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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밥 굶는 이들의 크리스마스



곧 크리스마스다. 대개 이 시간을 전후로 신춘문예 당선통보가 간다. 국내 작가지망생이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고로 신춘문예의 경쟁률은 작게는 수백 대 일에서 많게는 1000 대 일로도 올라간다. 조선시대에나 볼법한 과거시험을 연상시키는 이 등용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통보전화를 받는 단 한명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쓴 맛을 삼키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어쩌면 매년 반복되는 고배의 잔이기에 이제는 그 맛이 그다지 쓴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을지도 모르지. 그건 또 그거대로의 슬픔이다. 하지만, 딱히 부자가 낙타바늘 들어가려는 것도 아닌데도, 그 좁디좁은 문을 통과한 기성들의 입장에선…… 글쎄, 그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뚫었음에도 생계 하나 제대로 간수되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음에 낙담할 따름이다.「글은 식물이 써야하는데, 왜냐하면 식물은 광합성을 할 수 있으니까 돈을 안 벌어도 되거든. 어쨌거나 아직까지 햇볕에 특허를 낸 놈이 없으니까…….」입에 붙은 유머라곤, 글밥으로 먹고 살 수 없다는 자조만이 남는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말은 등단하지 못한 지망생들에겐 질투를 유발하는 허세가 불과한 말처럼 들릴 테지? 거참, 배고픈 자가 뱉은 배부른 소리라니, 예나지금이나 주머니에 남는 건 역설뿐이구나—.


이런 사정은 웹소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혹자는 웹소설에서는 전자책의 문턱이 낮아서 쉽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대기도 하지만, 글쎄, 언제까지 그럴지 모르겠다. 맹자가 한 말 중에 유일하게 들을 만한 말인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라는 말처럼, 작가도 사람이기에 밥을 먹어야 글을 쓴다. 고로 글로 밥 먹으려는 사람들은 밥 나오는 곳으로 올 수밖에. 혹시나 여기에 문예창작과에 다는 학생이 있나? 만일 있다면, 너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구나. 예전과 다르게 문창과에 성적에 맞춰 대학에 온 인원 못지않게 장르문학이나 웹소설 쪽 지망생이 많아졌다는 걸. 또한 그걸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분위기라는 걸. 지적허세고 나발이고 금강산도 식후경. 여기에 순문학 운운하며 맨날 학식 2,500원짜리 씹어가며, 그것도 하루 두 끼가 부담스러워 하루 일식으로 살아가는 <백이숙제伯夷叔齊>들마저도, 밤이 되면 몰래 익명으로 닉네임을 파서 웹소설에 글을 올려대는 것까지 합산한다면…… 글밥 먹기로 작정한 작가들 중에 웹에 글 안 올리는 사람이 도대체 뉜가?


오늘 좀 두서가 없는데, 어쨌거나 순문학의 신춘문예이든, 웹소설에서 열리는 여러 공모전이든 무지막지한 경쟁률이기에 많은 이들이 좌절할 것이란 점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꼭 문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 역시 찬바람 쌩쌩 불기는 마찬가지라고 질타하는 놈년들이 있겠지만, 뭐,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님에도 딱히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글쎄, 나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선 그렇게 모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너의 문장력이 어떻던, 일말의 상상력도 존재하지 않는 클리셰 덩어리이든, 어쨌거나 글을 향한 열정은 비슷하리라 본다. <글은 그냥 취미로 써요>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글 쓸 때 가장 열정적이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는 걸 잘 아니까. 세상엔 패배자가 참 많다. 그런 세상에서 독창적이고 싶지 않은 이 뉘 있겠는가? 진짜 멋진 글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이 뉘 있겠는가? 좌절에 비웃음을 던지는 자들은 자신이 직접 걸어보지 않은 자들, 경기장에서 야유하는 건 늘 관중석에 앉아 편히 치킨이나 뜯는 이들이다. 선수들은, 경기에서 지든 이기든 다가가 악수를 한다. 뻔질나게 들여 봤던 폰, 자판을 누를 때마다 아려오는 손가락, 손목에 박힌 굳은살들…… 그이의 땀방울이 내가 흘렸던 눈물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현실의 벽이란 게 있다. 그 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건강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밀린 월세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나 부모, 또 아니면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말미암은 열등감일 수도 있다. 이들 중에 누군가를 비웃을 특권 같은 건 없다. 그저 그 벽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져 당장이라도 글을 접고 싶어진다는 점에서 같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이 벽은 <인정>이라는 벽돌들로 올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인정의 범위는 여러 가지다. 단순히는 <이제 너 사람구실하구나, 장하다 내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일수도 있고, 좀 더 넓게는 금융평가 기준으로 받는 내 등급이나, 소득분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인간은 이러한 인정들을 갈구한다. 아, 물론 그런 타자의 인정 따위는 갈구하지 않는 강력한 정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런 자는 사자 같은 존재다. 나는 그런 자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자와 인간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삶은 쾌락의 샘이다. 그러나 슬픔의 아버지, 즉 병든 위장으로 말하는 자들의 모든 샘은 중독되어 있다.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사자의 의지를 가진 자를 위한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미 지쳐버린 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의욕당할 뿐이며, 온갖 물결에 희롱 당한다.」


