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8일 인터뷰
00:00:15:~00:28:07까지
엘든 버지웰: 저는 1947년 8월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조 갤러웨이: 47년 말이죠.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되셨나요?
엘든 버지웰: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죠.
저는 워싱턴주 호퀴엄과 애버딘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이셨죠.
51세에 유방암으로 죽은 누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고등학교 때까지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군에 입대할 때까지 지역 전문대를 다녔죠.
[입대 전의 삶]
엘든 버지웰: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 많은 매우 보수적인 마을에서 자랐거든요.
제 친구들 아버지들도 모두 군을 나오셨죠.
동네에서 카우보이 vs 인디언, 미군 vs 독일군으로 싸우는 놀이를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관심이 많았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 뉴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느 뉴스에서 월남 어딘가에 있는 제101 공수사단 부대원들과 웨스트모어랜드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부대원들이 당시 제 나이대인 18, 19세 정도 되는 애들이었는데, 저도 언젠가는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풋볼 장학금을 받고 지역 전문대에서 풋볼을 하기로 했기에 조금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1년 동안 풋볼을 했죠.
그러다 무릎을 다쳤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저를 1년 더 재계약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군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리고 저는 공수 보병으로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훈련]
엘든 버지웰: 포트 루이스에서 기초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지아주 포트 고든에서 고급 보병 훈련을 받았고, 그다음에는 점프 스쿨에 갔습니다.
조 갤러웨이: 포트 베닝에 있는 점프 스쿨 말씀입니까?
엘든 버지웰: 예, 포트 베닝에 갔었죠.
거기서 마지막 날에 자대에 배치됐습니다.
101공수사단과 173여단으로 절반씩 나뉘었습니다.
저는 친구 몇 명과 함께 101공수사단에 배치됐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버스에 타기 전에 일등 상사가 저를 부르더니 "버지웰, 너는 특수부대 훈련을 받으러 가게 될 거다."라고 했습니다.
주특기 훈련 중 시험을 치렀지만, 아무 소식도 못 들었기에 떨어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트 베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따로 끌어내더니 제 친구들만 자대에 배치시켰습니다.
불행히도 그중 두 명은 월남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렇게 67년 7월에 그린베레 훈련을 받으러 포트 브래그로 갔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린베레 훈련을 마치고 뭘 하셨죠? MOS가 어떻게 됐습니까?
엘든 버지웰: 처음에는 모스 부호, 05B 통신병이었습니다.
그때도 구형 AN/GRC-109로 모스 부호를 가르쳤는데 핸드 크랭크 방식이었습니다.
사용하기 끔찍하죠.
그리고 포트 브래그의 훈련단에서 제7 특전단에 배치됐습니다.
7특전단에서 4개월 정도 있었고, 사실상 월남 대체 그룹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배치됐다가 떠났다가 했습니다.
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펜타곤에 있는 알렉산더 부인에게 연락해 "제발 저를 월남으로 보내주세요.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여기 있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죠.
부인은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68년 8월쯤에 훈련단을 나온 지 6개월 만에 월남에 보내졌습니다.
[월남 배치]
엘든 버지웰: 워싱턴 주로 휴가를 갔습니다.
물론 워싱턴 주 포트 루이스에 경유지가 있었죠.
그래서 제가 제 발로 갔거나 부모님이 데려다주셨거나 했을 겁니다.
그리고 군 계약 항공편을 타고 캄란만으로 갔습니다.
캄란만에서 제5특전단이 트럭에 모든 그린베레 대원들을 태워서 나트랑으로 데려갔고, 우리는 5특전단에 배치됐습니다.
조 갤러웨이: 5특전단 어디에 배치되셨죠?
엘든 버지웰: 특수작전단, 북부 지휘 통제 사령부에 배치됐습니다.
조 갤러웨이: SOG군요.
엘든 버지웰: 예, 즉시 SOG에 배치됐습니다.
조 갤러웨이: 즉시 말이죠?
엘든 버지웰: 네, 당시에는 배치를 거부할 수 있는 정책이 있었지만, 정찰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더 일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겠다고 했습니다.
