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S. 마이어가 CCN에서 파병을 마치기 며칠 전에 찍은 사진. 왼쪽부터: 히엡, 차우, 뚜안, 마이어, 사우, 까우, 손, 더그 '프렌치맨' 르터노, 헝, 블랙)
1969년 4월이 되었을 때, 나는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내 파병이 4월 27일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말년으로서의 태도를 피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기는 월남이었고 우리는 국경 너머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은 주월 미군을 줄이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었다. 당시 월남 해안 안팎으로 543,000명의 미군이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감축될까? 어쨌거나 우리는 흑색 작전이었기 때문에 SOG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았다. 야전부대에 일어나는 일은 우리 작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히엡이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린베레가 월남을 포기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월남 팀원들은 월남 정부가 부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호치민의 공산 정권보다는 월남 정권을 선호했다. 내게 이것은 우리가 비밀리에 열정적으로 싸우고 있는 이 전쟁이 끝나려면 멀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바깥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대했다. 하지만 사우, 히엡, 푸옥 및 CCN의 다른 대원들을 남겨두고 떠난다는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그린베레 임무를 믿긴 했으나, RT 아이다호가 사상자 없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1968년 5월 라오스에서 6명의 대원을 잃은 이후로 적의 총격으로 대원을 잃은 적은 없었다.
우리는 끈끈한 팀으로 성장했다. 세 명의 고참 월남 팀원인 사우, 히엡, 뚜안은 미군 팀원들과 함께 젊은 월남 팀원들이 임무 준비 상태를 갖출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시켰다. 그해 4월에 푸옥, 손, 차우, 헝은 사우가 정기적으로 임무에 투입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졌다.
RT 아이다호는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고, 수많은 총격전을 치렀다. 기지에 남을 만한 예비 팀이 아니었다. 그동안 사우, 히엡, 뚜안 및 다른 월남 팀원들의 기술과 용기는 물론, 월남 킹비 파일럿과 해병대 스카페이스 및 '저지와 엑스큐셔너'와 같은 미군 파일럿, 그리고 우리의 지원 요청에 늘 응해준 TAC 파일럿들의 용기와 비행 기술 덕분에 나는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찰의 신들이 재편성된 RT 아이다호에게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어쨌든 신뢰, 훈련, 본능, 배짱, 타이밍, 그리고 신의 은총이라는 마법의 비약이 모두 발휘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내 첫 파병이 끝날 무렵, 나를 괴롭히는 여러 일들이 있었다. 1969년 4월, 헬기가 착륙을 위해 LZ에 접근하던 중 사격을 받고 철수하는 일이 수많은 목표에서 발생하자, 린 블랙과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장에 있지 않을 때는 블랙과 내가 계속해서 REMF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에 RT 아이다호가 마블 마운틴 봉우리에서 경계를 서는 임무를 자주 맡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를 봉우리까지 공수해 줄 수 있는 헬기도 전혀 없었다. 우리는 모든 물자를 직접 운반해야 했는데, 산 남쪽 마을과 산속 깊은 동굴에서 벌어지는 베트콩 활동을 고려하면 여전히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는 항상 만반의 경계 태세를 갖추고 마블 마운틴을 올랐다. 그런 어느 날, 사우는 헝에게 포인트맨 훈련을 시켰다. 그날 헝은 압력식 격발 장치가 있는 크레모아를 포함하여 십수개의 부비트랩을 발견하고 해체하여 급여를 받았다. 자칫 치명적일 수 있었던 그 상황은 베트콩의 존재를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동시에 나를 비롯한 어린 대원들에게 RT 아이다호에서 사우가 얼마나 뛰어난 멘토였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며칠 후 CCN 사령관 잭 "아이스맨" 아이슬러 대령이 내게 특별 임무를 수행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작전 본부는 라오스 깊숙한 곳에 있는 무지아 패스의 산 정상에 중무장한 정찰팀을 배치하여 호치민 트레일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교통을 방해할 것이라는 단독 임무 계획을 알려주었다. 중무장한 팀이 산 정상을 확보하고 경사면 주변에 수십 개의 크레모아를 설치한 다음, 호치민 트레일을 따라 차량 통행이 정체될 정도로 심한 공습을 월맹군에게 가하여 미군 전투기/폭격기의 표적을 계속 늘릴 것이라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해당 지역의 예상 일기예보는 상대적으로 맑을 것이었다.