인정을 향한 열망, 혹은 거기서 좌절됨으로서 생긴 애정결핍은 그 자체로 망설임을 낳는다. 글을 그만두고 싶어지는 마음 밑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했을 때 느끼게 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너무도 모자란, 아무런 재능이 없는 존재라고 손가락질 받을 것만 같은 두려움. 그게 아들러식으로 노력하지 않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재능은 있는데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야, 노력하면 언제든 될 수 있어>식의 자위를 위한 위안의 자리를 남겨놓은 것이든, 아니면 그냥 그 낙담 자체가 무서워 움직이지 못한 채 자기만의 방을 찾는 버지니아 울프들이든…… 어쨌거나 그 벽은 높고 굵으며, 항상 눈앞에 존재한다. 하지만 벽을 오르지 않으면 변하는 게 없는 것 또한 냉정한 현실이다. 끊임없는 시도가 현 상황의 개선을 낳는다. 당신이 환상이라 생각하는 건 대개는 쟁취해야할 현실 그 자체다. 두려움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환상 속에 사는 건 당신이다. 도대체가 누가 꿈을 꾸고, 또한 뭐가 꿈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지속적인 시도와 박살남을 가로막는 요소는 타자다—좀 더 거창하게 <세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 자가 인정을 하고 말고는 결정짓고, 나는 그 손에 목숨이 달린 콜로세움의 불우한 검투사다. 우리는 타자를 잊고 글을 써야하겠지만, 동시에 아예 타자를 잊어버린다면 가치가 발생하는 근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당신이 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타자로부터 받는 사랑이나, 인정, 혹은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가치의 대부분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들일 확률이 높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모순돼 보이는 문제와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셈이고, 그런 의미에서 해결책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모순 사이에서 적당한 <중용(中庸)>을 취하는 게 동서고금을 막론한 해결책이긴 한데…… 글쎄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 중간을 가늠한단 말인가? 당신이 나침반 없이 남극 한가운데 떨어져있다는 사실엔, 큰 변함이 없다. 병명은 아는데, 안타깝게도 그 병이 불치병이다. 그렇다면 도대체가 진단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끊임없는 근면성실, 강인한 정신, 좌절하는 않는 의지, 문장에 대한 집념, 독창성을 얻기 위해 손보다 발바닥으로 글을 쓰려는 신념, 책상 앞에 널브러진 두통약, 소화제, 잊으려고 하면 재발하는 항문소양증…… 글을 잘 쓰고, 그걸로 글밥을 먹기 위해 해야 할 일들, 하게 되는 고민들, 분노, 슬픔, 외로움, 그리고 불 꺼진 밤이면 다시 가슴 속에 스며들어 낯설고 난감한 열정들…… 글쎄,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혹은 폭력적인 환원이 아니라면, 그래, 나는 당신의 고충을 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반쯤은 이해한다. 또한 지금 두루뭉술하게 하는 위로가, 한순간의 아편일 뿐, 내일 자고 일어나면 다시 고통이 밀려들리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는 나나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한 힘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테세우스는 신화시대에 살아서 아리따운 아드리아네가 실을 던져줬다지만, 신이 죽은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겐 그런 전기적 해결책도 없다. 회색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미로에 갇힌 너와 나, 우리. 그래서 서로가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벽 너머로 들리는 소리정도는 들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가끔씩 그 말들을 들으며 서로를 그려주는 것, 그건 세상에 몇 개 남지 않은 <인간적임>의 하나일 것이다. 뭣하나 확실한 게 없는 불안의 시대다. 크리스마스는 겨울이니 춥다. 따뜻한 녹차 마시고, 몇 자 더 적고 자자.「아주 불명료한 이 모든 삶들을 기록해서 남겨야 한다고, 나는 메리 카마이클이 앞에 있기라도 한 듯 말했어요. 머릿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삶의 축적인 무언의 압력을 느끼며 런던의 거리들을 떠올려보았어요. 살쪄서 부푼 손가락에 파묻힌 반지를 낀 채 양손을 허리에 대고 셰익스피어 대사의 율동 같은 몸짓을 하며 말을 하고 있는 길모퉁이의 여성들, 제비꽃 파는 여자와 성냥팔이 여자, 그리고 문간 아래 자리 잡은 쪼그랑 할머니, 또는 상점 유리창의 깜박이는 불빛과 다가오는 남녀들을 알려주는 태양과 구름의 너울 같은 얼굴을 지닌 떠도는 소녀들, 이 모든 이들의 삶을 남겨야만 한다고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