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온전한 육신을 유지하면서 무사히 무덤까지 안착되기까지의 여정이 아니다. 완전히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데다 탄약도 떨어진 상태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조용히 "잘했어, SOG 전사!"라고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헌터 S. 톰슨(어록 수정)
나는 월남 파병의 마지막 몇 주를 CCN 작전본부에서 근무하며 마무리했다. 그곳에서 나는 나트랑으로 날아가 제5특전단 본부에서 출국수속 절차를 밟았다. 그런 다음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깜란만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 미국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이 밀려서 2주 이상 있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2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린베레 전입 수속 본부로 가서 근무 중인 그린베레 부사관에게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항공편이 심하게 밀려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밖에 나가서 지인들과 잠시 파티를 즐긴 후 내가 묵고 있던 작은 방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자정 무렵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운 형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베개 밑에서 브라우닝 9mm를 꺼냈고,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나노초를 앞두고 "톰슨. 나야. 키스 페닝턴."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켜지자 그가 키스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내 방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는데, 키스가 다른 하나를 배정받은 것이었다. 나는 키스에게 밥 셰리던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키스는 자기 누이(밥의 약혼녀)가 이미 그 일에 대해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나는 키스가 파병을 무사히 마친 것을 보고 기뻤다. (키스의 동료들은 그가 일찍 백발이 됐다는 점과 유령 같은 행동을 한다는 점 때문에 그를 "회색 유령"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약 20분 동안 잡담을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0200시경에 누군가가 문을 크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톰슨 중위님, 당장 터미널로 가셔서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몇 시간 후에 출발합니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떠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 검사관이 "바지에 있는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거 말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으며 9mm 권총을 꺼냈다. 그랬더니 그는 "네, 그것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전쟁 전리품이죠."라고 말했다.
그는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권총을 다시 바지에 넣고 민간 항공기에 올라타 미국으로 향했다. 마음속으로는 아무도 이 비행기를 납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못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비행기 주변을 둘러보았다.
• 나는 군인들로 가득 찬 비행기에 앉아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살아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을 정말 기뻐하는 듯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자기성찰에 빠져 있는 듯했다.
• 눈물을 흘리며 홀로 있고 싶어 하는 군인들을 보았다. 아마도 그들이 잃은 친구들, 그들이 경험한 두려움 또는 마음 한구석에 영원히 새겨져 있는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장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척하며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그 가식을 끝내기도 할 것이다.
• 나는 어떤 경험을 했을까? 긴 12개월이었다. 나는 블랙홀에 빠졌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내 SOG 친구/팀원 34명이 작전 중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나 역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죽음을 모면했고,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고 한들 지난 12개월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이야기를 전할지, 어떻게 전할지 결정하려면 20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았다. 친구들과 팀원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때문에 치유할 시간을 가진 후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SOG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 또한 이 비행기나 내가 귀국하는 동안 탑승하게 될 비행기를 납치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재빨리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 비행이었다. 하지만 지난 12개월 동안의 사후검토와 주요 교훈에 대해 생각하고 마무리할 시간을 가졌다.
사후검토: SOG 1968~69
SOG에서 지난 12개월을 돌아본 결과:
• SOG는 블랙홀과 같아서 계속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SOG는 중독성이 강해졌다.
• SOG 임무는 빠르게 변화하는 복잡한 적응형 시스템이었다.
• 어떤 임무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마지막 임무가 될지 결코 알 수 없었다.
• 항상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임무를 시작했다.
• 운은 좋든 나쁘든 항상 임무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 연습, 연습, 연습이 필수였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 이어졌다.
• 통신/소통은 생명줄이었다.
SOG의 필수 원칙
• 모범을 보여라.
• 연습. 연습. 연습.
• 사고방식이 성공을 이끈다.
• 높은 스트레스=나쁜 결정.
• 적응! 적응! 적응!
• 움직임을 멈추지 마라.
• 오늘은 3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 전장은 역동적이다.
• 변화에는 재시작과 연습이 필요하다.
• 최중요 대응 방식=우선 대응.
• 스트레스를 받기 전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라.
참고
• "미국에서 다음 임무지에 배정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밥과 내 룸메이트이자 포트 브래그에서의 절친한 친구를 사살할 뻔했다. 내 마음은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다.
