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의 평원에는 승리의 여명에 쉬다가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시커먼 뼈가 누워 있다.
-애들레이 스티븐슨
나는 무릎 높이의 갈풀밭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월맹군 병사의 어깨를 죽기 살기로 붙잡고 있었다. 내가 그의 AK-47의 총신을 잡고 밀쳐내는 동안 서로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나는 내가 곤경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리의 통증으로 힘이 안 들어갔다! 거기다 숨쉬기조차 곤란했다. 우리는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그는 겁에 질려 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약 40m 떨어진 풀밭에서 기고 있던 팀원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AK-47의 방아쇠를 당겨 나를 쏘려고 했다. 총알은 나를 빗나갔다. 나는 점점 힘이 빠지고 호흡이 어려워졌지만 그를 포로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내 위로 구르며 더 격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CAR-15를 그에게 겨누고 어깨에 한 발 쏘았다. 그러면 싸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가 여전히 나를 압도했다. 그는 계속해서 팀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내게 총을 쐈다. 나는 극심한 고통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는 내 CAR-15의 총신을 잡고 있었고 나는 그를 겨누지 못했다. 월맹군 병사는 내가 압도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곧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내 CAR-15의 총신을 놓더니 내 코를 정말 세게 가격했다. 코에서 피가 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리고 다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죽음을 체감한 자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내 CAR-15를 놓은 탓에 내가 그의 얼굴을 향해 총을 겨누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1초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나는 CAR-15의 총구를 그의 뺨에서 약 6인치 떨어진 그의 머리를 향하게 했다. 이 시점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눈을 감았고, 내 포로 생포 시도에 따르지도 않았다. 내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를 죽여야 했다. 나는 연사로 5발을 그의 얼굴에다 곧바로 쏘았다. 그의 머리가 말 그대로 폭발하면서 내 얼굴과 머리가 그의 피, 뇌, 뼛조각, 노란 지방 조직으로 뒤덮였고, 곧바로 그의 경동맥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머리가 거의 다 날아간 그의 몸이 축 늘어지면서 총격전과 내가 마주한 현실의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의 팀원들이 이미 죽은 그에게 거의 다 왔다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나는 풀밭으로 20~25발가량 연사를 가하고 수류탄을 그들에게 던진 다음, 몇몇 월맹군이 반격하는 동안 폭탄 구덩이를 향해 구르기 시작했다. 구르는 동안 나는 아주 오래전 숲속에서 혼자 군인 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1947년 1월 3일에 태어나 클렘슨 대학교에서 멀지 않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작은 마을인 월할라에서 자랐다. 나는 군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인 헨리 L. 톰슨 주니어 병장은 2차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한 참전 용사였다. 아버지와 5명의 외삼촌인 클라이드 J. 허드슨 일병, 레이 허드슨 일병, 해럴드 허드슨 일병, 알튼 허드슨 병장, 도일 허드슨은 모두 동 시기에 2차 대전에 참전했다. 어머니인 크리스틴 허드슨 톰슨은 6회에 걸쳐 블루스타 패밀리에 속했다. *1944년 11월 19일에 블루스타 중 한 명이 골드스타가 되었다. 외삼촌 중 한 명인 클라이드 J. 허드슨 일병이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누구도 원치 않는 골드스타 패밀리의 일원이 되었다.
*블루스타 패밀리: 참전한 군인의 직계 가족, 골드스타 패밀리: 전사한 군인의 직계 가족
내가 기억이란걸 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부터 나는 전쟁과 군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들이 자주 모였기 때문에 전쟁과 전장과 후방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아버지와 외삼촌들에게 더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군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소대가 무엇을 하는지 등을 알고 싶었다.
아버지는 대부분 보병으로 복무하셨지만 레인저에서 시간을 잠시 보내기도 하셨다. 가끔 아버지가 외삼촌들에게 자기가 어떤 작전에 참여했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곤 했다. 아버지는 약 4년간 군대에 있었고 2차 대전이 끝나고 제대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현역으로 복귀해 한국으로 파병 가셨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기에 전쟁에 대해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편지를 써서 어머니에게 진흙이 얼마나 깊었는지, 얼마나 추웠는지, 전쟁이 어땠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전쟁과 군대는 나를 매료시켰고, 한국 전쟁에 대해 직접 듣게 됐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돌아와 우리가 새로 살게 된 집은 내가 뛰어놀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작은 농장이었다. 집에 수도가 있었지만 실내 화장실은 없었다. 실외 화장실에 가려면 날씨를 이겨내야 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화장실로 가려면 길 위를 지나야 했다. 우리 집 앞을 지나는 비포장도로가 집과 헛간, 화장실을 나누었다. 화장실로 가려면 도로를 건너 헛간으로 가야 했다.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는 큰 칠면조를 사셨다. 칠면조 옆에 서면 나하고 키가 같고 눈도 마주칠 정도로 컸다. 이 칠면조는 매우 공격적이고 영역 의식이 강했다. 칠면조는 도로의 헛간(그리고 화장실) 쪽의 모든 구역을 자기 것으로 보며 맹렬히 지켰다. 내가 길을 건너는 것을 보면 바로 공격해 댔고, 종종 나를 땅에 쓰러뜨리고 화장실을 못 쓰게 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하자 아버지는 "맞설 줄 알아야지. 네가 칠면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 걔가 물러서게 해."라고 말하셨다. 나는 "저도 맞서긴 하지만, 칠면조가 저보다 크고, 강하고, 빠르잖아요. 게다가 제가 넘어지면 엄청 쪼아대는걸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맞아, 하지만 너는 칠면조보다 똑똑하잖니. 칠면조한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방법을 생각해 내고, 도로변이 네 구역이라는 걸 보여줘."라고 말하셨다.
