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잡담을 집어넣고 싶다 - jäger의 글에 이어붙이며
최근 올라온 게시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지난 12일에 jäger가 올린「난 잡다한 만담을 넣는 걸 좋아해」라는 한 줄짜리 글이었다—이른바 제곧내. 별 이유는 없고, 그냥 나도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는데, 밤잠도 안 오는 김에 왜 그럴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뭐랄까, 우선 여기서 <만담>이라는 건 단순히 <재미있고 익살스럽게 세상이나 인정을 비판ㆍ풍자하는 이야기>라는 사전상의 정의라기보다는, 그냥 글의 전체 전개와 딱히 관련이 없는 말장난을 가리키는 말로써 이해보겠다. 딱히 중심서사와 상관있는 사건에 대한 키워드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을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음 사건에 대한 암시를 하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그냥 <잡담>이라는 것. 도대체가 이게 왜 하고 싶을까?
사실 이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고, 문학이 탄생한 고대로부터 시작된 문제였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8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줄거리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다고 해서 통일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단 한 사람의 인생에도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그중에서 전혀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특정 인물이라도 결코 단일한 행동을 이루지 못하는 수많은 행동을 한다.> 그는 인간이란 게 원래 딱히 통일성과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게 맞는 말인 게, 내가 어제 만난 후배한테 별 생각 없이 웃어준 건, 내 인생의 중심서사라고 볼 수 있는 소설가로서의 삶이나, 그 밖의 다른 정체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우연한 일이었다. 물론 사소한 실수행위들로부터 무의식을 추론해 내려했던 프로이트 같은 친구는 이 사실을 부정하겠지만—「실수의 이러한 모든 작은 특징들은 주의력 박탈이라는 이론을 가지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이 할아버지가 이렇게 꽥 소리를 지른 게 어제오늘 일인 건 아니니, 그냥 그러려니 하자. 어쨌거나 저건 우연이다.
그런데 소설은,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현실과 반대다. 주제의식이 일상 그 자체가 아니고서야, 사건의 배치는 주제의식에 따라 일정한 통일성을 요구로 받는다. 이거를 잘 못하면 <글의 흐름>을 방해하는 삼류소설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데, 독자는 글을 읽음에 있어서 모든 대사와 사건, 그리고 인물에 등장이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자가 읽고 싶은 건 소설이지 현실은 아니다. 현실을 봐라. 수많은 우연과 딱히 의미로 이어지지 않는 무의미한 인과들의 집적…… 쥐뿔 의미 없어 보이는 인생의 수많은 순간들이 부디 뭔가 이유가 있는 순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근시안적인 인간의 시선에선 무의미인 것이 신의 역사함 속에서는 부디 의미이기를 바라는 고대인들의 <섭리>를 향한 믿음이—혹은 헤겔이 부르짖은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란 게—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가?「신들이 하는 일들은 섭리로 가득 차 있다. 운명이 하는 일들도 자연과, 또는 섭리가 지배하는 복잡한 인과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만물은 섭리에서 흘러나온다. 그 밖에도 필연과, 너도 그 일부인 전(全) 우주에 유익한 것이 있다. 자연 전체가 가져다주는 것과 자연 전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자연의 모든 부분에서도 선하다.」신이 죽은 시대에 사는 우리에겐, 이런 위안조차도 없다.
그래서 소설에서라도, 그 주제의식이 뭐를 향하건 간에, 어쨌거나 소설이라는 구성 안을 꽉 찬 의미로 채우고자 한다. 하다못해 주인공이 밥을 먹어도 그건 다음 사건을 위한 원기보충으로 이해된다(나는 똥 싸려고 밥 먹는 인물의 얘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 그걸 쓰는 작가나, 읽는 독자나 일종의 <대리만족>을 소설 속에서 행하는 것이며, 혹은 자신의 현실 역시 그렇게 의미 있는 순간들의 나열이기를 바라는 문학적 의례행위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모든 순간은 의미와 이유로 빛나야하며, <잡담>같은 요소는 죄악이다. 아까 인용했던『시학』8장의 마지막 문단이 다음과 같은 건 적확한 논리적 귀결이다.「그러므로 다른 재현 예술에 있어서 재현의 통일성은 대상의 통일성에서 비롯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의 재현인 줄거리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단일한 행동을 재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부분들을 구성하는 사건들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옮겨 놓거나 빼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덧붙이거나 빼버려도 뚜렷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전체 중의 부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정교한 소설적 톱니바퀴를 설계해도, 글쎄, 딱히 내 현실이 의미로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될 것 같진 않다. 기껏해야 가끔씩 불이 들어오는 백열전구에서 형광색 LED조명으로 바뀌는 것 정도? 영광은 늘 순간이고, 권태의 그림자는 짙다. 그리고 상식에 호소해서, 빛나고픈 건 소설이 아니라 그 소설을 읽는 인간 개개인들이 아니겠는가? 이쯤 오면 소설가는 다른 걸 시도해보자 한다. 소설에 적히는 건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라 여겨지니, 거기에 일상에서는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잡담>을 넣어보면 어떨까? 그러면 소설 속에서 어떤 서사적 연결고리를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게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시도정도는 해볼 수 있잖아? 하지만 결과는, 에라이. 끝.
오늘은 조용하네
인용문 명상록?
시학 안 읽어도 되게 인용까지 해주시고
명상록 맞음. 시학은 그냥 읽어봐라. 재미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