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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공수여단은 월남에 배치된 최초의 미 육군 부대였다. 5월 12일 1216시, 16기갑 D중대가 동남아의 파리라 불리는 사이공의 항구에 도착했다.


"그럼 이제 72시간 동안 적군을 막아내야 합니까? 그게 경계 임무입니까?" 안토스코프가 소대장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여긴 냄새가 지독하네." 로그스던이 불평했다. "메탄가스도 많으니 성냥은 켜지 마. 나라 전체가 일본의 사탕수수밭처럼 될 거야."라고 말하며 그는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비행기 타고 하와이에서 내릴 때 나는 꽃 냄새와는 다르지?" 웨스터맨이 조롱했다. "다음 달에 아내를 만나기로 했는데... 어쨌든 장비나 챙기자." 한 시간 후, 우리는 버스와 트럭을 타고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 중대는 1819시에 비엔호아에 도착하여 서둘러 베이스캠프를 준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D중대의 첫 전투 임무는 매복 순찰의 형태였다. 우리는 3일 동안 매일 12명의 병사들을 503연대 1대대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갑한테는 너무 빡세! 이 빌어먹을 땅개들! 우리 없이는 일도 못 하냐." 안토스코프가 불평했다. "블랙, 매복 순찰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


"어느 날 밤 트레일에서 굽어진 부분에 L자 매복을 설정했지. 거의 관통되지도 않을 정도로 덤불이 빽빽한 곳이었어. 시야도 몇 야드로 제한됐지. 자정 무렵에 몇 명이 이야기 하면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통금 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베트콩이라고 생각하고 교전 준비를 했지. 그들이 약 20피트 떨어진 지점까지 왔을 때 땅개 한 명이 코를 골기 시작했어."


"세상에." 그리고 안토스코프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어?"


"목소리가 멈췄어. 우리는 모두 숨을 참고 있었는데, 잠자던 녀석이 정말 큰 소리로 코를 골았어. 순찰대장이 "저 녀석 깨워!"라고 소리까지 쳤지. 그렇게 우리 매복 작전이 끝났어. 우리는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캠프로 돌아갔고."


"걔들이 베트콩이라고 생각해? 직접 봤어?"


"아무도 못 본 것 같아. 그냥 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한 명이 걸어가면서 웃었어."


"웃는 소리가 참 싫긴 하지, 안 그래?"


이게 진지한지 아닌지도 정말 모르겠다. 적어도 오키나와 FTX보다는 덜 엄격한 것 같다. 이 순찰 행위는 말도 안 되는 시간 낭비다.


5월 18일, 우리 차량이 도착했고 중대는 차량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신이시여! 이제 보병들과 순찰을 그만해도 되는 겁니까. 저희는 땅개가 아니라 기갑 부대원입니다." 한 승무원이 불평했다.


나도 동의한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비참한 곳을 걷고 싶어 하지 않을 거다. 벌레, 뱀, 그 외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냄새 나는 젖은 땅에서 자고 싶어 하겠는가? 젠장! 나는 유럽에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


5월 19일, 1소대는 319포병연대 3대대에 배치되어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남은 한 달은 훈련과 방어선을 끝없이 개선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몇 주 동안 순찰을 하지 않을 때는 3중 철조망을 쳐 경계선을 형성하고, 끝없이 참호를 수작업으로 파고, 수천 개의 모래주머니를 채웠다. 또한 버려진 팔레트 위에 판자와 합판 바닥을 쌓아 바닥을 만들고, 승무원이 잘 수 있도록 GP 대형 캔버스 텐트를 세우기도 했다. 모래 지대에 텐트를 올바르게 세우는 방법을 알아낼 때까지 강풍과 폭우로 인해 많은 텐트가 무너지는 일이 반복됐다. 그리고 D중대 대원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몇 피트씩 뛰어오를 수 있는 거미 같은 벌레들을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


"A & B 팀 같은 거네." 승무원 중 한 명이 관찰하며 말했다.