조 갤러웨이: 정말 빠르게 진행됐네요.
엘든 버지웰: 네, 그리고 우리는 정찰 기술과 다른 것들을 복습하는 전투 작전 과정을 위해 혼쩨 섬에서 10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후 다낭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다낭 공항에서 픽업된 기억이 납니다.
8월 23일 참사가 일어난 지 3주 정도 지난 9월이었죠.
그리고 구멍이 잔뜩 난 검은색 스쿨버스가 우리를 픽업했습니다.
창문, 문, 지붕에 구멍이 뚫려 있었죠.
그때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한 거지?' 같은 거 말이군요.
엘든 버지웰: 네, 우리는 기지로 가서 인사 절차를 밟았고, 저는 더 북쪽에 있는 다른 FOB로 보내졌습니다.
총알구멍이 잔뜩 난 검은 버스를 탄 것이 제 월남 입문이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때 계급이 병장이었습니까?
엘든 버지웰: 아뇨, SP4였습니다.
조 갤러웨이: 스페셜리스트 4 말이군요.
엘든 버지웰: 네, 그리고 저는 푸바이에 있는 FOB 1에 보내졌습니다.
일주일 정도 FOB 1에 머물렀죠.
그러고 나서 캄로와 LZ 반더그리프트에서 꽤 가까운 마이록의 발진기지에 배치됐습니다.
조 갤러웨이: 네, 케산 남쪽에 있는 곳 말이죠.
엘든 버지웰: 캄로 남쪽입니다.
캄로와 케산 사이의 V자 지점이죠.
저는 당시에 스파이크 팀이라고 불리던 정찰팀에 배치되었는데, ST 미시간의 세 번째 미군 팀원이 되었습니다.
[전시 복무]
엘든 버지웰: 71년경까지 모든 임무는 라오스나 월맹 쪽 DMZ 강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 첫 임무는 정찰 임무였습니다.
의무병 출신인 윌러비라는 대원이 당시 팀장이었습니다.
우리는 투입되어서 3일 동안 현장에 있었습니다.
적들과 접촉해서 조금 교전을 벌이다가 철수를 요청하고 나왔는데, 이는 계속 현장에 남아서 돌아다니다가 적들에게 붙잡히거나 완전히 전멸당하지 않기 위한 표준 절차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대원들이 팀장 경력이 얼마 없던 윌러비에게 찾아와서 체이스 기체에 의무병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린베레 의무병이 부족했기 때문에 윌러비는 팀에서 나와 체이스 메딕이 되어야 했습니다.
의무병은 가장 어려운 주특기 중 하나죠.
그린베레에서 가장 높은 이탈률을 보이는 주특기일 겁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어야만 통과할 수 있죠.
그리고 팀에 다른 미군 대원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사실상 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다른 미군 대원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이록에서 두 개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하나는 폭격 피해 평가였는데, 이는 B-52가 어느 지역을 폭격하면 폭격이 시작된 지점으로 바로 팀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폭격이 가해진 지역을 걸으며 포로 등을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임무였습니다.
이 임무에선 우리는 불타는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시간 정도 후에 철수했습니다.
이후에는 DMZ를 지나는 벤하이 강 북쪽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곳에서 월맹군 소대나 분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몇 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8명이나 10명 정도였을 겁니다.
그때 팀의 몽타냐드 통역사가 얼굴에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우리는 목표에서 빠져나와 마이록으로 돌아갔습니다.
라오스에서도 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엘디스트 선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소총이나 박격포 격발 시 내부에서 폭발하도록 설계된 탄약을 LZ로 운반하는 임무였죠.
그래서 우리는 LZ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큰 소음을 내고, 숲을 비롯해서 보이는 것들에다 전부 총을 쏴댄 후 모든 것들을 LZ에 남겨두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전부 LZ에 남겨두셨단 말이죠?
엘든 버지웰: 제가 염두에 뒀던 것은, 숲속에 있는 월맹군이 어딘가에서 이 총격전을 듣고 올 거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AK-47을 가진 팀원도 두 명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AK-47을 쏠 수 있었죠.
