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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 델타 베테랑 엘든 버지웰 인터뷰 (1/3)원본 영상2018년 10월 18일 인터뷰00:00:15:~00:28:07까지엘든 버지웰: 저는 1947년 8월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태어났습니다.조 갤러웨이: 47년 말이죠.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되셨나요?엘든 버지웰:gall.dcinside.com00:28:07~00:48:51 구간
[수훈십자장]
엘든 버지웰: 71년 무렵, 월맹군은 월남 북부 라오스 국경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라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죠.
월남 국경 안쪽 30마일 구간에는 모두 월맹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을 배회하는 월맹군이 너무 많아 우리는 팀을 여러 곳에서 잃었고, 큰 화력을 지닌 두 팀을 함께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RT 캔자스와 함께 투입됐습니다.
저는 RT 부시마스터의 팀장이었고 RT 캔자스 팀장은 조지 코트렐이었습니다.
그가 지휘를 맡게 됐죠.
그리고 우리는 적들을 더 잘 견제하기 위해 기관총을 들고 다녀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M60 기관총은 항상 문제가 있어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총열을 자른 러시아제 RPD 기관총을 가져갔습니다.
총에 장전된 1개를 포함하여 10개의 드럼 탄창을 들고 다녔습니다.
모두 오래된 1쿼트 수통 파우치에 넣어서 가지고 다녔죠.
그리고 우리는 투입됐습니다.
LZ에 도착해서 50m 정도 걸어갔더니 후방사수가 월맹군 두 명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는 월맹군들이 하는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팀을 미행하고 추적했죠.
그래서 우리는 움직였고,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1.5km 밖에 못 갔는데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우리는 RON 경계를 설정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월맹군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들렸죠.
아침이 되면 큰일 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준비를 했습니다.
아침에 창백한 빛이 처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월맹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경계선 바로 한가운데로 RPG가 날아왔습니다.
RPG는 모든 나무를 관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나무와 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정말 두꺼웠지만, RPG는 나무를 관통했고 파편이 사방에 튀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파편에 맞아 첫 부상을 입었죠.
그리고 월맹군이 공격해 왔습니다.
제 기관총 사선으로 바로 들이닥쳤죠.
그래서 저는 기관총을 갈겨 탄창 5개 정도를 쐈고, 어느 월맹군도 경계선까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딱 두 명이 제가 있던 곳에서 약 5야드 이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공격했을 때 몽타냐드 한 명이 죽었고, 다른 한 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월맹군들은 일단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몽타냐드가 월맹군이 서로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월맹군 중 한 명이 중대장에게 올라오라고 소리치고 있었죠.
따라서 그 월맹군들은 아마도 중대 규모였을 겁니다.
월맹군 중대는 약 50, 60명을 넘진 않았지만요.
어쨌든 미군 중대 수준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조지에게 말했습니다. "조지, 우리는 더 이상 못 버텨." 라고요.
우리는 탄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움직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계곡 아래에 있는 LZ를 향해 후방으로 이동했고, 상공을 비행하는 코비가 A-1E 스카이레이더를 불렀습니다.
코비에서 재미있는 점은, 코비 비행기가 아니라 거기에 탑승한 FAC 라이더였습니다.
FAC 라이더는 저를 보호하기로 되어 있었죠.
이 임무에선 존 플라스터라는 남쪽의 다른 대원이 FAC 라이더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프레리 파이어라고 암호를 대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상에 있는 팀이 상공을 선회하는 지휘기에 프레리 파이어를 말하면 팀이 큰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이었죠.
조 갤러웨이: 죽는다는 거군요.
엘든 버지웰: 예, 저는 프레리 파이어를 요청했습니다.
조지는 LZ에 경계선을 구축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월맹군은 다시 우리 경계선을 향해 공격했습니다.
약 100m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죠.
저는 큰 대나무 줄기 뒤에 누워 있었는데, 큰 대나무는 정말 바위처럼 딱딱했습니다.