(2차 대전 당시의 삼촌들과 아버지)
그렇게 내 특수작전 현장훈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길 반대편으로 침투하는 법, 은엄폐, 주의를 분산시켜서 칠면조가 반응하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는 법 등을 배웠다. 그리고 돌과 새총으로 무장하여 철수 중에도 칠면조를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부모님의 칠면조 대처법도 지켜보았다. 부모님은 칠면조에게 달려들어 소리를 지르며 쫓아내곤 하셨다. 나는 이걸 따라 해보기로 했다. 새총으로 무장한 나는 저리 가라고 소리치며 돌을 쏘고 소리를 지르며 칠면조에게 달려갔다. 칠면조는 내가 등을 돌릴 때까지 나를 피해 도망쳤다. 이 전술을 몇 번 반복했지만, 결국 내가 칠면조한테 달려갈 때만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종적으로는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에 이 칠면조가 나오며 내가 승리했다.
내 일곱 살쯤 되었을 때 나는 군대를 만들기로 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톰슨즈 레인저였다. 훗날 군에 입대하여 칼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사촌 에디가 내가 군대를 조직하고 다른 대원을 모집하는 것을 도왔다. (칼은 월남에서 3년을 보냈으며 제75 레인저 G중대원이었다) 사촌인 조, 래리(일명 LD)와 대니가 첫 신병이었다. 이후에 사촌 팻시(일명 팻)가 우리의 유일한 WAC(Women's Army Corps/여군) 대원이 되었다. 우리는 거기서 가족 외의 다른 사촌과 친구들을 데려오면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대원들과 그들의 성과를 기록할 수 있는 일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한 대원이(우리 사촌은 아니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쫓겨났다. 그는 우리의 최초이자 유일한 불명예 제대자였다. 그리고 기록상으로, 일지에 따르면 나는 제69 레인저 연대, A중대, 2소대를 지휘하는 톰슨 장군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일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4살 때부터 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이미 "그 길"에 들어섰다. 내 일지에 따르면, 사촌들과 함께 1958년에 "Darby's Rangers"라는 영화를 본 날, 나는 실제로 레인저가 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내 행동과 관심사는 점점 더 특수전에 집중됐다. 나는 총을 쏘는 것뿐만 아니라 사격술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폭죽뿐만 아니라 폭발물을 만드는 것도 말이다. 단순히 숲에서 군대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위장을 하고 땅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레인저 일지)
나는 숲에서 자랐다. 다섯 살 때 틈만 나면 숲에 갔다. 칼이 놀러 오지 않는 한 대부분 혼자 가서 동물을 쫓고, 숲의 소리를 듣고, 이동 중이거나 정지 상태에서 위장하는 방법을 연습했다. 옥수수밭에서 개미를 추적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을 갖고 싶었지만, 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섯 살 무렵에는 군용 텐트를 가지고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숲이 우거진 언덕에 올라가 텐트를 치고 홀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주말이면 칼과 나는 계란과 베이컨을 가져가 불을 피우고 아침으로 요리해 먹곤 했다. 조금 더 자라서 BB탄총이 생겼을 때는 새를 잡아서 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칼과 나는 레인저가 할 법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여럿 했다. 또한 나는 내게 스파이더 센스 같은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조용한 도그 휘슬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500m 떨어진 소나무를 오르는 모기의 암수를 구분할 수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능력과 뱀 냄새를 맡는 능력도 있었다.
우리는 알튼 삼촌이 전쟁에서 독일제 드레스 나이프를 가져온 것을 알게 됐다. 삼촌은 죽은 독일 장교에게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나이프를 만지는 것이 허락되진 않았지만 삼촌이 어디에 보관했는지는 알았다. 그래서 가끔 삼촌이 집을 비울 때 나이프를 꺼내서 놀곤 했다.