"A & B 팀? 빌어먹을 땅개처럼 말하기 시작하네." 다른 승무원이 그를 놀렸다.


우리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모래주머니를 채우는 동안 파낸 모래 속에는 밝은색의 전갈이 있었다. 매일 아침 군화를 신을 때마다 전갈과 거미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가장 성가신 것은 흰개미였다. 수십만 마리의 흰개미가 있는 거대한 흰개미 둥지가 있었다. 이것들은 선선한 밤에 나와서 모래로 된 땅이 스스로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줬다. 이 둥지는 나뭇가지, 이파리, 기타 유기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때 한 대원이 이 둥지를 파고 가솔린을 붓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그다음은 모두의 예상대로... 점화했다.


"똥통을 태우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네." 사병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냄새도 더 낫고 말이지."


끝없이 참호를 파고,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벙커를 만들고, 철조망을 묶고, 텐트를 세우면 바람과 비 때문에 참호와 벙커가 침수되고 텐트도 쓰러졌다. 다시 반복해서 텐트를 쳐야 했다! 그리고 땅개와 함께 순찰을 나가고, 주방 업무를 맡고, 경계 임무도 수행했다. 부사관들은 어떻게 이런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걸까? 주방 업무에 너무 지쳐서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았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우리를 준비시키려는 건가 하고 말이다. 냄비와 프라이팬으로 말이다.


5월 마지막 날, 윌리엄슨 장군은 4일간의 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스카이 솔져들은 세 개의 개별 목표를 공격했다. 저항은 가벼웠고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우리 병사들은 격렬한 전투를 겪진 않았지만, 월남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수행한 이 공세 작전은 173공수여단의 자신감에 큰 기여를 했다.


6월 3일, 제16기갑 D중대는 503보병연대 2대대의 철수를 위해 호송대 엄호를 맡았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173여단의 화력을 보강하고 세 번째 기동대대를 구성하기 위해 1965년 6월 10일에 호주에서 도착한 왕립호주군연대 1대대를 배치했다. 주로 말레이시아 전투 참전자들로 구성된 왕립호주군연대 1대대는 자체 공병대, 장갑차, 헬기, 포병대를 데려왔다. 호주군의 합류로 173여단은 베트콩을 본격적으로 공략하는 데 필요한 추가 전력을 얻을 수 있었다.


6월 중순, 우리 중대는 경로 정찰 및 무력 과시 유형의 임무를 수행했다. 


'무력 과시'! 도대체 누구에게 말인가? 월남인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들기만 한다.


6월 23일, 중대는 첫 강 도하에 나섰다. 선두 장갑차가 탄우옌에 있는 월남군 기지까지 가기 위해 손돈나이 강에 입수했다. 하지만 첫 수영의 흥분에 운전병은 도하용 판을 펼치는 것을 잊었다. 판이 있었다면 강물이 장갑차 앞쪽으로 밀려와 모든 해치를 침수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장갑차와 당황한 승무원들은 강에서 끌어내야 했다. 데이브 웨스터맨은 운전 매뉴얼에서 도하용 플레이트가 펴진 사진을 가리키며 지휘 차량에 다가갔다. 중대장인 조던 대위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탄우엔에 있는 월남군 캠프에 임무 지연 신호를 보내야 했다. 


