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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 델타 베테랑 엘든 버지웰 인터뷰 (2/3)전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42649 SOG, 델타 베테랑 엘든 버지웰 인터뷰 (1/3)gall.dcinside.com00:48:51부터 끝까지
저는 포트 루이스로 갔습니다.
포트 루이스에서의 첫날에 PX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는데, 한 대위가 제게 다가왔고, 저는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시 월남에서 중사였던 제 옛 팀 동료인 조 콘론이었습니다.
그도 학사장교를 갔죠.
그는 예전에 제75 보병 LRRP B중대였던 포트 루이스 7군단 LRRP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포트 카슨에 있었는데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포트 카슨에서 쫓겨나 포트 루이스로 옮겨졌습니다.
그들이 막 포트 루이스에 도착한 시기에 제가 배치됐죠.
그리고 콘론은 제게 뭘 하고 있냐고 물었죠.
저는 9보병사단에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안 된다며 LRRP에 오라고 말했습니다.
조 갤러웨이: LRRP에요?
엘든 버지웰: 그래서 저는 LRRP에 가서 2년 동안 LRRP 소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레인저 대대로 가서 3년 동안 근무했죠.
그렇게 저는 보병으로서 진급했습니다.
그리고 포트 루이스의 부사령관인 코타이 준장의 부관으로 들어가 9개월 동안 제2 레인저 대대를 떠났습니다.
이후 레인저로 돌아가, 현재 은퇴한 3성 장군인 짐 두빅의 부지휘관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레인저 중대장이 되려고 했으나, 이전에 중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레인저 중대는 중대장 경력 중 두 번째 중대가 될 수 밖에 없었죠.
그래서 저는 9사단에서 중대를 얻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중대장이 됐습니다.
그리고 아마 제가 거친 이들 중 최고의 대대장이자 리더였던 글렌 마쉬 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정석적인 보병 부대였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훈련을 위해 숲속으로 5마일을 걸어야 했지만, 좋은 중대였죠.
중대원들은 야전에서 훌륭했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온 금수 같은 녀석들이 입대하며 포트 루이스나 포트 오드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막사에서도 바쁘게 지내야 할 만큼 문제가 많았죠.
하지만 야전에서는 훌륭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야전에서 꽤 잘 지낼 수 있도록 훈련시켰죠.
하지만 이 이후, 저는 포트 루이스를 떠났습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포트 루이스에서 지냈죠.
그리고 제가 9사단에서 중대장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레인저 대대에서 저를 중대장으로 뽑으려고 했지만, 보병 병과에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 오래 있었다고 말입니다.
대위 지휘참모과정(고군반)을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위 지휘참모과정에 간다면 대부분 중위와 함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임기가 끝나가는 중위들을 대위가 되기 직전에 보내는 경력 과정이었거든요.
저는 이미 대위로 3년을 지냈지만 이제 대위 지휘참모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과정이 끝나야 다시 신청해서 1대대로 가게 될지 2대대로 가게 될지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레인저에는 3대대가 없었습니다.
2개 대대 중에서 가게 되는 거였죠.
저는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트 베닝에 갔습니다.
고군반 과정을 갔죠.
거기서 보병 병과 사람들이 오더니 모두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했습니다.
보병 부 병과장은 로저 딤스데일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포트 루이스에 있었을 때 그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포트 루이스에서 그를 알았습니다.
그는 제게 이 과정을 수료하면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다고 했죠.
병과에서는 제가 학위가 없으니 먼저 학위 취득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소령으로 진급하려면 학위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15개월 동안 학위 수료 과정을 밟겠다고 했습니다.
15개월이면 2년제 정도였죠.
그래서 저는 포트 베닝에서 트로이 주립대 학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수료했죠.
트로이 주립대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딤스데일이 다시 전화해서 뭘 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글쎄, 델타포스에 갈까 고민 중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옛 보병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 1년 동안 포트 베닝 4번 건물에서 보병 병과 대표가 되어 달라고 말이죠.
그러고 나서 델타포스든 레인저든 그린베레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제가 1년 전에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딸아이가 하나 있었죠.
그래서 '뭐 어때 어차피 1년 더 있으면 그만인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쯤이면 딸아이가 두 살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 할 수 있었죠.
