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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산꼭대기에 위치한 SOG의 비밀 무전 중계지인 '레그혼'에 접근하는 재보급 휴이)


정보 수집 특수 작전 부대인 SOG의 유일한 방어 역할은 기지와 발진 기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방에 있는 SOG 기지의 위치, 이러한 기지가 월맹군에게 주는 가치, 후방 지역에서도 기습할 수 있는 적의 능력으로 인해 SOG는 전쟁 중 가장 치명적인 방어전에 투입됐다.


SOG의 가장 큰 방어 임무는 1968년 케산 포위전 당시 FOB-3를 지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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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의 항공 전경)


50명의 그린베레와 500명의 몽타냐드 대원들은 정찰팀과 해칫포스의 월경 작전을 중단하고 이웃한 6,000명의 미 해병 제26연대와 마찬가지로 길고 진지한 전투를 벌였다.


케산 방어군은 하루에 최대 1,500발의 포탄과 로켓 공격을 견뎌냈으며, 그중 대부분은 라오스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3마일 너비의 절벽인 코록(Co Roc)산의 숨겨진 진지에서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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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 라오스 국경 바로 건너편에 있는 코록산과 그 두드러진 절벽)


한편 미 공군 B-52는 케산의 철조망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적의 참호를 타격하기 위해 데인저 클로즈로 융단 폭격을 가했다.


1월 중순에 월맹군 320, 304, 325 사단의 20,000명 이상의 병력이 기지를 포위했다.


이러한 케산의 위험한 언덕에선 푸바이의 SOG FOB-1 정찰대원들이 배회하며 유선 전화를 도청하고 공습 표적을 찾아내거나 센서를 설치했다.


아직 월맹군이 전면적인 지상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기에 케산에서의 SOG 피해는 쏟아지는 포탄에 의해 한 명씩 발생했다.


SOG의 가장 암울했던 날인 1968년 4월 15일에는 SP5 찰스 코리, 다니엘 산도발, 데니스 소프 병장이 부상당한 전우들을 돕기 위해 벙커에서 달려가던 중 더 많은 포탄이 떨어지며 세 명 모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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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 SOG FOB-3 가장자리에 있는 월맹군 참호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A-1 스카이레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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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B-52에서 투하된 폭탄의 폭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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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 외곽의 월맹군 참호를 강타한 B-52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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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회의 B-52 아크 라이트가 넓게 퍼져 있는 월맹군이 미 해병대와 SOG 기지로 집결하여 공격하는 것을 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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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케산의 SOG 기지 경계선에서 터진 네이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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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처럼 보이는 것은 케산의 철조망 바로 너머에서 시행된 B-52 폭격으로, SOG 기지에 잔해가 날아올 만큼 근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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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에 미 해병대 연료 저장소를 피격한 월맹 122mm 로켓. 포위된 기지는 매일 수천 발의 포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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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전이 끝날 무렵, 케산 외곽의 폐허를 헤쳐나오는 SOG 정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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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콜로라도 1-0 폴 더글라스(왼쪽)와 팀 동료 프레드 크레인. 1968년 2월 21일, 더글러스는 케산에서 포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한편 케산에서 서쪽으로 5마일 떨어진 라오스 국경에는 랑베이 그린베레 캠프가 있었다.


정찰팀이 라오스 인근에서 월맹군이 탱크를 집결시키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SOG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이공의 MACV 본부는 기갑 공격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7일 자정 직후, 월맹군의 PT-76 전차 11대와 500명의 보병이 철조망을 뚫고 랑베이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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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제 PT-76 전차)


소수의 대원들은 캠프의 지휘 벙커로 피신했으나, 전차가 모래주머니로 된 지붕을 궤도로 파헤치며 모두 끄집어냈다.


케산에 해가 뜰 무렵, FOB-3 지휘관인 조지 콰모 소령과 찰스 "스킵" 민닉스 상사는 12명의 SOG 미군 정찰대원과 30명의 몽타냐드 및 넝족을 소집하여 미 해병대 헬기를 타고 랑베이의 생존자를 구출하러 갔다.


벙커와 벙커를 뛰어다니며 SOG 대원들은 미군 생존자들과 최대한 많은 몽타냐드 부상자들을 구출해 냈다.


