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없는 씹스압 시리즈인걸 양해바람. 온 더 그라운드 때처럼 어거지로 넣을 구간이나 적절한 짤도 없었음
호치민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인도차이나에서 미국 정보부와 일했다. 구체적으로는 CIA의 전신인 OSS가 베트남 북부 정글에서 호치민의 베트민 게릴라를 훈련하고 무장시켜 일본군과 싸웠다. 호치민은 모든 연령대의 애국자, 농민, 노동자, 상인, 군인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전선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프랑스군을 베트남에서 몰아냈다.
호치민이 OSS와 함께 연합군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돕고 있었을 때 오리건주 올버니에서 린 시니어와 바이올렛 블랙 사이에서 태어난 린 모리스 블랙 주니어가 바로 나다. 이것이 내가 태어난 배경이다. 어머니가 우유에 초콜릿을 조금 섞어 먹이면 내가 바로 졸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나는 *"보스코"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미국의 초콜릿 음료 이름
내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인 4월 22일 오전 10시, 독일 베를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참모들에게 독일이 패전했음을 선언하고 자살했다. 아버지는 항상 내가 더 일찍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물론 히틀러의 자살, 호치민의 투쟁, 영원히 평화로울 것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아메리칸드림의 일부가 되기 위한 내 분투, 이 모든 것은 시간상의 우연일 뿐이었다.
1945년 8월, 호치민은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를 설득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다. 호치민은 임시 정부의 의장이 되어 프랑스와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가 새로 구성된 민주 정부를 인정하지 않자, 호치민은 좌절감을 느꼈다. 호치민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베트남 독립을 지지해 달라고 거듭 청원했지만, 트루먼은 당시 인도차이나에 대한 전후 지배권을 행사하던 영국과의 협정의 일환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전쟁 직후 베트남 내 라이벌 진영과 프랑스 식민지 세력 간의 폭력 사태가 격화되자 영국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그레이시 경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1945년 9월 24일, 베트민 지도자들은 총파업을 벌이며 대응했다. 베트남을 프랑스에 반환하려는 영국에 맞서 독립 선언문을 들고 호치민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베트남인들이 일어섰다. 그러나 독립국 지위를 위한 베트남의 투쟁은 다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같은 달, 20만 명의 중국 국민당 군대가 하노이에 도착했다. 호치민은 공산당을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해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로 하는 계산된 정치적 협정을 루한 장군과 맺었다. 하지만 장개석이 베트남 내 중국의 영향력과 상하이 내 프랑스 조계지를 거래하려고 하자, 호치민은 배신감을 느끼고 장개석의 군대를 북베트남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호치민은 1946년 3월 6일에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연방과 프랑스 연합에서 자치 국가로 인정받는 협정을 프랑스와 맺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중국이 떠난 직후 프랑스와의 싸움이 벌어졌고, 투쟁은 계속되었다.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중국은 천 년 동안 베트남에 머물렀다. 프랑스는 외국인이며 그들은 약하다. 식민주의는 죽어가고 있고 아시아에서 백인들은 끝났다. 하지만 중국이 지금 머무른다면 그들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중국 똥을 먹을 바에 5년 동안 프랑스 똥 냄새를 맡는 것이 낫다."
1946년, 내 어머니는 동생 휴를 임신했다. 우리는 오리건주 세일럼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주 전후 고용청에서 일했다. 전쟁은 끝났고 실업률은 높았다. 당시 나는 한 살이었다.
1947년 4월, 내 두 번째 생일에 우리 가족은 2차 대전 당시 전쟁 물자를 보관하던 군수품 창고 마을인 오리건주 오드넌스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이 창고의 급여 사무실을 관리했다.
그해 어느 더운 여름날, 주근깨 가득한 빨간 머리의 옆집 소녀와 나는 옷을 벗고 뒷베란다의 아이스박스에 기어들어 가서 뚜껑을 닫고 잠갔다. 소녀의 어머니가 하루 종일 소녀를 미친 듯이 불러대고 찾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둘은 아이스박스 속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내 엉덩이를 때리며 빨간 머리 소녀를 멀리하라고 당부했다. 아마 소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우리는 오리건주 허미스턴으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가이 F. 앳킨슨 건설회사에서 우마틸라 수력발전댐 건설 급여 사무실 책임자로 일했다. 어머니는 우마틸라와 허미스턴 마을 사이에 있는 작은 도로변 식당을 사서 "블루버드 카페"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 나와 내 동생인 휴, 브루스는 우리끼리 살게 됐다. 나는 "작은 사나이"이자, 베이비시터 "보스코"였다.
