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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과 전기성, 그리고 비극적 인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강의노트『시학』1장에서부터 비극을 행동주체(prattontes)가 되는 행동들(praxeis)을 재현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좀 있어 보이려고 그리스어 좀 병기해봤는데) 단순하게 말해 비극이란 <행동하는 인간>에 대한 것이란 말이다—그런데 이게 무엇에 대한 행동일까? 그에게 있어서 이 행동이란 매우 중요한데, 가령 인물의 성격(èthos)까지도 모두 행동에 종속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 인물이 어떤 성격과 사상을 가졌는지 알려주는 유일한 방식이 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니까. 또한 말이 아닌 그런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만이 확실한 무언가를 가져다준다―인간은 말에는 냉소하고, 행동에는 감동받는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연설과 달리 비극은 인물들 간의 행동을 통한 마주침이라는 사건들의 연쇄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그 안에 감동이 깃들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좀 더 따라가 보자.


「비극은 행동의 재현이고 그 행동의 주체는 행동하는 등장인물이며, 이들은 반드시 성격과 사상의 측면에서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실제로 우리는 성격과 사상을 통해 그들의 행동의 품격을 판단하며, 행동에는 사상과 성격이라는 두 가지 자연적인 원인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도 바로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줄거리는 바로 행동의 재현이며 (나는 여기서 <줄거리>를 사건들의 조직이라고 말한다), 성격은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의 품격을 판단하게 해주고, 사상은 말을 통해 어떤 주장을 내세우든지 준칙을 진술하면서 드러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의 배열이 바로 서사 내지 <줄거리>가 된다. 참고로 그는 이 줄거리를 비극의 제1원칙이자, <비극의 영혼(psukhè)>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이 배열은 지극히 개연적이거나 혹은 비슷한 표현으로 <필연성이나 있음직함에 따라 연결된 사건들의 연속(ephexès gignomenôn)>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조직된 비극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봤으며, 여기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너무 뜬금없는 외적인 구성 일체를 배격해야 한다고 봤다—그런 게 등장하면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감동할 수 없으니까(그런데 도대체 왜?).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게 인간의 고유한 쾌감, 즉 감동을 느끼게 해주는 방법이라 봤다.


자, 이쯤 적고 여기서 <왜?>라고 물어보자. 왜 행동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고, 인간적이지 못한 전기적 해결책은 인간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가? 그건 단순히 현실성에 기인한 공감의 문제일 뿐인가? 하지만 공감한다고 모두 감동하고 좋은 비극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어떻게 축조된 개연성이 감동을 선사하는가?「가능하지만 설득력 없는 것보다는 불가능하지만 개연성 있는 것을 택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제는 개연성 없는 부분들로 구성되어서는 안 되며, 나아가서 가능한 한 개연성 없는 것은 하나도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물론 모범답안은 이미 나와 있다—모범답안이란 게 늘 그러하듯.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적 행동이란 고귀한 인물의 안타까운 파멸에서 느껴지는 연민과 두려움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에서 완성된다는 답. 그러니까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이 지향하는 방향성에서 감동을 찾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독해하는 즐거움은, 그 <연민>이란 게 도대체 무엇에 대한 연민인지 제대로 적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공백을 해석을 무한히 뻗어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필이면 왜 고귀한 인물이 파멸해야하는가?>, <왜 그 안에서 연민이 느껴지는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은 전기적으로 구성되면 안 되는가?>란 질문들을 부여받게 된다. 이 세 가지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저 <개연성>이란 키워드다. 개연성이란 게 뭔가? 가령 내가 밥을 먹었는데, 너무 급하게 먹어서 체증에 걸려서 구토했다고 보자. 이건 생리학적으로 완벽한 개연성을 이루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걸 개연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택시를 타는 바람에 돈을 많이 써서 점심을 빵으로 때워야만 하는 경우 역시도, 완벽히 개연적이지만, 이 역시 개연적이라 부르지 않는다. 왜? 주제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해서는 안 되는 바로 그 사실, 모든 개연성은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개념이란 점이다. 주제의식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각 사건들의 취사선택과 배열이라는 편집을 가능케 하는 기준이요, 이를 보장해주는 권능이다.