구조대가 철수할 때, RT 앨라배마 1-0, 존 앨런은 한 미군이 팔을 흔들며 활주로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이미 헬기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남겨진 그린베레 대원인 데니스 톰슨은 5년간의 적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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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 구조대가 철수하는 동안 랑베이 비행장으로 뛰어들었다가 생포된 데니스 톰슨 하사)


랑베이를 방어하던 24명의 그린베레 중 1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콰모 소령의 SOG 대원들은 미군 14명을 구출했으며 한 명 빼고 모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랑베이에 투입된 11대의 전차 중 7대가 파괴되었고, 2대가 더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250명의 월맹군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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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다음 날의 랑베이. 무너진 지휘 벙커 옆에 파괴된 월맹군 탱크가 있으며 SOG 부대가 해당 벙커에서 마지막 저항군을 구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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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게 손상된 랑베이 기지와 격파된 전차 3대(원으로 표시))


포위전이 끝난 후 콰모 소령은 SOG 비행기를 타고 케산을 떠났으나 악천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1974년에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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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시신과 함께 수습된 조지 콰모 소령의 개인 소지품)


캄득 방어전


랑베이가 함락된 후, 월남 북부에 위치한 제1군단 지대에는 SOG가 1965년 라오스로 첫 정찰 임무를 시작한, 남쪽으로 약 75마일 떨어진 캄득을 제외하고는 다른 그린베레 국경 기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악천후로 인해 비행장이 폐쇄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캄득은 라오스 165번 고속도로 범위 내에 있는 SOG의 유일한 발진 기지였다.


1968년 5월 10일, 증원된 월맹군 연대가 캄득을 제거하기 위해 캠프의 문어발식 경계선을 공격하며 여러 그린베레 마이크 포스 중대와 함께 미 해병 포병 부대와 미군 사단 보병 대대가 투입된 3일간의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SOG의 소규모 발진 기지 파견대는 그들만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나중에 젊은 발진 장교인 짐 맥리로이 중위와 매리언 윈들리 중사에게 은성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캄득을 유지할 수는 없었고, 이후 SOG 팀의 라오스 165번 고속도로 일대 정찰은 태국 나콘파놈에 주둔한 제21 특수작전비행단의 졸리 그린을 통한 투입으로 간헐적으로만 수행할 수 있었다.


무전 중계지


가장 지속적으로 취약한 SOG의 전초 기지는 적진 속 작은 산봉우리 지역의 무전 중계지로, 클론다이크와 슈가로프와 같은 월남 내 기지처럼 수개월 동안 점유했거나, 레그혼과 히코리 전초기지의 경우처럼 수년 동안 점유하기도 했다.


라오스 남부에 국경으로부터 약 10마일 떨어진,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 위치한 레그혼은 1967년 1월 15일, 사후 명예훈장 수훈자인 조지 K. 시슬러 중위가 이끄는 정찰팀이 처음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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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15일, 자신이 확보한 레그혼에서 월맹군을 관측하는 조지 시슬러 중위. 시슬러 중위는 나중에 사후 명예훈장을 수훈했다)


레그혼의 무전기는 정글이 우거진 계곡 위로 1,000피트 이상 솟아 오른 곳에 있어 정찰팀의 메시지를 월남의 SOG 기지로 전달할 수 있었고 NSA의 폴라리스 II 무전 감청 장비를 위한 완벽한 위치를 제공했다.


레그혼은 5년 동안 계속해서 점유되었고 결국 정찰팀 대신 경비 파견대가 기지 경비를 맡았다.


월맹군이 종종 박격포탄 몇 발을 쐈지만 레그혼은 워낙 좁아서 무해할 정도의 위치에 떨어졌다.


버나드 뉴웰이 레그혼에서 근무하던 중, 개코원숭이 무리의 밤장난이(월맹군들이 어밤 중에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소리를 냈다) 사냥과 몽타냐드의 바비큐 파티로 이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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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혼에서의 개코원숭이 사냥 결과)


또한 유진 맥칼리가 야간 중 월맹군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알람 역할을 위해 6마리의 거위를 키웠을 때, 또 다른 몽타냐드의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1970년에는 그린베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여배우, 마사 레이가 레그혼으로 몰래 들어와 그린베레 대원들과 노래를 부르고 키스를 나눴다.


마사 레이는 자신의 무단 방문 사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레그혼과 같은 식으로, 케산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인 '950 고지'에 CCN 무전 중계지인 히코리 전초기지가 위치해 있었다.


