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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판소설의 딜레마



이제 갤러리가 적당히 잠잠해진 것 같으니, 다시 수다나 시작해보자.


종종 소설과 현실정치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작품들을 만날 때가 있다. 계몽주의 내지 정치적 프로파간다임을 자처하는 그런 작품군들 말이다. 정치적 냉소주의가 일반화된 우리네들의 사회상에서 그런 작품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날카로운 비판을 날릴 때도 있다. 여기서 이런 작품의 효용성 같은 걸 토론에 붙일 생각은 없다. 그보단 이러한 형식의 소설이 뭔지에 대한 얘기들을 해볼 생각이다. 우선 이른바 <사회비판소설>의 핵심은 무엇일까? 무조건 비판하면 되나? 마치 대한민국 보수가 진보를 비판함에 있어서 기승전종북으로 가는 것 마냥, 마음에 안 드는 요소들이 보일 때마다 죄다 그건 좌빨짓이라고 빼—액 소리를 지르면 되는 건가?「김정일, 김정일이는 개새끼냐? 개새끼라고 하면 그건 종북세력이 아닙니다.」「저, 그건 방송용으로는 좀…….」「만약에, 아니, 이건 방송용이 아니라, 그럼 김정일이가 개새끼지. 그러면 개새끼가 아닙니까? 이게 왜 방송용으로 나쁩니까. 만약에 그런 대답을 못하고 피한다면 그건 종북세력이죠.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자유민주주의를 정말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글쎄, 그건 그런 작태 자체를 풍자하려는 게 의도인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 방식이다. 비판의 요체는 그 논증에 있는 것이고, 사회비판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논리체계를 갖춰야하며, 그 다음 관건이 이러한 논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예시와 상징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있고 주제의식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주제의식이 있고 그에 부합하는 이야기가 조립식으로 세워진다고 봐야한다랄까. 혹은 이야기를 전자의 방식으로 적었다하더라, 그 후에 후자의 방식으로 반드시 퇴고를 거쳐야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비극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사건의 조직적 배열, 즉 <서사>이고, 두 번째는 인물의 <성격>, 그리고 세 번째를 <사상>으로 꼽고 있다. 이 사상을 <있거나 없다고 논증하는 형식이며, 또는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형식>이라고 정의하고 있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고.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으며 무엇이 적절한 것인지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엄밀하게 말해서 정치적 또는 수사적인 담론 기술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옛날 시인들이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시민으로서 발언하도록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시민들은 웅변가로서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시학』中)


근데 왜 세 번째지? 실제로『시학』의 후반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상은 비극적 요소라기보다는 수사학 내지 정치학에 가까운 요소이며, 무엇보다 비극이란 것은 사상과 달리 설명 없이도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대한 대전제라는 게, 모방효과를 통한 도덕적 효과의 창출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파멸하는 비극의 영웅들을 통해 연민과 감동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동시에 거기서 비장미로서의 도덕을 학습시킨다는 발상. 그리고 확실히 인간은 고리타분한 윤리학 책보다는 소설 한 권을 좀 더 킬킬거리면서 보는 법이니까.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루하게 만드는 <설명충>들을 문학계에서 근절하기 위해 사상을 우선순위의 가장 아래에 위치시킨 것인가? 좀 더 정확히는, 비단 그뿐인가?


