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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병이다!


나는 보병이요, 전투의 여왕이로다! 2세기 동안 나는 조국을 지켜왔고, 피를 대가로 자유를 얻었다. 폭군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리라. 치열한 전투 속에 내가 있을지니... 나는 보병이다! 나를 따르라!


-스티븐 H. 화이트 중령의 각색 시


때는 1967년 1월이었다. 나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세네카에서 포트 잭슨이 있는 컬럼비아까지 버스를 타고 장거리 이동 중이었다. 신병들을 태운 버스가 정문을 통과해 포트 잭슨에 도착했으나, 신병 입소 센터까지 몇 마일이 아직 남았다. 도로 한쪽에는 철도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약 20피트 높이의 석탄차들이 몇 마일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버스 운전병은 남부 억양으로 "도로 옆에 쌓인 석탄 보이냐? 어제 버스로 신병들 데려왔을 때는 전부 도로 반대편에 있었어. 내일 이맘때쯤이면 너희들이 다시 저기로 옮겨 놓을 거다!(그리고 큰 웃음이 이어졌다) 너희들은 인생 최대의 충격을 받게 될 거다! 엄마 찾으며 울어도 소용없어. 여기 안 계시니까! 너희들 대부분은 월남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거다!"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몇몇 신병들이 훈련을 마치기 전에 사망했다. 그중 한 명은 고급보병훈련 때 나와 같은 침대를 쓰던 동기였다.


입영 센터 -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 잭슨


처음 입대했을 때 나는 3년만 복무하다가 제대해서 학교로 돌아가 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 화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소 첫날 새벽 0330시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는 막사의 이층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때 불이 켜지고 누군가가 침대에서 쳐 나와 대열을 지어 서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빨리 움직이지 못한 것 같았다. 이층 침대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침대 앞에 섰고, 말대꾸할 사람들을 으깨버릴 준비가 된 교관을 보았다!


내 덩치 정도 되는 남자가 큰 교관모를 쓰고 왼쪽 어깨에 검은색과 금색으로 이루어진 레인저 탭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와! 이 교관은 짐승 같은 인간이네. 아무도 그에게 대꾸하지 못할 거야! 제자리에서 뛰어라고 하면 모두가 '알겠습니다'라고 해야겠는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좋아, 진로를 다시 생각해야겠어. 이 사람은 레인저야. 정말 인상적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레인저가 되고 싶다는 사춘기 이전의 열망이 되살아났다. 교관이 케이던스와 함께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가던 중 나는 "공수 레인저가 되고 싶네! 위험천만한 삶을 살고 싶네."라고 말하며 푹 빠진 티를 냈다. 앞으로 3년 동안 무언가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한 이유가 뭐겠는가?


일주일 동안 연이어 시험을 치르고, 행군, KP(Kitchen Police-감자 껍질 벗기기, 설거지, 기름받이 청소 등)와 폴리스콜을 했는데, 멋지게 들리지만 사실 쓰레기, 특히 담배꽁초를 주워 모으는 일이었다. 첫날 훈련 교관이 내게 왜 담배꽁초를 안 줍냐고 묻자, 저는 "저는 비흡연자입니다.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포트 잭슨을 지구 반대편으로 밀어 넣을 정도로 푸쉬업을 해댔고, 이번에는 예외를 인정하고 줍기로 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유로도 팔굽혀펴기는 충분히 하고 있었기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며칠 후면 포트 잭슨을 떠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 수백 명은 말 그대로 가축 수송차(트랙터 트레일러 트럭)에 실려 조지아주 포트 고든으로 이동하여 기초 훈련을 받았다. 길고 춥고 비참한 여정이었다. 가축 운반차에는 소가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구멍이 많이 나 있었지만, 그때는 1월이었고 영하의 날씨였다.