같은 해에 소련은 호치민 정부를 인정했다. 비록 국제적으로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던 시기였지만 말이다. 스탈린은 호치민에게 중국 고문들이 6~7만 명의 베트민을 훈련시키는 것을 허용한다면 프랑스와의 싸움에 소련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설득했다. 호치민은 입술을 깨물고 중국의 지원에 동의했고, 그 덕분에 프랑스와의 싸움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났다. 나는 8살,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또 다른 이웃집 빨간 머리 주근깨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 이번에도 빨간 머리 소녀였다. 회전초 가득한 들판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놀기에 좋은 곳이었다. 항상 내 곁에는 내 남동생인 휴와 브루스가 있었다. "작은 사나이"라고 불렸던 나는 부모님이 일하는 동안 동생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그때 오드넌스에서 일하던 이웃 중 한 명이 나무에 매달아 캠프를 만들 수 있도록 낙하산을 줬다. 어른들은 이 낙하산이 우리 정신을 팔리게 하고, 사고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해줄 것이며, 동네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해 가을에 사막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우리의 낙하산 캠프가 무너졌다. 나는 차고에서 큰 눈썰매를 끌고 와 앞쪽에 낙하산 라이저 코드를 연결했다. 막내인 브루스가 앞에, 휴가 가운데에 앉았고, 나는 뒤에 걸터앉아 풋브레이크를 맡았다. 동네 아이들 중 몇몇이 낙하산을 들어 올려 바람을 잡았고, 우리는 출발했다. 시속 20~30마일의 바람에 맞춰 속도를 내며 우리는 옥수수와 밀밭을 가로질러, 관개 도랑을 따라 늘어선 회전초 울타리를 지나 사막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정말 멋진 드라이브였다! 그날 오후 늦게 우리는 덜컹거리는 낡은 포드 픽업트럭을 운전하는 지역 인디언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우리를 부모님께 데려다줬고, 부모님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내 엉덩이에 각인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은 소련과 중국 고문의 자금 지원을 받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였다. 3월 23일 베트민은 주요 비행장을 점령하여 프랑스군 부대를 부분적으로 고립시켰다. 거기다 프랑스군은 악천후로 인해 보급품 공수, 부상자 후송, 근접 항공 지원도 불가능해졌다. 프랑스군의 보급품이 점점 떨어지고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자, 베트민이 시골을 장악하게 됐다. 프랑스군은 더 이상 지역 순찰을 할 수 없게 되자, 순전히 방어 태세만 취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포격을 받았다.
1954년 4월 7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기자 회견에서 "도미노 이론"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소위 "쓰러져가는 도미노"에 빗대어 말할 수 있는 광범위한 고려 사항이 있다. 도미노를 일렬로 세워 놓고,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리면, 마지막 도미노는 매우 빠르게 넘어질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붕괴의 시작이 될 수 있다." 9일 후 리처드 닉슨 부통령은 미국이 "연합군의 지원과 관계없이 인도차이나에 미군을 투입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그해 4월 22일, 나는 9살 생일을 맞이했다. 그리고 빌 헤일리 & 더 코메츠가 Rock Around The Clock을 녹음하여 로큰롤 열풍을 일으켰다. 거기다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 육군이 공산주의에 "유화적"이라는 이유로 청문회를 열었던 시기였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생일 축하 소식이 이어졌다.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의 통일과 인도차이나의 평화 회복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틀 후,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공산 중국이 베트민 게릴라를 훈련시키기 위해 인도차이나에 전투 부대를 파견한 것을 비난했다.
5월 7일, 장대한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베트민은 부상자는 총살하고 프랑스군을 해안까지 행군시켜 배에 태우고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자국민에게 패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고 군인들도 배에서 하선하기를 거부했다. 다수의 용맹한 프랑스 외인군들이 그 배의 선체에서 죽었다.
디엔비엔푸는 비유럽 식민지 독립운동이 게릴라 세력에서 현대 서구 점령군을 전면전에서 물리칠 수 있는 정규군으로 발전한 최초의 사례였다.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인도차이나 반도가 동남아 안보에 중요하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선언하며 미국이 프랑스의 편에서 노골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종식시켰다.
1954년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어 북쪽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남쪽에는 비공산주의 세력이 재편성될 수 있게 되었다.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하노이로 이전하여 공산당이 주도하는 단일 정당 국가인 월맹 정부가 되었다. 제네바 협정은 1956년에 통일을 위한 국민 선거도 규정했으나, 이 조항은 월남 정부와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미국은 1950년부터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데 전념했으며, 당시 프랑스군의 80%에 자금을 지원했다. 제네바 협정 이후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월남의 주요 후원국이자 재정 지원국이 되었지만,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미국과 월남 사이에는 체결된 조약이 없었다.