• 1968~1972년 동안 전 세계에서 326건의 항공기 납치 시도가 발생했다. 나는 내 귀국 항공편이 납치되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69년 10월/11월 친구/팀원 KIA
병장 찰스 E. 슐츠, KIA 10월 25일
하사 건터 H. 왈드, KIA 11월 3일
하사 도널드 M. 슈, KIA 11월 3일
하사 윌리엄 T. 브라운, KIA 11월 3일
하사 로널드 E. 레이, KIA 11월 13일
SP4 랜돌프 B. 수버, KIA 11월 13일
전환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브라우닝 하이파워 9mm 권총과 베레모를 챙긴 채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거리를 두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침을 뱉으며 "베이비 킬러", "살인자"와 같은 말을 외쳐댔다. 그 누구도 내가 얼마나 빨리 거리를 좁히고(2~3초) 그들을 붙잡아 폭력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아무도 나와 직접 접촉하거나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마 내 날카로운 시선과 눈빛의 차가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돋거나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했다. 고의든 실수든 반전 시위대와 맞붙을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충동을 억제하고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싸우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반전 시위대와 여행객들로부터 같은 반응을 받았다. 공항 내부의 미리 계획된 장소에서 아버지와 만나 어머니와 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차까지 함께 걸어갔다. 공항을 통과하기 전에 나는 아버지에게 공항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2차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영웅처럼 환영받으며 귀국한 아버지는 내가 받은 무례한 환영에 충격을 받으셨지만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으셨다. 나는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되어 매우 감사하고 기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남동생인 부치가 출전하는 풋볼 플레이오프 경기를 보러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부치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부치는 이후에 군에서 파일럿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는 AH-64 아파치 파일럿으로 걸프전에 참전했다. 군에서 은퇴한 후에 부치는 보잉의 AH-64 아파치 & 롱보우 사업부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사회"로의 전환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었다. 나는 1년 전에 떠났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세상으로 돌아왔다. 전쟁 시위를 제외하면 환경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미국과는 다른 규칙이 있는 SOG라는 폭력적인 서부에서 살다가 왔으니까 말이다. 12개월 동안 나는 작전 지역에서 적(월맹군)을 발견하면 그/그들을 제거한다는 규칙에 따라 살았다. 그게 전부였다. 적들이 무기를 휴대하거나 나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적들이 나를 봐서는 안 됐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들을 본 것만으로도 그들을 사살해야 했다. 내가 적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면 나는 사실상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다른 규칙이 있는 세상에 있었다. 모두가 적이 아니었다. 내 임무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허용되는 행동에 대한 법률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적이 숨을 수 있는 곳이 보였고, 나는 CAR-15까지는 아니지만 무장을 하고 다녔다. 전환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가장 큰 과제는 자제력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중위였고 복무 기간이 끝나기 몇 주 전이었다. 나는 월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1월에 있을 대위 진급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이 진급을 수락하면 복무 계약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 나는 최소 20년 이상 군에 남아 중령 이상으로 전역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사회로 돌아온 나의 군 복귀는 "다음 근무지 소식이다.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서 레인저 교관으로 근무하게 될 거야."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내 대답은 "좋군요. 할 수 있습니다."였다. 나는 레인저 교관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얻게 되어 기뻤다. 그리고 길어봤자 8~10개월 후에 다시 월남으로 돌아가 2차 SOG 복무를 수행할 것이었다. 소규모 순찰, 급습 및 매복, 전술, 특수 작전, 사고방식, 인내심, 공수 작전 등에 대해 레인저 훈련생들을 평가하고 새로운 전술을 실험하면서 각 분야의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레인저 교관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있겠나? 나는 특수 작전 리더십 일지를 작성하고 내 기술 개발을 기록했다. 나는 SOG에서 사용하던 모든 기술을 향상시킬 것이었다. 