그날 저녁 약 200명의 일행이 도착했을 때 무식해 보이는 훈련 교관이 우리 차에 올라타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순간부터 내가 너희들의 부모다. 내 지시가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도 쉬지 마라. 너희들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너희들이 어디 있는지, 피곤한지, 배고픈지, 추워하는지, 집에 가고 싶어 하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감히 그런 @$#* ##@** 소리는 하지 마라. 알겠나?" 우리 모두는 매우 큰 소리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는 "내가 가라고 하면, 모든 장비를 챙기고 버스에서 내려서 톱밥 구덩이에 있는 케이블에 줄을 서라!"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길을 터주며 "가라!"라고 소리쳤고, 우리는 버스에서 서로를 죽일 기세로 내렸다.


우리는 오늘이 운이 좋은 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줄을 서자 교관이 말했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몸뚱이와 장비를 가지고 내 뒤로 줄을 서라. 알아듣겠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알겠습니다, 교관님(Yes, drill sergeant)!"이라고 대답했다. 앞줄에 있던 한 사람은 "Yes, Sir"이라고 대답했다. "훈련생, 엎드려뻗쳐, 이 %$#새끼야. 나는 미 육군 하사다! 이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고. 절대로 날 Sir이라고 부르지 마라. 내가 질릴 때까지 푸쉬업을 실시한다."


"아담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이름을 호명하면, '여기 있습니다'라고 소리치고 장비를 들고 내 뒤에 줄을 서라. 알겠나?" 모두가 "알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푸쉬업을 하던 훈련병을 내려다보며 "날 다시 Sir이라고 부를 건가?"라고 물었다. 그 훈련병이 대답하기도 전에 교관이 말했다. "좋아, 똥 덩어리! 파충류처럼 배로 기어서 줄 끝까지 갔다가 최대한 빨리 돌아와라. 움직여!"


"잘 들어라, 쓰레기들아! 다시 한번 호명하겠다! 아담스!" 이번에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엎드려뻗쳐를 시키더니 푸쉬업을 시작하라고 했다. 그는 명단의 다음 이름인 "아디스"를 불렀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응답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몇 분간 계속되다가 다른 교관이 와서 그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교관은 "너희들 전부 장비를 챙겨서 루이스 교관을 따라 구보로 이동해라. 가라! 내 구역에서 꺼져!"라고 소리쳤다. 루이스 교관은 좋은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다음 해인 1968년 월남에서 전사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엉뚱한 대대 구역에 내려진 것이었다. 우리 중대는 길 건너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리는 더플백과 장비를 들고 구보로 이동해야 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대열이 완전히 흩어져 있었다. 모든 교관들이 굶주린 핏불 무리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는 뒤늦게 대열에 들어갔을 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안다고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육군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는 곧 "서두르고 기다리기"에 대해 배우게 됐다.


기초 훈련 - 조지아주 포트 고든


월남으로 보낼 인원들이 너무 방대해서 우리를 수용할 건물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나와 같은 운 좋은 소대들은 18' X 52', 중앙 높이 12', 양쪽에 작은 오일 히터와 함께 5'8"짜리 측벽이 있는 범용 대형 텐트에서 생활했다. 이 히터는 밤마다 항상 막혀서 열보다 그을음이 더 많이 나왔다. 대부분의 아침이 영하였던 추운 텐트에서 일어나면(기후 변화 이전이었다) 그을음으로 코가 막혔고, 장비 전체가 검댕으로 뒤덮였다. 화장실은 시베리아처럼 추운 텐트 밖에 있는 옥외변소였다.


우리가 포트 고든에 있는 동안 눈이 여러 번 내렸고, 눈의 무게 때문에 텐트가 우리 위로 무너지려고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훈련과 음식은 정말 훌륭했다. 세 끼 모두 감자를 먹었고, 아침으로는 SOS(Shit on a Shingle/크림과 다진 소고기를 빵 위에 얹은 음식)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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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20일~3월 24일, 조지아주 포트 고든, 제1 훈련여단, 제3 훈련대대, E중대.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병장 계급장을 단 사람이 나다.)


