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론과 우연
새삼 하는 말이지만, 인간은 목적론적인 동물이다.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그걸 왜 하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목적>으로 귀결된다. 하다못해 할 게 없어 느끼는 공허와 무기력한 감정 역시도 목적이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는 점에선, 인간이 지극히 목적론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래서 인생이 목적론적인가? 오, 이건 애매하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장래희망 칸에 적었던 꿈을 향해 달려갔고 있을 정도로 일관성 있는 인간은, 전체의 1할도 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란 건 살면서 만나는 각종 우연적 요소들에 의해 계속해서 바뀐다. 소방관, 체육선생님, 의사, 공무원, 대기업, 화가, 소설가, 그리고, 그리고……
이 요소는 여러 가지다. 단순히 친구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으며, 혹은 스마트폰처럼 바뀐 기술들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예측 바깥에 존재하는 미지의 무엇으로 다가온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다. 돌진한다. 충돌한다. 세상이 아무리 필연적인 체계라 할지라도, 그 지도를 우리가 관망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우연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필연성이 감추어져 있는 형식이다>라고 말한 엥겔스의 통찰은 거꾸로 됐다. 우연성이 감추어져 있는 형식이 곧 필연성이다. 세상은 필연일지라도, 그 안의 인간은 우연의 지배를 받으며 나아간다. 그 우연이 부드러운 손길로, 혹은 야만스러운 주먹질로 우리가 필연적 체계라 믿었던 협소한 세계를 뚫고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게 나락이든 천국이든, 여하튼 간에 다른 어딘가로 이동한다. 우린 다른 존재가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목적과 우연, 이 두 가지 모순된 힘이 소설가의 두 유형을 만들어낸다. 물론 두부 자르듯 깔끔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향상 구분이 될 정도로 나뉜다. 목적론적 유형은 주제의식을 구상하고 거기에 맞는 전체스토리를 짠 다음에 각각의 장면들을 배분한다—문학교본에서 볼법한 지극히 상식적이고 교과서적인 설명방식. 이런 방식의 원조는, 적어도 그걸 최초로 학문으로서 기록했다는 점에선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문학론은 <목적telos>를 강조하는 그의 철학이 향하는 당연한 필연적 귀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시학』17장에서 이 부분을 정확히 언급한다.「주제가 이미 정해져 있건 시인이 스스로 주제를 정해야 하건, 먼저 전체적인 구도를 대체로 그려본 다음 삽화(揷話)들을 집어넣고 발전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런 목적론적 작법의 최대 단점은, 그냥 그 자체로 작위적인 냄새를 풍기기 너무 쉽다는 것이다. 소설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맞춰 인물이 끼워 맞춰지기 쉽다는 말인데, 이러면 소설이 고루해진다. 우리 삶을 돌아봐라. 그런가? 솔직해지자. 아니다. 특별한 인생스토리나 철학적 훈련을 받은 게 아니고서야, 내가 있고 서사가 있는 것이지, 서사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이성은 전자를 추론하려고 하지만, 그 오만한 정념은 후자를 선택하고 만다. 서사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사를 만들어나는 것이라고 믿으려한다—교회와 보이스카우트에서 본인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반복되는 지루한 자유의지 같은 얘기들의 실체. 이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보다 이야기의 <조직적 배열>을 더 중요시 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이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들을 조직적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실제로 비극은 사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삶과 행복(불행 역시 행동 속에 들어 있다)을 재현하며, 비극이 겨냥하는 목표는 행동이지 성품이 아니다.」
그럼 우연적 유형이란 무엇인가? 비밀이다. 끝.
※.....는 장난이고, 우연적 유형은 2화에서 풀 거다. 페이지가 많아져서 나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시인추방론을 말한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싸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전자는 본인이 이미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내 생각엔, 안타깝게도 아군이다.
※춥다. 감기 조심해라. 두 번 조심해라.
혹시 철학과이신가 시학이 자주 등장하네 성님도 감기 조심 퍄퍄
밀당 ㄴㄴ 빨리 다음편 뱉어주셈....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예전 꺼에도 변화유형인가? 그거 제시해놓고 안 올리지 않았었냐
잘 읽었습니다
아아, 그랬긴 했지. 근데 그때는 올리겠다는 말 같은 건 안 했음. 하지만 이번에는 했지. 이번에는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