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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아스프의 흥망 (中)전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43599 RT 아스프의 흥망 (上) - 워리어플랫폼 마이너gall.dcinside.com(1968년 3월과 1971년 5월에 수행한 임무를 포함하여 SOG의 RT 아스프는 DMZ 인근 외딴 지역에서 여러 차례 위험한 기밀 작전을 수행했다)
1970년 말, 라오스에서 온 타이족 부족원 6명이 다낭에 자원했다.
타이족은 월맹의 북서쪽 외딴곳의 원주민이었지만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라오스로 피난을 갔다.
6명의 타이족 중 한 명인 로 반 안은 1966년에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근처에서 모집된 타이족 파견대의 일원으로 SOG에 합류했다.
원래 이 파견대는 월맹 내에서 장기 요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68년, SOG는 요원 팀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대신 타이족을 월맹에서 단기 정찰 임무(STRATA라는 약어로 알려짐)를 하는 데 이용했다.
STRATA 팀은 첫 번째 임무에서 흩어지고 말았고 팀장이었던 로 반 안의 아버지가 포로로 잡혔다.
로 반 안 본인은 헬기로 철수하여 월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로 반 안은 이후 STRATA 프로그램을 그만두었지만 1970년 후반에 타이족 5명과 함께 SOG로 돌아와 새로 개편된 RT 아스프에 재편성되었다.
이 최근의 부활에서 RT 아스프는 다낭에서 SOG 정찰 중대를 지휘한 루시우스 델크 대위가 지휘를 맡게 됐다.
그의 동료 중 상당수는 이 두 차례의 임명에서 연고주의의 기미를 감지했다.
델크의 장인이 월경 작전을 담당하는 SOG 대령인 댄 쉰겔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쉰겔이 1971년 초에 교체되면서 델크도 재배치되었다.
델크의 짧은 부임 후, 2월에 클라우스 빙햄 병장이 RT 아스프를 맡았다.
1968년에 FOB 4에서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빙햄은 이번이 두 번째 파병이었다.
빙햄은 제임스 러트렐, 루이스 월튼 병장과 함께 RT 아스프에 합류했다.
1971년 2월은 다낭에서의 SOG 작전에 중대한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그달에 월남군은 호치민 트레일을 돌파하기 위해 체폰을 향해 서쪽으로 대대적인 진격을 감행했다.
미국은 헬기 지원을 제외하고 침공에 크게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월남이 이처럼 야심 찬 작전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이유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동남아에서의 미군 작전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라는 국내의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정책을 반영하여 SOG는 파일럿 구출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라오스로의 추가 월경 임무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결과, SOG는 이제 월남과 DMZ 내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월맹군에 대해서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4월이 되자 이러한 상황은 초기 스파이크 팀 개념으로 돌아가는 데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초기 작전과는 달리 은밀함보다는 팀 화력에 의해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 SOG 대원들은 전쟁의 전반적인 진행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
"그때는 이미 승산이 없었고 정찰대원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다낭의 작전 장교였던 제임스 슬래튼 소령이 말했다.
1971년 봄, SOG의 관심은 적의 도로 건설에도 집중되었다.
월맹군 시설공병들은 아샤우 계곡 도로를 남쪽으로 확장해 꽝남성의 아브엉 계곡까지 직행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있었다.
지난 2개월 동안 유사한 임무를 몇 차례 수행한 경험이 있는 RT 아스프가 지역 정찰에 파견되어 조사에 나서게 되었다.
(실종 전 마지막 임무 중 야영을 하는 동안 휴식을 취하는 루이스 월튼 병장(왼쪽)과 RT 아스프 대원들)
(실종 전 마지막 임무에서 촬영된 클라우스 빙햄 병장)
5월 3일 새벽, 미군 3명과 타이족 6명으로 구성된 RT 아스프는 라오스 국경에서 15km 떨어진 볼킨산 북서쪽 경사면에 투입됐다.
해당 지방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볼킨산은 남쪽에서 아브엉 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헬리본 침투 10분 후, RT 아스프는 무전으로 스퀠치 신호를 보내 팀원들이 성공적으로 투입되었음을 알렸다.
다음 날, FAC가 해당 지역으로 돌아왔지만, 무전기에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정글 아래에서 나오는 비상 신호도 보지 못했다.
5월 5일, 비행기가 다시 돌아와 RT 아스프를 수색했다.
두 명의 파일럿이 LZ에서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거울과 패널 신호를 확인했다고 보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널 근처에서 짙은 녹색 전투복을 입은 두 명의 인물이 목격됐다.
