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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바이 사격장에서, 왼쪽부터 존 S. 마이어, 존 '버바' 쇼어, 찰스 보그)


1969년 1월 이전부터 수개월 동안 FOB 1의 폐쇄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병사들 사이에서 돌면서 미군과 현지 대원들 모두에게 우려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누구도 기지째 재배치 되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특히 자기 작전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 생명이 직결된 조직은 더더욱 싫어했다. FOB 1의 정찰팀은 자신의 작전 지역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문제를 겪진 않았으나 국경을 넘을 때 예상되는 상황과 대처 방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정찰팀은 또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비행하는 미군 및 월남 파일럿들과도 큰 친밀감을 쌓았다. 좁디좁은 정찰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이며, FOB 1의 우리들은 서로를, 그리고 우리를 직접 지원해 준 이들을 100% 신뢰했다. 이러한 유대가 깨진다는 생각은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당연히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어디로 보내질 것인가였다 CCN, CCC, CCS라는 세 가지 조직 요소 내에는 푸바이의 FOB 1 외에도 5개의 다른 FOB가 있었다. 남쪽에 호응옥타오 FOB 6와 부온마투옷 FOB 5. 중부 고원에는 콘툼 FOB 2. 북쪽에는 DMZ 바로 옆 마이록 FOB 3. 마지막으로, 푸바이에서 남쪽으로 30분 정도 비행하면 나오는 중국해 가장자리의 다낭 FOB 4가 있었는데 내가 가장 선호하지 않은 옵션이었다.


내가 왜 FOB 4를 싫어했을까? 그 몇 가지 이유를 말하겠다. 무엇보다도 심적 평화였다. FOB 1에 있던 우리들은 임무를 마치고 푸바이로 돌아오면 긴장을 풀고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누군가 박격포를 쏘거나 우리 쪽으로 AK-47 몇 발을 쏘기도 했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반면에 다낭은 불과 6개월 전에 거의 초토화될 뻔했다.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사실은 아니었다.


게다가 열악한 경계 상황과 그 때문인지 몰라도 다낭의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응집력이 없거나 필수적인 동지애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양립할 수 없는 이들이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다낭 기지는 정찰을 수행하는 FOB 4의 본거지인 것 외에도 CCN의 본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다수의 REMF(Rear Echelon MotherFucker, 후방 출신 병신)와 함께, 그에 수반되는 끊임없는 헛소리가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정찰대원들은 목숨을 거는 것 외에도, 확립된 서열, 점호, 청소 등 비전투원들이나 진심으로 따지는 전형적인 군대 환경과도 싸워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CCN의 새 사령관에 대해 들은 소문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러한 강압적 경향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었다. 전임 사령관인 잭 워렌 대령은 자신이 지휘하는 대원들을 깊이 배려하는 장교였다. 일부에서는 특히 대원들이 현장에 있을 때 그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신경을 써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운 사령관은 잭 아이슬러 대령이었다.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이 그의 리더십에 대한 방식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는 잭 워렌과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아이슬러의 방식에 따르면 팀이 임무를 수행하는 비율은 증가하는 반면, 팀이 투입되지 않거나 철수하는 비율은 감소했다. 첫 번째 부분인 임무를 더 자주 수행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이의가 별로 없었다. 결국 우리는 군대였고 정찰 활동이 우리가 하는 일인 데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가 가치 있고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이 점에 있어서, 68년 말에 FOB 1의 정찰팀 중에서 RT 아이다호보다 더 많은 목표를 정찰한 팀은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분이 더 문제가 됐는데, 사실상 현장에 있는 팀과 그들을 지켜보는 코비 파일럿이 철수하는 걸 깊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팀과 코비 모두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철수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마저도 견딜 수 있었으나, 정말 나를 괴롭힌 것은 기지 생활 중 아이슬러의 틀에 박힌 비전투원식 접근 방식이었다. 팀이 더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려면 사소한 검열을 받거나 빌어먹을 군화를 고광택으로 닦으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수준을 넘어 비생산적인 일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유능한 병사들이 임무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는 가장 "군인답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정찰을 수행하는 우리에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FOB 1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군사적이거나 일상생활을 방해할 만큼 군사적이지는 않았다. 점호가 있기도 했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었고 임무에서 막 돌아온 팀원이나 임무를 준비하는 대원들은 참석할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의 정찰대원들은 거의 항상 이 두 가지 자세 중 하나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나타나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복장 규정에 관해서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계급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장교들은 하루에 한 번 이상 경례를 받았지만, 마주칠 때마다 경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원들은 계급이 아니라 현장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마나 교활하게 포커를 치는지, 풋볼 경기에 얼마나 몸을 던지는지, 얼마나 재치 있는 발언을 했는지에 따라 평가받았다. FOB 1은 천국이었다.