처음에는 미 해병대 통신 기지였던 히코리는 케산 포위전 이후 버려졌다.


이후 1969년 11월에 프란시스 애테버리, 이반 보마크, 제임스 마틴 중사와 프란시스코 올리바레즈 하사가 이끄는 CCN 해칫포스 A중대 제1소대가 다시 점령했다.


히코리는 레그혼과 마찬가지로 무전 중계지이자 NSA 모니터링 기지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레그혼과 달리 히코리는 1971년 6월, 전면적인 월맹군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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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무거운 모래주머니와 철조망, 지뢰로 둘러싸인 레그혼은 강한 방호력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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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접근로를 장악한 레그혼 봉우리(중앙). 월맹군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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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레그혼 무전 중계지 헬리패드에 착륙한 휴이)


공병이다!


공병은 월남의 미군 시설에 대한 야간 공격을 전문으로 하는 월맹군 특공대였다.


공병은 일반적으로 분대 또는 소대 단위로 공격했지만, 1968년 8월 23일 오전 3시에는 100명으로 구성된 공병 중대 전체가 다낭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SOG의 CCN이 위치한 기지로 침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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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외곽 마블 마운틴 기슭에 위치한 CCN 기지. 월맹군 공병들은 바다를 건너 기지에 도착했다)


공병들은 첫 공격으로 인접한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침대에서 던져질 정도로 강한 폭탄으로 막사를 폭파하고 나서야 발견되었다.


한 미군 부사관은 공병이 자신의 머리에 AK를 대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고, 총이 발사되는 순간에 총신을 옆으로 밀쳤으나 새끼손가락이 날아갔다.


그는 고통을 무시한 채 공병을 방 밖으로 내던진 뒤, 자신의 CAR-15를 들고 그 공병을 죽였다.


또 다른 공병 팀은 CCN 통신 벙커 내부에 배낭 폭탄을 던져 미군 3명이 사망했다.


더 많은 공병들이 CCN의 육지 쪽을 통해 정면 공격을 시작했다.


에드 레센 대위는 아래층 침대에 있는 장교에게 AK 탄두가 날아드는 것을 보았고, 당시 무기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중위는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갔으나 숨어있던 공병에게 총을 맞았다.


그리고 "공병들이 수류탄을 던졌지만 터지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팻 왓킨스 주니어 중사는 막사 복도에서 수류탄이 튀는 소리에 침대에서 굴러 나왔다.


왓킨스는 .45구경 권총을 들었고 배낭 폭탄을 점화하던 월맹군 공병을 쐈다.


한편 또 다른 미군 중위는 문밖으로 나가다 총에 맞았으나, 전우들에게 2명의 공병이 문 앞에 있다고 용감히 외쳐 여러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몇몇 공병은 점화한 폭탄을 손에 든 채 총에 맞아 죽었다.


찰스 파이퍼 대위는 사실상 수류탄으로 탄막 포격을 가해 수십 명의 공병을 사살했다.


새벽이 밝아오자 CCN 대원들은 전선을 형성하고 체계적으로 기지로 진격하여, 각 방 및 엎드려서 지나갈 수 있는 모든 공간 등을 확보하여 적 저항군을 소탕했다.


대원들은 곳곳에서 하나둘씩 공병의 시체를 발견했다.


마지막 두 명의 월맹군이 파도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총에 맞아 죽었다.


적군 중 약 38명이 죽고 9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날 밤 17명의 그린베레 장교와 부사관이 사망했는데, 이는 그린베레 역사상 최대 피해였다.


사망자 중에는 5개월 전 랑베이 구조대로 합류했던 리차드 페그렘 주니어 원사와 캄득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했던 탈마지 알핀 주니어 하사 등 훌륭한 대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수많은 넝족, 몽타냐드, 월남인도 사망했다.


1995년, 1968년 당시 다낭 지역의 지휘관이었던 베트콩의 담득남 전 장군은 그를 방문한 SOG 출신자인 척 파이퍼에게, 공병 습격은 SOG 작전을 방해하여 호치민 트레일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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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중에 확보한 CCN에 대한 적 공병 습격 작전 명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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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군 공병의 수류탄 바구니. 공병은 수류탄을 던지기도 전에 죽었다)


1970년 4월 1일, 약 15명의 월맹군 공병이 쓰레기로 가득한 배수로를 통해 CCC의 TOC와 지휘관 숙소를 파괴한 소규모 공병 습격이 발생했다.


