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자비토스키 하사는 1968년 2월 19일 전투 중 보인 영웅적 행보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날 라오스에서 9명의 자비토스키를 비롯한 그린베레와 넝족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정찰대가 호치민 트레일을 따라 병력 이동 정보를 수집하던 중 수적 우위를 점한 월맹군과 조우했다.
자비토스키는 뉴저지주 유잉 타운쉽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였다.
그는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방향성을 잃은 규율이 없고 반항적인 십대였다고 본인이 인정했다.
1959년에 군에 입대했을 때, 모든 것이 그에게 적합했다. 그곳에서 그가 그동안 찾던 것을 발견했고, 신생 미군 특수부대에서 그는 집을 찾았다.
1967년 말, 그는 세 번째 전투 파병 중 MACV-SOG에 배속됐다.
자비토스키는 스파이크 팀 메인(ST Maine)의 리더로, 3명의 미국인과 9명의 원주민 대원(보통 중국계 넝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소총은 대부분 러시아제 AK-47이나 스웨디시 K 기관단총이었다. 그들은 월맹 군장을 찼고 월남 음식만 먹었다.
이 작전에서 자비토스키는 자신의 좋은 친구인 더그 글로버 하사의 부팀장이 되겠다고 제안했다.
자비토스키(맨 왼쪽)와 다른 두 명의 그린베레
더글라스 존 글로버 하사
팀은 두 대의 헬기를 타고 라오스 앗따쁘 동쪽에 투입됐다.
그린베레가 LZ 근처의 10피트 높이의 코끼리 풀과 대나무 관목 사이를 뚫고 이동하던 중 자비토스키와 팀원들은 정글로 들어갔고 어느 순간 대규모(2000명 이상) 월맹군 시설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곳에 벙커와 철조망이 깔려 있었다.
자비토스키는 부팀장이었지만 글로버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글로버는 지휘권 인수를 촉구했다.
자비토스키는 대원들을 LZ로 보내는 한편, 크레모아를 백린 연막탄에 연결하여 그들의 퇴각을 엄호했다.
글로버는 A-1E 스카이레이더를 불렀고 백린 연막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에 대한 공습을 요청했다.
750파운드의 폭탄과 네이팜탄이 그 주위에 떨어졌지만 월맹군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헬기가 도착하기 전까지 버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비토스키는 대원들과 함께 LZ 외곽에 작은 방어선을 구축했다.
궁지에 몰린 팀은 스카이레이더들이 투하한 폭탄, 네이팜탄, 집속탄과 함께 방어선에서 싸워 월맹군 공격을 차례로 격퇴시켰다.
월맹군은 자비토스키의 팀을 제압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거리를 좁혀 공중 지원을 못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자비토스키의 팀은 탄약이 부족해졌다.
UH-1 휴이가 도착했을 때, 두 대의 헬기는 LZ가 너무 위험하다는 무전을 보내고 500m 떨어진 2차 PZ(픽업 존)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팀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세 번째 헬기에 SF 메딕 루크 낸스가 타고 있었다.
팀은 휴이가 말한 대로 2차 PZ에 도착했다.
두 명의 넝족과 한 명의 미국인이 첫 번째 헬리콥터에 탑승했다. 나머지 6명의 대원은 두 번째 헬기에 탑승했다.
좌측에서 PZ를 향해 월맹군이 돌진해오자 자비토스키와 도어거너는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월맹군이 RPG를 쐈고, 테일 붐에 직격했다.
헬기는 회전하며 추락했고, 자비토스키는 충격으로부터 20피트 밖으로 튕겨 나갔으며 그의 옷은 불타버렸다.
그는 아직 몰랐지만, 등이 부러졌고 갈비뼈도 여러 개 부러졌다. 탄약도 떨어졌고, 총열도 휘어져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자비토스키는 조종사를 밖으로 끌고 나왔고 자신처럼 몸에 불이 붙어 비명을 지르는 부조종사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갔다.
한편 세 번째 헬기에 타고 있던 낸스는 조종사에게 아래에서 움직임이 있었기에 지상에 생존자가 남아 있다고 확신시켜줬다.