즉, 사격술, 감지, 체력, 야간 이동 기술을 향상시키고 전술적 환경에서의 작전 수행을 위해 사격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을 의미했다. 8개월 동안 이 일을 하면 처음보다 훨씬 더 나은 대원이 되어 SOG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12월 한 달 동안 휴가를 낼 예정이었다. 그러면 레인저에 전입신고를 마치고 세 개의 "캠프" 중 어느 곳에 배정될지 알아보고 살 곳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었다. 또한 부모님, 형제, 친구들, "규칙"에 다시 익숙해질 시간도 주어질 것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많이 했다. 때문에 아버지는 우리에게 먼저 새 사냥을 하러 가자고 하셨다. 나는 약간 주저했지만 "좋죠"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집 근처의 넓은 풀밭(무릎 높이)으로 가서 맥(우리 집 사냥개)을 들판으로 보내 새를 찾게 했다. 아버지와 부치는 평소처럼 들판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수목선에 머물렀다. 나는 아버지께 개활지로 나가서 나 자신을 표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새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들판 가장자리에서 총을 쏘곤 했다. 새 사냥 여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사촌 칼과 부치를 데리고 집 근처 숲에 있는 "오리 연못"으로 가서 오리를 쏘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개활지에 있을 필요가 없었지만 이번에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나는 5발이 든 12게이지 반자동 산탄총을 들고 있었다. 우리가 숲에 들어가자마자 내 모든 감각이 최고조에 달했다. 연못에 다다르자 오리 한 마리가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날아올랐다. 나는 지면으로 뛰어들면서 12게이지 버드샷 두 발을 오리에게 쏘았다. 아버지, 부치, 사촌 칼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나무 뒤에 있었고, 그들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리를 향해 두 발을 더 쏴서 오리의 내장과 깃털을 물 위로 흩뿌렸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충격을 보고 "왜?"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뭐 하는 거야?"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움직였어요. 아직 안 죽은 거라고요."라고 말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한 현장 사후 검토를 실시했고, 당분간은 동물 사냥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한 일부 습관/행동은 다른 행동에 비해 전환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정글에서 1년을 보낸 후 나무가 얼마나 작게 보이는지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내 인생과 경력에 대해 생각해 보니, 내가 사용해 온 SOG 필수 원칙들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리적 지침처럼 보였다. 이 원칙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 내가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주곤 했다.
레인저 교관
1월의 추운 어느 날, 나는 조지아주 달로네가에서 몇 마일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MRC(Mountain Ranger Camp/산악 레인저 캠프)에서 레인저 교관 근무를 시작했다. 날씨가 정말 춥고 엄청났다! 월남의 화씨 100도가 넘는 기온에서 한 자릿수 기온의 MRC에 적응하려면 몇 주가 걸릴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레인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훈련 및 평가하고 개인 "SOG-2" 훈련을 시작했다. 월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약 8개월 동안 SOG 기술을 연마해야 했다. 또한 나는 레인저 자격을 갖춘 전투 경험이 풍부한 약 40명의 최정예 장교 및 부사관 중 한 명이었지만, 그들이 내가 SOG에서 수행했던 미친 임무 유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애초에 내가 월남에 있을 때 그린베레에 있었다는 사실만 말할 뿐, SOG에 관해 언급할 수 없었다.
1970년 1월 22일, 나는 대위로 진급했다. 상황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밥 랜햄 대위, 길모어 셸리 하사, 알렌 멜린 대위, 밥 웨이지스 대위, 맥스 베넷 중사, 밥 수케 대위, 존 젠슨 대위, 스코티 리플 대위 등 평생을 함께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다. MRC에는 사회로의 복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훌륭한 전투 참전 용사 그룹이 있었다.
MRC에 도착한 지 몇 달 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톰슨?"
"네."
"미도우스야. 네게 일을 맡기지. 내일 TDY(임시 근무) 명령을 받게 될 거야. 오늘부터 몇 달 동안 완전히 사라질 준비해. 최고 수준의 기밀이니까 말이야. 이 전화에 대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야. 이 대화는 없었던 일이라는 거 명심해." 딸깍. 다이얼 톤. (이건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의 일이었다. 유선전화에는 다이얼 톤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굉장할 거라는 건 알았다. 안타깝게도 미도우즈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TDY 명령으로 레인저 부서를 떠난 후 나 역시 이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레인저 부서 지휘관이 이의를 제기했고, 내 명령은 결국 비밀 유지를 위해 취소되었다.
