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정의의 대의(Operation Just Cause)’ – 1989년 전투 강하 이야기
1989년 12월 20일, 현지 시각 새벽 2시 5분 경 — 파나마 영공 침투 직전
“강하 지점이 적의 사격 아래 있다! 너희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게 해라!”
카를 존슨 대위(웨스트포인트 1972년 졸업)가 C-141 수송기 안에서 스피커를 통해 외쳤다. 수송기 안에는 우리 공수부대원 120명이 탑승해 있었다. 나는 지금 진짜 적을 상대로 한 전투 강하부대의 일원으로 작전에 투입되는 중이었다. 단 35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것은 내 군 복무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전투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20년 가까이 뛰지 않았던 첫 강하, 그것도 내 생애 첫 야간 강하였다.
나는 초임 소위 시절 제2기갑연대 소속으로 동서독 국경을 따라 정찰 임무를 수행했고, 이후 연대 본부 작전장교로 1년간 복무했다.
이후 1971년 의무장교로 전과하여 군의관의 길을 걸었고, 의무총장(육군 Surgeon General)의 추천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한 뒤 외과 전문의로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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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예상치 못한 전투 투입
1989년 8월, 나는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에 위치한 **우막 육군병원(Womack Army Hospital)**에 외과과장으로 부임했다. 병원 업무에 바빠 부대 내 움직임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어느 날 44의무여단(44th Medical Brigade) 소속 외과 군의관이 “사람들이 이상하리만큼 예민하다”며, 뭔가 작전이 진행 중인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2월 초, 병원장이 내게 연락해 PROFIS(전시배치계획에 따른 의무병력 지원제도) 배정 변경을 요청했다. 기존 44의무여단 대신, 82공수사단 307의무대대에 배속되라는 것이었다. 해당 부대는 공수사단의 작전·훈련을 지원하는 실전 의무지원 부대다. 내가 이미 공수 자격이 있었기에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수락했고, 대대장과 면담 후 장비를 수령하고 곧 재강하 훈련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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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발동
12월 17일(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파나마 방위군(PDF)의 미국인 대상 적대 행위에 대응하여 작전 조기 실행을 지시했다. '정의의 대의 작전(Operation Just Cause)' 은 원래 1990년 1월로 예정돼 있었지만, 즉각 발동됐다.
다음 날인 월요일 오후 1시, 나는 307의무대대 XO(작전담당 중령)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500시에 대대 본부로 집결. 군장 챙겨와.”
아내는 샬럿에서 병든 장인을 간호 중이었고, 집에는 막 학교에서 돌아온 11살 딸아이만 있었다.
나는 딸을 꼭 안고 말했다. “어디 가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언제 올지도 몰라. CNN 잘 보라고 엄마한테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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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강하 임박
15시 5분, 대대장이 선언했다.
“내일 밤 파나마로 전투 강하한다.”
충격이었다. 내가 들어가는 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그 시점부터 막사 폐쇄, 외부와의 모든 통신 차단.
재강하 훈련은 생략되었고, 대신 9mm 권총 지급 후 포프 공군기지 옆 그린램프(Green Ramp) 대기장소로 이동했다.
82공수사단에서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제1여단 전투단(1st BCT, 504 낙하산 보병연대 기반)이었다. 원래 2여단이 정예대기부대였지만 작전이 앞당겨지며 현 시점의 BCT가 동원된 것이다. 당시 준비 상황을 보며 나는 신속대응군의 상시 훈련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대기 장소인 작전 통제 막사에서 여단장과 첫 대면을 했고, 그는 1983년 그레나다 작전 당시 레인저 부대원으로 첫 전투 강하를 경험한 인물이었다. 차분하고 신뢰감을 주는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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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병사들과 함께
504연대 중대장들이 소대장들에게 작전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치명적 무력 사용이 허가되었다”는 말을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법한 장교들이 하고 있었다.
나는 43세의 군의관이었고, 내 주변의 대부분은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이었다.
나라가 전쟁에 나설 때 가장 먼저 앞에 서는 건 늘 청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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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 장비, 구식 하니스, 그리고 착각
우리는 소련 인공위성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천막 안으로 대피했고, 야간 투시 장비에서 아군을 식별하기 위한 **적외선 반사 밴드(Glint Tape)**를 왼팔과 헬멧 상단에 부착했다.
