 무릅썼다. 이 두 대의 월맹 미그기는 현장에서 SOG 정찰팀에 의해 촬영되었다)
(정찰팀 브라이트 라이트 장비. 닥토 발진 기지에서 즉시 투입될 준비가 됐다)
그리고 추락한 파일럿이 자신이 이미 적에게 잡혔다는 것을 암호로 경고할 수 있었을 때, 브라이트 라이트 구조 임무가 여러 번 중단되었다.
월남 내에서의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도 다를 것 없이 극적이었다.
1969년 7월, 한 공산주의 전향자는 추라이 근처에 월맹군 병원이 있으며, 그곳에 흑인 병사인 SP4 레리 에이켄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1969년 7월 10일, 연합군이 급습했으나 월맹군은 도망가며 젊은 병사의 머리를 마체테로 내려쳤다. 래리 에이켄은 간신히 살아 있었지만 10일 후에 사망했다.
SOG가 미군 포로를 구하는 데 가장 근접했던 사건이었다.
씰의 구출 시도
(메콩 델타를 급습하는 네이비씰의 배리 이녹. SOG는 메콩 삼각주에서의 수많은 포로 구출 시도에 씰을 고용했지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결과는 항상 부정적이었다)
미 해군 씰과 월남 해군 코만도는 메콩 삼각주에서 SOG 임무로, 일련의 포로 구출을 시도했다.
1971년 11월 8일, SOG의 씰이 이끄는 해군 코만도는 미 육군의 게라시모 아로요 바에즈 하사를 찾기 위해 USS 와시트너 카운티에서 작은 고무보트를 타고 해변으로 이동했다.
베트콩으로 변장한 해군 코만도는 수용소 외곽으로 이동했고, 그들을 동료 베트콩이라 착각한 베트콩 보초를 생포했다.
베트콩 포로는 돌아가서 아로요 바에즈의 구출을 돕겠다고 동의했지만, 바에즈 하사는 이미 사라졌다.
공산주의자들은 1985년에 아로요 바에즈의 유해를 미국으로 반환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씰이 두 명의 미군을 수용하고 있다고 보고된 수용소를 공격했다.
SOG 보고서에 따르면 대원들은 "일부 조리된 식사와 갖가지 장비"를 발견했다.
근처에 있는 또 다른 기지를 휩쓸었으나, "온기가 있는 밥을 보아 수용소가 불과 2~3시간 전에 비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좋은 계획과 과감한 실행에도 불구하고, 씰은 49명의 월남군을 구출했지만 미군은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좌절
SOG 사령관 존 새들러 대령은 "벽에 적힌 글과 밧줄의 매듭으로 포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때 매우 실망스러웠다."라고 말했다.
SOG는 심지어 살아있는 미군을 데려오는 월맹군과 베트콩에게 포로 몸값으로 5,000달러를 제공하기도 했다.
SOG의 프레드 카리스토 대위는 베트콩 포로수용소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여러 번 만나 미군 5명을 데려오면 현금 25,0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는 수용소 지휘관으로 추정된 사람의 정교한 사기에 불과했다.
다른 SOG 협상가들은 베트콩 수용소 지휘관에게 미군 포로 21명에 대해 10만 달러 이상을 제안했지만, 이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몇몇 사례에서 SOG는 돈을 지불하고 미군의 시신을 돌려받았는데, 이는 적어도 유족들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는 위안을 주었기에 어느 정도 자비가 있었다.
(SOG가 협상 후 보상금을 지급하고 확보한 실종된 미군 시신. 한 유족의 긴 고통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에서 SOG 팀은 파일럿의 시신을 수습했으므로, 모든 것이 헛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반적인 노력을 평가하면 몇 가지 문제가 되는 통계가 있다. 전쟁 동안 SOG의 레이드로 492명의 월남군을 구출했으나, 미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수백 건의 경우에서 SOG는 미군을 찾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레이드 직전에 미군 포로들이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전의 실패는 불운과 자주 포로를 이동시키는 월맹의 관행으로 인해 발생했다.
그러나 그 외의 더 큰 문제로, 월맹 정보국은 사이공에 두더지를 심었고, 하노이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던 부도덕한 월남 장교 첩자가 사이공 SOG 본부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두더지도 전쟁 중 최대 규모의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를 파악할 수 없었으며, 이 반역자의 눈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본토에서 손타이 레이드가 계획 및 준비되고 있었다.
이 위대한 용기와 기술에 관한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설명될 것이다.