1970년 11월 21일, 알렌 멜린 대위 및 다른 레인저 스쿠버 친구들과 함께 플로리다에서 스쿠버 다이빙 여행을 하던 중, 미국이 월맹 깊숙한 곳에 있는 포로수용소를 급습했다는 신문 헤드라인을 보았다. 나는 이것이 내가 놓쳤던 임무라는 걸 즉시 깨달았다. 나중에 미도우즈는 주말에 나를 집으로 초대해 그 임무와 교훈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항상 내 멘토였다.
나는 아이보리 코스트 작전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월남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SOG-2 훈련의 결과를 볼 때였다. 나와 15명의 다른 레인저 교관들은 레인저 부서에서 약 8~12개월을 보낸 후 월남(그리고 내 경우에는 SOG)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월남에 가기 2주 전에 우리 명령이 취소되었다. 레인저 교관의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는 전투 경험이었다. 당시 월남에서 돌아온 군인 중 상당수가 군에 남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전투 경험이 있는 레인저 자격을 갖춘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다. 때문에 나와 내 동료들은 이전 레인저 임무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레인저 교관으로 총 3.5년을 보냈다.
레인저 교관은 모의 전투 임무에서 순찰대를 지휘하면서 레인저 훈련생들의 리더십을 평가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다음 24시간 동안 지휘자 훈련생들을 평가할 순찰 임무에 대한 브리핑을 받던 중 한 훈련생의 이름을 보았다. 바로 로버트 하워드였다. 나는 '밥 하워드(MACV-SOG 1-0, 퍼플 하트 8개, 명예훈장 & 수훈십자장 수훈)가 레인저 스쿨에 있을 리가 없어. 굳이 귀찮은 방법으로 레인저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군. 하워드 정도면 그냥 탭을 줘야 한다고.'라고 생각했다. 내가 순찰대와 합류하자 "그" 밥 하워드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SOG에 있었을 때 몇 번 만났을 뿐이었고, 그는 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다음에 만나면 나를 기억할 테니까 말이다. 그는 내가 MRC에 있는 동안 "매우 만족" 평가를 준 몇 안 되는 훈련생 중 한 명이었다.
딕 미도우즈 소령의 추천으로 나는 HALO 스쿨을 다니고, MRC HALO 팀, 낙하산 클럽, 낙하산 시범 팀(그리고 노스 조지아 대학 낙하산 클럽)을 창설했다. 나는 정찰팀장이자 레인저 장거리 정찰 작전의 교관이 되었다. 그리고 82공수사단의 "브라이트 스타" 사막 배치를 준비하는 사막 작전 훈련팀의 일원이었으며 독사에 대한 강의를 포함하여 사막 환경에서의 레인저 작전의 주요 개발자이자 교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군 점프 마스터와 패스파인더 스쿨을 다닌 뒤 미국 낙하산 협회 프리폴 점프 마스터, 교관, 교관 시험관 자격증과 연방항공청 낙하산 정비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렇게 나는 조지아 북부의 미국 낙하산 협회의 낙하산 안전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헨리 톰슨 대위, 1972년, 82 공수사단 사막 배치 사전 훈련, 뱀 강의)
레인저 부서를 떠난 나는 포트 베닝에서 보병 장교 고급 과정을 이수했다. 내 친구인 리치 토드(SOG)와 존 젠슨(MRC)이 이 과정에 함께 참여했고, 밥 하워드(SOG)가 훈련생 반장이었다. 좋은 한 해였다. 리치 토드와 나는 그해에 프리폴 낙하산 강하를 많이 했다. 보병 장교 고급 과정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한국 제2 보병사단에서 12개월간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국에 가기 직전에 나는 포트 베닝에서 핵, 화학, 표적 분석 과정을 이수했다.
한국, 2보병사단
1974년에 나는 2보병사단 사단장인 "건파이터" 헨리 에머슨 소장에게 연락하여 보병 중대 중 하나를 "임시" 레인저 중대로 만드는 것에 대한 근거와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내가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하여 논의하자고 말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의 참모들을 만나 계획을 제시했다. 다음 날 나는 23보병연대, 1대대, "벙키" 브라보 중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와 함께 내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나는 벙키 브라보를 브라보 레인저스로 탈바꿈시키고 사단급 전투 풋볼 선수권 대회와 태권도 선수권 대회, 최우수 보병 소대 등 모든 사단 대회에서 우승하기 시작했다.