그래서 보병 병과 대표로 14개월 동안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 시기에 저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린 델타포스 셀렉션에 참가했고, 합격했습니다.
셀렉션을 끝내고 돌아오자 명령을 받았습니다.
조 갤러웨이: 년도가 어떻게 되죠?
엘든 버지웰: 네?
조 갤러웨이: 그때가 몇 년도였습니까?
엘든 버지웰: 81년입니다.
조 갤러웨이: 81년이군요, 알겠습니다.
엘든 버지웰: 네, 79년에 대위 지휘참모과정을 밟았고, 1980년 대부분은 학위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81년 6월에 OTC, 즉 오퍼레이터 훈련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 동안 저는 거기서--
조 갤러웨이: 그때 델타 사령관은 누구였습니까?
엘든 버지웰: 로드 파스칼입니다.
조 갤러웨이: 알겠습니다.
엘든 버지웰: 베크위스는 떠났습니다.
여기서 주제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제2 레인저 대대에 있었을 때 보 베이커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유럽 특수작전사령부나 특수작전부대 태스크포스 같은 조직이 생기기 이전의 조직인 SOTFE 사령관을 맡았죠.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베크위스는 월남에서 프로젝트 B-52 델타에서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일했었죠.
당시 베크위스는 차기 사령관에 대해 많은 발언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 베이커를 원한다고 말했죠.
진급을 통해 오퍼레이터이자 델타 사령관이 될 만큼 거기에 오랫동안 있었던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보 베이커가 델타 사령관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침에 수영을 하다가 수영장에서 나오는 순간에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했습니다.
조 갤러웨이: 세상에.
엘든 버지웰: 그래서 7특전단을 맡을 예정이었던 로드 파스칼을 7특전단에서 빼내어 델타의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렇게 그가 2대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델타에서 약 20개월을 보낸 후 육군부는 그를 다른 곳으로 옮겼죠.
그리고 레인저 연대 출신인 데다 월남전 당시에는 173공수여단에 있었던 셔먼 윌리포드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잘 적응했습니다.
이어서 제가 델타, 육군 경력상 최고의 사령관이라고 생각하는 빌 개리슨이 부임했습니다.
정말 멋진 분이셨죠.
정말 훌륭한 사령관이었습니다.
나중에 소말리아 작전 때문에 곤경을 겪으셨지만요.
조 갤러웨이: 네, 그랬죠.
엘든 버지웰: 환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월남에서 그린베레, 보병이자 피닉스 프로그램 요원이었죠.
그 때문에 대원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런 다음 스쿤메이커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그는 부대에서 오퍼레이터로 근무한 대원이 부임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이 이후로는 부대에서 오퍼레이터로 있었던 사람들이 부임하게 됐습니다.
조 갤러웨이: 언제 군에서 전역하셨나요?
엘든 버지웰: 4개월간의 휴가를 마치고 2007년 1월 1일에 했습니다. 휴가를 전부 썼죠.
조 갤러웨이: 다 쓰셨군요.
엘든 버지웰: 네, 2006년 6~7월에 이라크에서 돌아왔습니다.
이미 전역 서류를 제출한 상태였습니다.
위에서는 저를 포트 베닝 사령관의 특별 보좌관으로 배정했는데, 그건 사실상 어딘가에 붙잡아두는 허구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알고 있었죠.
그는 "일이 있으면 전화할 테니 그냥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조 갤러웨이: 전화요?
엘든 버지웰: 실제로 전화를 했습니다.
참전용사 장례식에 갈 장군이 필요하니 가달라고 말이죠.
그래서 오펠리카인가 어딘가로 갔습니다.
제복을 입고 장군으로 장례식에 참석했죠.
조 갤러웨이: 장례식 장군이군요.
엘든 버지웰: 네.
조 갤러웨이: 전역 후에는 무엇을 하셨나요?
엘든 버지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몇몇 대기업과 회사에서 장군 출신을 6개월 동안 컨설턴트로 고용하는 식의 제안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하지만 101사단에서 대대장을 역임했던 제 옛 전우인 행크 키니슨이 웩스포드 그룹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 육군 AWG(비대칭전 그룹)과 계약을 맺었고 덜레스에 있는 SOF 센터와도 다른 계약을 맺었죠.