그리고 총탄이 대나무를 관통했고, 이에 따라 탄속이 엄청나게 느려졌습니다.
이어서 총탄이 파편화되더니 제 왼쪽 뺨에 날아가 박혔습니다.
정확히는 관통했습니다.
파편은 비강 동맥을 끊고 제 눈 아래에 박혔습니다.
조 갤러웨이: 세상에, 아주 아팠겠네요.
엘든 버지웰: 네,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몽둥이로 저를 때린 것 같았지만, 곧 회복되었고 괜찮아졌습니다.
겉으로는 피가 많이 나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차례의 공격을 격퇴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헬기를 타고 그곳에서 빠져나왔죠.
제가 FOB로 돌아왔을 때, 저는 쇼크 상태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파편이 제 비강 동맥을 절단했기 때문이죠.
목구멍 안으로 피가 흘렀고 저는 한입 가득 피를 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낭의 제95 후송병원에 실려 갔고, 그곳에서 거의 의식을 잃을 뻔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렀죠.
웃긴 일이죠.
병원에 누워서 어지러움을 느끼고, 토하는 등 온갖 일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젊은 의사가 들어왔고, 제 코를 잘라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코를 절개해서 동맥을 집을 거라고 말이죠.
그때 아마 40살 정도 되는 나이가 많은 의사가 왔습니다.
저는 25, 26살이었고요.
그는 들어와서 '너희들 뭐 하는 거야?'라고 말했죠.
젊은 의사들은 제 코를 자를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나이 많은 의사는 나가서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연필만 한 크기의 튜브 두 개를 제 코에 밀어 넣었습니다.
마치 제 코에 망치를 밀어 넣는 것 같았죠.
그러고는 공기를 주입해서 출혈을 막았습니다.
다량의 수혈을 받고, 정맥 주사를 여러 번 맞고 나서야 저는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임무에서 제가 기관총으로 한 일과 부상당한 몽타냐드를 옮기는 것을 도운 것 때문에 상부는 제가 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훈장을 받았습니다.
조 갤러웨이: 코만 봐도 응당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엘든 버지웰: 그렇죠, 다음 날 제가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을 때 의사가 설명해 줬습니다.
파편 때문에 제 비강 동맥이 끊어졌다고 말이죠.
지금도 치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으면, 그 조각이 보입니다.
앞쪽 끝이 부러진 AK 탄환의 절반 같았습니다.
그 절반 정도가 저에게 박혔죠.
조 갤러웨이: 아직 파편이 남아있습니까?
엘든 버지웰: 네, 광대뼈에 박혀 있죠.
두개골을 관통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계속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수년에 걸쳐 녹아내렸죠.
월남전 후에 치아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꽤 커 보였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 또 한 번 엑스레이를 찍었죠.
훨씬 작아졌더군요.
체내의 산이 파편을 조금씩 녹여왔던 것 같습니다.
[최고의 날]
*최고의 날은 이전에 말했기에 실질적 주제는 희생자 및 사망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엘든 버지웰: 군사 작전으로는 이전에 이야기했던 적 정보를 찾았던 임무가 제가 수행한 최고의 작전, 최고의 임무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적진에 들어가서 돌아다니고, 월맹군과 교전을 벌이고, 다시 나와야 하는 많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런 임무들은 모두 비슷했습니다.
이러한 임무 모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지만, 그 임무가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요.
이와는 별개로 또 다른 나쁜 날이 있었습니다.
기지에서 어느 한 대원이 기지 착륙장에 있는 PSP 패드 LZ에 있던 배낭을... 아 이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착륙장에 정찰팀 2개, 미군 대원 4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격리 담당 부사관이 격리 중이었던 다른 팀을 데려왔죠.
착륙장에는 이미 한 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어느 대원은 다른 팀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기 배낭을 놓았습니다.
그때 한 대원이 픽업트럭을 타고 떠나면서 배낭을 밟았는데 M14 발목지뢰가 터졌고, 이는 크레모아 격발로 이어졌습니다.