공병들은 모두 탈출했고 약 10명의 몽타냐드가 사망했으나, 미군은 한 명도 부상조차 입지 않았다.


또한 닥펙 그린베레 캠프에 대한 월맹군의 대규모 공격 및 12일 후 발생한 닥세앙 캠프 공격은 공병 습격과 함께 발생했다.


프랭클린 "더그" 밀러가 이끄는 RT 버몬트가 공병들을 추적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공병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새로운 팀이 투입되었기에 CCC 작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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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3월 CCC 공병 습격 후 발견된 불발 배낭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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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3월 CCC 공병 습격 중 불발된 월맹군 방갈로르 토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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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군 공병 습격 후 불타고 있는 CCC T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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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는 1970년 공병 습격 이후, 사진에서 정찰대원인 테리 소르스비가 쏘고 있는 것과 같이, 지프에 부착된 미니건 등으로 방어를 강화했다)


존 카바이아니의 히코리 고지 전투


1971년 6월, 버려진 케산 비행장 바로 북쪽에 있는 CCN의 전초기지인 히코리 무전 중계지는 월남 북서부의 마지막 연합군 주둔지였다.


존 카바이아니 하사와 그의 보조인 존 존스 병장이 지휘하는 이 작은 기지에는 현지군 67명과 센서 판독병 및 75레인저 L중대 산하 분대를 포함한 미군 27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6월 4일 일출, 카바이아니는 철조망에서 중국제 크레모아를 발견하고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지만, 월맹군이 더 많은 크레모아를 터뜨려 존 존스를 포함한 여러 대원이 부상을 입었다.


곧 이어 월맹군은 총격을 가하고 박격포와 RPG 포격을 퍼부어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 육군 센서 판독병인 월터 밀샙은 카바이아니의 벙커로 올라가 .50구경 기관총을 맡았고, 카바이아니가 탄약을 재분배하고 부상자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RPG 탄두가 벙커에 명중했음에도, 밀샙은 부상을 무시하고 총을 뒤로 옮기고 사격을 재개하여 5명의 월맹군 기관총 사수를 쓰러뜨렸다.


밀샙의 지원 사격과 함께 카바이아니는 부상당한 대위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러자 또 다른 포격이 히코리를 뒤흔들어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카바이아니는 여러 번의 중계와 함께 대피를 요청했다.


카바이아니는 밀샙과 대부분의 수비 병력을 첫 헬기에 태웠으나, 젊은 텍사스인인 밀샙은 전투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헬기에서 내렸다.


오후 4시 30분이 되자,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카바이아니는 마지막 휴이로 7명을 대피시킬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31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대원들을 버릴 수 없었던 카바이아니는 세 차례 부상을 입은 밀샙과 6명의 몽타냐드를 휴이에 강제로 태우고, 23명의 몽타냐드 및 월남군 병사, 존 존스와 함께 기지에 남았다.


히코리의 절반을 버리고 가장 방어하기 쉬운 오르막 지대를 확보한 카바이아니는 기관총 세 자루를 옮기고 벙커 꼭대기에 사격 진지를 구축했다.


오후 7시경, 해가 지고 미 공군 C-119 스팅어 건쉽이 도착했다.


한 시간 후 첫 월맹군 정찰대가 왔지만, 스팅어는 짙은 안개 때문에 사격할 수 없었다.


오후 8시 30분, 15명의 월맹군 병사가 기관총 3개가 교차하는 사선 속으로 돌격했고, 총구가 번쩍이는 것을 보자마자 그들은 죽었다.


10분 후, 또 다른 15명의 월맹군이 달려왔지만, 결과는 동일했으며 그 뒤 또 다른 15명도 마찬가지였다.


자정까지 적군은 공격을 8회 감행했고, 그때쯤 카바이아니는 곧 대규모 공격이 시작될 것을 감지하고 대원들을 히코리의 가장 안전한 벙커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월맹군은 즉시 공격을 가했고 혼란 속에서 히코리 전역을 휩쓸었다.


카바이아니는 벙커 위 사격 진지에서 몸을 구부렸다가 등에 AK탄을 맞았다.