그러고는 저한테 와서 일하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조지아주 콜럼버스에 사무실이 있으니 자기 회사에 일하러 와보라고 했습니다.
좋은 봉급을 줄 테니 다양한 부대에 가서 우리 직원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도 얘기를 나누는 컨설턴트가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7년 동안 그렇게 일했습니다.
편하기도 했고요.
D.C.의 부질없는 경쟁에 끼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회사를 소유한 사람은 은퇴한 3성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회사를 설립했죠.
빌 레노라는 은퇴한 3성 장군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회사 이름을 웩스포드로 지었냐?'고들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법인 사람들이 와서 LLC를 설립하거나 법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회사 이름을 뭐라고 지을 거냐고 묻자, 본인이 버지니아 북부의 웩스포드 스트리트에 살고 있으니 웩스포드라고 이름을 붙이겠다고 말이죠.
어쨌든 그는 회사를 1억500만 달러에 CACI(Consolidated Analysis Center, Inc./통합 분석 센터 주식회사)에 매각했습니다.
직원 소유의 회사였기에 모두가 약간의 지분을 얻었으니 좋았죠.
그리고 우리 모두 CACI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CACI는 대기업들이 돈을 아끼기 위해 하는 것처럼 조직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제 직장과 지위를 유지하고 싶으면 프랑스 샹티이로 전근을 가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회사는 행크를 완전히 없애려고 했습니다.
서던 파인즈 사무실에 있던 모든 직원들도요.
대부분이 해고됐습니다.
우리가 AWG를 위해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것도 모르고, 자기들만의 모집 담당자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 모집 담당자도 해고했습니다.
그들은 민간인 팀을 두고 있었고, 대부분이 그린베레, 델타 출신이며 몇 명의 레인저 출신도 있었던 JET(Joint Explosive Technology office/합동 폭발물 기술국), 즉 해외로 팀을 파견하여 보병 부대에 IED를 찾는 방등에 대해 조언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모집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건 안 되겠다고 했죠.
그렇게 CACI에서 약 1년을 보내자, 회사에선 저에게 프랑스 샹티이로 가라고 했고 저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거기 안 갈 겁니다. 더 이상 돈 안 줘도 됩니다. 제 아내는 아무 데도 안 갈 거요."
저는 안 가겠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금요일 밤과 일요일 밤에 왕복 비행하는 비용을 지불해 줄 수 있냐고요.
안 되겠다고 하자, 저는 미국에 머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퇴직금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제너럴 다이내믹스에 채용되었습니다.
포트 베닝 사격장에서 시연을 했고, 무기 시연 같은 걸 보고 있었죠.
그때 제너럴 다이내믹스에서 아는 사람이 다가와 제게 뭐 하는 거냐고 물었죠.
웩스포드에서 일하는 줄 알았다면서요.
저는 아니라고 말했고, 더 이상 회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CACI 산하이지만, 다 박살 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금은 뭐 하고 지내냐며 제게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죠.
그는 자기를 위해 일해 달라고 했고, 그래서 저는 1년 정도 컨설팅 일을 했습니다.
한편, AWG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1년에 두 번씩 저를 고용하여 그들만의 작은 OTC를 거치는 신임 대위와 부사관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러앉아서 육군과 그들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는 대위들에게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 물어보죠.
그냥 재미로 하는 일이지만, 그게 제가 하는 전부입니다.
아내가 가끔 집 밖으로 나가서 일을 하길 바라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조 갤러웨이: 물론이죠.
[성찰]
엘든 버지웰: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월남에서 지내는 동안 저는 분명히 성장했고, 어느 정도 남자가 되었습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법, 헛소리를 꿰뚫어 보는 법,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라고 할 때 사람을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중 일부는 힘들게 배웠지만 결국에는 배웠습니다.
덕분에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첫 파병을 마치고 군에서 제대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꽤 힘든 파병이었습니다.
첫 파병에서 두 번이나 부상을 입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는 군에 계속 남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월남에서 본 중위 중 일부는 훌륭했고 일부는 끔찍했는데, 저도 이 사람들만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육 부족이나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여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월남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저는 할 수 있다면 보병 소대장으로 월남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제가 임관하기 전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일에 대한 자부심과 명예를 얻게 되었죠.
저는 월남에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죠.