이 크레모아는 대기 중이었던 몽타냐드들을 향한 상태였고 그들을 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 갤러웨이: 쓸어버렸다고요?
엘든 버지웰: 그리고 6개월 전에 제 팀을 떠나 해칫포스로 갔던 미군 대원 한 명이 심각한 중상을 입었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정말 엉망진창이 됐고 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우리는 모임회에서 이런 식으로 그저 "왜?"라고 생각하게 되는 무의미한 이유로 죽어간 사람들이나 그런 사건들처럼 작전 이외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생존자의 죄책감 같은 거죠.
우리가 만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은 다낭 해변에서 수영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왜 그 사람이었을까요?
왜 하필 그가 수영을 하다가 해류에 휩쓸려 익사했을까요?
이렇게 나쁜 날도 있었지만, 정말 나쁜 상황에서 팀이 구출된 좋은 날도 있었습니다.
저는 실패로 끝난 몇 번의 브라이트 라이트 임무에 투입됐는데, 결국 그 사람들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으며 나중에 그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월맹군이 그들을 어딘가에 묻어버렸죠.
일부는 발견되었지만, 다른 일부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제 SOG 부대인 CCN, CCC, CCS의 실종자가 여전히 50명 정도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참 많은 일을 겪었겠지만, 중동 지역은 정글보다 시신을 찾기가 훨씬 쉬우니 시신을 남겨두는 짓을 하지 않는 점에서 낫다고 말이죠.
정글에 있을 때는 200m 이동하면 코끼리도 놓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죠, 아직 50명이 실종 상태라고 말입니다.
몽타냐드를 제외하면 SOG의 규모는 특전단 정도 됐습니다.
몽타냐드 대원들까지 포함하면 조금 더 커지죠.
오늘날에 그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5특전단의 전체 실종자가 50명에 이르는 걸 상상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세상에.
엘든 버지웰: 정부는 미쳐 날뛸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월남전 때와 똑같이--
조 갤러웨이: 네, 그렇겠죠.
엘든 버지웰: 사람들이 백악관 앞에 서 있을 겁니다.
가족들과 다른 모든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할 겁니다.
월남전 실종자는 여전히 1,200~1,300명 가량 됩니다.
하지만 우리 부대만 해도 아직 50명이 실종 상태죠.
조 갤러웨이: 50명이나 말이죠.
엘든 버지웰: 그렇죠, 그리고 우리는 실종 대원 중 일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실종된 방식을 감안하면 아마 절대 못 찾을 것 같습니다.
그냥-- 그게 현실이죠.
[동맹군과의 접촉]
엘든 버지웰: 사실상 없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엘든 버지웰: 제가 레콘도 스쿨에 있었을 때 거기 한국군 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어를 못했죠.
우리도 한국어를 못했습니다.
사실상 SOG에 월남인, 월남 특수부대, LLDB 군사고문, 그리고 몇몇 월남인 팀이 있었지만, 저는 그들과도 함께 일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월남에서 내내 몽타냐드와 함께 임무를 수행했죠.
[월남인]
엘든 버지웰: 사실상 군인들은 만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월남인 팀원이 없었으니까요.
월남인 팀은 기지 주변에서 보았죠.
월남 여성들과 자주 만나기는 했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 갤러웨이: 그렇군요.
엘든 버지웰: 저는 두 번의 파병에서 몽타냐드하고만 일했는데, 그들은 훌륭한 군인이자 전사였습니다.
사실, 3년 전 월남에 가봤을 때, 케산 마을에서 제 팀의 몽타냐드 팀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세상에.
엘든 버지웰: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62세였죠.
조 갤러웨이: 몽타냐드 기준으로 오래 살았군요.
엘든 버지웰: 네. 제의 현지 대원 팀장이었을 때 16살 정도였던 거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케산 마을의 가톨릭 신부가 국경에 가까운 9번 도로에 있는 그의 몽타냐드 마을로 가서 그와 그의 가족을 교회로 데려왔죠.