월맹군들은 그 총성을 들을 수 있었고 M16 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월맹군이 LZ를 조사하러 오면 현장에 남겨진 것들을 사용하기 위해 모든 물건들을 주워서 가져갈 것이라는 이론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69년쯤에 월맹군이 출처 불명의 탄약을 발견하면 거의 사용하기를 두려워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 갤러웨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나 보네요.
엘든 버지웰: 네, 하지만 월맹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라오스에는 월맹군이 가솔린이나 디젤 드럼통을 떠내려 보내는 어느 강이 있었는데, 드럼통이 강가에 부딪히면 긴 막대기를 든 강 감시병들이 다시 떠내려가도록 밀어 넣곤 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 강에 들어가서 드럼통 중 하나를 잡고 헤엄쳐 나와 강변으로 끌어올린 뒤, 상부에서 만든 퓨즈를 끼우는 것이었습니다.
드럼통 윗부분의 캡을 풀고 퓨즈를 끼운 다음 진짜 뚜껑을 다시 끼우는 식이었죠.
조 갤러웨이: 그리고 강으로 다시 돌려보내고요?
엘든 버지웰: 네, 다시 물속으로 넣어요.
우리는 3~4개의 드럼통에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이론상 통이 떠내려갈 테니까요.
어디에서 꺼내든, 결국 보관소로 옮겨질 것입니다.
조 갤러웨이: 유류고 말이죠?
엘든 버지웰: 퓨즈의 타이머는 48~72시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이론은 다시 말해서, 그 시간 안에 그 보관소에 도착할 거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날려버릴 거였죠.
조 갤러웨이: 네, 성공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엘든 버지웰: 성공 여부에 대한 보고를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일을 한 다른 팀이 있었죠.
그리고 공군에서 그 팀의 퓨즈가 폭발했다고 확인한 것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폭발했을 당시 드럼통은 트럭에 실려 남쪽으로 운반되고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어쨌든 다른 팀에서 그런 종류의 임무를 수행하는 얘기를 들은 건 그때뿐이었습니다.
엘디스트 선 프로그램은 70년, 71년쯤까지 꽤 오랫동안 운영됐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었는지 모르겠지만, 라오스로 엘디스트 선 임무를 수행하러 간 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H-34 킹비 헬기가 격추되어 미군 대원 6명과 월남 승무원 3명이 모두 사망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2002년쯤에 시신을 수습하여 모두 알링턴에 안치됐습니다.
끔찍한 날이었죠.
마이록에서 임무를 마치고 나니 아마 11월 말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상부는 마이록을 폐쇄한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마이록은 발진 기지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푸바이 FOB 1으로 돌아가서 푸바이에서 발진됐고, 꽝찌에 또 다른 발진기지를 만들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 권한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렇게 저는 푸바이로 갔습니다.
푸바이에서도 정찰 임무를 하나 수행했습니다.
당시 5~6일간 현장에 머물렀습니다.
거의 아무도 보지 못했죠.
그리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마이록에서 푸바이에 도착한 이후로 거의 짐을 풀지 않았는데, 상부는 이제 모든 팀이 다낭의 FOB 4로 이전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짐을 챙겨 다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1969년 1월부터 9월까지, 제가 월남을 떠날 때까지 다낭에 머물렀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동안 전부 SOG이야기입니까?
엘든 버지웰: 정확히는 정찰이죠.
조 갤러웨이: 정찰이군요.
엘든 버지웰: 첫해 내내 RT 미시간에 있었죠.
조 갤러웨이: 1차 파병이군요. 2차 파병도 하셨습니까?
엘든 버지웰: 2차 파병은 정찰 중대에서 했습니다.
[제대]
엘든 버지웰: 69년 9월에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름에 군에 입대하기 전에 했던 제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워싱턴 주에서 말입니까?
엘든 버지웰: 네, 호퀴엄에서요.
저는 병장이었지만 제대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갔습니다.
대학에서 풋볼을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취직도 했죠.
약 3개월 후, 저는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포트 루이스의 본부에 있는 사람들이 부모님 댁에 전화해서, 누가 죽었다고, 누가 실종되었다고 내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군에 재입대했습니다.