이 사람들은 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보고서에는 "D중대원들은 나중에 쓰일 귀중한 실용적인 지식을 많이 얻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아침 보고서의 문장은 다음 줄에 "D중대 베이스캠프 텐트 설치율은 100%"라는 문장이 읽힐 때까지 본부 지휘관 회의에서 몇몇이 웃음을 참게 했다. 보고서의 이 항목은 노골적인 웃음을 불러일으켰고, 당황한 중대장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6월 27일, D중대는 4일간의 경계 임무를 위해 다시 319포병연대 3대대에 배치됐다. 프억록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적의 사격을 경험했다. 한 발뿐이었고 맞은 사람은 없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한 발은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후에 레온 R. 세인트 클레어 하사가 .50구경으로 저격수를 처리한 공로를 인정받았고, 존스 병장이 지휘하는 M56 SPAT는 포탄 한 발로 5명을 사살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쟤들은 한 발 쐈는데 우리는 50구경 200발과 포탄 한 발까지 쐈어! 젠장, 크리스마스 전에 탄약이 다 떨어지겠으니 오키나와에서 재보급을 받아야겠구만." 지휘관이 투덜거렸다. "정보가 있는지 시체를 확인해 봐."


시체 사이에 무기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보기엔 민간인 농부들 같았다. 


"무기 찾은 사람 있어?" 우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젠장! 이런 상황에 대비한 훈련은 못 받았다고!


6월 말, 173여단은 월남군 공수부대 2개 대대와 월남군 보병 1개 대대와 팀을 이뤄 "워존 D"로 공중강습을 감행했다. 


즉, 워존 A, B, C도 있다는 얘기다. 거기는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이번이 우리의 진짜 첫 임무였다.


우리 부대원들은 지상에 겨우 내려와 진을 쳤는데,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총격이 날아왔다. 그리고 우리 순찰대 중 다수가 무기, 탄약, 폭발물, 선전 자료들이 있는 여러 은닉처를 발견했다. 밤 동안 베트콩이 끊임없이 우리 경계선을 수색했다.


7월의 첫 작전은 503보병연대 1대대와 함께 진행된 수색 및 파괴 임무였다. D중대는 여단이 워존 D의 남쪽 끝에서 작전을 수행함에 따라 319포병연대 3대대를 지원하면서 도보 순찰을 수행하는 데 능숙해졌다. 월남군 제48 보병연대는 차단 진지를 구축했고, 우리 173여단는 북쪽에서부터 이 지역으로 진격했다. 503보병연대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숫자로 베트콩과 즉시 교전을 시작했다. 이 4일간의 작전 동안 503보병연대 1대대는 1,2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광대한 베트콩 베이스캠프를 압도했다. 제복을 입은 베트콩 중대 전체가 기지 지역을 방어하며 우리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철수할 때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캠프는 매우 정교하게 지어져 식당과 교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1톤이 넘는 적 문서와 수십 개의 무기, 몇 톤가량의 쌀, 28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7월 16일, 중대는 503보병연대 1대대 및 공병중대와 함께 수색 및 파괴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 중에 내 남동생인 휴가 박격포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고, 그의 친구 몇 명이 죽었다. 휴는 AO에서 후송되어 미 본토로 돌아갔다.


씨발놈들! 내 동생만큼은 안 돼! 동생만큼은 안 된다고! 모습을 드러내라, 이 겁쟁이들아! 젠장! 배트콩 놈들이 덤불에 숨어 있는 동안 우리는 도로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놈들은 우리를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놈들을 볼 수 없었다. 도대체 놈들은 어디에 있는 거야? 누군가는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미안, 휴. 내가 같이 있어야 했는데... 놈들을 반드시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D중대는 수색 및 파괴 임무에서 503보병연대 2대대와 함께 3일간의 차단 임무로 이동했고, 이 임무는 7월 22일에 끝났다. 7월에는 부소대장인 허먼 L. 트렌트의 지휘하에 4.2인치 박격포 운반 장갑차인 M106 4대가 새로 배치됐다. 이제 우리는 11마일을 쏠 수 있는 90mm 주포와 4.2인치 박격포, 최대 11명의 보병을 태울 수 있는 장갑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D중대는 강력한 전쟁 기계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11마일을 쏠 수는 있었지만 바로 앞에 있는 적들은 여전히 볼 수 없었다. 너희 개새끼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1965년 8월, 173여단은 비엔호아 지역에서 첫 진격을 감행했다. 사이공에서 북쪽으로 약 200마일 떨어진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경의 교차점에 인접한 콘툼 지방이 있었다. 이 콘툼이란 삼중 국경 지대에 미 육군 특수부대가 일련의 고립된 캠프를 여러 개 설치했다. 소수의 그린베레가 지휘하는 현지민들로 구성된 이 캠프는 호치민 트레일을 따라 월남으로 침투하는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을 탐지하는 조기 경보 기지 역할을 했다. 그린베레와 그들이 지휘하는 CIDG(민간 비정규 방위군)은 콘툼 지방의 중부 고원 지역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실제로 적군이 여러 그린베레 캠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정도이기도 했다.


