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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적 자의식; 식민지와 혁명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행위가 자의식을 축조하는 원리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상의 정의를 빌리자면 자의식이란 <자아(自我)에 대해 갖는 반성의식의 총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이 <반성의식>이란 게 참으로 야시꾸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근대의 여러 망치들이 던졌던 질문처럼, 도대체 누가 반성을 한단 말인가? 말장난스럽지만, 내가 나를 반성한다면 여기서 <나>는 뭐란 말인가? 이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인가, 문법상의 한계인가? 그도 아니라면, 저 문장에서의 <내>와 <나>를 서로 구분되는 개념인가? 참고로 프로이트는 맨 후자의 생각에 집중했다. 그의 생각엔, 인간은 원래 그게 헤겔의 방종이든, 루소의 자연이든, 아니면 계몽주의가 질겁한 전근대적 야만이든…… 그 형태가 뭐가 됐던 인간은 자유스러운 존재인데, 여기에 공동체의 규율이 자리 잡으면서 <반성의 기준>이란 게 생겼다고 봤다. 저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공동체 내에서의 생존을 영위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유를 일부 반납하는, 일종의 정신분석적 사회계약을 한 것이라 본 셈이다—지능을 가진 짐승으로서의 인간을 역설한 홉스는 그의 선지자다.


훗날 <초자아superego>라는 이름을 불리게 되는 외부적 기준은,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마치 자신의 생각인 마냥 내면화되어, 일종의 검열기준으로서 활동하는 <양심>의 원형을 구성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릇을 깨뜨렸을 때 혼난 적이 없는 아이는, 그 일에 대한 어떠한 죄의식도, 혹은 공포심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자의식이란 게 마냥 초자아로 구겨 들어가는 것만은 아니다—우리도 엄마가 자꾸 잔소리하면 후드 뒤집어쓰고 밖에 당구나 한판 당기러 뛰쳐나가지 않던가?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런 일련의 일탈행위들 중 그 정도가 미약한 것은 의식화되어 실제로 현실에 <저지름>으로서 나타난다고 봤고, 반대로 너무 심한 경우에는 내면으로 극도로 억압되어 아예 의식화되지도 않게 유폐된다고 봤다. 그 지하감옥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는 뭔가를 선택하지 않는다. 표현컨대 이 친구는 일종의 괴뢰국가이자 식민지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아라는 열강의 지배를 받는다.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지를 취사선택한다는 식의 자유의지는, 주관식으로 이뤄진 세계에서 오지선다형 객관식 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개구리의 자위에 불과하다—수능 보는 양서류. 초자아는 로마황제마냥 기준을 따랐을 때의 <빵>을 약속하고, 때로는 공식적인 일탈을 위한 <서커스>를 제공해주는 방식으로 인간을 길들인다. 칙령을 위반한 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유배를 보내 격리 조치한다. 이런 질서의 극단에 도달한 인간은 초자아의 명령을 자신의 명령인 마냥 착각하려는 <습관>의 달인이 된다.「여기에서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명령하는 자이자 동시에 복종하는 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복종하는 자로 의지의 행위에 따라 즉시 작용하기 시작하는 강제, 강요, 억압, 저항, 움직임 등의 감정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자아>라는 종합 개념에 의해, 이 이중성을 무시하고 속여 알지 못하게 하는 습관을 알고 있고, 의지작용에서 일련의 오류 추리와 그 결과로 나오는 의지 그 자체의 잘못된 가치 평가에 여전히 매달려 있다—이렇게 해서 의지하는 자는, 행위하는 데는 의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굳게 믿게 된다.」


나를 잃어버린 자의 발버둥은, 발작적으로 혹은 도착적으로 나타나는데, 우리시대에는 정신을 포기한 육체에 집중하는 이른바 <몸짱-신드롬>으로 표현되고 있다—게임산업을 닫았으니, 당분간 머슬매니아는 번창할 것이다.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분석이, 현대에 와서 정반대로 뒤집혀버린 셈이다. 게다가 이미 우리는 신(新)로코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던가? 이제는 지식마저도 <섹쉬>해야 하는 뇌섹남의 시대이지 않은가? 우리에게 남은 건 자연스러움, 순박함, 매력…… 가격표가 붙은 낭만주의가 정신의 넝마주의를 멋지게 포장할 것이고, 우리는 그 상품들을 무려 드론배달을 통해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월세 밀린 거식증 환자의 블링블링한 유토피아—.


이런 의미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작가가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입맛에 맞는 서사로 배열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초자아의 검열행위와 닮아있다. 초자아는 반란군을 무의식 속으로 유폐시키고, 작가는 퇴고하면서 delet키를 누른다. 조금 더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자면, 초자아라는 강자를 따라하는 의례를 함으로써 조작된 자아가 조작하는 초자아의 권능을 갈구하는, 일종의 강자선망 내지 대리만족을 하는 꼴에 불과하다. 이력서에 넣을 수 있는 항목들이 곧 자신을 설명하는 전부가 되는 현대사회에서, 노예는 소설 속에서나마 갑(甲)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갑은 단연 자본주의고, 그래서 소설가들은 그 잘난 <시장원리>에 맞춰 글을 쓰려고 하지 않던가? 노예스럽게 축조된 자의식을 가지고 노예스러운 방식으로 펜을 들어, 소설적 허구 속에서나마 주인이 되고자 한다? 뒤틀렸지만, 지극히 정상적이로다.


하지만 얄궂게도 세상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기 마련이다. 드물게 이들 중에서 <정신병>에 걸린 자들이 도출되곤 한다. 이 환자들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비록 그것이 소설적 허구라 할지라도—반쯤은 <창조>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바람에, 본인이 선악을 구분 지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들의 착각은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게 만드는 인식능력전반을 흔들며, 군사정권에 의해 발표된 일련의 정정보도들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스스로의 인지부조화를 밀고 나고자 한다. 자기가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닌,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돈키호테의 탄생인 셈이다. 여기서 지배형식은 그 자체로 혁명의 씨앗을 내포한 <가능태dynamis>가 되어버리고, 또한 여기서 웹소설은 일종의 보급형 황금사과가 되어버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