며칠 동안 우리 소대가 하는 것을 지켜본 비즐리 하사는 훈련병 한 명을 부소대장 훈련병으로 선발하여 병장 계급장이 있는 완장을 주며 소대 책임자로 임명했다. 나는 플래툰 가이드로 선발되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숙소 당직 근무를 맡게 됐고, 그날 밤 당직을 맡은 교관과 함께 행정반에서 근무해야 했다. 그때 책상 위에 육군 야전 교범, FM 22-5, 제식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교범을 살펴보니 오향우, 좌향좌, 구령을 내릴 때 등 이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책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래서 나는 그날 밤 교범을 읽었다. 다음 날 나는 교관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실수를 지적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포트 고든을 지구 반대편으로 밀어붙일 정도로 삼두근과 흉근을 단련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 만에 비즐리 하사는 나를 플래툰 가이드로 만든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제식 면에서 현명해지면서 나는 무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의욕이 넘쳤고 이걸 즐겼다!


나는 백병전 훈련 중 비즐리 하사가 앞차기를 가르칠 때 플래툰 가이드 직책을 잃을 뻔했다. 갑자기 나는 "저 발차기는 안 되겠어. 너무 느리고 머리가 너무 노출돼."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 순간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완전한 침묵이 흘렀다. 


비즐리 하사는 "이리 와라, 톰슨. 내 발차기를 막을 수 있을 만큼 빠르다고 생각하면 어디 해봐라. 그렇지 않으면 어린 계집애처럼 바닥에 누워 울게 될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울게 될 거다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사타구니를 향해 발차기를 가했다. 나는 전투화의 딱딱한 끝으로 블로킹 킥을 날려 교관의 정강이뼈를 반쯤 가격했고 교관은 바닥에 쓰러졌다. 교관의 바지에서 피가 스며 나오는 것을 보니 정강이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비즐리 하사는 루이즈 교관에게 훈련을 맡겼고, 나를 열외 시키라고 말했다. 비즐리 하사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 3일 동안 다리를 절뚝거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격장에 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말 흥분했다. 정말 좋았다! 몇몇 훈련병들은 실루엣 표적 사격을 거부했는데, 이는 전투에서 사람의 형상을 향해 사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나는 곧 M-14 소총 전문가 자격을 얻었고 중대 사격술 트로피를 획득했다. 당시 군인들이 특정 기준을 충족하면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무기가 15가지 정도 있었다. 수류탄도 그러한 체계 중 하나였고, 수류탄 전문가 배지도 받았다. 훈련 마지막 주에 나는 사격술 과정을 최고점으로 이수했고 체력 부문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당시 월남에서 중위의 기대 수명은 약 하루 반 정도였다. 중위들이 너무 빨리 전사하는 반면, 육군은 중위들을 빨리 배출할 수 없었다. 비즐리 교관은 내게 OCS에 지원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내가 기초 훈련을 마치기 전에 내 지원서가 승인되었는지 확인했다. 비즐리는 또한 기초 훈련을 마치고 내가 이등병으로 진급할 수 있도록 했다. 중위의 사망률을 고려하면 그가 나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가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남동생 부치가 내가 훈련 중대의 우수 훈련병으로 수료하는 모습을 보러 왔다. 수료 후 나는 인생 첫 상업 항공편을 타고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로 가서 고급 보병 훈련을 받았다.


리더십 준비 과정 -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포트 루이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고급 보병 훈련 기간 동안 소대장 훈련병이 될 준비를 위해 2주간의 리더십 준비 과정에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더십 준비 과정은 훌륭했다.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기본 훈련 기간 동안 평균 이상의 리더십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선발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예리했고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때 나는 좋은 친구가 될 두 사람, 밥 셰리던과 피트 맥머레이를 만났다.