제기 휴가로 고향에 돌아가면 고등학교 친구들이 저를 보고, '월남에 있었지? 대체 왜 그랬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냥 말했죠.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와 대통령에 의해 월남에 갔다고 말이죠.
조 갤러웨이: 네, 그렇죠.
엘든 버지웰: 그 친구는 공화당원이 아니라 민주당원이었죠.
그러니 그놈의 자유주의 헛소리는 필요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은퇴 후 따뜻한 날씨를 찾아 북동부에서 앨라배마 유폴라로 이사 가는 진보적인 사람들 때문에 지역 주민들은 미칠 지경이었죠.
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도 않죠.
어쨌든 이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 갤러웨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월남전이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엘든 버지웰: 지금은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처럼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2차 대전은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2차 대전은 본질적으로 본토를 위협한 세계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월남전은 그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 정도로 봅니다.
조 갤러웨이: 아주 옛날일 정도로 보죠.
엘든 버지웰: 월남전이나 월남 참전 용사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너무 오래돼서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하는 일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교육하는 것입니다. 좋든 나쁘든 말이죠.
뭐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CBS에서 1년 전쯤 방영한 방송이 있는데 그건 정말-- 빌 쿠쉬너와 함께 포트 베닝에 가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 어찌 됐든 화를 냈을 테니까요.
조 갤러웨이: 저도 그랬을 겁니다.
엘든 버지웰: 모르겠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저를 매우 존경합니다.
월남에서의 제 배경을 알고 있고... 아, 제가 살고 있는 유폴라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저를 존경하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유폴라에서도 월남에서 한 명을 잃었죠.
조 갤러웨이: 한 명이요?
엘든 버지웰: 제 아내의 동급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한가운데에 그를 기리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주제를 생각하지 않죠.
제가 은퇴했을 때 월남과 모든 것에 관해 유폴라에서 현충일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네, 뭐, 알았습니다' 하는 듯이 저를 봤죠.
사람들에게는 너무 먼 옛날 일 같았습니다.
비록 단편적인 정보이긴 하지만, 월남뿐만 아니라 정치, 정부, 역사 등 많은 분야의 교육적인 부분이나 정보적인 부분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견에 사로잡혀 전체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요점을 끌고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죠.
이런 점이 우려스럽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이런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 갤러웨이: 월남에서 얻은 교훈 중에서 전수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엘든 버지웰: 군사적으로는 리허설과 계획을 세우고, 모든 세부 사항을 다루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의 일로 죽을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은 앉아서 생각해 봐야 하죠.
저는 이라크에서 데저트 스톰 작전 당시 제 스쿼드론을 지휘했고, 제 아들이 이라크에서 한 일과 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대들의 계획 중 일부는 매우, 매우 취약합니다.
델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계획을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영국 SAS는 그런 면에서 끔찍했습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죠.
그냥 어느 지점까지 가서 이런 걸 하자고만 말했죠.
그런 다음 다들 장비를 챙겨 지프에 올라타서 출발했습니다.
조 갤러웨이: 그리고 떠났군요.
엘든 버지웰: 그들은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사막의 폭풍에서 제가 보았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체온증으로 죽거나 길을 잃었죠.
그리고 총에 맞아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왜 저렇게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커리어 내내 계획과 세부 사항에 중점을 두었고, 저도 한때 부사관이어서 부사관들이 장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일부 장교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계획 수립에 있어서 부사관들에게 대부분의 장교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특히 제가 델타 스쿼드론 지휘관이었을 때 말이죠.
제 주임원사는 저만큼이나 스쿼드론을 지휘하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사관들이 계획 작성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계획을 이들에게 맡겼습니다.
장교들이 계획을 짜서 부사관들에게 냅다 건넸는데, 부사관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 계획은 성공할 수 없으니까요.
조 갤러웨이: 그렇군요.
엘든 버지웰: 그래서 저는 부사관들이 계획의 작성자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부사관들이 저에게 오면 제가 조금씩 수정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토론을 했죠.
저는 제 주임원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엉망인 데다 당신 시점에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게 당장 말하라고요.
만약 말하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가 문제가 생긴다면--
조 갤러웨이: 그땐 모가지죠.
엘든 버지웰: 내쫓아버리고 '우리는 이런 거 안 할 겁니다'라고 말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을 찾겠다고 했죠.