1957년 4월 22일, 나는 12살이 되었고 더 이상 보스코라고 불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 이름은 린이고, 진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게다가 또래의 아이들이 나를 몹시 놀려댔다. 하지만 내 진짜 이름이 뭔지 알게 되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린? 정말 계집애 같은 이름이야." 그렇게 시작된 "여자애 같은 이름의 소년"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1963년, 호치민은 평화 협상을 이루기 위해 월남 대통령인 응오딘지엠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 서신은 그해 말에 미국이 응오딘지엠에 대한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하게 된 배경이 됐다.
1963년 6월, 나는 워싱턴주 시애틀에 있는 레이니어 비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토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내 어깨를 흔들며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일어났어요... 무슨 일인데요?"
"방송국에 다시 출근하니?" 엄마가 물었다.
"오늘은 아니에요, 토요일이잖아요." 나는 18살의 건방진 미소를 보였다. 사실 떨어진 학점에 신경 쓰기 위해 졸업 6개월 전에 방송국을 그만뒀다. "여름에는 그냥 쉬고 놀고 싶다고요."
"장학금을 쓸 계획은 있니?"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난 대학을 다녔다."라고 잔소리했다.
"미술 학교는 가겠지만 대학은 안 갈 거예요. 시간과 돈 낭비일 뿐이죠. 이 얘기는 이미 다 한 줄 알았는데요." 나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건방지게 굴지 마." 엄마가 다시 물었다. "집세, 식비, 교통비를 낼 수 있을 만큼 저축은 했니?"
"여름에는 여기서 살다가 가을에 다시 일하러 가서 자취할 생각인데 어때요?"
"여기서 살 거면 월세를 내. 지금 내는 거 말고 진짜로 집이 있는 사람처럼 내야 한다고. 금세 돈이 바닥날 거야. 그러려면 직장이 필요하겠지. 알겠니?"
"엄마가 한 말 들었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 정도 집세를 낼 돈은 없어요." 나는 졸린 채로 불평했다. "졸업하고 정말 쉬고 싶다고요.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만 바라는 거 같네요."
어렸을 때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나는 5살 때부터 두 동생을 돌보았다. 부모님은 나를 작은 사나이라고 불렀고, 보스코라는 이름보다 그게 더 좋았다.
"15살 때부터 일하며 돈을 모았어요. 여름에는 쉬었다가 직장에 복귀하고 싶고, 그다음에는 아파트를 구할 거라고요. 이번 여름만 기다려줄 순 없어요?"
"우리가 같은 얘기를 하는 것 같지 않구나." 엄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 동생들 모두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고, 네 아버지는 은퇴했어. 오늘 저녁이 마지막 무료 식사란다. 알겠어?"
"예, 그러시던가요." 나는 벌거벗은 채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과감하게 샤워실로 향했다.
씨발! 왜 이번 가을까지 못 기다려준다는 거냐고!
내가 샤워실에서 나왔을 때 부모님은 이미 없었다. 나는 옷을 입고 버스 정류장까지 1마일을 걸어 시애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으로 가서 먹을 것을 산 후 야외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난 뭘 해야 하지?"
나는 몇 년 전 시애틀 세계 박람회를 위해 깨끗하게 정비된 이 오래된 마을인 스키드 로드를 좋아한다. 유서 깊은 작은 해안가 카페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며 시애틀 타임즈 신문을 집어 들고 "평균적인 가족"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직장인 남편은 연평균 16,000달러를 번다. 세 자녀를 둔 엄마인 아내는 집에서 집안일을 한다. 그들은 차 두 대를 넣을 수 있는 차고와 단층집 또는 복층 주택을 가지고 있다. "연봉 16,000달러... 결혼하지 않고도 그런 돈을 벌 수 있다면 부자가 되겠지. 예술가들은 그런 돈을 벌지 못하겠지만." 그때 계란, 해시 브라운, 베이컨이 담긴 접시가 내 앞에 놓였다. 감자 위에 케첩 반병을 뿌리고 "커피."라고 말하자 웨이트리스가 코웃음을 치며 내 컵을 가져왔다. 그녀의 담배에서 나온 재가 컵에 떨어지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여 담배를 불었고, 기름지고 두꺼운 머리카락이 내 음식에 닿고 있었다.
"예, 정말 고맙습니다." 기침을 하며 그녀는 청구서에 추가 금액을 적었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확인했다. "젠장, 집으로 돌아갈 버스비도 없네. 알 제트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올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하나. 그리고... 어디까지 데려다주려나?"