(브라이트 라이트 팀이 수습한 두 구의 미군 비행사 시신. 시신을 막대에 묶어 LZ로 옮겼다. 이는 위험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베트콩 수용소에서 포로의 목에 채운 칼)
(브라이트 라이트 팀과 함께 구조 헬기가 킹비 추락 현장에 도착했지만, 생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한순간의 밝은 빛(브라이트 라이트)
정찰팀이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를 수행할 때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1분 만에 C-레이션을 먹고, 레펠링 장비를 착용하고 CAR-15를 들고 휴이로 달려가야 했다.
전형적인 사례는 1970년 4월 15일의 사건이었다.
마이크 셰퍼드, 조 샘플, 데니스 닐과 함께 RT 몬타나는 SOG의 닥토 발진 기지에 있었는데, 그때 국경에서 30마일 떨어진 곳에서 휴이가 격추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추락한 미군 비행사 4명이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RT 몬타나가 탄 구조 휴이 두 대 중 첫 기체는 추락한 승무원들 근처의 LZ에 착륙하다 거센 사격을 받았다.
헬기로 총격이 날아들자 조 샘플, 데니스 닐, 두 명의 몽타냐드, 한 명을 제외한 휴이 승무원 모두가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RT 몬타나의 대원들은 추락한 두 명의 승무원을 붙잡고, 헬기 옆에 월맹군 두 명을 쏜 다음, 헬기로 데려왔다.
저고도 선회를 하던 두 번째 구조 헬기에 탄 셰퍼드와 3명의 몽타냐드는 동료들이 LZ에서 나오는 동안 지원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선두 휴이가 심하게 손상되어 닥토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닥세앙 특수부대 기지에 비상 착륙했는데, 그 기지는 적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두 휴이가 착륙하면서 더 많은 피격이 발생했다.
셰퍼드는 부상당한 리드 파일럿이 엄폐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거센 사격을 뚫고 돌진했고, 팀 동료인 데니스 닐 병장을 데려오기 위해 돌아와 그를 바닥에 눕혔다.
닐은 눈을 뜨고 한 마디를 뱉으며 사망했다.
그리고 셰퍼드는 조 샘플을 옮겼다.
적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셰퍼드는 부상자 두 명을 휴이에 더 태운 다음, 닥토로 이동하는 동안 응급 처치를 실시했다.
셰퍼드, 샘플, 닐은 모두 은성훈장을 수훈했다.
이 모든 일은 한 시간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닥토에서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 중인 RT 애리조나(뒷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켁, 카일 딘 병장, 카이, 짐 영 중위, 오이, 론. (앞줄) 무이, 브레아, 프레아, 마이크 윌슨 병장, 닌, 투)
(추락한 동료 주변을 선회하며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를 준비하는 킹비 파일럿)
SOG의 최장기 브라이트 라이트
1968년, SOG는 10개월 동안 구정 공세 당시 납치된 미국인 3명을 구출하기 위해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했다.
37세의 농업 고문인 마이클 벤지, 몽타냐드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간호사인 베티 앤 올슨(30세); 그리고 성경 번역가인 헨리 블러드(53세)는 부온마투옷 근처에서 붙잡혀 끌려갔다.
납치 2주 후 첫 번째 브라이트 라이트는 제173공수여단 소속 3개 중대와 5개 SOG 팀이 참여했다.
래리 "식스팩" 화이트와 그랜트 볼렌백이 이끄는 단 한 팀만이 월맹군과 접촉했다.
거센.사격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는 죽은 월맹군에게서 한 줌의 서류를 가져오기 위해 앞으로 돌진했고, 문서를 통해 벤지, 올슨, 블러드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에 의해 밀려난 화이트의 팀원들은 미국 포로들이 그들의 총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수감자들은 함께 사슬에 묶여 단식에 처해졌다.
한 달 후 벤지는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 후 베티 올슨이 뎅기열에 걸렸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치료하기를 거부했다.
SOG는 여전히 포로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고 4월 7일, CIA 소속 피닉스 프로그램 소대를 이용해 또 다른 레이드를 시작했으며 버려진 수용소와 미국인 3명이 불과 이틀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5월 중순, 블러드, 벤지, 올슨이 부온마투옷에서 35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는 정보 보고가 들어왔다.
SOG는 피닉스 프로그램 팀을 파견했으나 적 중대와 마주쳤고 겨우 빠져나왔다.
두 개의 SOG 팀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나, 다시 포로 일행이 옮겨진 뒤였다.
그해 여름, 헨리 블러드는 폐렴으로 사망했고, 벤지와 올슨은 괴혈병에 걸려 잇몸에서 피가 나고 사지에 상처가 벌어졌다.