내 미래 계획을 엎은 폭풍은 내가 13살 때 찾아왔다. 수학과 과학은 항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산타로부터 크리스마스에 화학 세트를 받았고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화학에 대한 열정이 생겨서 군대와 화학이라는 기로에 서게 됐다. 토요일 자정에 쇼크 시어터에서 본 괴물 영화를 따라 거기서 나온 실험 중 일부를 따라 하기도 했다.
레인저에 대한 것들 외에도 헛간에 나만의 연구실을 만들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과 모든 용돈을 화학약품과 실험장비에 썼다. 그 당시에는 약국에서 온갖 화학 물질을 살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화학 물질을 두고 어머니가 "농축 질산을 사도 괜찮단다."라고 허락하는 모습은 믿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실험을 위해 모든 종류의 화학 물질과 실험 장비를 실험실에 구비해 뒀다. 어느 순간 나는 새와 개구리 사이의 성공적인 뇌 교환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개골에 뇌를 넣을 수는 있었지만, 그 후에 실험체들이 다시 숨을 쉬게 할 수는 없었다. 심장 교환도 시도했지만 심장이 다시 뛰게 하는 데도 실패했다. 120볼트든 얼마든 전기를 아무리 흘려보내도 소용없는 것 같았다.
나는 또한 고체 연료 로켓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갖게 됐고, 작은 로켓에서 시작해서 점차 크게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큰 로켓 중 하나가 발사대에서 폭발하여 이웃집 창문이 깨졌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작은 로켓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내 침실에 로켓 연료가 몇 파운드나 있는지 전혀 모르셨다.
나는 고등학교 화학/물리 선생님인 시드 발린저 선생님과 친분을 쌓았는데, 선생님은 물리/화학 분야에서 나를 고등학교 이상 수준으로 이끌어 주셨다. 내가 과학 박람회 프로젝트에서 선생님께서 추천한 것과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선생님은 내 프로젝트를 좋아하셨다. 가끔은 헛간에 있는 내 실험실에 쓸 수 없는 실험 장비를 빌려주기도 하셨다.
(여러 과학 박람회 중 하나, 염색약 및 혼합물의 크로마토그래피 분리를 통해 오코니 카운티 과학 박람회에서 우승했다)
발린저 선생님은 학생들이 운전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최첨단 운전 교육용 기계를 가지고 계셨다. 여기서 비상 정지등이 켜졌을 때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테스트가 있었다. 나는 딱 한 명을 제외하고 고등학교에서 가장 빠른 반응 시간을 보였다. 발린저 선생님의 딸인 조이스가 그 예외였다. 조이스는 내 또래의 운동선수였고, 고등학교 마칭밴드인 "Majorettes"의 스타였으며, 스포츠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이스의 반응 시간에 더 감명받았다. 그녀는 반응 시간의 여왕이었으며 나는 조이스를 이길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학교의 매우 비싼 Bausch and Lomb™ 고성능 현미경을 빌렸다. 일주일 후, 내가 현미경으로 찍은 사진을 선생님께 보여드린 후 선생님은 방과후 내 연구실에 들러 내가 무엇을 하는지 보았다. 내가 정밀 현미경을 분해하여 내가 만든 사진 시스템과 통합된 부품으로 더 고성능의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선생님은 거의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내 시스템은 학교의 현미경보다 두 배 이상 성능이 좋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정신을 차리시자, 선생님은 다음날 학교에 현미경을 최대한 재조립해서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현미경을 새것처럼 다시 조립했지만, 그 일로 학교에서 비싼 장비를 다시는 빌려주지 않으셨다.
고등학교 때 나는 풋볼과 육상을 했다. 힘이 세고 빠른 데다 정말 세게 타격할 수도 있었지만, 대학 선수로 갈 만한 체구는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고등학교 3학년에 200파운드가 넘는 수비 라인맨들 사이에서 디펜시브 엔드를 맡았는데, 내 체중은 140파운드였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있는 곳으로 뛰려고 하지 않았다. 뉴턴의 제2 법칙에 따르면 힘은 질량에 가속도를 곱한 값이다. 내 질량은 비교적 작았지만 매우 빨랐고, 내 힘은 러닝백이나 쿼터백과 충돌해도 여전히 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내 쪽으로 오면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빨리 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쿼터백은 뒤로 물러나서 나를 지켜보곤 했다. 내 사촌이자 절친인 데릴 톰슨은 다른 쪽 디펜시브 엔드를 맡았는데, 우리 계획은 쿼터백을 양쪽에서 포위하여 샌드위치처럼 뭉개버리는 것이었다.