간부들은 우리를 훈련병이라기보다는 군인처럼 대했고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고급보병훈련 중대에 합류하여 리더십 직책을 맡을 때가 되었다. 리더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 것 외에도 워싱턴주 시애틀의 포트 루이스에서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고급 보병 훈련 -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지휘자 훈련병 팀은 일반 훈련병보다 며칠 먼저 도착했다. 우리는 교관들과 중대 구역, 훈련 기간 동안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훈련병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 고급보병훈련은 내가 예상했던 군대의 모습과 더 비슷해 보였다. 우리는 열심히 훈련하고, 다양한 무기를 다루며, 기본 순찰 및 전투 기동을 배웠다.


전우조로 활동하면서 주간 독도법에 비교적 능숙해진 후에는 야간 독도법을 배울 차례였다. 두 번째 밤은 길고 습했다. 우리는 새벽에 막사로 돌아와 약간의 수면을 취한 후 주간 독도법 훈련을 더 진행했다. 그날 밤 우리는 야간 독도법 교관을 다시 찾아갔다. 교관은 내게 "톰슨, 네 나침반 친구는 어디 있지?"라고 물었다. 나는 재빨리 "죽었습니다, 교관님."이라고 대답했다. 이 "비꼬는 듯한" 대답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관은 내게 푸쉬업을 시키며 내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침내 우리 중대 교관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나를 구해주었다. 그는 교관에게 내 나침반 친구가 그날 아침 뇌수막염으로 인해 침대(내 아래층이었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존은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즐겼다. 버스 운전병의 말이 어느 정도 옳았던 것 같았다. 우리 중 일부가 훈련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으니까 말이다.


M-16A1 자동소총, M-60 기관총, 3.5인치 로켓 발사기, M1911 .45구경 권총 등의 전문가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8주간의 고급보병훈련은 훌륭하고 습한 시간이었다. 고급보병훈련이 끝날 무렵 나는 일등병으로 진급했고, 밥과 피트와 함께 OCS에 가기 전에 잠시 집으로 휴가를 떠났다.


OCS - 조지아주 포트 베닝


나는 카키색 제복을 입고 어깨에 끈을 두른 뒤, 국방근무기장과 일병 계급장을 달고 2000시가 조금 지난 후에 OCS 제92 중대에 보고했다. 꽤 멋진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날 당직 근무를 하던 선임 생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격노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차림으로 행정반에 들어올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때 나는 계급이나 상훈도 없는 하급 생도였다. 나는 밖으로 쫓겨나 제복에 붙은 것들을 다 뜯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6개월 동안 고생하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시작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룸메이트 두 명을 만났더니, 일정이 꼬여서 우리가 5주 일찍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두르고, 기다려라!"라는 말을 이해할 것이다) 선배들이 막사를 떠나 우리가 머물 곳이 생겼지만, 매일 돌아와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며 우리를 괴롭혔다. 참 재밌는 5주가 될 것 같았다!


그 주 후반에 밥과 나는 조지아주 그리핀에서 온 키스 페닝턴을 만났다. 우리 셋은 절친이 되었고 월남에 갈 때까지 함께 지냈다(밥은 나중에 키스의 누이와 약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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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소위 계급장, 1968년 1월 22일)


우리 중대장은 폴락 대위였다. 그는 최근 월남에서 전투 파병을 마쳤기에 신망이 두터웠다. 안타깝게도 그는 1968년 말에 월남에서 두 번째 파병 중 사망했다.