우리는 여기서 설명충이 왜 극혐인지, 그리고 왜 소설은 서사와 상징들 속에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적당히 간접적으로 표현해야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일반적인 미학과 노골적임은 왜 상극인가? 좋아, 여기서부터 희극은 배제하고 비극에 한정지어서 논의를 진행시켜보자. 사회비판소설은 근본적으로 암담한 사회적 폐해를 고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비판 이후의 대안을 제시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남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 부분은 부차적인 요소로, 대개 방점은 구체제에 대한 망치질에 찍힌다. 이 조건 하에서 비극적 요소란 것은, 정의로운 덕성의 담지자가 체제모순에 의해 파멸하는, 혹은 그와 싸우다 파멸하는, 그런 새드엔딩이 좀 그렇다면 <……싸움을 계속될 것이다>란 식의 열린결말을 가장한 파멸을, 어떤 식으로든 그러한 파멸들을 당할 것이다.「덕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고,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다. 즉, 오이디푸스나 튀에스테스 등 명문가 출신의 인물들처럼 큰 명망과 행복을 누리는 부류에 속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잘 만들어진 줄거리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 이중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가 아니라 정반대로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하며, 주인공의 악행 때문이 아니라 큰 과오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물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인물이어야지, 더 못한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첨예한 개연성으로 지어진 정교한 구조물로서의 서사를 요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 이야기는 그럴싸해야하는가? 좀 더 질문을 정확히 하자면, 개연성을 통해 진짜 같게 포장되었지만 궁극적으론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를 접한 관객은 어떤 심리를 가지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명백히, 극에 몰입하면서 느꼈던 안타까움과 연민 등의 비장미에 비례한 안도감을 느낄 것이란 점에 있다. 내가 무지와 운명 때문에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한 오이디푸스가 아니란 사실에, 나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역설적 희망을 느끼며, 이것이 곧 그리스어로 <정화katharsis>을 뜻하는 카타르시스의 요체인 것이다. 심심할 때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문학의 본질은 그것이 근본적으론 <구라>라는 점에 있는 법이다.


그럼 이러한 점과 직접적 설명의 상충은 무엇 때문인가? 그건 작품 내부적 모순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심리에 기인한 문제다. 기본적으로 사상이란 현실에 대한 견해요, 문학은 현실에 대한 또 다른 가상의 모사품이 가지는 견해다. 플라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철학자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현실이란 1차적 가공품을 만드는 것이며, 반대로 소설가들은 그러한 1차적 가공품 위에 또 다른 허구를 쌓는 2차적 가공을 하는 셈이다. 여기서 철학의 설명이란 독자의 삶과 직결되는 분석일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소설은 독자가 아닌 소설 속 인물에 대한 분석이다. 비록 그것이 인물의 입을 빌려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둘 사이에 경계가 나눠진다는 것은 결정적인 차이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독자는 <어쨌거나 그건 구라가 아니느냐?>는 반문을 통해 소설가의 말을 가뿐히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게 소설의 권능이 광고만도 못한 이유다. 하지만 얄궂게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자면, 바로 이 지점이 문학적 감동이 가능해지는 근본이기도 하지. 피곤하지만 흥미롭도다.


끝으로 다시 문제의 <사회비판소설>로 돌아오자. 이 소설은 근본적으로 사상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논증을 해야만 하는, 하지만 동시에 그 논증이란 게 <지나친 설명>의 방식을 띄는 순간, 그 설교가 등장인물이 아닌 그를 바라보는 관객에 대한 것이 된다는 점에서 감동적 요소 일체가 사라져버리는, 지극히 난해한 난점을 안고 있는 소설형식이다. 소설 자체가 선생님을 지향하는데, 거기서 선생님의 냄새를 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건 마치 검은 볼펜으로 검은 선을 긋지 말라는 요구에 다를 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반드시 지켜야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교훈적 설명을 일삼는 인물이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상징이나 어휘사용 역시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그런 짓을 하는 순간 소설이 읽는 독자에게 참여를 독려하는 게 되어버림으로서, 인물과 관객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린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선 슬퍼하고 연민하지만, 자기 자신의 불행에 대해선 분노하며 타개책을 구상하려고 하는 법이니까. 이게 바로 사람들이 몇 백 년 전 자유를 위한 농민반란이나 기사들의 칼싸움엔 닭똥 같은 눈물들 뚝뚝 흘려주면서,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다뤄버리면 뭔가 잔뜩 불편한 얼굴로 극장을 나오는 이유다. 동시에 이것이 비극으로서의 실험적 참여연극이 사람들을 직접 거리로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이자, 사회비판을 말하고자하는 소설이 날이 가면 갈수록 쥐뿔 무슨 말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