그리고 포트 브래그, 7특전단으로 곧장 보내졌습니다.
조 갤러웨이: 계급은 다시 돌아갔나요?
엘든 버지웰: 네, 제가 6개월 이상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병장 계급을 다시 받았습니다.
그리고 7특전단에서 6개월 더 근무했습니다.
그동안 레인저 스쿨을 나왔습니다.
레인저 스쿨 이수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월남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죠.
조 갤러웨이: 알렉산더 부인에게 월남으로 배치해달라고 전화했단 말이죠?
[2차 파병]
엘든 버지웰: 저는 월남으로 돌아갔습니다.
월남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청을 통해 다낭의 정찰 중대로 바로 돌아갔습니다.
조 갤러웨이: 다시 SOG로 말이죠?
엘든 버지웰: 네, 그리고 처음에는 RT 부시마스터의 부팀장이 되었습니다.
제 절친한 친구인 데이비드 로빈슨이 그곳에서 격리 담당 부사관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팀원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다시 팀을 만들겠다고 말했습니다.
제 옛 팀인 RT 미시간에 있던 몽타냐드들은 해칫포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팀원들을 영입하지 못했죠.
그는 중사였고 저는 하사였습니다.
그는 "그래, 하지만 모든 임무를 네가 다 맡았잖아. 네가 팀장이 되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계급 차이가 났지만, 팀장이 병장이고 그 대원이 중위인 팀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큰 문제는 아니었겠네요.
엘든 버지웰: 하지만 당시 중대장은 일종의 관습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중대장은 중사가 더 선임이니 그가 팀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언젠가 다른 팀에 배치되어 팀장이나 다른 직책을 맡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총격전을 벌이고 여기저기 쫓기다가 철수했고, 그는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더는 못 하겠다고 말이죠.
조 갤러웨이: 그렇군요.
엘든 버지웰: 그렇게 저는 첫 임무를 마친 뒤 72년 9월에 SOG가 끝날 때까지 다시 팀장이 됐습니다.
그동안 8~9개의 임무를 수행한 것 같습니다.
8번째 임무에서 심한 총상을 입었죠.
그래서 저는 6주 동안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회복할 때까지 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몇 개의 임무를 더 수행했습니다.
그러다 71년 12월경, 11월 말쯤에 MACV와 MACV-SOG 본부는 임무 수행을 중단했습니다.
더 이상의 임무는 없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더 이상 없었다고요?
엘든 버지웰: 그렇게 마지막 임무가 하나 진행됐습니다.
12월 초, 11월 말쯤에 수행됐죠.
이때 몬태나 출신의 슬리프카라는 정말 훌륭한 중위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강에서 익사했습니다.
헬기에 기계적 고장이 발생했고 파일럿은 강에 헬기를 불시착시켰습니다.
그리고 헬기가 가라앉았죠.
몽타냐드 한 명이 떨어졌고, 이들은 수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산에서 자랐기에, 개울에 들어가곤 했지만 수영은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중위는 60파운드짜리 웹기어를 착용한 채 뛰어들었는데, 레인저 스쿨을 수료한 그가 그런 장비를 벗지 않았기 때문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강을 헤엄쳐 그 몽타냐드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가 강 아래로 300~400m 내려가자, 탄약과 무기가 그를 물속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 밖으로 튀어나온 테일붐으로 몽타냐드를 밀어 올렸습니다.
몽타냐드는 테일붐을 잡고 매달렸지만, 중위는 강 아래로 떠내려갔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리고 익사한 건가요.
엘든 버지웰: 네, 다음 날에 브라이트 라이트 구조팀이 보내졌고 얕은 곳에 떠 있는 그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CCN에서 정찰 임무 중 사망한 대원은 슬리프카 중위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훌륭한 중위가 많지 않았지만, 그는 정말 훌륭한 중위였습니다.
[전우들]
엘든 버지웰: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죠.
LA 동부 출신과 기숙 학교를 다닌 북동부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조 갤러웨이: 모든 사람들 말이죠?
엘든 버지웰: 예, 모두가 섞였고, 대체로 꽤 훌륭했습니다.