저와 제 부팀장은 항상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지난 10년, 20년 동안 그를 볼 수 있었던 건 제게 최고의 날 중 하나였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엘든 버지웰: 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꽤 건강해 보였죠.
하지만 그의 아내가 항상 아팠다고 하더군요.
병원에 가려면 150달러 상당을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내과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의 가족으로서는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였죠.
저는 제 부팀장과 함께 그에게 1,000달러 정도를 줬습니다.
그가 5년 동안 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고, 돈은 그냥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0대-- 12살인가 20살 정도 되는 아이들 2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우리와 이야기하고 아이폰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들은 20대 몽타냐드였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미 서구화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적었습니다.
저는 그의 딸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했는데 연결이 안 됐습니다.
결국 실패했죠.
하지만 그들은 모두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도 케산에서 미국 영화를 본 적이 있었죠.
마을에서 내려와 영화를 보러 가곤 했죠.
그리고 이 여행 중 월남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잘 대해주었습니다.
매우 친절했죠.
그러고는 왜 더 많은 미국인들이 이곳에 오지 않느냐고 제게 계속 물었습니다.
저는 이 나라도 아름다운 해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고급 호텔들도 있죠.
하지만 너무 멀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미국인들은 8시간이면 멕시코나 카리브해, 유럽에 가서 아름다운 해변을 즐길 수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는 20시간이 걸립니다.
너무 비쌌죠.
하지만 거기도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조 갤러웨이: 정말 아름답죠.
엘든 버지웰: 그리고 저는 다낭만 옆에 옛날에 정찰 중대가 있던 곳으로 갔는데, 지금은 일본 고급 리조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죠.
모두 일본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단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라는 듯이 우릴 쳐다보았죠.
하지만 우리는 정찰 중대가 있던 해변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쪽에 리조트가 다 지어졌지만, 어쨌든--
[고향 소식]
조 갤러웨이: 편지만 보내셨다고요?
엘든 버지웰: 그마저도 별로 없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받았죠.
한 번은 MARS(군 계약 무선 시스템) 기지국에서 무선 연락을 시도해 봤죠.
하지만 안 됐습니다.
완전히 망해서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편지를 썼죠.
69년 4월에 하와이로 휴가를 갔을 때 거기에 가서야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날은 전혀 다르죠.
제 아들이 이라크에 있는데 매일 인터넷과 문자로 연락을 합니다.
제가 이라크에 케이시 장군의 참모부장으로 있었을 때는 위성 전화를 사용했습니다.
그거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이웃집에서 온 전화를 받은 것처럼 아내는 전화를 받았죠.
이런 식으로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네, 지금은 항상 컴퓨터로 대화를 주고받죠.
엘든 버지웰: 제 아들은 파병 갈 때마다 항상 자식들하고 페이스타임으로 연락을 합니다.
물론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같은 건 말하면 안 되지만 그런 주제에서 벗어나 대화하면 상관없죠.
이런게 군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 갤러웨이: 네, 그들도 뭔가가 있어야 하니까요.
8회, 10회, 12회씩 전투 파병을 가잖습니까.
엘든 버지웰: 네, 제 아들은 9번인가 10번이나 파병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두 번은 군단 LRRP 부대에 있을 때 1년씩이었습니다.
그리고 델타에 갔을 때는 6개월 동안 배치됐다가 돌아와서 4개월 동안 머무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고되죠.
6개월 나갔다가 4개월 돌아와서 정착하고, 결혼 생활에 익숙해지는 등의 가정 문제를 마주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갈 준비를 합니다.
지치기 딱 좋죠.
조 갤러웨이: 힘들죠.
엘든 버지웰: 저는 그곳 사령관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월남 시절 1년 파병이 아마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냥 1년 동안 거기에 있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동안 가족들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편지를 쓰거나 뭐 그런 식으로 그냥 잊어버리고, 그냥 1년 동안 제 일만 하다가 돌아갔죠.