1962년 6월, 내 친구인 할 발린저가 스쿠버 다이빙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매주 로이드 브리지스 주연의 씨 헌트를 시청했고 자크 쿠스토의 책도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스노클링과 프리다이빙도 많이 해봤고 스쿠버 다이빙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변호사이자 전직 폭격기 파일럿, 2차 대전 포로 경험이 있는 할의 아버지인 하워드 발린저 씨가 산소통과 레귤레이터를 몇 개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풋볼 코치인 찰리 존슨도 취미 삼아 스쿠버 다이빙을 해보았고, 작은 스쿠버 공기 압축기를 가지고 있어서 발린저 씨의 산소통을 채우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호수에 도착하자 할은 레귤레이터를 산소통에 연결하고 산소통의 스트랩을 내 몸에 묶은 다음,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라고 말했다. 할은 내게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하고 물속으로 잠수했다. 이후 어떻게든 익사나 공기 색전증 없이 스쿠버 다이빙을 끝마쳤다.
몇 주 후 아버지의 형제인 로버트 삼촌이 해군에서 30일간 휴가를 받고 나왔다. 삼촌은 최소 3피트 길이의 판자처럼 딱딱한 오리발 등의 잠수 장비를 몇 개 가지고 있었다. 삼촌은 해군의 수중 폭파 팀 소속이라며 내게 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이후 나는 스쿠버 다이빙에 올인했다. 이것이 내 본격적인 스쿠버 다이빙 여정의 시작이었다. 거의 매일 물속에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내내 다이빙을 계속했고 1966년 11월 3일에 다른 고등학교 친구인 마이크 헤이머와 함께 공인 다이빙 마스터 및 강사가 되었다. 헤이머는 나중에 해군 씨비(Seabees)에 입대하여 1969년 월남 다낭에서 다시 나와 재회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앞으로의 길을 위해 정신적, 신체적 기술을 계속 쌓아가고 있었다. 또한 나는 남중국해를 포함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했다.
나는 196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학 장학생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스쿠버 다이빙을 계속하면서 무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학에서 봤을 때는 나라가 마치 장발에 마약을 해대며 반전을 외치는 히피들과 월맹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애국자들, 이렇게 두 집단으로 나뉘어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애국자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고 전쟁에 자원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년 반이 지나자, 월남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일 밤 뉴스에서 전쟁이 보도되었다. 이 시기는 월맹이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진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시기이기도 했다. 월맹군은 아마도 세계 4대 군대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그들의 뒷마당에서 싸우고 있었다. 월맹군은 훈련하는 방법과 작전 수행 방법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단점은 우리와 같은 기술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공중 우위도 없었다. 월맹군이 확보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월맹군들을 방해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미국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을 것이다.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월남에서 적을 무찌르는 애국적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나는 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고, 이는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가 군에 입대하는 것을 지지하셨지만 어머니는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를 마치기를 바라셨다. 나는 어머니께 "그냥 3년 휴학일 뿐인걸요. 돌아오면 박사 학위를 마칠 거고, 모든 게 잘될 거예요."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셨다. 나는 다시 돌아와서 학교를 마치겠다고 약속했다.
해병대가 매일 밤 TV에 나왔기에 해병대 신병 모집소에 가는 길이었는데(분명히 길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옆에 있던 육군 신병 모집소에 들러서 육군은 어떤 것을 제공하는지 보려고 했다. 모집관들은 흥분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해줄 것 같았다. "화학을 원해? 육군에는 화학 부대가 있어." 나는 화학 부대에 배치될 수 있다는 약속 때문에 육군에 지원했고, 육군에 있으면 원한다면 레인저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이 길에 들어섰다!
(월남에서 기관총 사수로 복무한 사촌 칼)
칼이 집으로 보낸 이 사진에 항상 감명을 받았다.
교훈
•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면 올바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길을 벗어나는 경우에는 옳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다시 길로 돌아와 올바른 길을 걷도록 하자.
• 모든 사람에게는 여러 길이 있지만,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길은 하나뿐이다.
• 길에서 경험하고 보는 것들이 서로 맞아야 한다. 그렇기에 계속 움직여라.
• 내가 입대하기 전에 이미 군에 있었던 사촌 칼은 "할 일이 주어지면 아무리 하기 싫고 주변에 아무도 없더라도 항상 최선을 다해라. 결국에는 보상이 있을 거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절대 잊지 않았고, 그의 말이 옳았다.
• 육군은 별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입대하자 나는 헨리(또는 덜 호감 가는 이름 몇 가지)로 불렸다. 내 절친한 친구들만이 나를 딕이라고 불렀다.
• 사건들이 모여 패턴을 형성한다. 패턴은 체계적 구조로 이어진다. 체계적 구조에는 규칙이 있다. 규칙을 배우면 자신의 길을 통제할 수 있다.
• 사촌 칼은 월남에서 3번 연속으로 파병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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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사람은 어릴적부터 특수하구나~ 비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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