나는 CCN 본부가 있는 FOB 4에 배치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어디로 갔을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먼저 CCS의 두 FOB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나는 호응옥타오의 FOB 6에서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고, 그곳에 있던 짧은 시간 동안 본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린호넷의 항공 지원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나는 콘툼의 FOB 2에 가본 적은 없지만, 절친한 친구인 존 월튼이 해당 AO에서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임무를 설정하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작전 장교들이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며 항공 지원도 훌륭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콘툼에는 한 가지 큰 단점이 있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FOB 2 기지는 큰 도로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다. 본질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기지였다. 문제가 발생하면 FOB 1보다 더 자주 발생했고,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곳이 도로 반대편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고 지속될 수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그게 현실이었다.


이상이 내 평가와 선호도였으며, 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 선택지가 큰 계획 속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RT 아이다호는 다낭의 FOB 4로 이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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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N으로 배치되기 전 푸바이의 사격장에 있는 RT 아이다호)


***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특별한 작별 인사를 고하고 싶은 특별한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한번 가보고 싶은 특별한 장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 FOB 1과 푸바이를 떠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월남전의 드라마, 고통, 공포와 같은 공개적인 면모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사적인 면, 즉 수많은 우정이나 지역 주민들과 맺은 특별한 관계는 묘사하기가 더 어렵고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내게 그 특별한 관계 중 하나는 그린베레 라운지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과의 인연이었다. '한'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밤에 FOB 1 경계선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된 단 두 명의 월남인 근로자 중 한 명이었다. 이는 그녀가 헤픈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녀와 다른 근로자인 응아라는 소녀는 출퇴근이 불가능한 다낭시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CCN으로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이 특별한 사람을 데리고 특별한 장소인 후에로 가기로 결정했다. 1687년에 세워진 후에시는 응우옌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 도시는 향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다. 6피트 두께의 성벽 내부에는 1805년에 지어졌으며 자체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베이징 자금성의 복제품이 있다. 성문과 신사, 건물이 어우러진 그 모습은 놀랍고도 장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68년 초, 이곳은 격렬한 전투의 중심에 있었기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큰 피해를 입고 방치됐으나 오래된 귀족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과 나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다.


주로 내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밤늦은 시간에 시장을 방문해 나를 위해 준비할 식사에 필요한 재료와 향신료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호기심 많고 낭만적인 생활이었다. 무서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아름다운 젊은 여성과 함께 잘 차려진 식사를 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킹비 파일럿들이 매일 이런 일을 반복했는데,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이 아이들과 함께 놀아줬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경험하지 못한 정신적 분리감이었다. 나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러 번 한에게 돈을 줬지만, 하루나 이틀 안에 그 돈이 내 바지 주머니나 전투복 상의에서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클럽에서 팁을 받아 충분한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향강에 떠 있는 삼판으로 구성된 시장에 한을 내려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60년대 중반 그룹(애니멀스, 폴 리비어와 레이더스,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 더 도어스 등)의 노래를 포함해 좋은 로큰롤을 틀어주는 스테레오 시스템을 자랑하는 아는 바에 들렀다. 나는 사운드의 향연에 빠져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바텐더 중 한 명이 시스템의 플러그를 뽑았고 정적만이 방 안을 감쌌다.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피니(끝났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를 쳐다봤지만,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오늘의 로큰롤은 없었다.