그런 식으로 조금씩 진행됐죠.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사관들... 그리고 저는 월남 시절이 상명하복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저는 이런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기 가서, 이 시간에 이런 걸 해. 끝."
"여기로 가서 이걸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안 된다. 저기로 가서 이걸 해."하는 식이었죠.
월남 2차 파병 중에 월남에 대한 글을 읽으며 우리가 조기 경보 트리거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라오스로 정찰팀을 보내고 팀이 적과 마주친 다음 총격전이 발생하죠.
일부는 돌아왔고, 일부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월맹군도 미군과 똑같았습니다.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사단으 순으로 얘기가 전달됐죠.
지금에 비하면 제한적이지만 우리의 모든 스파이 활동은 공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호 전하 세기를 감지할 수 있는 대형 전자 도청 장비가 라오스에 있었죠.
예를 들어 PRC-25가 있다면 무전기의 특정 신호 세기가 나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신호 세기를 포착할 수 있는 전자 장비를 통하여 '아, 이건 PRC-25네. 그럼 소대나 중대 규모가 있겠다'하고 파악하는 식이죠.
상위 제대로 올라가면 대대와 사단에 더 큰 무전기가 있고, 이것들은 훨씬 더 강한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포착되죠.
이를 통해 아마도 연대나 사단급 부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투입돼서 적군을 자극하면, 그 신호가 연쇄적으로 전달되어 수신되는 거죠.
조 갤러웨이: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또 감청하고요.
엘든 버지웰: 그런 식으로 사이공은 여기에 사단이 있고, 거기에 연대가 있고, 하나는 여기로 이동하고 하나는 저기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우리 임무는 적들이 트레일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9사단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이 부온마투옷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로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이들의 현황을 모르고 그들에게 가서 물어볼 수도 없었죠.
그러니 그들이 우리와 접촉하게 하는 것이 전부였던 겁니다.
따라서 임무 중 일부는 이런 점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월맹군 부대가 있다고 예상되는 지역에 투입돼서, 적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무전을 보내겠죠.
조 갤러웨이: 무전기를 켜고 상위 제대에 무전을 보내겠죠.
엘든 버지웰: 네, 또한 구두보고를 하는데 이것도 포착될 수 있었죠.
그러다 월맹군은 유선 전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회선에 테이프 녹음기를 연결하고 숨는 임무를 여러 번 임무를 수행했죠.
이렇게 우리는 월맹군이 유선 전화로 하는 말을 듣고 녹음했습니다.
전부 월남어밖에 없었기에 우리가 녹음한 것이 가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월남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테이프는 정보원들에게 넘겼고, 그들은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SOG 대원들에게 월맹군 트레일을 따라 전화선이나 통신선을 찾아서 녹음하라고 하는 건 큰 임무였습니다.
12시간 동안 녹음하곤 했죠.
녹음기를 설치한 곳에선 주위를 잘 살펴야 했는데, 월맹군이 끝에 고리가 달린 막대기를 들고 트레일을 걸으면서 우리가 전화선에 장치를 설치했는지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전화선에 녹음기를 끼웠는지 확인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이렇게 돌아다니는 월맹군을 보고 바로 녹음기의 클립을 뽑았습니다.
클립을 수풀 속으로 숨겼죠.
우리는 헬기가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월맹군은 트레일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떠났죠.
[추모비]
엘든 버지웰: 추모비가 만들어진 지 1년이나 2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갔는데, 제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보았죠.
낮에는 가고 싶지 않아서 밤에 갔습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갔는데 불이 다 켜져 있어서 밝았습니다.
저에겐 월남 참전 명부, 모든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적힌 크고 두꺼운 책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죠.
30명에서 40명 정도였습니다.
그날 밤 추모비 앞에서 이름을 찾아보며 6시간 정도를 보냈습니다.
조 갤러웨이: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다 적어서 말이죠?
엘든 버지웰: 제 고향 호퀴엄에서 사망한 몇 명과 101사단에 간 제 친구 두 명도 포함해서 말이죠.
제가 운 좋게 그린베레 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 그들은 101사단에 갔다가 전사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추모비에 여러 번 다시 갔습니다.
제 아내도 데려갔고, 아이도 데려갔죠.
꽤 좋았습니다.
저는 항상-- 혹시 데이브 마우러를 아십니까?