정오에 다낭으로 돌아온 파일럿들은 헬리본 SOG 구조팀을 데리고 패널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열대성 폭풍으로 인해 하늘이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중단한 헬기는 기지로 복귀했지만, FAC는 1700시까지 상공에 머물렀다.
다음 날, 거대한 열대성 저기압이 월남을 강타하여 구조가 더욱 지연되었다.
5월 7일이 되어서야 또 다른 투입이 시도되었다.
10대의 헬기가 투입되었고, RT 아스프의 LZ 근처에 병력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선두 헬기가 접근하자 주변 산등성이에서 기관총 사격이 쏟아졌다.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병력 수송 헬기 3대와 호위를 맡은 AH-1 코브라 4대 중 2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편대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다낭으로 돌아갔다.
손상된 헬기를 교체한 SOG는 같은 날 두 번째 시도를 시작했다.
이번에 구조대는 첫 번째 LZ에서 약 600m 떨어진 더 높은 곳에 있는 대체 LZ에 착륙할 계획이었다.
산등성이에 대공포가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구조대가 목표에 접근했다.
그러나 파일럿이 착륙하기 전에 악천후와 곧 다가올 어둠으로 인해 또 한 번 임무가 중단됐다.
두 번째 열대성 폭풍으로 구조대는 이후 4일 동안 발이 묶였다.
마침내 5월 11일, 날씨가 따라주며 SOG는 다시 출격했다.
각각 십수 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두 개의 증원된 정찰팀이 구조 임무에 투입됐다.
제1팀인 RT 부시마스터는 2차 파병 중인 SOG 베테랑인 엘든 버지웰이 이끌었다.
제2팀인 RT 코네티컷은 안드레 스미스 병장이 이끌었다.
그 무렵, RT 아스프의 대원들은 이미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된 상태였고, SOG는 그들이 여전히 수풀 속에서 적들을 피해 다니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갖지 않았다.
하지만 SOG는 버려진 장비를 찾거나 팀의 운명에 대한 증언을 해줄 수 있는 현지 민병대를 생포하는 것 등을 통해 RT 아스프의 흔적을 찾기를 원했다.
RT 아스프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투입된 두 수색팀은 정글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별다른 일 없이 정찰하던 중, 멀리서 무언가가 그들의 이목을 끌었다.
"LZ로 보이는 곳에 신호 패널의 일부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함정처럼 보였다."라고 버지웰은 회상했다.
두 팀이 철수하던 중, 갑작스럽게 원거리에서 적의 총격이 날아왔다.
대원들은 수풀을 헤치고 대피하며 헬기 철수를 요청했다.
이후 모두 무사히 다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더 이상의 SOG 구조대 투입 시도는 없었다.
몇 달 후, 한 포로가 RT 아스프는 마을로 들어가서 전멸당했다고 증언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한편 1971년 8월, 톰슨과 퀸 병장의 지휘 아래 새로운 팀이 구성되면서 RT 아스프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SOG에서의 미군 비중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팀은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해체되어 1972년 4월에 SOG 작전은 막을 내렸다.
RT 아스프의 이야기는 실종된 대원들의 운명에 대해 여전히 많은 의문을 품고 있다.
1968년 첫 실종 사건을 다루던 중, 미국 수색팀은 미군 3명이 죽임을 당하고 근처에 묻혔다는 지역 주민들의 제보를 다시 받고 1992년에 체폰 북쪽 지역을 수색했다.
한 주민이 수색팀을 데리고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까지 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전쟁 후반에 심한 폭격을 받았기에 그 주민은 매장지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여러 개의 구덩이를 팠지만, 실종 대원들의 유해나 개인 소지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1971년 RT 아스프의 실종과 관련하여 1991년 10월, 미국 수색팀의 조사를 받은 한 현지 목격자가 민병대와 미군 주도의 특공대 간의 장기간의 전투를 회상했다.
증언에 따르면 이틀 동안 총 6명의 대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1992년 5월, 또 다른 현지 목격자는 3명의 미군 모두 사망했지만 매장되지는 않았다고 보고했다.
1993년 여름에 실시된 발굴 작업에서 단추 몇 개와 일반 서바이벌 나이프가 발견되었으나, 이것이 RT 아스프와 결정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었다.
같은 해, 1971년 5월 임무 당시 RT 아스프의 대원 중 한 명이었던 로 반 안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RT 아스프의 마지막 임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로 반 안이 조사관찰단(SOG) 롱탄 캠프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의 모습)
이전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이 버전에서는 팀이 마을에 접근하던 중 지역 민병대에게 포위당했다고 한다.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미군들은 이를 거부하고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적과 맞섰다.
여러 공산군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3명과 타이족 5명이 처형당했다.
오직 로 반 안만이 추격병들을 피해 라오스로 도망쳤다.
그는 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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