그때 낡은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크게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피아노 음악이 아니라, 더 거친 음악의 울림, 즉 혼란스러운 시대와 상황에 더 잘 어울리는 음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보니, 피아노 부전공으로 성악을 전공했던 트렌턴 주립 사범대학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2년 넘게 건반을 만져본 적이 없었고, 처음 건반을 만져보자 습한 기후로 인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나는 앉아서 바흐 C장조 전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밤마다 카세트 플레이어의 한쪽 이어피스를 통해 이 곡을 들었기 때문인지 이 노래가 떠올랐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 중 하나인 프로콜 하럼의 Repent Walpurgis라는 노래에도 이 전주곡이 삽입되어 있다. 바흐의 전주곡에서 클로드 드뷔시의 '피아노를 위하여'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작품으로 아름답고 극적이며 까다로운 곡이었다. 세 부분 중 첫 번째 부분인 전주곡을 연주하면서 더 많은 것들이 떠올랐고, 예전에 손끝으로 직접 했던 수많은 연습을 모두 기억해 내도록 했다.


연주 중 1964년 음대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에 토요일마다 오랜 시간 연습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드뷔시 전주곡을 선택해 이 곡을 반복해서 연주하며 방황하는 기억과 주저하는 손이 이 곡을 기억하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드뷔시는 이 곡을 4분 30초 만에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을 연주하는 데는 최소 4주 반의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마침내 그 곡을 마스터했고 프랑스 작곡가가 음악에 불어넣은 뉘앙스와 감정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는 학생이 아닌 전사가 되어 썰물, 쏟아진 음료수, 월남 담배 연기 냄새가 진동하는 바에서 다시 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운명은 사람의 삶과 재능을 가지고 재미있는 일을 하곤 한다.


전주곡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혹시나 그린베레 친구들이 와서 내가 빌어먹을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특수부대원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클로드 드뷔시를 연주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바의 깊은 그림자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청년이었다.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의 친절함에 고개를 숙이면서 나는 그가 베트콩의 검은 파자마를 입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반응이 합리적이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슬픔이 밀려왔다. 한 사람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다른 사람은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만,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자신을 죽일지 궁금해하는 이런 상황까지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는 총 대신 "클로드 드뷔시는 프랑스의 모든 것이 독재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이지 않다는 놀라운 증명이자 한때 살아있던 증거"라는 말을 꺼냈다. 그의 완벽한 영어에 놀랐지만, 곧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그에게 프랑스인의 잔인함과 월남 사람들에 대한 식민 착취에 대해 읽었다고 말했다. 미군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내 생각에 대해서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결과는 똑같이 불행할지 모르지만, 우리 행동의 의도는 훨씬 더 숭고했다. 그는 내가 월남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내게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사라반드"와 지독할 정도로 복잡한 "토카타"라고 불리는 '피아노를 위하여'의 나머지 부분을 연주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 곡들은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고 고백했고 내 대학 시절에 대해 조금 이야기했다. 우리는 음악에 대해, 음악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 역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등 서양 클래식을 형성한 작곡가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서 음악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나처럼 고대 왕조 도시인 후에의 허름한 바에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시장에서 한을 데리고 FOB 1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강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월남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와 실크 바지를 입고, 바지 밖으로 길게 늘어진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변의 월남 여성들과 구분할 수 없었겠지만, 내 눈에는 그녀가 등대처럼 눈에 띄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반가워서 마지막으로 후에를 떠나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보자고 서둘러 제안했다.


