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론과 우연2 - <열등한 시인들>의 웃음
※23장에서 이어짐(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web_fic&no=10146&page=1)
이런 의미에서 우연적인 방식으로 작법을 하는 이는, 천재적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논했듯 우리네들의 인생은 딱히 통일성의 암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연들의 다발이니까. 목적을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 목적은 그때그때 만나는 우연적 요소들에 의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조립되니까. 표현컨대, 그들은 무언가 하고픈 즉흥적인 착상에 귀를 기울이는 유형이다. 이른바 마음의 소리랄까? 물론 목적론적을 엄격히 적용시키자면, 이 짧은 순간마저도 목적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본 논의에서 느슨한 정의로서 사용되고 있는 기승전결을 뚜렷이 갖춘 큰 서사에 대한 목적론이라고는 볼 수 없다. 차라니 <옴니버스>라고 하면 표현이 정확하겠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방식을 <삽화(揷話)식>이라면서 극딜했다.「단순한 줄거리와 행동을 다룬 작품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삽화식>의 줄거리나 행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삽화식 줄거리>란 여러 삽화들이 개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연관성 없이 연속되는 것을 말한다. 열등한 시인들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작품을 만든다면, 우수한 시인들은 배우들 때문에 만들 때가 있다. 실제로 경연을 위한 작품을 만드느라 줄거리를 지나치게 늘이는 바람에 사건의 연속성을 그르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학의 아버지가 이런 방식을 <열등한 시인들>이나 사용하는 <가장 나쁜 것>이라고 명명했다. 거대한 통일적 체계론 안으로 우연을 끌어내리려는 근엄한 발악. 하지만 이런 목적론이 도리어 인간을 비극 속으로 구겨 넣는 환원주의가 아니던가? 삶은 다양하고, 소설은 한정되어 있도다. 이런 의미에서 그때그때의 이야기들을 적으려는 우연적인 <열등한 시인들>은 좀 더 인간의 본질에 근접한 유형인지도 모른다. 딱히 통일적인 주제 없이 한편, 한편에서 던져지는 소주제와 떡밥들을 계속해서 이어 붙여가며 방향 없이 뻗어나가는 분열자들……「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分岐)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려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그들이 나무를 보며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당신이 옴니버스와 각종 우연적 구성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의 유일한 양식은, 주제의식이 없다는 게 곧 주제의식인 역설이다. 누가 역설들을 오롯이 견딜 수 있는가? 글쎄, 그런 건 없다. 존재론적으론, 끊임없는 이산집합을 반복하는 분열자 그 자체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기에 존재하는 건 <분열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끊임없는 이산집합을 반복하는>이라는 분열자의 특성뿐이다. 즉, 흐름과 운동이다—니체에 애착이 있다면 <힘 양자(Machtquantum)>라는 용어도 괜찮겠고. 또한 인간-본성론적으론 분열된 상태의 불안을 계속해서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에 분열된 자는 다시 합쳐지려고 하며, 또 반대로 합쳐진 상태로 계속 머무르려는 압제와 권태의 사슬을 두르고 평생을 살 수 있는 인간도 없기에, 합쳐진 자는 다시 분열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혹여나 멈춘 자가 스스로를 분열자라 칭한다면, 그 자는 사실 자기가 나무인 것을 자각하지 못한 백치거나, 혹은 마키아벨리다. 예전에도 그랬고, 우리시대에도 이런 자가 한둘이 아니니,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고 본다.
그럼 하고자 하는 말이 뭔가? 글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좀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했지만,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우연은 인간을 구성하는 두 축이라는 것이다. 목적과 우연은, 그것이 세계의 본성이거나, 혹은 인간의 본성이다—물론, 이는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내 경험상,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연 목적론적 유형이다. 하지만 그 말이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란 말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우연에 반응하고 있고, 그 분열 속에 목적은 재조립된다. 적당히 비뚤어진 의미의 변증법(2세기 전에 죽은 헤겔은 너무 표정을 찡그리지 않도록 하자). 소설가가 할 일은,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두 모순적인 면모를 적당히 잘 가져 놀 줄 아는 유연성을 키우는 것이다. 박쥐와 유머가 핵심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작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웹툰계에 있다고 보는데, 양영순 같은 사람이 그렇다고 생각 중이다. 그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 중인 <덴마>를 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뭔말인지 직관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웹툰은 크게 덴마와 덴마 아닌 것으로 나뉜다. 물론 지금은 뿌려놨던 이야기들을 하나의 서사 안으로 뭉치는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여러 에피소드들을 그때그때 풀어놓는 모자이크식 진행을 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특별한 노하우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마지막 장면을 정해 둔 뒤 중간 부분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전개해나가는 일이 많습니다. 일단 결말을 정해 둔 이상 그곳까지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최적의 루트를 채운다는 개념으로 진행합니다. <희노애락을 모두 재미의 일환으로 삼아 감정적으로 몰리는 일 없이 진솔하게 표현한다>를 기본삼아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며 그리는 것이죠.」끝.