(헨리 톰슨 대위, 1974년, 제2 보병사단, 23연대, 1대대, B중대(레인저) 중대장(레인저))
각 중대원들은 브라보 레인저 챌린지 카드(부대 챌린지 코인과 유사)를 발급받았다. 중대원들은 항상 카드를 소지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했다. 이 카드는 훌륭한 동기 부여 및 유대감 형성 도구였다.
(브라보 레인저 챌린지 카드)
브라보 레인저들은 매주 레인저 유형의 훈련에 참여했다.
(1974년, 제2 보병사단, 23연대, 1대대, B중대(레인저) STABO 훈련)
(제2 보병사단 전투 풋볼 챔피언 2X (탑건). 사단 전투 풋볼 탑건 깃발을 들고 있는 브라보 레인저 중대원들)
제18 공수군단
1975년, 한국에서 2보병사단에서 임시 레인저 중대 중대장으로 12개월을 보낸 후, 3성 장군으로 진급하여 제18 공수군단장이 된 에머슨 소장이 나를 포트 브래그로 데려갔다. 나는 처음에 군단 전체에 전투 풋볼 프로그램과 태권도 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1976년에는 올림픽과 프로 풀-콘택트 토너먼트에 참가할 육군 무술팀을 구성하는 추가 임무를 맡았다(프로 토너먼트에 참가하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 기간 동안 나는 또한 의병 제대한 월남 레인저인 마이크 에카니스와 그의 동료들과 팀을 이루어 그린베레에 특수 전투 훈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다음 나는 포트 브래그에서 기본 훈련 중대 중대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군단 G-3(훈련, 작전, 기획 등) 훈련부에 배치되어 저격 프로그램과 레인저 및 그린베레 대대의 EDRE(Emergency Deployment Readiness Exercise/긴급 전개 준비 훈련) 프로그램의 기획자 및 평가자로 근무했다. 주로 특수 작전 임무에 투입되는 HALO 팀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통해 나는 그린베레 및 레인저 대대와 함께 정말 흥미로운 HALO 강하를 많이 할 수 있었다.
1978년 초, 마이크 에카니스, 척 샌더스, "바비" 반 응우옌이 0200시에 내 문을 두드리며 함께 비공식 임무를 수행하자고 말했다. 나는 군에서 나를 보내주지 않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그들과 알레그레트 장군은 1978년 9월 8일 니카라과-코스타리카 국경 근처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사망했다. 이 외에도 나는 더 많은 좋은 친구들을 잃었다.
나는 포트 브래그에서 영외에서 거주했다. 1978년 초 어느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막 집에 도착하자 차 한 대가 우리 집 진입로로 들어와 차를 세웠다. 내 아내 그레내가 누가 온 거냐고 물었다. 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딕 미도우즈 같아."라고 말했다.
이에 그레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에게 말해." (SOG 시절부터 미도우즈는 보통 0300시에 문을 두드리며 "비공식적인" 임무에 나를 데려가려는 멘토/동료/친구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는 항상 내 친구이자 멘토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미도우즈가 있었다. 그는 "톰슨, 자네를 위한 일이 있어. 우리는 새로운 티어1 작전 분견대(SFOD)를 구성하고 있지. 자네가 선발 과정을 설계하고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줬으면 하네.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네도 작전 팀에 들어갈 수 있어. 오늘 자네를 재배치하고, 내일부터 업무를 시작하게 될 거야. 네 업무는 극비로 처리되겠지. 아무도 네가 뭘 하는지 알 수 없어. 질문 있나?"라고 말했다.
내가 대답했다. "조지아 대학교에 박사 학위 과정을 밟게 됐습니다. 어제 이 집(브래그에 있는 내 집)을 팔았고, 지난주에 조지아주 애선스에 있는 새 집을 계약했죠. 이미 어린 자식만 두 명이고 3개월 후에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날 예정입니다. 제 꿈의 직장이긴 하지만, 이번 근무를 마치려면 3년은 필요합니다."
미도우즈는 "총을 내려놓은 것 같군."이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선택을 무르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가족들을 저버릴 수는 없죠."