따라서 어떤 목적을 향해 꿰어진 줄거리 안에서만 개연성의 개념이 성립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지극히 연역적이다. 모든 것은 주제의식이란 대전제로부터 도출되어 나오는 일련의 과정이다. 심지어 일상요소들을 귀납적으로 분석해서 결론으로 가는 기승전결의 방식을 따른다고도 해도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은 구상의 단계에서나 사용되는 것이지, 소설에는 아니다. 표현컨대 구상은 인간이 아지만, 창작은 신이 한다. 작가는 자기세계의 신이다. 그는 모든 인물들의 처음과 끝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바라는 주제의식을 위해 그 소설적 세계에 섭리를 구현해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소설은 현실태를 향한 잠재태의 약동이다.「주제가 이미 정해져 있건 시인이 스스로 주제를 정해야 하건, 먼저 전체적인 구도를 대체로 그려본 다음 삽화(揷話)들을 집어넣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소설의 특징은 관객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소름끼치도록 완벽히 부합한다. 경험이 죽은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지극히 연역적으로 구성된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 산다—과학이라니, 그건 투명한 농담이다. 가령 <사회인>내지 <정상인>이란 어휘를 봐라. 이게 우리들의 주제다. 무슨 교육과정-어떤 직장-어느 때의 결혼-어느 정도의 봉급-거주지-그에 따른 적당한 취미-어휘선택-패션-(……)-생활리듬-게다가 생체리듬마저. 누가 이걸 명령하는지 정확히 찍을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사회나 권력 같은 추상적인 어휘로 표현되는 저 두루뭉술한 구름들 속을 허우적거리는 게 우리네들 아닌가? 모두 저 천상계로부터 말미암은 어떤 대전제로부터 연역된 삼단논법을 끌어안고 산다. 도대체 어느 현대인이 자기 경험의 고유성을 말하는가? 우리들의 세계는 단테의 천국처럼 지극히 창백하고 일괄적이며 보편적이다. 어떤 경험을 하던 간에, 가령 그게 불안과 슬픔이라면 우울증이나 정신분열 같은 정신의학적 용어로 대체되고, 상황이나 맥락은 정신분식의 저 지루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따위의 보편적 학술용어로 녹여진다. 까놓고 말해서 당신이 가진 것들 중에 고유한 게 뭐냐? 우리시대에 모든 건 숫자로 수치화되지 않던가? 연소득이 너다. 우리는 통계다. 세계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정리들의 집합일 뿐, 저 공리 바깥의 무엇은 없다. 그건 무(無)다, 진공이다.


왜 소설은 전기적으로 구성되면 안 되냐고? 이건 모종의 역설을 포함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소설이 모방하는 현실이란 게, 이미 충분히 전기적이며, 더 나아가 작가가 소설 속에서 구현해내는 서사라는 게 신의 전기적 역사함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전기성을 오해하고 있다. 전기성이란 사건 바깥의 무엇이 서사를 종결하는 것이지만, 그건 결코 사건 바깥이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사건이 바깥에 존재하는 신로부터 주조된 것들이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개연성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독립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주제의식의 노예요, 도구다. 권력이 세계에 역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걸 이해해야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재현의 대상은 끝까지 완결된 행동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연민을 일으키는 사건들이다. 그러한 감정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전혀 예기치 않게 일어날 때 특히 강렬하게 느껴진다. 사건들이 그렇게 일어나면 저절로 또는 우연의 결과로 일어날 때보다 더 놀랍게 느껴질 것이다. 우연한 사건도 무슨 의도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보이면 매우 큰 놀라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르고스에 있는 미튀스를 살해한 자가 그의 동상을 구경하고 있는데 동상이 그 위로 떨어져 그를 즉사시킨 경우 같은 것이다. 그런 사건들은 맹목적인 우연 탓에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런 종류의 줄거리가 더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튀스를 살해한 자에게 떨어진 동상을 통해 구현되는 전기적 권선징악이 어째서 훌륭한 서사가 된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개연성이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객들에게 <무슨 의도에서의해 일어난 것처럼(hôsper epotèdes)> 여겨지기에 납득될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감동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지난 2천 년간의 전통문학이 전기적이라서 현대문학보다 뒤쳐진다? 무지한 자의 평가다. 문학은 단 한번이라도 전기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배척받아야할 전기성이란 게 뭔가? 그걸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관객중심적인 각도에서 바라봐야만 한다. 관객에서 소설적 세계는 자신의 세계와 같은 원리로 움직이는 세계, 즉 작가란 신이 군림하는 섭리의 세상이다. 여기서 이들이 전기성이라 여기는 건, 이른바 권선징악을 따라가는 착한-섭리와, 그렇지 않은 불가해한 괴물스러운 잔혹극으로서의 섭리로 나눠진다. 전자의 경우엔 각광받았기에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후자의 경우엔 음침한 장소에서 비밀스럽게 상연되었다—하지만 맥이 끊기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역시 진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신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신은 불가해함이다. 그는 도무지가 의도를 예측할 수 없는 전제군주이기에, 유한한 인간으로선 그 절대적 권능에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설사 그 뜻을 안다 하더라도 계시를 바꿀 어떠한 능력도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그 신이 선한 신이기를 바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노예스러운 바램만이 남을 따름이다. 세계의 질서란 것도 늘 그래왔다. 우리시대는 자본주의 시대니까 자본주의의 예시를 들어보자.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고 부모를 잘 봉양하는 효자이며, 교우관계도 원만하다. 게다가 적당한 교양과 깔끔한 매너를 지녔으며, 때로는 봉사활동을 할 정도의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자, 그래서 뭐? 개인은 늘 스스로에 대한 일련의 서사를 꾸리기 마련인데, 그걸 바탕으로 앞날의 복(福)을 점친다. 하지만 밝은 앞날은 당신의 믿음일 뿐, 그를 주재하는 자본주의란 물신(物神)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당신을 일터에서 해고시킬 수 있다. 더 큰 이윤을 내기 위해 공장을 자동화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그냥 당신 자리에 자기 친척을 낙하산으로 내려 보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게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논지는 단순하다.「내가 내 돈 가지고 내 하고 싶은 거 하겠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자본주의는 돈의 의지가 곧 법인 세상이다. 당연히 해고당한 당신에게 이 신의 뜻은 지극히 불가해할 것이다. 하지만 불가해하니까 신인 것이다. 물론, 그래서 우린 노동법과 같은 일련의 안정장치를 걸지만, 늘 한계가 발생하고, 신의 권능은 적당한 여론몰이와 비정규직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키며 여전이 작동한다. 물론, 이건 현대만의 문제는 아니고, 그냥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나 전부 그래왔다. 도대체가 인류의 역사 속엔 교회가 없었던 적이 없다. 신은 그 이름만 개명해왔을 뿐이다.