탄두는 카바이아니의 살점을 거의 어깨까지 찢었고,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카바이아니는 존 존스와 함께 벙커로 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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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의 "원제로" 스쿨에서 촬영한 존 카바이아니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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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리에서 맹렬히 싸워 수훈십자장을 수훈한 센서 판독병인 월터 밀샙)


월맹군은 각 벙커를 이동하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있었다.


자신과 존스를 따라 월맹군 2명이 벙커로 들어오려 하자 카바이아니는 커버 Mk II 전투용 단검을 뽑았다.


카바이아니는 한 명에게 단검을 꽂아 즉사시켰고, 존스는 다른 한 명을 총으로 쏴 사살했다.


갑자기 수류탄이 날아와 존스를 비롯한 모두가 부상을 입었고 카바이아니만 귀가 머는 선에서 끝났다.


너무 심하게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존스는 항복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으나, AK가 발사되었고 존스는 뒤로 넘어지며 사망했다.


곧이어 폭발하는 수류탄에 카바이아니는 기절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카바이아니는 월맹군이 AK로 가슴을 찌르고 벙커에 불을 지르는 동안 죽은 척을 해야 했다.


뜨거운 타르가 카바이아니의 얼굴에 떨어졌고 바지에 불이 붙었지만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월맹군이 자리를 떠난 후 카바이아니는 기어 나왔지만, 총탄이 머리를 스쳐 기절하고 말았다.


카바이아니는 주변을 뒤지던 월맹군 병사가 자신을 밟을 뻔한 순간에 깨어났다.


곧 바로 거버 나이프를 뽑아 월맹군의 가슴에 세게 꽂았으나, 너무 세게 꽂아 칼을 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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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리 전초기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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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히코리에서 50구경 기관총을 쏘는 로버트 노에 대위)


카바이아니는 열흘 동안 풀러 화력기지(Firebase Fuller)를 향해 동쪽으로 비틀거리며 이동했으나, 미군 기지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포로로 붙잡혔다.


월맹은 1973년에 카바이아니가 석방될 때까지 그가 포로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히코리를 지킨 공로로 존 카바이아니는 명예훈장을 받았으며, 용감한 센서 판독병인 월터 밀샙은 수훈십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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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혼과 히코리에서 사용된 NSA 폴라리스-II 시스템과 유사한 이 무전 감청 장비는 주파수 도약스캐너와 음성 인식 녹음 기능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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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N 무전 중계지인 히코리 전초기지는 케산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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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참전용사 기념비 앞에 선 존 카바이아니)


RT 캔자스의 최후의 저항


히코리 전초기지를 잃은 지 두 달 후인 1971년 8월, 수많은 월맹군이 왜 캄로강 계곡을 따라 DMZ를 넘었는지 미 정보부가 알아낼 수 있도록, RT 캔자스는 히코리에서 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오래된 언덕 위 화력기지에 투입되어 포로 생포 임무를 수행했다.


RT 캔자스의 1-0 로렌 "페스투스" 헤이건 중위, 1-1 토니 앤더슨 병장, 1-2 브루스 버그 병장은 영리한 계획을 세웠다.


눈에 띄도록 투입되어 하룻밤을 보낸 후, 팀의 절반은 철수하고 나머지는 숨어 있다가 언덕 꼭대기를 수색하러 올라온 월맹군을 매복하여 그중 한 명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RT 캔자스는 8명의 몽타냐드와 오랜 빙햄 하사와 빌 퀸, 윌리엄 리몬디 병장으로 이루어진 3명의 "스트랩행어"를 포함하여 14명의 대원과 함께 투입됐다.


헤이건의 대원들은 우연히 DMZ 전역에 설치된 비밀 연료 파이프라인 근처에 착륙했고, 이 파이프라인은 몇 달 후 월맹군 기갑부대가 전쟁 최대 규모의 공세를 펼칠 때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자정까지 조용했으나 월맹군이 산비탈 주변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에 헤이건의 대원들은 트럭 뒷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해가 뜨기 직전에 불길할 정도의 고요함이 엄습했다.


SOG 사령관인 새들러는 나중에 증원된 연대가 언덕을 포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2,000명의 월맹군 vs 14명의 SOG라는 상황이 발생했다!


알라모에서는 188명의 미군이 3,000명의 멕시코군과 맞섰는데, 이는 16:1이었고, 1879년 영국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인 로크 드리프트 전투에서는 영국군 140명이 줄루족 4,000명과 28:1로 맞붙어 빅토리아 크로스만 11개가 주어졌다


RT 캔자스는 107:1의 상황이었다.