지금은 계속 들락날락 하고요.
그래서 이게 좋은 방법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6개월이었습니다.
지금은 4개월이죠.
뭔가 이점이 있기야 하겠지만, 저는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1년 내내 가족과 떨어져 있는 건 아니라는 점 때문일 수도 있죠.
물론 아시다시피 월남전 때는 적어도 포트 브래그에서는 모든 가족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페이엣빌 사람과 결혼한 게 아닌 이상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 그냥 집으로 돌아갔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요.
조 갤러웨이: 고향으로 돌아갔죠.
엘든 버지웰: 네, 지금은 모두 집이나 숙소에 머물죠.
조 갤러웨이: 할 무어가 대대장으로 배치되었을 때는 그의 아내에게 30일 안에 근무지를 비우라는 지시가 내려졌죠.
엘든 버지웰: 네, 대부분은 남편 없이 근무지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말했듯이 그냥 고향으로 돌아갔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페이엣빌에 있는 집에 살고 있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이사한 건 아닐 겁니다.
어쨌든 좋다면 좋은 일이죠.
조 갤러웨이: 좋죠.
엘든 버지웰: 네.
조 갤러웨이: 파병 당시 월남전에 대한 뉴스는 얼마나 접하셨습니까?
엘든 버지웰: 스타 앤 스트라이프지, 그게 전부였었습니다.
조 갤러웨이: 역시 그렇죠.
엘든 버지웰: 대부분 주요 보병 작전과 정치에 관한 내용이었죠.
솔직히 말해서, 20대 중반인 그 시기에 우리는 그런 뉴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조 갤러웨이: 고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 없으셨나요?
엘든 버지웰: 우리는 폭동과 그런 것들에 대해 읽었지만, 애초에 SOG에도 흑인이 몇 명 있었습니다.
정찰 중대에 한두 명 있었고, 지원 쪽에도 몇 명 있었지만,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죠.
그리고 물론 반전 시위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산주의자 집단들이라고 했지만요.
조 갤러웨이: 물론이죠.
엘든 버지웰: 우리는 그런 뉴스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지적 관심사를 훨씬 넘어서는 주제였으니까요.
[두 번째 복귀]
조 갤러웨이: 두 번째 파병이 마지막 월남 파병이었습니까?
엘든 버지웰: 맞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리고 당시 계급은 어떻게 되셨죠?
엘든 버지웰: 하사였습니다.
조 갤러웨이: 하사요?
엘든 버지웰: 네.
조 갤러웨이: 나중에 어떻게 임관하셨습니까?
엘든 버지웰: 2차 파병 때 중대장과 CCN 사령관이 제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하며, 학사장교 임관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부 장교들도 자기네들 못지않게 훌륭하다고 했죠.
저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OCS(학사장교)에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사회를 상대해야 할 거라고 하더군요.
모든 서류 작업들을 다 해야 했죠.
월남을 떠날 때까지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매사추세츠주 포트 데벤스에 있는 제10 특전단에 배치되었고 모든 서류 작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저는 팀 서전트였던 빌리 보그스 원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시험을 통과하고 OCS에 배치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2년제 대학 학점과 동등한 학점만 있으면 됐습니다.
OCS는 1년 정도 있으면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6개월 보병 OCS로 들어갔습니다.
6개월 보병 OCS가 마지막이었나 뒤에서 두 번째였나 했을 겁니다.
그리고 73년 4월에 수료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곳에 배치될 수 있을 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었죠.
입대 후 6년 반 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기에 많이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 주에 있는 포트 루이스의 제9 보병사단에 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반 보병 소대장이 되겠다고 했죠.
그렇게 훈련을 받았고 그거로 뽑혔으니 문제없었습니다.
거기다 저는 그린베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소위로 그린베레에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친구들이 포트 브래그의 상황이 정말 나쁘다고 했죠.
그리고 활동도 없었습니다.
대원들은 곤경에 처했죠.
70년대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트 루이스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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