나는 더그 르터노와 맥 포텐베리를 팀에 추가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또한 마이클 오번 대위도 추가했다. 5명의 월남 팀원과 함께 총 10명의 대원이 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늘 그렇듯이 날씨가 걱정됐지만, 예보관들은 72시간 동안 맑은 하늘이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는 우리를 공격하려는 적들을 향해 24시간 내내 공습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4월 22일경, 아이슬러 대령은 임무 전 RT 아이다호의 시찰 및 현장에서 예상되는 문제에 대비한 비상 훈련과 전체 임무 계획을 검토하고 싶다는 3성 장군을 위해 완전하고 상세한 브리핑을 준비해 달라고 내게 요청했다. 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증원된 RT 아이다호에 대한 리차드 스틸웰 중장의 전체 사열이 있었다. 그는 브리핑 도중과 브리핑이 끝난 후에 나를 다그치며 임무에 행운이 있기를 기원했다.
(존 S. 마이어 병장에게 진행 중인 임무에 대해 질문하는 리차드 스틸웰 중장.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인물은 잭 '아이스맨' 아이슬러 대령이다)
내 파병 기간이 곧 끝나가자, 아이슬러 대령은 다른 팀이 임무를 수행하길 원하는지 내게 물었다. 나는 거절했다. 나는 RT 아이다호의 일원이었고 월맹군의 뒷마당에서 놈들을 해칠 기회를 한 번 더 갖고 싶었다. 다음날, RT 아이다호는 킹비들을 타고 푸바이의 캠프 이글 발진 기지로 향했다. 우리는 만반의 태세가 갖춰진 목표에 들어갈 예정이었기에 여분의 수류탄, 크레모아, 블랙과 오번이 쓸 M-60 기관총탄, 조명탄을 비롯한 M-79 유탄, 무전기 배터리를 운반하기 위해 공군 HH-3헬기로 투입될 계획이었다.
바로 투입을 진행하는 대신, 우리는 캠프 이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에 임무에 대한 브리핑을 준비하던 중, 발진 기지의 부사관 중 한 명이 내게 임무 자체가 취소되었고 킹비들이 우리를 다시 CCN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AO의 날씨는 맑았지만, 무지아 패스 상공을 비행하던 공군 관측기 두 대가 적의 집중 대공 사격을 받아 한 대는 추락하고 다른 한 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CCN으로 돌아오자마자, 1시간 이내로 마블 마운틴 정상에 있는 정찰팀과 교대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REMF는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전하며 항공 자산이 없으니 직접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혀를 깨물고 밖으로 나가, 블랙과 르터노에게 이 씁쓸한 소식을 전했다. 블랙이 팀을 막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킹비 파일럿들이 오래된 H-34 안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헬기 착륙장으로 걸어갔다. REMF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 아직 입 안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나는 파일럿들에게 CCN에 남아서 RT 아이다호를 산 위로 데려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파일럿들은 동의했고, CCN에서 머무르다 우리를 마블 마운틴 정상으로 공수해 줬는데, 기지의 특정 REMF가 정말 열불을 냈다. 당연히 이는 내가 파병 중 마지막으로 탄 킹비였다.
이틀 후, 나는 RT 아이다호의 용감한 대원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히엡을 통해 팀원들에게 복잡한 심경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내 파병 일자는 끝났다. 나는 팀원들,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SOG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블랙이 1-0가 될 것이며 르터노의 RT 아이다호 배치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블 마운틴에서 내려오기 위해 배낭을 메기 전, 마블 마운틴 동쪽 봉우리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클리트 "베이비상" 신야드가 언덕 위로 올라와 나를 안아주며 성공을 기원해 주었다. 그 작고 친절한 몸짓은 월남의 그린베레 대원들, 그리고 우리 팀의 월남 전사들보다 더 훌륭한 이들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1969년 초, 라오스에서 휴식 중인 RT 래틀러. 왼쪽부터: 1-1 빌 개버드, 팀 통역사 티에우, 1-0 클리트 '베이비상' 신야드, 서 있는 대원들은 포인트맨 탕과 트래커 키아)
CCN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밝게 빛나는 모래사장과 막사가 비밀 전쟁에서 일급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작전 기지가 아니라 해변 휴양지처럼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1968년 8월 23일을 상기시키는 흔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아직 월남을 떠날 때까지 이틀 남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저격수가 내 등에 납탄을 꽂을지도 몰라서 CAR-15를 꽉 쥐고 뜨거운 모래 위를 지그재그로 걸었다.