나는 OCS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수료 후 공수학교에 갔다가 그린베레(Q코스 포함)에 배치되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거의 즉시 승인되었다. 나는 1968년 1월 22일에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아버지는 내가 왜 그린베레에 가고 싶어 하는지 물으셨다. 나는 "월남에 간다면 최고 중의 최고가 되고 싶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공수학교 - 조지아주 포트 베닝


밥, 키스, 나는 낙하산 강하 훈련을 위해 3주간 아파트를 빌렸다. 공수학교는 정말 훌륭했다. 1,250피트 고도에서 시속 120마일 이상의 속도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었다! 훈련 과정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공수학교를 수료한 밥, 키스, 피트와 나는 그린베레 배치 및 Q코스를 위해 포트 브래그로 갔다. 그렇게 밥, 키스, 나는 초소 바로 옆 트레일러 주차장에 있는 트레일러를 배정받았다. 비좁았지만 주로 장비를 보관하고 가끔 비를 피해서 잘 수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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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 탭. 조지아주 포트 베닝, 1968년 2월, 공수학교 수료)


제3 특전단(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배치


우리는 그린베레 장교 Q코스(Special Forces Officer Qualification Course, SFOC 68-4)를 기다리는 동안 제3 특전단에 배치됐다. 이 Q코스는 학업, 전술, 전략, 체력, 현장 작전, 기본 특수부대 기술 훈련이 혼합된 어려운 과정이었다. Q코스 생도들은 훈련 기간 동안 "A팀"에 배치되었으며, 밥, 피트, 키스, 나는 척 아담스, 레이 스택스, 덴튼 소령, Dr. 존 보스코, 리치 토드, 팻 커닝햄, 조 게이어, 할 헤플러과 한 팀이 되어 친구가 되었다. 


3개월 후, 우리 팀 모두가 Q코스를 수료하고 부대 마크와 우리가 그린베레임을 나타내는 증명서를 받았다.


그린베레 Q코스 수료 -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오늘 100명이 시험을 치르지만 그린베레가 되는 사람은 3명뿐이다!


마침내 Q코스를 수료하고 제3 특전단에 배치되었다! 그린베레는 단순히 습격이나 매복을 수행하러 가는 이들이 아니었다. 월남에서의 그린베레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기 위해 투입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Q코스에서 반1란, 정부 전복 방법 등을 비롯하여 레이드, 매복, 지하 조직 활동, 폭발물, 자물쇠 따기, 그리고 부사관이 훈련받는 주요 주특기인 폭파, 경화기, 중화기, 통신, 전투 외상 치료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훈련받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부사관의 의무 주특기는 기본 수술을 포함하여 12개월간의 집중 의무 훈련을 받아야 했다.


A팀을 이끄는 장교로서, 내 팀원 중 두 명은 그린베레 의무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그린베레 장교 Q코스에 있었을 때 우리는 대규모 반1란, 탈출 및 회피 과정,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사로잡는 법, 게릴라 작전에서 현지민을 훈련시키는 것 등을 자주 했다. 장교들은 그린베레의 모든 주특기를 훈련받는 반면, 부사관들은 Q코스를 마친 후에도 경화기, 중화기, 의무, 통신 등과 같은 특정 주특기에 대한 심층 훈련 프로그램을 거쳤다. 장교들은 팀의 능력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주특기의 기본을 훈련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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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베레 플래시 및 부대 패치. 1968년 5월,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그린베레 장교 과정)


아프리카 임무 준비 -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밥과 나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에 있는 제3특전단 B팀에 배치되었다. 3특전단의 목표 지역은 아프리카였고, 우리 B팀은 아프리카 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밥과 내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월남의 5특전단에 즉시 배치되기 위해 1049서류(임무에 자원 서류)를 제출했다. 우리는 아프리카가 아닌 월남으로 가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으니까 말이다.


아프리카 임무 준비는 계속되었고 나는 많은 예방 접종을 맞았다. 또한 AK-47 소총을 포함하여 그곳에서 접할 가능성이 있는 무기에 대한 훈련을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무기 훈련을 즐겼다.