전투는 잘 조준된 RPG가 브루스 버그의 벙커를 박살 낸 것으로 시작되었다.


갑자기 봇물이 터지듯 월맹군이 초당 10,000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엄청난 총격에도 불구하고, 헤이건은 번쩍이는 총탄 세례를 뚫고 버그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거의 십수 야드도 채 가지 못해 사망했다.


그리고 오랜 빙햄이 벙커를 떠났으나, 6피트 앞에서 머리에 총탄이 날아들어 사망했다.


한 몽타냐드는 뒤로 물러나던 중 토니 앤더슨의 무릎에 쓰러지며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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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캔자스가 전투를 벌인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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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부터 해가 뜰 때까지 미 공군 스펙터 건쉽이 RT 캔자스의 지원사격을 했다)


앤더슨은 헤이건을 찾기 위해 언덕 위를 달려갔고, 100명의 적군이 거의 정상에 다다른 것을 발견했다!


앤더슨은 M60 기관총을 향해 달려가, 경계를 맡은 경사면에서 월맹군을 향해 탄띠 하나를 다 쏘고, 속도를 높여 다른 탄띠를 잇달아 쐈다.


그리고 코비가 도착하여 전투기를 불렀다.


한편 RT 캔자스 대원들은 수류탄이 더 이상 없어질 때까지 월맹군 머리 위로 던져 공중 폭발시켰다.


그때 월맹군 수류탄이 앤더슨의 M60 옆에서 폭발했고, 앤더슨은 CAR-15를 집어들고 수류탄을 되던졌으나 눈앞에서 터졌다.


앤더슨은 파편상을 입었고 팔꿈치에 총탄까지 날아들었다.


앤더슨이 마지막 몽타냐드 두 명을 데리고 근처에 있던 월맹군을 우회하여 살아남은 팀원에게 도달했을 때 경계선은 거의 절반으로 좁혀졌다.


빙햄은 사망했고 빌 퀸은 부상을 입었다.


아직 리몬디만 멀쩡했다.


그들은 최후의 저항을 위해 등을 맞대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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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캔자스: (뒷쪽 왼쪽부터) 브루스 버그, 로렌 헤이건 중위와 몽타냐드들(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펫, 켄, 에로, 파하이, 포.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 및 실종됐다)


월맹군은 해일처럼 언덕을 넘고 있었고, 그들의 AK는 끝없이 발사됐다.


영원 같던 저항 중 코브라 건쉽의 정확한 사격으로 월맹군의 시체가 쌓였고, 공수가 역전되자 월맹군이 엄폐물을 찾아 달아난 사이에 휴이가 도착했다.


리몬디의 도움으로 앤더슨은 첫 휴이에 여러 팀원의 시신을 싣고, 두 번째 휴이에 부상자와 다른 팀원들을 태웠다.


노엘 가스트, 지미 리브스, 샘 "인준" 아담스가 CCN 지휘관인 도니 벨피 중령과 함께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를 수행하여 헤이건 중위와 여러 몽타냐드의 시신을 수습했으나, 브루스 버그는 찾지 못했다.


헤이건, 빙햄과 함께 6명의 몽타냐드가 사망했으며 버그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라고 리몬디, 퀸, 앤더슨, 그리고 다른 몽타냐드들은 부상을 입었다.


미 공군은 나중에 185명의 월맹군이 모두 사망했으며 그 3배에 달하는 병력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했다.


헤이건의 가족은 미 육군의 마지막 월남전 명예훈장을 받았다.


토니 앤더슨과 빌 퀸은 수훈십자장을 받았으며 리몬디, 버그, 빙햄은 은성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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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 명예훈장을 수훈한 RT 캔자스 1-0 로렌 헤이건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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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 싸우다 전사한 오랜 빙햄 주니어 병장)


SOG의 람손 719 지원


1971년 초, SOG는 월남군의 라오스 침공 작전인 람손 719를 지원하기 위해 정교한 교란 작전을 펼쳤다.


처음에 SOG 블랙버드가 케산 서쪽 7개 지역에 폭죽과 함께 가짜 낙하산병을 투하했고, 그 후 미군팀이 또 다른 4개 지점에서 가짜 투입을 꾸몄다.