이 황량한 캠프 중 하나인 플레이쿠 서쪽의 두코 캠프는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월남군 연대가 파견되었다. 이 월남군 부대는 두코에 도착하기도 전에 월맹군과 교전이 발생했다. 월남군 고위 사령부는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자 했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탄빈 고개를 통과하는 주요 철수 경로를 확보하지 못하면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73여단은 다른 미군 부대 및 월남군과 함께 두코 그린베레 캠프의 포위망을 뚫었다. D중대 중대장인 조던 대위는 중대를 이끌고, 다른 기갑 순찰대와 경계 부대와 같이 도보 순찰을 통해 베트콩 거점으로 의심되는 곳을 공략했다. "조던 대위님, 저도 함께 순찰에 가겠습니다."


"블랙, 넌 우리와 함께 갈 만한 상태가 아니다. 나는 군인이 필요하지, 복수에 혈안이 된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다."


173여단은 탄빈 고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여단의 대부분은 8월 초에 북쪽으로 향했다. 작전 첫 주 동안 우리 스카이 솔져들은 적의 주요 지형지물을 차단하기 위해 대규모 헬리본 공격을 수행했다. 월남군이 후퇴를 완료하자, 173여단은 플레이쿠로 이동했다. 그리고 남은 한 달 동안 그 지역에서 수색 및 파괴 임무를 수행했다.


8월 6일, D중대는 호주 왕립 보병 연대를 작전 지역으로 수송했다. 이번에는 장갑차에 있는 스윔 베인을 펼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6기갑 D중대는 "워존 D"에서 확인된 목표물에 직간접적인 화력 지원을 제공했다. 105mm 곡사포는 사거리가 약 5마일에 달했고 베트콩을 밀어냈다. 90mm 대전차 자주포의 사거리는 11마일이었고 105mm와 함께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전방 항공 관제사는 우리가 화력 임무를 완수했다고 알려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누가 알겠어." 웨스터맨이 대답했다. "이건 장거리 포격 임무라서 우리는 적을 못 봐. 적도 우리를 보지 못하고. FAC가 성공했다고 하면 어딘가에 적의 시체가 잔뜩 있다는 거겠지."


8월 17일, 2소대와 3소대는 지휘 차량과 함께 플레이쿠 지역에서 연장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출발했다. 플레이쿠에 머무는 동안, 로빈스 중위의 2소대는 1954년 프랑스 기갑부대가 패배한 계곡을 돌파하여 중대에서 최초로 전과를 세웠다. 무력 과시 임무를 맡은 트렌트 병장과 그의 소대는 첫날 밤, 베트콩 공병의 공격을 받았다. 트렌트와 그의 승무원들은 50구경으로 속사를 가해 적 반군을 몰아냈다.


"적들이 몇 명이나 있었는데?" 내가 물었다.


"몰라. 실제로는 아무도 못 봤거든. 병장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 쏴 갈겼을 뿐이야."


여단이 비엔호아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워존 D로 돌아갔다. MACV의 정보망은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는 적 대대를 여럿 식별했지만, 실제로 우리가 적과 접촉한 것은 산발적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우리가 수색을 통해 많은 양의 귀중한 문서, 무기, 보급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503연대 1대대 C중대 하나만 해도 스코프가 장착된 저격총 62정, 수류탄 4,500개, 무전기 30여개를 발견했다.