퀵 킬


무기를 쏘는 훈련을 할 때는 보통 옆으로 돌아서서 쏘게 된다. 하지만 적이 총을 쏘면 뇌에서는 "적을 마주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몸이 본능적으로 적을 향해 돌아가게 된다. 이때 근거리에서 적과 마주할 경우 조준하지 않고 쏘는 법을 훈련해야 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눈이 조준기에 초점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지향사격이 훨씬 빠르고 조준하는 것만큼 정확할 수 있다. 우리 그룹은 허리나 겨드랑이 부분에서 바로 사격하는 훈련을 하는 퀵 킬이라는 집중 과정을 거쳤다. 비비탄 총으로 시작하여 2x4 크기의 미니어처 실루엣을 지향사격으로 모두 쓰러뜨릴 때까지 사격했다. 그런 다음 3인치 디스크를 공중에 던지고 움직이는 디스크를 맞힐 수 있을 때까지 총을 쏘았다. 디스크는 점점 작아지다 결국 우리는 공중에서 25센트 크기의 디스크를 쏘게 되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팝업형 표적이 튀어나오는 코스로 이동하여 조준하지 않고 모든 표적을 맞출 수 있을 때까지 M-16과 실탄을 사용했다. 여기에는 등장하는 표적 중 아군 표적도 존재하여 표적 식별이 포함되었는데, 표적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순식간에 판단해야 했다. 며칠 만의 훈련으로 매우 빨리 능숙해진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이 기술은 곧 내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동남아 정글에서 살아남는 데 배운 가장 귀중한 기술 중 하나였다. 생사는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린베레는 공수부대였다. 그래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에서 배낭을 메거나 메지 않은 상태로 수많은 낙하산 강하를 했다. 우리의 낙하산 기술은 빠르게 향상되었고, 비행기에서 멀미를 견디는 내성도 커졌다. 우리는 낮게 비행했고, 항상 힘든 비행이었다.


폭파 훈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훈련 중 하나였다. 우리는 Q코스에서 배운 중급 수준 기술에서 고급 기술로 넘어갔다. 예를 들어, 다리를 폭파하는 방법, 차량을 폭파시키도록 전선을 설치하는 방법, 다양한 부비트랩(IED)을 만드는 방법 등이 있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신관, 기폭 장치, 폭발물, 인계철선, 지뢰 등을 사용했다.


레인저 스쿨 - 조지아주 포트 베닝


밥과 나는 또한 레인저 스쿨에 자원하여 9주 동안 잔혹한 정신적, 신체적 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라이벌 정예 부대인 그린베레 출신이라는 이유로 더 많이 굴려졌다. 예를 들어, 레인저 스쿨에 보고하려면 훈련 중대 관리자에게 문을 두드리며 입소 허가를 요청해야 했다. 밥과 나는 우리보다 앞서 줄을 선 다른 사람들이 보고 절차를 밟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생도들은 중간중간 푸쉬업을 많이 하면서 여러 차례 문을 두드리는 시도를 하지 않고서는 관리자의 마음에 들 정도로 세게 두드릴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차례가 되자 밥과 나는 뒤로 물러났다가 함께 문으로 달려들었는데, 문이 아예 경첩에서 떨어져 나갔다. 문은 두 명의 레인저 교관이 앉아 있는 테이블 바로 앞에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교관들에게 보고했다. ("레인저 톰슨, 훈련을 신고합니다! 레인저 셰리던, 훈련을 신고합니다!") 이때 전설적인 브루넬 상사가 우리를 바라보다가 명단을 보며 다른 레인저 교관에게 말했다. "여기 스네이크 이터가 두 명 있군. 이 녀석들을 주시하고 중대 도로에서 헛짓거리 하지 않도록 해. 이 $#*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거기서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레인저 스쿨에서 그린베레와 레인저 사이의 세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레인저가 우리한테 푸쉬업을 하라고 지시하면 우리는 "하늘에 계신 큰 레인저"를 위해 푸쉬업을 해야만 일어날 수 있었다. 이때 밥과 나는 항상 "큰 레인저를 지켜보는 큰 그린베레를 위해 두 번 더!"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우리는 다시 푸쉬업을 해야했다. 그리고 우리는 포트 베닝 훈련 단계에서 산악 훈련 단계, 플로리다 훈련 단계까지 함께하며 명성을 쌓았다.