세 번째 헬기는 추락한 휴이로부터 약 50m 떨어진 곳에 착륙했고 낸스는 생존자들을 보자 주저하지 않고 헬기에서 뛰어내려 생존자들에게 접근하던 월맹군을 사살했다.
.45구경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자비토스키는 부조종사를 세 번째 헬리콥터로 옮겼고 마찬가지로 조종사도 끌고 갔다.
헬기에서 약 10피트 떨어진 곳까지 다다르자 낸스가 세 사람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갔다.
자비토스키는 낸스 덕분에 자신과 조종사가 살았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부조종사는 병원에서 사망했다.
글로버, 넝족 3명, 도어 거너 2명 또한 추락 당시 사망했다.
자비토스키는 플레이쿠의 병원에서 6주 동안의 회복 기간을 보냈다.
팀과 승무원들은 전투에서 월맹군 수백 명을 죽였고, 그중에서 100명 이상이 첫 번째 LZ에서 사살한 것이었다.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1969년 3월, 백악관에서 아내와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자비토스키 중사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몇 년 후, 나는 몇몇 다른 그린베레 대원들과 함께 자비토스키를 만나는 영예를 가졌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전혀 거만하지 않게 조용히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영웅은 아니지만 그와 함께 복무했던 모든 이들을 위해 명예훈장 착용했다고 말했다.
"나는 훈장을 받았지만, 프로젝트(작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위해 달았다."라고.
또한 '그 전투에서 초록색 베레모 쓴 모든 대원은 나만큼 했고 또한 나만큼의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삶에서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 스스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 살 수 있다."
한편 그는 군이 PTSD 문제를 은폐했다고 생각해 씁쓸함을 표했으며, 그의 PTSD는 치료 받지 못했고 아내를 소외시킨 자신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모든 사람을 안심시켰다.
안타깝게도 자비토스키는 1996년, 53세의 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명예 훈장 표창:
의무 이상으로 목숨을 걸고 행동한 용감함과 대담함에 명예훈장을 수여한다.
미 육군의 자비토스키 중사는 9명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장거리 정찰대의 보조 팀장으로 복무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자비토스키 중사의 정찰대는 적진 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수적으로 우세한 월맹군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자비토스키 중사는 팀원들을 모아 방어 진지에 배치하고 집중된 적의 자동 무기 사격에 노출되어가며 반격을 지시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자비토스키 중사는 정찰대에게 퇴출을 위해 LZ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고, 소총 사격과 수류탄으로 그들의 철수를 엄호했다.
적의 압박이 거세지자, 그는 각 대원을 데리고 철저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들을 고무시켰으며, 그들의 방어 사격을 통제했다
자비토스키 중사 덕분에, 수적으로 열세인 정찰대는 전술 항공 지원과 구조 헬기가 도착할 때까지 불안정한 위치를 사수했다.
구조 헬기가 도착하자 월맹군이 공격을 가하여 압박했다.
자비토스키 중사는 LZ 주변 건쉽 사격을 조정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사격에 노출되었다.
구조 헬기 1대에 탑승한 그는 헬기가 이륙하는 순간에도 헬기 내부에서 적에게 사격을 가했다.
헬기는 화망에 노출됐고, 자비토스키는 조종 불능으로 추락하는 헬기에서 튕겨 나갔다.
의식을 회복한 그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부상을 무시하고 불타는 헬기 잔해 속으로 이동했다.
무기와 연료의 폭발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에서 중상을 입은 조종사를 끌어내고 정찰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한 시도를 반복했지만 극심한 열기에 실패했다.
심각한 화상과 갈비뼈 골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의 포화의 장막을 뚫고 구조 헬기에서 불과 10피트 떨어진 곳까지 의식을 잃은 조종사를 끌고 가 쓰러졌다.
자비토스키 중사의 비범한 영웅주의와 의무에 대한 헌신은 군 복무의 최고 전통과 일치했고 그 자신, 그의 부대, 그리고 미군에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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