ㅋㄷㅋㄷ댄마
이런데서 들뢰즈 인용하는 사람을 다 만날줄이야
믓시엘.
쓰벌 누구를 위한 글이란 말인가. 생소한 단어가 너무 많으니까 기본적인 독해가 안되네. 저 단어들은 풀어써주거나 익숙한 단어로 대체 할 순 없는거야? 검색하면서 읽는다고 해도 평소에 보고 써본 단어가 아니라 역시 독해 안되는건 마찬가지. 빡대가리 울고간다.
<완성>에 대한 글을 읽고 지려서 <변화>에 대한 글을 앞당겨 달란 댓글을 쓴 적이 있는데, 아직까지 안쓰는 이유가 있다면 뭐가 있을까? 아직 글을 쓸 만큼 정립(?)이 안된거야? 쓸 생각이 있긴 한것인지 궁금. 분명히 언젠가는 써줄거란 약속만 있다면 기다릴 수 있음! 쓸 생각이 없다면 지금 말해줘. 진짜 절망은 헛 된 희망이 동반하는 법이니까 ㅠㅠ
우연적으로 집필하고 또 삽화적이라는 이러한 서술 방식은 소설을 두 가지, 중단편 소설과 장편소설로 나눴을 때 장편소설에서는 적합하지 않을 거 같다. 다시말해 우연과 삽화를 각각 분리해서 하나의 완성된 글로 남겨둘 때는 그것이 빛을 발하겠지만 그것이 여러 갈래가 일렬로(한 길이라니까 졸렬한 느낌이 있는데, 어떤 결말이라고 생각해주면 감사하겠다) 귀결되는, 귀결되어야 마땅하는 장편소설의 경우에는 심지어 중단편 소설에 적합한(혹은 자신있는) 작가가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글을 쓴다고 하면, 난삽하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울 듯 함. 무엇보다 우연과 삽화에의 창작을 다독이는 이런 글은 자칫 '분기'되는 게 아니라 그저 뜨문뜨문 '놓여있는' 소설을 써도 나쁠 게 없다는 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리 받아들이는 건가? 하지만, [그나저나 인간이라는 건 자신이 찔리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야.] 라며 진작에 우리네들의 마음을 꿰뚫어본 작가도 있으니까 그치진 않겠다. 어쨋든 나는 모든 골목은 불가결적으로 대로를 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본인의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말을 하자면, 우연에 의한 글쓰기를 일종의 완성으로 치부하는 일은 되도록 기피해줬으면 한다. 그 결합부가 명백히 허술한대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무책임한 작가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게 아니니까. 특히 지망생들의 글은 더더욱 그럼. 씨앗을 뿌린다고 모든 씨앗이 발아하는 건 아니다만 될 수 있으면 훌륭한 수확을 위해 시간을 들여 꾸준히 관리하는 게 작가가 완수해야 될 임무라고 봄.
글쓴이가 직접 "본문에서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우연은 인간을 구성하는 두 축이라는 것이다." 라고 떠먹여주고 있는데도 우연과 삽화에 안주하는 일은 없길 바라는 마음에 댓글 남김. 글쓴이가 양면성을 요구하는 것에 비해 나는 귀결만을 주장하는 것 같아서 찔리지만.
재밌었땅
인용문이 들뢰즈인 걸 알아보다니, 이건 좀 색다르네. 전공자인가, 아니면 교양?
아아, 미안하군.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적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작가가 자신의 지적허세를 부리기 바빴다는 의미겠지. 반성하고, 이 다음부터는 좀 더 주의해보겠음. 내가 이쪽으로 진행되는 주제의식을 너무 좋아해서, 나도 모르고 경도 되어버린듯.
그게 11번 글이었지? <변화>유형의 글이라. 솔직히 나도 까먹어버렸는데, 음... 메모해서 컴퓨터 앞에 붙여놓을게. 언젠간 쓸 거임. 그런데, 그 부분은 내가 생각하는 소설에 대한 결론적인 부분이기도 해서, 한번에 다 적지는 않고, 이렇게 여러 편들을 통해 그 유형에 대한 여러가지 면모들을 조금씩 풀어놓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뤄보고 싶거든.
아냐, 필요한 지적이라고 봐. 뭐랄까, 삽화적인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 하나의 삽화 하나에서는 짜임새 있는 개연적 구성을 갖추는 건 중요하거든. 또한 여러 개의 삽화를 다시 하나의 이야기 안에 재정렬하고, 또한 해체하기 위해서도 통일성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하지. 하지만, 아마도 지망생들은, 당연히 둘 다 갖추려고 노력할거야. 사람들은 욕심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