푸바이를 향해 남쪽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익숙한 풍경들을 차례로 지나치는 동안 나는 향수를 느꼈다. 교통 체증으로 멈춰 서 있는 동안, RT 아이다호가 앞에 있는 트럭에서 코카콜라를 슬쩍 꺼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푸루엉의 농촌 지역을 지나자, 내게 소 눈알 국을 먹으라고 속인 팀이 생각났다. 1월인데도 날씨가 더웠고, 주변 논에서는 비료로 사용된 인분의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그 푸르른 곳에서 원뿔형 모자를 쓴 온 가족이 모를 심거나 어린싹을 돌보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이 지역과 FOB 1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안남 산맥에 드리운 아름다운 일몰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프레리 파이어 AO가 그리워질 것이었다.


추억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예리한 주의를 기울였고, 특히 매복 가능성이 있는 지점에 접근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1번 고속도로는 물에 잠긴 논 위로 솟아 있었고,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다리, 운하, 수로가 여러 개 있었다. 공격은 흔한 일이었고 지난 몇 달 동안 해병대가 여러 차례 공격받았다. 또한 지뢰, 임의의 박격포탄, 무차별적으로 아무나 노린 총탄도 문제였다. 6피트 2인치의 백인으로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눈에 띄거나 위로 솟은 경향이 있었다. 나는 다정하고 아담한 한을 바라보며, 확실히 테이스티 프리즈에 들러 큰 도로를 따라 드라이빙하는 일반적인 미국 데이트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최대의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자정까지 한을 집에 데려다주기 전에 어떻게 스킨십을 나눌 수 있을지였다. 내가 고향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한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무엇을 요리할 것인지 태연하게 얘기했는데, 마침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와 국수 요리 중 하나였고, 보통 특별한 날에 먹을 수 있는 요리였다. 내가 이 소식을 음미하는 동안 그녀는 며칠 후에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다낭으로 떠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우리 둘 다 피하려고 그토록 애썼던 일, 우리가 푸바이에서 함께 했던 일들이 정말로 끝나가고 있었다. 한도 FOB 4에 가봤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하진 않았다. 그녀는 내가 연락할 수 있도록 다낭의 주소를 알려 줬지만, 절대 직접 방문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녀의 동네는 베트콩 조력자들로 가득했고 그녀가 나 또는 그린베레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의 가족이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그녀는 FOB 4에서 일할 친한 친구인 응아를 통해 언제든지 방문 일정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끝을 맺었다. "기도할게요. 당신이 베트콩에게 죽지 않기를 말이죠." 


그녀의 말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내 삶에 그녀는 온전한 은혜와 아름다움을 최대한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내 삶에 일종의 평화와 평범함을 가져다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영혼을 구원해 주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우리들은 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맺어진 아주 특별한 관계의 종착점에 서 있었다.


FOB 1의 게이트에는 푸바이 착륙장으로 보급품과 인력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트럭 호송 행렬이 있었다. 이제 기지 폐쇄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고 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을 내려주고 지프를 모터풀에 반납한 후 클럽으로 향했다. 혼자서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한 공군 중령이 곧 클럽에 행차하실 예정이었다. 이름, 계급, 소속을 소개하던 부사관은 잠시 멈춰 서서 "이제 FOB 1 신사 여러분, 멋진 중령님을 위하여 힘찬 '찬가(hymn)'를 부릅시다"고 말했다. 


이에 모두가 자리에서 엄숙하게 일어나 잔을 높이 들고 한목소리로 "Him. Him. Fuck Him!"를 불렀다. 그런 다음 더 이상의 야단법석 없이 모두가 하던 일을 재개했다. 언제나 이 퍼포먼스는 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좋은 장교는 메시지를 받았고, 나쁜 장교는 화를 냈다. 신임 장교에게 이 '찬가'를 부르는 것은 본부 환경에서는 특별히 잘 통하지 않는 전통이었고, 이것이 내가 다낭에 가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몇 년 후, 우리는 FOB 1이 발각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1968년 8월 23일에 FOB 4에 발생한 것과 같은 대규모 공격을 위해 적군은 기지를 감시하고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를 조심스럽게 측정하다가 잡힌 월남인 "오물 처리원"과 클럽 꼭대기에서 발견된 빨간색 마커 깃발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가끔씩 베트콩이 쏘는 박격포와같이 익숙한 사소한 괴롭힘 활동의 일부로 치부했다. 우리는 찰리들이 목표를 놓치는 것에 질렸거나 저조한 결과에 너무 당황해서 누군가에게 거리를 측정하고 목표물을 표시하도록 하여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가 있었다.


