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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내밀함: 실재에 대한 실재의 모상



이런 생각해본 적 있는가, <나는 언제 처음 거짓말을 해봤을까?>에 대해서. 물론 당신이 어릴 때부터 독실한 도덕주의자인 관계로 거짓말 같은 건 일체 하지 않은 쾨니히스베르크인들이라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살면서 마주치는 인간군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경우는 굉장히 드문 것 같으니, 여기선 대충 논외로 치자. 대부분의 인간은 거짓말을 하며, 어떨 때는 그 거짓말 자체에 세상이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그레고리 하우스가 심심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 바 있다.「Everybody lies」어쨌거나, 그래서 이런 <호모-라이우스>들은 언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봤을까?


내 기억에 첫 번째 거짓말은 7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그날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갔는데, 집에 친척들이 와있었다. 날 보더니 친척 한 분이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대개는 공감하겠지만, 이 나이대에 아이들은 대개 남녀를 강박적으로 구별하며, 이 구분에 어긋나는 선지자들을 이른바 <얼레리꼴레리>로 놀리며 차별하기 마련인데, 그런 이유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성정체성에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아니요>가 되었어야 했다—게다가 그쯤 난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다지 흥미도 없는 축구놀음에 깊은 관심을 가진 척 연기를 해곤 했으니까(빌어먹을 축구왕 슛돌이가 내 유년기를 망쳐놨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을 해버린 거다.「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맑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유가 뭐냐고? 글쎄, 아마도 친척의 저 질문이 내포한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저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상되는, 어른들의 <까르르, 역시 요즘 애들은 빨라>라던가, 아니면 <벌써부터? 이 자식 이미 남자가 됐군. 나중에 크게 되겠는데?> 따위의 웃음에 반응하기 위함인 것이다. 아이는 누군가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고, 안타까운 트라우마를 겪는 게 아니고서야,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그렇다면 최초의 거짓말은 타자로부터 기쁨을 이끌어내기 위함인가? 단순한 애정결핍이나 관심유도? 물론 그렇게 단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궁금한 건 그 거짓말로부터 얻어지는 경험이다. 그러니까 그 최초의 거짓말로 말미암은 이후가 궁금하다는 것이지. 무릇 태어남보다는 그 태어난 아이가 훗날 어떤 인간이 되느냐가 더 궁금한 법이니까. 아이는 거짓말이 엄마를 즐겁게 했다는 지극히 단순한 동기를 충족시켰다는 것 외에 무엇을 얻는가? 내 생각에 그건 <실재實在>를 가져 노는 것에 대한 즐거움일 것이다. 오, 그 내밀한 즐거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 내밀한 맛에 대해서 아는가? 허구를 탐닉하는 세밀한 세공과정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철학이란 모름지기 개념정의로부터 시작하는 것, 실재란 무슨 말인가? 국어사전의 정의로는 한자말 풀이 그대로 <실제로 존재함>으로서 정의되고 있다. 엄밀하고, 또한 대개는 정신병스러운 인신록적인 논의들을 차치한다면—무려 <물자체物自體>라니, 전문의의 도움이 필요하다—그냥 우리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상을 실재라고 느슨하게 이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이가 한 거짓말, 즉 허구의 세계는 실재인가? 흔히들 무(無)에 비유되는 언어의 특성에 비춰보더라고, 또한 그것이 글로 적혔다한들 종이 안의 잉크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회의적 반응처럼, 그건 실재가 아니다. 호그와트가 만져지는가? 람보가 현실에 존재하는가? 이 단순한 거짓말이 그럴싸한 문체와 논리를 입고 확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소설>의 정의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라는 걸 생각해봐도, 이건 실재가 아니다.


하지만 얄궂게 다시 묻자. 진짜 실재가 아닌가? 거짓말과 소설은 실재가 아니겠지만, 그 허구가 만들어낸 타자의 감정이나 생각은? 그것도 허구인가? 아니다. 내 대답에 웃은 친척의 유쾌함은 허구가 아니다. 사회학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신경학적으로든, 어쨌거나 그건 실재다. 여기서 아이는 자신의 허구가 실재를 만들어낸다는 미묘한 역설을 경험한다. 창세기를 봐라, 하나님은 말로서 무(無)로부터 유(有)를 창조하신다. 첫째 날 무슨 말을 하니 하늘이 있고, 둘째 날 무슨 말을 하니 물이 있고…… 그래서 요한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당시의 아이에게 신에 대한 관념이 있는 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훗날 신의 권능이라고 알게 될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에덴동산의 이야기 속에서의 핵심은 선악과 따위가 아닌 <뱀의 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리고 만약 그가 이런 환상들의 내용을 실제로 체험한 것처럼 느낀다면, 이런 사실은 그의 신경증과 관련해서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러한 환상들은 <물리적materielle> 실재와 대립하는 <심리적psychische> 실재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신경증의 세계에서는 심리적 실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이런 식으로 경험한 자는, 거짓말의 핵심이 그로부터 말미암은 물질적 이득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직관한다. 그리고 여기에 몇 가지 조건들이 첨부되면, 그는 소설가, 혹은 그러한 유형의 인간이 된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서사의 기밀한 구성이나, 시적인 묘사, 리얼리즘을 적응 끌어온 수사 등의 소설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근원에는, 바로 이 <심리적 실재>에 대한 쾌감이 있다는 사실이다. 무로부터 존재를 이끌어내는 그 전지전능한 창조행위에 대한 예찬. 이 안에서 구상은 일종의 예배가 된다. 실재에 대한 실재의 모상과, 누가 누구를 모방했는가라는 답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걷는 즐거움.「우주는 바로 이렇게 해서 생겨났기에, 그것은 합리적인 설명(logos)과 지혜(phronēsis)에 의해 포착되며 <똑같은 상태로 있는 것>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점들이 이러할진대, 이 우주가 어떤 모상(模相, eikōn)일 것임이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