나는 짐을 싸고 아이슬러 대령에게 들러서 마지막 경례를 하고 르터노를 RT 아이다호에 배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는 CCN에서 떠났다. 다낭 공군기지로 가는 길에 한을 만나러 다낭 시내에 들렀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는 계속해서 제 갈 길을 갔다. 공군기지로 향하는 동안, FOB 1이 폐쇄되기 전에 한과 함께 보낸 몇 달의 시간을 회상하며 더 깊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비록 '바깥세상'에 연인을 남겨두고 왔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한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을 떠나는 것은 RT 아이다호에서 떠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한이 제트기를 조종하는 월남 파일럿과 만났고, 그가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자신과 사귀길 원한다고 하자 내 정신적 고통이 완화되었다. 하긴 집에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으니 우리 관계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회적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나트랑에서, 나는 깜짝 놀랄 지시를 받았다. 매사추세츠주 포트 데벤스에 있는 제10 특전단 E중대에 가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나는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훈련 중 만났던 애인과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포트 브래그의 특전단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해 동안 우리는 내가 돌아오면 포트 브래그에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간 제트 여객기가 깜란만에서 이륙하자 비행기에 탄 대부분의 미군들은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지르고 울부짖었다. 반면에 나는 귀국하는 병력을 태우고 출발하는 항공기가 격추되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숨을 죽였다. 안전벨트 착용 표시등이 꺼지고 나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SOG에서 1년을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동안, 나는 RT 아이다호의 대원들과 한, 그들의 향후 몇 년 동안의 운명을 생각했다.
내가 '바깥'에 있는 동안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전우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한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본토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나를 괴롭혔다.
일주일 후, 나는 포트 데벤스에 있는 제10 특전단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좋은 소식은 스파이더 파크스, 제프리 정킨스, 토니 헤렐, 릭 에스테스가 그곳에 있었고 로이 바흐 중령이 지휘관이었다는 점이다. 나쁜 소식은 바흐 중령을 제외하고 모두 러시아와 동구권 국가에서의 임무를 위해 유럽에서 산악 훈련과 어학연수, 훈련 등을 수행하는 현역 중대인 D중대에 배치됐다는 것이다.
내가 배치된 E중대는 지휘관 및 부지휘관으로 풋풋한 중위 2명과 부소대장으로 뚱뚱하고 형편없는 부사관 3명, 그린베레 훈련단에서 막 나온 어린 대원들로 구성된 구린 통신 중대였다. 이 중대는 그린베레 중대가 아니라 뉴저지주 포트 딕스의 기초 군사 훈련을 받는 부대처럼 운영되었다. 어린 병장이었던 나는 부사관들 사이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한 달 넘게 주말마다 당직을 맡았다. 과체중인 부사관들은 직업군인들이었는데, 머리에 대충 쓴 베레모가 부끄러울 정도의 인간들이었다. 모두 월남 복무를 기피했고, 개괄적으로 제5 특전단, 개별적으로 SOG와 같이 월남으로 가는 이들을 어리석다며 비웃어댔다.
그 후 몇 달 동안, 조지아 여자 친구와의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삶이 더욱 복잡해졌다. 첫째, 그녀의 오빠가 무장 강도 사건으로 총에 맞았고, 어린 아들은 폐렴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다가 딸은 일종의 어린 시절의 질병으로 인해 며칠 동안 심각하게 아팠다. 그녀와 함께 조지아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개인적인 불안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하지만 여름에 존 T. 월튼이 방문했을 때처럼 고된 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순간도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날의 마지막 점호를 마치자, 오토바이의 공회전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오른쪽을 보니 월튼이 긴 머리를 하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가 푸바이에 있었을 때부터 그가 꿈꿔왔던 대로, 월튼은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 횡단을 하고 있었다. 월튼은 전날 밤 트렌턴에서 우리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데벤스로 향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월튼은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아침 일찍 떠났다.