11월 말, SOG는 또 다른 팀을 투입하여 적 수용소를 발견했으나, 월맹군이 막 떠난 직후였다.
베티 앤 올슨은 점점 쇠약해졌고, 그녀가 뒤쳐지자 월맹군 호위대는 올슨을 쓰러뜨려 끌고 갔다.
결국 올슨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사망했다.
마이클 벤지는 캄보디아로 옮겨졌고 호치민 트레일을 거쳐 월맹으로 보내졌다.
벤지는 1973년에 석방되었다.
(월맹군에게 잡히기 직전, 미주(米酒)를 마시는 민간 농업 고문인 마이크 벤지)
(납치된 미국인들을 구출하는데 가장 근접했던 정찰팀의 래리 화이트 하사)
(몽타냐드 나병 환자들을 돌보다 월맹군에게 잡힌 민간 간호사 베티 앤 올슨. 포로 생활 중에 영양실조와 의료 부족으로 사망했다)
(벤지, 올슨과 함께 포로로 잡혀 있던 성경 번역가인 헨리 블러드. 그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세바스찬 드루카의 비극
전 CCS 정찰대원이었던 세바스찬 "토니" 드루카 상사는 포로의 곤경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SOG OPS-80(JPRC)의 담당 부사관으로서, 그는 많은 구조 임무를 계획했다.
SOG 참모 장교인 마이크 래드키 중령은 "그는 내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라고 했다.
드루카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SOG AO외부에 포로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1971년 6월 어느 날 밤, 드루카는 CCS 정찰대원 1-0, 프랭크 벅하트에게 월맹군 전향자가 캄보디아에 있는 미군 포로 12명을 수용하고 있는 수용소에 대해 말했고, 이를 항공 사진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전향자는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워싱턴은 구조 임무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드루카는 자신의 정보를 이용하여 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다음 날 아침, 드루카는 수천 달러 상당의 금목걸이 컬렉션을 가지고 방콕행 타이 에어 비행기에 탔다.
드루카는 방콕에서 라오스의 특정 중개인과 연결되어 있는 라오스 여성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는 포로를 찾기 위해 혼자 라오스로 가고 있었다." SOG 참모 장교가 말했다.
몇 주 후, SOG의 짐 버틀러 대위는 총탄에 뒤덮인 드루카의 시신을 발견하여 태국으로 옮겼다.
드루카는 미국의 동맹국으로 여겨지는 라오스 왕립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드루카의 금목걸이는 모두 사라졌다.
벅히트는 "포로들을 남겨두는 것이 드루카에게는 너무 낯설었기에 나는 그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 그가 미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직접 들어가서 스스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세바스찬 드루카는 휴가 없이 부재중에 승인되지 않은 구조 임무를 수행했기에 훈장을 받지 못했다.
(SOG 포로 구출 프로그램의 담당 부사관 세바스찬 "토니" 드루카 상사)
(사이공에서 진행된 SOG 추모식 중, 세바스찬 드루카의 영정과 화환)
SOG의 전투 정찰 소대
1971년, 대부분의 전투 부대가 웡남에서 철수하면서 미군은 전국 어디에서나 추락한 파일럿을 구출할 수 있는 능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이 임무를 수행하고 포로를 구출할 준비를 하기 위해 SOG는 2개의 특수 공격 중대 창설을 제안했으나, MACV에 의해 2개 소대로 축소되고 전투 정찰 소대 1, 2(CRP-1, CRP-2)라고 명명됐다.
미 합참은 1971년 6월의 에이브럼스 장군과 마찬가지로 "MACSOG가 작전 능력을 유지하는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조건으로 5월에 승인했다. 이는 SOG도 점진적으로 해체되고 있었기에 중요한 조건이었다.
CRP-1은 다낭에, CRP-2는 콘툼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각 CRP에는 소대로 구성된 3개의 정찰팀이 포함되었다.
CRP-2는 도널드 데이비슨의 RT 켈리포니아와 레스 도버의 RT 하와이, 래리 크레머의 RT 웨스트 버지니아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도널드 "레인저" 멜빈 중사가 이끌었다.
CRP는 동남아 전역에서의 포로 구출 책임을 맡았지만, 미국 정책이 허용하는 것 이상을 수행할 수 없었다.
1972년 2월 2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특파원 조지 맥아더는 MACV가 "포로수용소 안팎에서 싸우기 위해 연마된 단검들"인 SOG의 CRP를 곧 해체할 것이라고 알렸으며, 이는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장군의 본부 내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서의 폭로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고, 미군 인원을 25명으로 줄이기 위해 MACV는 동남아에 남은 마지막 브라이트 라이트 부대인 CRP-1과 -2를 해체했다.