그는 "행운을 빌어, 톰슨."이라고 말하며 차를 몰고 떠났다. 미도우즈와 나는 1995년 7월에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른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내게 선발 과정 수립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조직이 원래는 "블루 라이트"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1st SFOD-D(델타포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지아 대학교, 대학원
1979년 6월, 나는 조지아 대학교에 배정되어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 후 조지아 대학 육군 ROTC 부서의 부지휘관 및 3학년/교관 및 레인저 중대 고문/트레이너를 맡게 되었다. 또한 인근 대학에서 두 개의 외부 육군 ROTC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2년 CGSG에 진학하기 전에 전장 스트레스와 21세기 특수작전에 관한 2년간의 연구를 완료했다.
나는 조지아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마쳤고, 내가 "톰슨 박사"가 되며 어머니와 했던 약속이 이행되었다.
(내가 맡았던 뛰어난 생도 중 한 명인 제프 모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지미 카터 대통령)
나는 조지아 대학 근무를 마친 후 델타포스 선발 과정에 참여하겠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조지아 대학에서의 근무를 마칠 무렵 나는 미 육군 CGSG(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지휘 참모 대학교)에 선발됐으니 델타 선발 과정을 CGSC 이후로 연기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휘 참모 대학
나는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 있는 지휘 참모 대학에 다니며 두 번째 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학교장은 전투 경험이 있고 심리학 박사 학위가 있는 그린베레/레인저 장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를 CGSC의 리더십 교관 및 Airland Battle 2000, 즉 군대가 육해공 통합 팀으로서 높은 성과를 달성하며 21세기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을 연구하는 프로젝트 팀의 일원으로 배치했다. 나는 전장에서 높은 효율성의 전투 참모 및 리더십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연구 초점을 맞췄으며, 전장에서의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이 내 책임 영역에 추가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육군 사단과 NATO 국가를 방문하여 지휘관과 참모진에게 높은 성과와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에 대해 교육하고 최신 정보를 제공했다. 이는 3년간의 근무였고, 델타포스 배치 가능성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그리고 나는 CGSC에 있는 동안 중령까지 진급했다.
CGSC 근무가 끝나갈 무렵, 나는 조지아 대학교에서 육군 군사학 교수로 임명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1986년에 이를 수락했고, 21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1988년에 전역했다. 1970년에 내가 세웠던 목표가 최소 20년 이상 현역으로 복무하고 중령 이상의 계급으로 군에서 전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임무는 마침내 완수되었다.
High Performing Systems, Inc.
나는 1984년 1월에 참전용사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국제 경영 컨설팅 회사인 High Performing Systems, Inc.(HPS)를 설립하여 다음 경력으로 삼았다. 이 회사는 내가 군 경력 동안 개발한 모든 기술을 적용하고 전 세계 임원들에게 이러한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
2024년 1월 10일, High Performing Systems, Inc.는 창립 40주년을 맞이했다.
엘리트 군인이구만
미 2사단장 건파이터 에머슨은 한국전쟁 참전자로 매우 특이한 사람인데 항상 카우보이 리볼버를 차고 다녔음. 콜린 파월 전 합참의장이 대대장으로 저때 2사단에 들어갔는데 평생 파월의 인생멘토가 됨. 에머슨은 18공수군단장이 되는데 당시 파월은 다른 부대 대령이었음. 에머슨은 전역하는데 파월은 불러들임.
전역식 사열대표로 파월을 부르고 에머슨만의 행사를준비했는데 훈시 도중에 전사한 사람 이름부르며 울기도했다고함. 행사 중 파월에게 신호를 주자 파월이 뒤로 돌아 사열 중인 전 병력에게 이렇게 외침. 장교들! 장교들만 뒤로 돌아! 병사들에게 경례!
파월이 본인 대대장 이취임식때 연병장에 나가니 도열병력은 없고 기수들하고 최소임원만 있었으며 행사도 금방 끝났어 왜이런가 물어보니. 사단장 에머슨이 밑 장교들 이취임식때 쓸데없이 병사들 도열시켜서 훈시하는거 안좋아하니 이취임식 때 병사 도열금지시켰다고 .... 출처: 콜린 파월 자서점.
중령급에서 그런 사례는 간혹 보긴 했는데 별달고 있는 사람이 그러는건 진짜 신기하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