거기에는 게으른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해고당했거나,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뒀거든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모임에서 모두 모이게 됐습니다.
물론, 저는 월남 때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보다 월남전 이후에 군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은지만, 제 뿌리는 월남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계속 그들과 함께할 겁니다.
그들은 정말 현실적이고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중에는 미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요.
그들은 술을 많이 마시고, 그런 부류의 일을 많이 하곤 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정말 훌륭한 미국인이고 훌륭한 애국자이며 조국을 위해 한 일을 정말 즐겼습니다.
[전쟁 경험]
엘든 버지웰: 일반적으로, 당시 중대장, 정찰 중대장들은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작전 장교와 같은 참모 장교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그렇게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병장, 하사처럼 생각하던 시절로 돌아가서 장군이 대령을 바라보는 식으로 사람들을 생각하는 방식과 대조하곤 합니다.
우린 중령과 대령급 지휘관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현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약간의--
조 갤러웨이: 까라면 까라는 인간들 말이죠.
엘든 버지웰: 그들은 우리를 투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가야만 했습니다.
라오스의 일부 지역은 누구도 들어가서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저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이공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그 지역 중 하나가 오스카-8이라는 지역이었습니다.
한 번은 오스카-8에 들어가서 3일 동안 목숨을 걸고 뛰어다녔는데, 그 지역에는 월맹군이 너무 많았습니다.
오스카-8은 월맹군이 트레일을 유지하는 제593 지원단의 주요 본부였습니다.
그리고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는 수천 명의 월맹군이 있었습니다.
2~3시간 동안 공습을 요청한 다음에는 죽기 살기로 달리기 시작했죠.
하지만 어쨌든 저는 지도부에 대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클라이드 신시어 소령이나 쉘튼 소령처럼 소령급에서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령 이상에서는...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제가 대대장과 델타 사령관 등 진급을 할수록 그리고 이 사람들에 대한 것들을 떠올려봅니다.
종종 위대한 세대(1901~1927)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당시 중령급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세대 출신이었죠.
그래서 저는 항상, 이 사람들이 군인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어서 군에 남았는지, 좋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간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복무할 당시 CCN 사령관들은 모두 2차대전이나 한국전쟁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 모든 힘든 일들을 견뎌냈겠죠.
그들이 40년대와 50년대에 중위, 대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병장이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만의 작은 세상을 보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나 자신에 대해 궁금해할 뿐이었죠.
아마 공정한 평가는 아닐 겁니다.
제가 정말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나머지는 그냥 거기에 있던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제가 처음 배치됐을 때 어느 대원이 있었는데, 부대원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일의 절반은 출근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죠.
그는 우리를 아꼈습니다.
정찰 클럽에 와서 맥주를 사주고 우리 임무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술에 취해 있었죠.
뭐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이게 월남이었죠.
[최악의 날]
*답변 중 주제가 바뀌어 사실은 최고의 날에 관한 얘기이다
엘든 버지웰: 제가 생각하기에 최악의 날은 69년 4월 정찰 임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69년 4월일 겁니다. 아, 71년 9월로 정정하겠습니다.
69년 4월에는 정찰팀을 이끌고 능선에 있는 연대 벙커 단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AST가 벙커 라인이 있다고 말한 그 지역에서 약 1,000~1,500m 떨어진 곳에 착륙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벙커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얼마나 큰지, 그리고 기타 모든 것들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 1.5km 떨어진 곳에 착륙했습니다.
지상에서 8피트 정도 되는 곳에서 뛰어내렸고, 몽타냐드 중 한 명이 뛰어내리다가 팔이 부러졌습니다.
우리 모두 내리자, 헬기는 이륙했습니다.
그때 몽타냐드가 제게 다가오더니 팔을 내밀었죠.
그리고는 "중씨(중사), 나 팔이 부러졌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젠장이라고 했죠.
그래서 저는 무전으로 헬기 한 대를 불러서 그를 후송하러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헬기가 돌아오는 데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월맹군이 가까이서 박격포를 쏘았습니다.
정글에서 400~500m 떨어진 곳에 착탄했죠.