생각해 보니 나가라는 말도 들은 것 같다. 부모님은 더 이상 베이비시터가 필요 없었다.
"도대체 뭘 해야 하지? 어디에 머물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뭘 해야 할지는 알겠니?"
삐걱거리는 비닐로 덮인 의자에서 천천히 돌리자, 내 뒤쪽 부스에 정복을 입은 육군 부사관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뭐죠 그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두 가지가 있지. 첫째, 혼잣말 좀 멈춰. 미친 사람 같잖아. 미친기엔 넌 너무 어려. 그런데 너 몇 살이니?"
"18세요."
내가 왜 이 남자하고 왜 이야기하는 거지? 음식도 다 식겠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이 뭔데요?"
"입대."
"뭐요? 군 입대요?" 나는 웃었다.
"물론이지. 의무를 다하는 것 외에도 하루 세 끼 식사도 나오고, 나처럼 좋은 옷도 입고, 잠자리도 있고, 흥미로운 직업도 있고, 외국 여행도 다녀. 일단 먹을 거 가져와서 나하고 같이 먹자. 그러면 혼잣말을 해도 나한테 말하는 줄 알 테니 미친놈 취급은 안 당할 거야."
나는 뜨거운 접시를 집어 들자마자 다시 내려놓았다. "젠장, 정말 뜨겁네." 한 손에 냅킨을 든 채로 접시 가장자리를 잡았고, 다른 손에는 식기를 들고 부사관이 있는 부스로 향했다.
"아가씨? 아가씨, 이 친구 커피를 여기로 가져다줄래요? 고마워요. 영장을 받을 만큼의 나이는 됐니?"
"영장 받을 나이는 한참 지났죠." 웨이트리스가 쉰 목소리로 말하며 걸어갔다.
"아 당신 말고 여기 있는 남자애 말이에요."
"예, 영장 받을 나이가 됐죠. 18세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이미 받았고요."
"음? 받았어?"
"예," 나는 입안에 음식이 가득 들어있는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테이블에 해시 브라운을 뱉으며 말했다.
"그럼 입대해서 의무를 다할 나이가 됐구나. 정말 그 나이 맞니? 너는 18세 같지도 않아. 좀 말라 보여서 기초 훈련도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비꼬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저는 18살이고 증명할 수도 있다고요. 보여드릴까요?" 나는 짜증 내며 계란을 뱉고 지갑에 손을 뻗었다.
"얘야, 이건 친근한 대화지 푸드 파이트가 아니란다." 부사관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이 식사의 계산서 뿐이지."
"저를 입대시키려고 정말 애쓰시는군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계산서를 건넸다. "모집 담당관이세요?"
"응, 모집 담당관이지. 나는 킹 하사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린... 린 블랙이요."
"음, 린 블랙, 자원하면 임무와 복무하고 싶은 나라를 선택할 수 있어. 어때?"
"그리고 그 뒤에 할 일은 뭐죠?"
"어디서 밤을 보낼지 궁금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겠구나." 킹 하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말하는 걸 들었어."
"그럼, 내가 혼잣말 하는걸 멈추고 해야 할 일이 입대란 소리인가요?"
킹 하사가 웃으며 말했다. "바로 길 건너편에 내 사무실이 있단다."
나는 식사 후 입대했고, 미 육군이 비용을 지불한 YMCA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보잉 707을 타고 캘리포니아주 포트 오드에서 신체검사와 기초 훈련을 받았다. 기초 훈련을 받는 동안 나는 켄터키주 포트 녹스의 고급 리더십 학교에 선발되어 기갑 학교에 가게 됐다. (그리고 포트 녹스는 군이 금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킹 하사는 유럽(독일)의 제13 기갑병단에서 3년간 현역으로 복무하며 유럽의 모든 위대한 미술관과 고전 거장들의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거기다 군에서 유럽을 여행 경비도 지원해 준다고 했다. 정말 좋은 거래였다!
내 열정이자 가장 큰 야망은 항상 미술 화가로서 인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시애틀 지역 방송국 미술부에서 일했다. 아트 디렉터인 로버트 C. 딘스모어는 훈장을 받은 2차 대전 참전 용사로, 내가 군 복무를 마치도록 격려해 주었다. 1963년의 세상은 평화로운 곳이었고, Leave It To Beaver와 I Love Lucy가 텔레비전에 나오던 시기였다. "내가 왜 자원했는지 궁금할 거야..."
"나한테 말한 거야?"
"죄송합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1963년 린 블랙 주니어 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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