FOB 1 바로 옆에는 월남 제2 육군 훈련소 작전 본부가 있었는데, 그 자체로 매력적인 목표였다. 그곳과 FOB 1 모두 베트콩 조력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귀중한 정보가 많이 수집되었고, 우리를 초토화하기 위한 계획도 잘 수립되어 있었다. 요컨대, FOB 1를 향한 시계가 움직이고 있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FOB 1은 FOB 4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은 기지였고, 그 큰 FOB 4가 전멸 위기를 겪었다. MACV-SOG 지휘부는 또다시 이런 부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기지 운영을 중단하고 기지를 월남에 넘겨준 뒤 즉시 빠져나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일종의 전형적인 군사적 혼란, 높으신 분들의 삽질 사례로 간주했다. 


마지못해 RT 아이다호의 짐을 챙기고 우리를 새로운 기지로 데려다줄 두 대의 킹비에 팀원들을 태우면서 상기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리드 파일럿은 목숨을 걸고 RT 아이다호를 아주 좁은 지점에서 구출한 적이 있는 틴 딘 대위였다.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이 군인에게 최고의 찬사로 쓰일 수 있다면 틴 대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강심장 그 자체였다. 그는 1968년 8월 3일 아샤우 계곡에서 죽음이 확실시되던 존 월튼, 피트 보그스 및 마지막으로 남은 RT 루이지애나의 현지 대원을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상황에서 적의 집중 사격을 받고 돌아온 파일럿이었다. 틴 대위는 자신이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코비에게 "킹비가 그리로 가고 있다."라고 침착하게 말하며 모든 월남 파일럿들의 헌신과 용기를 불멸의 명언으로 남겼다. 


틴 대위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헌신과 그에 따르는 평온함으로, 그는 거의 신비주의에 가까웠다. 목표 지역으로 비행하는 동안 그는 부조종사에게 헬기를 맡기고 깊은 기도 상태에 들어가곤 했다. 내가 "상태"라고 말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활동이나 기도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별도의 세계나 존재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이 상태에서 그는 지혜와 인도를 구하고 지상에 있는 우리 모두의 안전을 겸손하게 간청했다. 육중하고 오래된 9기통 시코르스키 헬기가 자신의 연장선이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성한 뜻의 도구가 되었다. 비행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틴 대위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킹비가 LZ에 가까워지면 그는 조종간을 다시 잡았고, 초연한 우아함과 함께 운명의 문턱 속으로 헬기를 몰았다. 팀이 헬기에 탑승하고 위험에서 벗어나면 틴 대위는 다시 부조종사에게 조종을 맡기고 하늘에 감사 기도를 올리며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과 봉사를 다짐했다. RT 아이다호가 푸바이와 FOB 1을 떠나야 한다면 지구상에서 그들을 데려갈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푸바이에서 다낭까지의 비행시간이 짧았기에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우리의 운명은 정해졌다. 좋든 싫든 우리는 정찰의 현실과 상부의 망상 사이 불행한 지점인 아이스맨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던 참이었다. 틴 대위조차도 그 결과에서 우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틴 대위가 킹비를 기지 북서쪽 모퉁이에 착륙시키자마자, 나는 뛰어내린 후 H-34의 측면으로 올라가, 버바 쇼어와 함께 다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고 그를 초대했다. 틴 대위는 내가 떠나온 모든 것들과의 마지막 연결고리였기 때문에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꺼려졌다. 하지만 틴 대위는 조용하고 공손한 태도로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내와 아들이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곧 이륙할 예정이라 먼지가 많이 휘날릴 테니 내게 물러서서 등을 돌리라고 부드럽게 제안했다.


나는 그에게 정중히 경례를 하고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