케산 바로 서쪽의 코록 산 정상에 SOG는 정찰팀 3개와 해칫포스 2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이는 1971년 2월 7일 이후 미국 정책이 변경되고 라오스에 더 이상 미군의 존재가 허용되지 않자 철수했다.


2월 8일, 월남군은 9번 고속도로를 따라 케산에서 서쪽으로 진격해 침공했다.


월남군이 라오스로 진격하는 동안 SOG의 NAD는 27개월 만에 처음으로 DMZ 이북에서 내스티 보트 습격을 벌였다.


2월 11일 밤, 내스티 3척이 정크선, 트롤선, 100톤짜리 해안 증기선을 격침시키고 소련제 구잠정 2척을 손상시켰다.


2월 19일에는 내스티급 4척이 60피트 초계정을 격침시키고 130피트 상하이 II급 고속정과 산터우급 건보트에 큰 피해를 주는 등 전쟁 최대의 수상 작전이 이루어졌다.


월맹 해군이 그들을 격침시키려 했으나, SOG 승무원들은 초계정 한 척을 무력화시키고 상하이 II급 한 척을 침몰시켰다.


교전 중 SOG 월남 선원 1명만 사망했다.


2월 18일, 6개의 미 정찰팀 중 첫 번째 팀이 적군의 발을 묶어두고 922번 고속도로를 따라 라오스를 떠날 때를 대비하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아샤우 계곡에 투입됐다.


착륙 직후 적과 접촉한 RT 인트루더는 로프로 철수하던 중, 거센 사격으로 인해 로널드 "닥" 왓슨 대위와 앨런 로이드 병장이 매달려 있던 휴이가 격추당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새미 헤르난데즈 중사는 로프가 끊어졌을 때 기적적으로 정글 캐노피 쪽으로 떨어졌다.


클리프 뉴먼과 빌리 워가 이끄는 RT 하부는 왓슨과 앨런, 휴이 승무원들의 시신을 찾아 격추 지점으로 가기 위해 절벽 아래로 레펠을 해야만 했다.


정찰팀 대원들이 왓슨과 로이드의 시신을 발견했으나, 증원된 월맹군 중대가 RT 하부를 가파른 절벽으로 몰았고 대원 절반이 부상을 입은 팀이 시신을 남겨두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탈출하지 않았다면 팀은 전멸했을 것이다.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짐 버틀러 대위가 이끄는 RT 파이썬은 1-1 레슬리 채프먼 하사와 함께 버려진 토르 화력기지를 점령하여 월맹군이 장악한 548번 고속도로를 차단했다.


첫날 밤 RT 파이썬을 향핸 수색이 있었고 가끔 박격포탄이 날아왔으며, 밤새 계곡 바닥에서 손전등과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았다.


팀은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음날, 어두워진 직후 월맹군은 박격포와 무반동총으로 팀이 있던 언덕 꼭대기에 포격을 가했다.


결국 휴이 두 대가 월맹군이 언덕 위로 몰려오기 전에 RT 파이썬을 간신히 구출했다.


버틀러의 대원은 적 42명을 사살하고 공습을 유도하여 추가로 300명을 사살한 것으로 판명됐다.


레슬리 채프먼은 수훈십자장을 받았다.


아샤우의 또 다른 SOG 팀은 작은 봉우리를 점령하고 박격포와 무반동총을 사용하여 548번 고속도로를 따라 월맹군 트럭과 병력을 묶어두고 밤마다 미 공군 건쉽을 유도했다.


이들은 다른 두 팀과 함께 21일 동안 도로를 차단하여 월맹군 트럭 15대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미군 2명과 몽타냐드 4명이 부상을 입었다.


SOG의 교란 작전으로 상당수의 월맹군이 사살되었으나, 침공은 수렁에 빠져 대참사가 되었고, 월남군 부대는 아샤우 계곡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차단 및 전멸 당했기에 교란 작전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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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 C-130은 더미를 떨어뜨리고(왼쪽 위), 정찰팀으로 아샤우 계곡 도로를 차단하고(중앙), 내스티 보트로 월맹 해역을 습격했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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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버드가 라오스에 투하한 것과 유사한 팽창식 더미 낙하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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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 내스티 보트는 사진과 같은 월맹의 상하이 II급 건보트를 여럿 격침했다)


(미 해군 고문과 함께 다낭 해변에서 촬영한 월남 내스티 보트 선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