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감독 - 돌고 도는 문학적 즐거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왜 문학(비극)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에 대해서, 그건 바로 모방본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음울한 프로이트는 문명질서에 억압된 리비도 충동에 대한 대리만족이 문학적 즐거움의 근원이라고 말했고, 니체는 반쯤 철학서인『비극의 탄생』에서 근원적 일체성으로 귀일(歸一)을 희구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문학의 즐거움을 찾고자했다. 햇볕이 뜨거운 날이면 주머니 속에 찔러 넣어둔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카뮈의 경우엔, 타자 안에서 수동적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닌 자기로서 스스로를 정립하려는 <반항인>적 면모를 보는 것에서 문학적 즐거움을 찾으려 했다—만일 그에게 즐거움이란 게 유효한 개념이었다면, 아마도. 또 괴테는 어쩌고저쩌고,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은 흰나비는 어쩌고저쩌고,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어쩌고저쩌고…… 하여간 문학의 즐거움에 대한 견해는 아파트 벽에 붙은 중국집 스티커만큼이나 많다. 고로 그냥 딱 보고, 맛있게 탕수육 튀길 것 같은 집에 전화를 걸도록. 먹어보고 맛있으면 거기서 계속 시켜먹으면 된다—.
그래도 크게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들의 이름을 <배우>형과 <감독>형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전자의 경우엔, 마치 메소드 연기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에 몰입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정신과 육체 등 모든 면에서 드라마 속의 인물에 이입되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으로써 다른 세계를 온몸으로 경험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공감에 능한 편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감정으로 캐릭터들을 재해석하는 능력에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쪽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극에 몰입하는 동안의 동일성에서 즐거움을 끌어올린다—이름 하여 카타르시스.
반대로 독감형의 인간들은 문학적 요소를 다 뜯어서 보고자하는 친구들이다. 예전에 인터넷에 올라왔던 썰 중에,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잔인한 슬래터 영화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서, <어떤 미친 녀석이 이런 잔인한 장면에서 웃는 거지?>하고 뒤돌아봤더니 덩치 큰 백인아저씨가 혼자 웃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사람이 <쿠엔틴 타란티노>감독이었다고. 그럼 여기서 쿠엔틴 나란티노는 왜 웃은 걸까? 왜냐하면 본인이 B급 폭력미학의 대가(이걸로 A급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이기에, 보통의 슬래터 영화의 요소들을 다 알고 있다는 점에서의 웃음이었을 것이다.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효과음을 넣고, 어떤 부분에서 각본은 한번 뒤틀어주고, 잘린 팔 다리 모조품들을 어떤 각도로 촬영해야 리얼하게 보일 것인지…… 이 여러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예측해보고 평가하는 재미인 셈이다. 그래서 이 친구들에겐 한걸음 떨어져서—이른바 <메타적 시선>이라고 할까나—소설을 분석하는 게, 그들 나름의 몰입법이다. 일목요연하게 요약하자면, 전자는 영화가 시작할 때 시작하고, 후자는 영화가 끝날 때 시작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두 유형은 두부 자르듯 딱 나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령 감독적 요소만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에 공감하고 몰입하는지에 대한 요소가 결여된다는 점에서…… 뭐랄까, 너무 창백해서 쥐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 프랑스 예술영화처럼 되어버린다—그걸 굳이 이해해도 지적허세 외엔 딱히 뭐가 남는지 알 수 없는 허망함. 이 두 요소는 적절한 배합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며, 상황 따라 그 비율을 달리할 따름이다. 물론 여기서 이 <적절함>에 대해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는 게 유머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다. 우리는 비겁과 한 끝 차이일 뿐인 <조화>를 향유하고자 한다.「이 세상은 정말 훌륭하게 조성되어 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다른 모든 것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여행가와 건축가의 차이라도 말해볼 수 있겠다. 배우는 좋은 각본을 찾아 많은 여행지를 탐독하고, 건축가는 그 좋은 각본을 쓰려고 한다. 전자는 원하는 걸 못 찾으면 본인 스스로가 건축가가 되려고 하며, 후자는 <딴 놈들은 뭐 지었나?> 궁금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은밀한 여행을 한다. 결국 돌고 돈다. 누가 진리는 <원환(der Kreis)>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 표현을 잠깐 빌리자면, 문학 역시도 살짝 찌그러진 원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분열의 활동은 오성의 힘과 작업에 의한, 참으로 경이롭고도 더없이 위대한, 아니 절대적이라고도 할 힘의 발현이다. 자체 내에 흔들림이 없이 결집되어 있는 실체로서 그의 요소를 끌어안고 있는 원환은 직접 드러나 있는 대로 거기에 있을 뿐, 전혀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관계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둘레를 벗어난 우연적인 요소가 이 원으로부터의 속박을 느끼면서 원을 벗어난 다른 현실과의 연관 아래 독자적인 존재로서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 여기에는 거대한 부정의 힘이 발동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사유의 에너지이며 순수자아의 에너지이다.」끝.
끼요오오
바스터즈가 명작이지
학자형? 감독형이 아니고?
오호... 몰입적 독법과 분석적 독법의 차이에 대해서는 나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덤으로 나는 꽤 분석적으로 읽는 편인데, 보통 처음 읽을 때는 몰입해서 읽고, 재차 읽을 때 분석을 하는 스타일.
어우야, 오타네. 처음에는 <배우와 학자>였거든. 근데 학자보다 감독이 좀 더 괜찮은 어휘선택인 것 같아서 바꿈.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니... 생산적인 디씨질 가능하게해줘서 감사드림 횽아 시간나면 혹시 드라마틱 사건에 대해서도 써줄 수 있어? 옛날에 조르주? 암튼 누가 드라마틱한 유형을 몇 십 개로 분석하기도 했었는데... 소설 쓸 때마다 드라마틱한 설정에 엄청 공들이는 편이라 늘 궁금햇는데 시간나면 이것도 한번 다뤄주시길... (공손하게 부탁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조르주? 글쎄, 그쪽으로는 잘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으흠, 일단 메모해둠. 나중에 삘 받으면 한번 짱구굴려서 써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