1965년 9월 9일, 조셉 C. 조던 주니어 대위는 여단 본부의 참모직으로 가며 중대 지휘권을 내려놓았다. 이전에 본부 중대장이었던 존 E. 던롭 주니어 대위가 중대 지휘를 맡았다. 다음 날 던롭 대위는 중대를 이끌고 벤캣 1 작전에 투입됐다. 그날 밤 베트콩 공병들이 루돌프 웬츠 하사의 차량으로 수류탄 두 개를 던지며 우리 경계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웬츠 하사는 즉시 .50구경을 발포했고, 나는 3/4톤 트럭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발포가 시작되자 나는 일어나다가 차량 밑면에 머리를 부딪혔고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들은 사실상 내 쪽으로 바로 걸어왔지만, 나는 방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이 스페셜리스트 친구는 퍼플 하트도 못 받겠는걸." 던롭 대위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작전을 시작한 지 5일째 되는 날, D중대는 재보급 부대가 13번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압벤까우의 다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동했다. 부대가 다리를 건너자, 우리는 압바우방 갯벌 화력 진지에 발이 묶인 319 포병연대 3대대 뉴질랜드군 A포대에 대한 경계 및 구출을 수행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들이 포탄을 한 발씩 쏠 때마다 포가 진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뉴질랜드군 대대장은 D중대에 "A 포대의 구세주"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던롭 대위는 기뻐했다. 


내가 보기엔 보험사 서비스와 다를 게 없었는데 말이다.


압바우방에서 중대는 라이케 고무나무 농장에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순찰 중 부소대장인 허먼 트렌트, SP5 카릴로, 헨리 S. 배이커 일병, 로버트 L. 아담스 일병이 보이지 않는 적들의 집중적인 박격포 공격을 받아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SP4 크레이그가 두 명의 목숨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고 나중에 군인 훈장을 받았다. "그는 동성훈장을 받았어야 했어." 한 부사관이 투덜거렸다. 


보이지 않는 적들... 땅개가 될 걸 그랬어. 걔들은 분명 적을 봤겠지. 그러고 보니 휴는 매디건 병원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173여단의 다음 목표는 신비로운 "철의 삼각 지대"였다. 사이공에서 북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철의 삼각지대는 13번 고속도로를 따라 벤캣 바로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여단의 임무는 미국에서 제1 보병사단이 오기 전에 해당 부대의 본거지가 될 곳의 인근 지역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여단은 거의 불가능한 임무를 맡았다. 철의 삼각지대는 수년 동안 베트콩의 견고한 점령지역이었다. 그동안 반군들은 울창한 정글이 우거진 50km²에 달하는 지역을 월남 전역에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점으로 만들었다. 울창한 정글 때문에 베트콩은 대규모 영구 캠프를 건설할 수는 없지만, 철의 삼각지대 지하에 정교한 땅굴을 촘촘히 깔았다. 이러한 지하 네트워크는 베트콩에게 구호소, 훈련실, 보급 창고, 행정 사무실 등의 시설을 제공했다. 또한 베트콩은 월남군이나 미군이 철의 삼각지대를 넘보지 못하도록 수천 개의 지뢰와 부비트랩을 설치했다. 철의 삼각지대의 평판이 너무 악랄했기 때문에 3년이 넘도록 이 지역에 감히 들어선 월남군 부대는 없었다.


1965년 10월 8일, 173공수여단의 철의 삼각지대 진출이 시작되었다. 대규모 포격, B-52 폭격, 제트기 공습에 이어 173여단의 부대들이 철의 삼각지대를 향해 공중강습을 감행했다. 왕립 호주군 연대 1대대는 사이공 강을 따라 서쪽으로 약 8마일 떨어진, 벤캣과 벤숙 사이, 철의 삼각지대 북쪽의 LZ에 배치됐다.