조 갤러웨이: 이름은 압니다.
엘든 버지웰: 그도 SOG 베테랑입니다.
이전에는 1기병사단 출신으로 LZ 콜럼버스에 있었죠.
올버니 옆에 콜럼버스가 있었죠 아마?
조 갤러웨이: 네, 올버니는 콜럼버스는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포병대가 이전한 곳이죠.
엘든 버지웰: 알겠습니다.
마우러는 이아드랑 전투 때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관측병이었죠.
전투 때문에 정말 엉망진창이 됐습니다.
벌레처럼 미쳤다고나 할까요.
저는 훈련단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마우러는 군에서 제대하고 다시 돌아왔고, 그때부터 우리는 친구로 지냈습니다.
마우러의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그가 좀 엉망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나쁜 일을 겪었다는 건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 좋은 친구죠.
이 인터뷰를 한다고 마우러에게 말하기도 했죠.
어쨌든, 제가 그의 이름을 꺼낸 이유는, 제가 수년 동안 그를 추모비에 데려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우러는 너무 감정적이고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었기 때문에 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갔습니다.
마우러는 버지니아주 샬롯츠빌의 신문사에서 20년 동안 피처 기자로 일했습니다.
남북 전쟁과 지역 사회 문제 등에 대한 기사를 다뤘죠.
그리고 은퇴하고 자신이 자란 미네소타주 세인트 클라우드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마우러는 추모비에 갔지만, 저는 수년간 그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 번은 제가 버지니아까지 차를 몰고 가서 태워주고 호텔 방까지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룻밤 묵고 추모비에 가자고요.
하지만 안 가겠다고 했죠.
조 갤러웨이: 안 갔군요.
엘든 버지웰: 네, 안 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갔던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워싱턴 DC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기념관이잖습니까.
조 갤러웨이: 그렇죠.
엘든 버지웰: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 월남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이분법을 알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워싱턴 DC에 가는 관광객들이 30, 40, 50대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다 어린애들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조 갤러웨이: 그 추모비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은 거기에 58,00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친척, 동급생 등의 관계까지 포함하면, 약 2천만 명의 사람이 추모비에 새겨진 전사자들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런 사람들도 추모비를 보러 가야 하고 실제로도 보러 가고 있습니다.
엘든 버지웰: 그것참 좋군요.
[월남전 기념]
엘든 버지웰: 저는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50주년이 되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0주년을 어떻게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조 갤러웨이: 2차 대전 때도 이런 걸 했죠.
한국 전쟁 때도 했고요.
이제는 우리들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엘든 버지웰: 그러니 큰 의미가 있겠죠.
워싱턴 D.C.나 다른 곳에서 축하 행사가 열린다면 저도 참석하고 싶습니다.
조 갤러웨이: 당신 고향에서도 열려야죠.
엘든 버지웰: 그래야죠.
조 갤러웨이: 네, 우리가 하려고 하는 건 거창한 퍼레이드가 아니라--
엘든 버지웰: 제가 본 유일한 축하 행사는-- 축하 행사인지, 이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혁명의 딸들에서 열린 것이었을 겁니다.
조 갤러웨이: DAR은 우리의 큰 파트너입니다.
엘든 버지웰: 월남전 참전 용사들을 모두 교회에 초대해서 모두에게 멋진 증서와 핀을 줬습니다.
조 갤러웨이: 핀? 핀을 주던가요?
엘든 버지웰: 네.
조 갤러웨이: 그 DAR 여성분들은 이 월남전 기념식의 정말 큰 지지자들입니다.
엘든 버지웰: 그게 제가 거기서 본 유일한 행사입니다.
현충일에는 월남전 기념관에 새 깃발과 꽃 같은 것들을 걸었죠.
하지만 시에서 그렇게 했지, 특정 단체에서 한 건 아닐 겁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동네를 둘러보고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조 갤러웨이: 자세히 알아봐야죠.
엘든 버지웰: 저는 아직 조지아주 콜럼버스에 있습니다.
조 갤러웨이: DAR 여성분들이 나서게 해야죠.
엘든 버지웰: 알겠습니다.
조 갤러웨이: 만나 뵙게 되어 기뻤습니다.
엘든 버지웰: 네, 저도 뵙게 되어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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