파나마 방위군도 미군과 동일한 전투복을 착용했기에 아군 오인사격 방지를 위한 조치였다.
강하 직전 낙하산을 착용하러 갔을 때, 나는 "이건 어디에 펀치 버튼이 있어?"라고 물었다.
점프마스터가 “마지막 강하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내가 “거의 20년 전”이라고 대답하자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다행히도 현재 낙하산 하니스는 예전보다 훨씬 안전한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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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및 강하
1989년 12월 19일 오후 8시, 첫 비행 편대로 이륙했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우박과 빙결폭풍이 몰아치고 있어, 민간 제빙 장비까지 동원됐다.
6시간의 비행 끝에 0205시, 카를 존슨 대위가 스피커로 경고했다.
"강하지점은 아직 확보되지 않았다. 공항 터미널에서 총격전이 진행 중이다."
0211시, 강하 개시등(Green Light) 이 켜졌고, 나는 토리호스-토쿠멘 국제공항 활주로 상공 중심부에서 강하를 시작했다…
그건 계획이었을 뿐이다.
지상에서의 적의 대공 사격으로 인해 수송기 편대는 몇백 미터 동쪽의 습지로 이탈하여 고도 500피트 이하에서 강하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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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 중 착각, 그리고 전투 지원
낙하산이 완전히 펼쳐지고 내려가던 중, 내가 본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뒤따르던 수송기들이 내 앞 비행기보다 낮게 날고 있었다.
순간, ‘저기 부딪치겠는데?’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그건 실제 비행기가 아니라, 아래 흐르던 옅은 구름에 비친 비행기들의 그림자였다.
야간 강하의 변수가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착지 후 나는 총성이 들리는 민간 공항 터미널 방향으로 향했다. 우리 의무대는 그곳 또는 인근에 **환자 집결지점(CCP)**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총성 들리는 곳으로 행군하라”는 지휘 원칙대로, 다른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집결지점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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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나는 군의관이자 군인이었다
그 35시간, 그리고 이후 며칠 간 나는 철저히 훈련된, 잘 지휘된 전투부대를 직접 경험했다.
로마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로마군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들의 훈련은 피 없는 전투였고, 전투는 피로 물든 훈련이었다.”
우리의 성공은 훈련, 동료애, 사명감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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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 Point 의 세 가지 가치로 돌아보다:
Duty (의무) – 어디든 부상자가 있다면 치료하러 간다. 20년의 훈련과 18년의 외과 경험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
Honor (명예) – 평소 야전 의무지원의 중요성을 설파해온 내가, 실제 그 현장에서 뒷걸음질쳤다면 그것은 위선이며 비겁함이다.
Country (조국) – 나는 외과의사이기 전에 군인이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간다. 그리고, 맡은 임무는 반드시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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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9년 작전 JUST CAUSE에서 82공수사단의 일원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
모든 훈련과 경험이 그 순간을 위해 준비되었음을 체감했다.
그리고 내가 의지한 건, 나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훌륭한 체계와 훈련 시스템이었다.
닥터 도노휴
첫 전투 투입치고 성공적이었나보네. 역시 20년 짬밥 무시 못 함. ㄷㄷ
이거 보니까 델타 작전요원 출신 델타 의사보조사(PA) 중령 햏이 떠오르네요. 파나마전 때 유닛 신입대원으로 처음 전투파병 되고 그린베레 메딕 과정 수료 후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에서 임무수행 한 뒤 E8 때 부대 추천으로 PA스쿨 가서 졸업했고 소위 임관 후 첫 부임지가 82에어본이었는데 대대 군의관이었지만 전기전술도 많이 가르쳤다고... ㅋ
델타있다가 그린베레로 갔다가 장교임관한건가요?
델타 대원 신분으로 SFQC에 입교한 거죠. 델타에서 입교하면 일부 과정들은 건너 뛰어서 교육 기간이 좀 짧아진다는데 18D 과정이라 수료까지 15개월 걸렸다고 하네요.
20년만의 공수강하인데 감각이 살아있었나보네 ㅋㅋ 자칫 잘못하면 발목 접질러서 본인이 부상자 될뻔했을듯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