이에 대해 딱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평소처럼 월맹군이 우리가 오는 것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월맹군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월맹군들은 헬리콥터 소리를 들었겠죠.
일단 헬기가 와서 팔을 다친 대원을 후송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약 1km 떨어진 능선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벙커 단지에 들어섰죠.
처음 몇 개의 벙커는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벙커 단지 안쪽으로 향하는 트레일을 올랐습니다.
트레일 위를 올라가보니 6명의 월맹군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 젠장, 여기서 포로를 잡아야겠다"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내려가서 몽타냐드 한 명을 옆에 두고 트레일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머리가 땅의 가시선 위로 튀어나오자, 일반적인 간이테이블 같았던 테이블에서 월맹군 한 명이 저를 보고 뛰어오르더니 벙커로 달려가며 다른 한 명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를 부상 입히기를 바라며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총을 쏘기 시작하자, 월맹군들은 죽었습니다.
몇 명을 죽이자, 몇 명이 벙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트레일 위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무기가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월맹군들은 무방비 상태였었고 다시 생각해 보니 박격포를 쏜 건 이들인 것 같았습니다.
헬기가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철수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저 노름질이나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벙커 단지를 관리하는 지원병이었을 겁니다.
다행히도 벙커 단지에 연대나 중대가 없었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벙커를 살펴봤습니다.
한 벙커에 들어가서 튜브형 지도 케이스를 발견했죠.
그 뚜껑을 열고 살짝 꺼내봤습니다.
지도에 선과 작은 X표 같은 게 보였습니다.
이게 무언가의 위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다시 넣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지도 케이스를 챙겼습니다.
벙커에서 나오니 벙커 가장자리에 AK-47 조끼가 기대어져 있었습니다.
기념품으로 챙겨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AK 조끼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납니다.
강철 탄창이 세 개 들어 있었고 주머니 두 개에 미제 수류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벙커의 모퉁이를 돌았는데, 월맹군 한 명이 나타나 제 가슴에 총을 쐈습니다.
총탄은 탄창에 맞고 방향이 틀어졌습니다.
그 총탄은 수류탄 가장자리를 관통하여 구멍을 냈죠.
터지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총탄이 탄창을 뚫고 스프링을 제 가슴 쪽으로 밀었습니다.
저는 가슴에 큰 멍이 든 채 쓰러졌죠.
총에 맞아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제 주의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이 일을 회상하며, 탄창이 든 AK-47 조끼를 주워 목에 걸고 5피트 정도 더 이동한 사이에 그 월맹군이 저를 쏜 것이 제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조끼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조 갤러웨이: 죽었을 수도 있었겠죠.
엘든 버지웰: 네, 저는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과 더불어 우리가 찾은 지도의 중요성도 컸습니다.
우리가 찾은 것은 호치민 트레일의 모든 병참 지원기지를 보여주는 지도였습니다.
조 갤러웨이: 와.
엘든 버지웰: 그렇게 하루나 이틀 뒤에 B-52가 그 모든 지점에 폭격을 가했습니다.
저희가 찾은 지도에는 좌표가 없었지만, 본부의 측량 전문가나 지도 마법사들이 트레일 위치에 선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약 100마일의 트레일이었지만,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그 정보를 저희가 가지고 왔죠.
모든 정보는 군단급 사령부였던 24군단의 스틸웰 장군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장군은 대화를 나누게 저와 두 팀원들을 보내달라고 기지에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군을 만나러 갔습니다.
FOB에서 온 우리들은 모두 지저분하고 더러운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장군은 정말 친절했습니다.
장군은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이번 일은 우리가 몇 년 동안 적지에서 얻은 정보 중 가장 큰 정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매우 고마워했고 정말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제 최악의 날은 제가 총에 맞고 여러 가지 일을 겪었던 수훈십자장을 받았을 때의 일이고, 이 임무는 중대한 정보를 찾았기 때문에 제게 최고의 임무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포로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월맹군들은 벙커 구멍으로 내려가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 월맹군들을 잡기 위해 구멍으로 몽타냐드를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 가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게 당시 사건의 전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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