1965년 10월 8일, D중대는 수색 및 파괴 작전을 위해 비엔호아 기지에서 출발하여 철의 삼각지대로 향했다. 벤캣으로 향하던 중 세인트 클레어 하사의 장갑차는 엔진에 문제가 생겨 도로 옆으로 밀려나야 했다. 나머지 차량들이 계속 이동하는 동안 구난 차량이 파견되었다. 정비병인 데이브 웨스터맨과 함께 정비 구난차량이 도착했고, 현장에서 장갑차를 가동할 수 없었기에 차량을 벤캣으로 견인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커브길에서 베트콩의 지뢰로 장갑차가 완전히 파괴됐고, 운전병인 마이클 브랜카토 일병이 사망했고, 세인트 클레어 하사, 웨스터맨, 샘슨 무어가 중상을 입었다.


"개새끼들이 우리를 날려버렸어." 이후에 웨스터맨이 철사로 묶인 턱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을 더듬으며 설명했다. "장갑차를 날려버리고 거꾸로 뒤집어버렸어. 그리고 브랜카토까지 죽였어... 착한 녀석이었는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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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웨스터맨의 얼굴에 난 부상)


워존 C, 워존 D, 철의 삼각 지대, OPLAN의 "뉴 라이프"와 12월의 "스매시", 수색 및 파괴, 호송 보안, 차단군 임무 등 우리들의 임무는 계속되었다. 


제16기갑 D중대가 베이스캠프에 있었을 때 우리는 여러 시민 활동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우리의 주요 프로젝트는 호나이 카톨릭 고아원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고아원의 건물 중 하나가 베트콩의 박격포 공격으로 파괴되었기에 나는 건물을 재건할 계획을 세우고 현지 상인과 협력하여 자재를 구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중대는 고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얼었다. "경계 활동하고 크리스마스에 오키나와로 돌아가자니 너무 힘들다." 안토스코프 녀석이 투덜거렸다.


"장난해? 내 마누라는 하와이에 못 데려갔다고 아직도 편지로 성토하고 있다고." 웨스터맨이 불평했다.


그렇게 우리는 고아원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우리는 SPAT를 순록과 크리스마스트리가 달린 산타의 썰매로 개조했다.


이 첫 파병은 내가 SP4로 진급할 때까지 처음 6개월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1966년 7월에 사회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나는 워싱턴주 시애틀의 KING-TV에서 프레스턴 프라이스라는 사람이 진행하는 텔레비전 아침 쇼에 출연했다. 나와 함께 반전 시위자가 된 육군 헬기 사수가 출연했다. 30분 동안 진행된 쇼에서 이 도어거너는 미국이 동남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대편 세계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왜 미국의 자유에 영향을 미치냐?"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징집 연령의 젊은이들이 명분 없는 전쟁에 참전할 책임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불법적인 권력의 사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의 그의 요지였다. 그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었고, 나는 그를 겁쟁이이자 조국에 대한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나는 즉시 의무, 명예, 국가에 대한 연설을 시작했고, 누구라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확실히 나한테는 그랬다. 내가 원했던 것은 휴를 공격한 보이지 않는 적들을 조지는 것이었다. 이는 도어거너의 결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스튜디오의 불이 꺼지고 인접한 다른 스튜디오의 맥주 및 가전제품 광고가 장시간 진행되는 동안 우리 아침 쇼 게스트 둘은 서로 떠들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적들 때문에 내 동료 병사 몇 명을 죽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내 동생과 가장 친한 친구는 평생 불구가 되었거나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 그 파병 기간 동안 적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하와이의 아파트에 앉아 저녁 뉴스를 보면서 나는 죄책감과 화가 났고, 외로움과 함께 복수심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때쯤 미군 비행기가 하노이와 하이퐁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숨어봤자다, 개새끼들아!"


허나 월맹이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월맹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WTF), 재입대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