더 이상 적진 뒤에 추락한 공군이나 미군 포로를 구출할 부대가 없어졌다.
(CCN CRP-1의 패치)
(월남 중부고원에서 CRP-2와 훈련하는 CCC 정찰중대 지휘관 짐 스토터 대위)
톰 노리스와 BAT-21 구조
(톰 노리스가 활약한 지점)
1972년 부활절 일요일, 전쟁 중 가장 큰 월맹군의 공세가 시작된 지 4일 차에 SAM이 DMZ 바로 아래에서 RB-66 전자전 항공기인 Bat-21을 격추시켰다.
단 한 명의 승무원만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고, 그는 미 공군의 아이실 진 햄블턴 중령(53세)이었다.
미엔지앙 강 옆에 착지한 햄블턴은 SAM, 대공포, 탱크, 포병 및 수천 명의 병력을 갖춘 월맹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를 구출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거센 사격으로 헬기 두 대가 추락했고 다른 기체를 몰아냈으며 휴이 승무원들을 잃었다.
다음날, 적의 사격으로 Bat-21 상공의 FAC가 격추되었고, 마크 클라크 중위가 햄블턴 근처로 착륙하여 구조할 파일럿이 둘로 늘었다.
A-1부터 B-52까지 매일 90회에 달하는 공습이 두 명의 파일럿의 구출하려는 시도를 지원했다.
그리고 HH-53 졸리 그린이 진입했지만 월맹군의 총격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자 6명이 모두 사망했다.
다음날 거센 총격으로 또 다른 FAC가 격추됐고, 두 명의 승무원이 실종됐다.
11명의 공군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고 2명이 추가로 생포되고 5대의 항공기가 손실된 가운데 Bat-21 구조는 SOG에게 맡겨졌고, SOG는 미 해병대의 앤드류 앤더슨 중령을 현장에 파견했다.
공중 접근은 자살 행위라고 결론을 내린 그는 5명으로 구성된 SOG 해군 코만도 팀과 그들의 고문인 SOG 씰의 톰 노리스 대위를 투입했다.
(지쳤지만 성공적으로 진 햄블턴 중령을 구하고 막 돌아온 네이비씰의 톰 노리스와 월남 해군 부사관 응우옌 반 끼엣)
클라크 중위는 무전을 통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명조끼를 부풀려 검은 파자마를 입고 공산주의자로 변장한 노리스 중위와 해양 특공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류로 떠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월맹군 순찰대 때문에 노리스는 계속 누워 있었고 떠내려가던 클라크 중위를 놓쳤으나, 노리스의 팀은 결국에 클라크에게 도달하여 그를 데리고 나왔다.
10일 동안 음식도 휴식도 없이 지쳐 45파운드가 줄은 햄블턴 중령은 강에 도달하기 위해 1마일을 기어갔지만 강변에 쓰러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톰 노리스가 그를 데리러 가야 했다.
단 한 명의 월남 부사관인 응우옌 반 끼엣이 다음 날 밤 노리스와 동행하기 위해 자원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어부로 변장하여 작은 삼판을 타고 조용히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안개가 자욱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실수로 월맹군 전차와 병력이 건너고 있는 다리까지 갔다가 되돌아가야 했다.
마침내 그들은 햄블턴이 강둑의 수풀 밑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햄블턴을 삼판에 숨기고 월맹군 보초를 여러 번 피해 노를 저어 떠났다.
해가 뜨기 직전, 적들이 손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며 멈추라고 명령했지만 노리스 일행은 못 들은 척했다.
해가 뜨자 중기관총이 발사되었으나, 노리스 일행은 거의 무사히 떠났고, 키 큰 갈대에 숨어 A-1을 불렀다.
그리고 팬텀 편대에게 물가로 마지막 공습을 가하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무사히 돌아왔고 햄블턴이 옮겨지는 순간 CBS 뉴스 기자가 도착하여 노리스에게 "다시 이런 일을 하실 겁니까?"라고 물었다.
노리스의 눈이 번쩍였다.
"미군이 적지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연히 다시 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톰 노리스 중위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수여하는 명예훈장을 받은 SOG의 유일한 씰 대원이었다.
노리스의 용감한 해군 코만도 대원인 응우옌 반 끼엣은 해군십자장을 받았으며, 해당 급의 높은 미국 훈장을 받은 유일한 월남인이다.
(Bat-21 구조를 이끈 톰 노리스 대위)
(제럴드 포드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는 톰 노리스 대위)
항상 잘읽고잇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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