레인저 스쿨은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유머를 넣을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우리 반은 248명의 레인저 생도들과 함께 포트 베닝에서 시작했지만 최종적으로 135명이 이수했다. 그리고 이들 중 75명만이 검은색과 금색으로 이루어진 탐나는 레인저 탭을 받았는데, 처음 인원의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였다. 밥과 나는 이 30% 안에 들었다. 사실, 내가 우리 반에서 가장 뛰어난 수료생이었지만, 나보다 2점 앞선 10점짜리 스팟 리포트(spot report)가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정치적 문제로 수료 전날 밤에 버조츠 소령이 나를 제치고 우수 수료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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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 탭. 1968년 10월, 조지아주 포트 베닝, 레인저 스쿨 수료)


레인저 스쿨을 수료한 후, 밥과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반 생도들은 가까운 스테이크 하우스로 가서 큰 티본 스테이크를 샀다. 하지만 우리는 겨우 스테이크의 1/4 정도만 먹고 주차장으로 달려가 먹은 걸 모두 토했다. 레인저 과정 동안 적은 양의 음식만 먹은 탓에 위가 줄어들었고 기름진 큰 스테이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레인저 경험의 일부였다. 밥과 나 같은 열혈 레인저들은 우리가 토한 것들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했으나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밥과 나는 기초 훈련 때부터 함께했다. 육군에서 알파벳순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시간에 같은 훈련을 받았고 항상 같은 분대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포트 브래그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임무가 변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팀원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가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제5 특전단 배치와 함께 월남이라는 새로운 목적지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주간 포트 브래그를 떠날 준비를 하고 휴가를 받은 후 "이국적인 장소에서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처치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여정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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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특전단 플래시, 1968년 10월 월남 제5특전단 배치)


교훈


그린베레


• 그린베레는 강경한 전사지만 모두 유리를 씹어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린베레 대원들은 "지적이고 조용한 전문가"였다.


• 우리는 아프리카 배치를 준비하면서 많은 신체 훈련을 받았다. 이는 레인저 스쿨의 신체적, 정신적 요구 사항을 충족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퀵 킬" 훈련을 통해 속도(1/n초)와 정확성(한 표적에 여러 발 vs 매우 특정한 위치에 한 발을 맞추는 것)에 대한 사고방식을 계속해서 형성했다.


• 저격 기술은 근접 전투에 필요한 기술과는 다르다.


레인저 스쿨


• 그린베레와 레인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불가능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마음가짐을 개발/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뇌가 멈추라고 하면 몸은 멈출 것이다.


• 생각보다 항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 음식, 수면, 휴식이 거의 없어도 오랫동안 업무를 수행할 수는 있지만 의사 결정 효율성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 나는 육로 탐색, 특히 야간 탐색에 매우 능숙해졌다.


• 산악 레인저 캠프의 레인저 교관 중 한 명인 쉘리 중사로부터 배운 것에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하드코어의 정석 그 자체였다.


•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그 분야에 무의식적인 편견이 생겨 다른 분야에서는 사각지대가 생긴다. 이 사각지대는 잘못된 의사 결정으로 이어진다.


• 스트레스는 주의 집중을 통해 사각지대를 만든다.


• 고통은 실제로 약함이 육체에서 떠나는 과정이다.


• 고통은 가장 강렬한 고통이 덜한 고통을 숨기는 식으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면 넣으면 부러진 발목의 고통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 호흡을 하면 더 많은 고통을 관리할 수 있다.


• 특수작전 훈련(그린베레, 레인저, 씰 등)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도록 설계되었다. 다른 방식으로 훈련하면 잘못된 능력 감각이 생겨 이러한 전사들이 직면하는 격렬한 전투 상황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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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어 셸리 하사, 내 친구이자 미 육군 레인저 부서에서 가장 하드코어하고 헌신적인 레인저 교관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