7월에는 1968년 푸바이에서 눈 부상으로 장애를 입은 존 매킨타이어를 만나러 내 올즈모빌 442 W-30을 몰고 뉴욕 개리슨으로 내려갔다. 헤렐, 에스테스, 댄 라다보가 함께 여행에 동행했다. 우리는 옛 추억을 되살리며 투 핸드 터치 풋볼을 했다. 하지만 트렌턴으로 돌아가는 길에 뉴저지주 유료도로 8번 출구 근처에서 시속 130마일로 달리다 엔진이 터졌다. 한 달 후, 나는 기름값과 보험료를 벌기 위해 매사추세츠주 워스터에서 주유 일을 했지만, 결국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차를 잃었다. 그게 전부였다. W-30을 잃은 것은 기본적인 예산 경제에 대한 잔인한 교훈을 주는 동시에 내 남자다운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혔다.
(매사추세츠주 포트 데벤스, 마이어의 442 W-30에 기대어 있는 로버트 J. "스파이더" 파크스와 존 S. "틸트" 마이어)
1969년 여름,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달에 발을 디뎠고,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톡에서 공연을 펼쳤다. 동시에 월남에서 병력 감축이 시작됐다.
10월이 되자, 나는 월남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을 그만두고 밤새 차를 몰고 펜타곤으로 향했다. 스파이더는 내게 펜타곤 인사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비공식 그린베레 수호천사이자, 많은 대원들이 A부인이라 칭하는 빌리 알렉산더 부인을 만나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린베레 대원들의 전출 명령서를 작성하는 책임자였다. 나는 스파이더가 말한 대로 와인 한 병과 꽃 몇 송이를 들고 펜타곤 깊숙한 곳에 있는 A부인 앞에 나타났다. 나는 A부인에게 내가 데벤스를 싫어하며, 몇 번의 술집 싸움으로 기물을 파손한 것, 기지 내에서 과속한 것과 관련하여 헌병과 지역 경찰이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A부인과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주차장으로 나가 차에서 잠을 잤다.
늦은 오후, A부인은 내 요청에 응해주었다. 그녀는 나를 SOG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명령서를 작성했다. 또한 내 복무 기간을 1969년 12월 1일에서 1970년 5월 1일까지 연장해 주었다. 나는 밤새 데벤스로 차를 몰고 돌아와 다음 날 아침에 기지를 정리하고, 조지아로 날아가 연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자기 혼자 남겨두고 월남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하러 온 것이냐며 내게 물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데다 진실도 전혀 모른 채 나를 그곳에 두고 하루하루를 더 견딜 수는 없던 것이었다. 그녀는 68년 4월 내가 월남으로 떠날 때 남겨둔 그린베레 반지가 걸린 목걸이를 빼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둘 다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병장으로서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며, 포커 게임으로 군 봉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 그녀는 전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뉴저지로 날아가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이틀 후 나는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월남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정킨스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파티를 시작했고, 일본으로 향하는 긴 비행시간 동안 살면서 제일 허세 같았던 축하 모드를 이어갔다. 급유를 마친 후, 나는 잠이 들었고 정킨스는 깜란만으로 가는 비행 내내 파티를 벌였다.
정킨스와 내가 비행기에서 내려 더플백을 챙기자마자, 그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빌릴 수 있는" 지프를 찾기 시작했다. 첫 파병 때처럼 육군 파월 처리 본부에서 절차를 기다리는 대신, 몇 분 만에 정킨스와 나는 나트랑를 향해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작은 브라우닝 25구경 자동 권총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날 현지 베트콩은 너무 바빠서 1번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질주하는 두 명의 그린베레를 귀찮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나트랑 시내의 한 집으로 곧장 향했고, 그곳에는 일련의 월남 여성들이 5개의 커다란 침대에 앉아 각 침대에 몇 피트 높이로 쌓인 마리화나 더미를 가지고 담배를 말고 있었다. 정킨스는 본부에 보고하러 가기 전에 그곳에서 만나고 싶었던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우리는 함께 놀고, 음식을 먹고, 나트랑 해변으로 차를 몰고 간 뒤, 제5 특전단 본부에 도착해 근무 보고를 했다. 다음날 정킨스는 "동남아 사회화와 재적응"을 위해 남았다. 반면 나는 다낭으로 날아갔다.
오 결국 돌아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