다시 전기성 얘기로 돌아오자면, 전기성이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개연성을 망가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개연성을 너무나도 완벽히 충족시켰기 때문이다—전기성에 대한 기존의 이해는 전부다 거꾸로 됐다. 전기성은 주체라 생각했던 자들이 벌거벗은 채로 잡혀있는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여기서 느껴지는 불안과 실망과 분노는 정신분석적인 방어기제의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전기성에 대한 분노는 원하지 않는 섭리에 대한 인간의 반감, 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시대의 막장드라마 만큼이나 개연성을 완벽히 지키는 장르도 없다. 여기에 비판을 날리는 자들은 막장드라마의 현실성 운운하는데, 여기서 개연성과 현실성은 날카롭게 구분됨과 동시에,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현실성이란 것도 결국은 세계의 거대서사가 제공하는 또 다른 의미의 개연성에 다름이 아니니까. 개연성이 개연성을 비판하는 꼴인 셈이다. 현실 그 자체란 말은 지극히 우스운 말이다. 그런 게 어디 있나? 세계는 스스로를 현실로 정립하려는 서사들의 투쟁의 장일뿐이다. 그 자체는 뿌리 깊은 오해이고, 그러한 오류를 진리로 생산하는 게 권력의 작동방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느끼지는 비극적 감동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중의 숭고함이다. 첫째로는 신의 권능으로 짜여진 운명의 서사 속에 파멸하는 인간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로는 그 파멸에 대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 후자의 심리는, 그러한 선한 신의 개입이라는 자비를 거부하는, 굉장히 독립적인 인간상의 발현이다. 그는 비록 파멸하지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이점을 간과하는데, 관객이 감동을 느끼는 대상은 소포클레스가 아니라, 운명의 몫을 기꺼이 짊어지고 걸어가는 오이디푸스다.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돈키호테다. 관객은 신으로 군림하는 작가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 섭리 속에 고통 받는 인물을 위해 기꺼이 눈물을 흘린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거기엔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구걸하는 자는 혹시 모를 평안을 얻을 순 있지만, 결코 자유인으로 우뚝 설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꺼이 비극적 운명을 견디는 자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유인으로서의 기본은 된 자들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기성이란 서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서사를 맞닥뜨리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감동은 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는 자유인으로서의 결단력과 의지에 있기 때문에, 전기적 해결책이 나오는 것 자체가 자유인에 대한 모독이자, 반인간적인 행위인 셈이다. 전기성은 개연성을 해치기 때문에 사라져야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개연성이 곧 전기성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또 다른 전기성의 요청은 자유를 포기하는 기도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런 생각은 종교성을 만든다. 자유는 스스로 일어서는 자의 것이며, 비극을 이해할 줄 아는 자는 그 불굴의 정신에 감동할 줄 아는 자다. 노예는 비극에 대해서 아는 바도, 느끼는 바도 없다. 그래서 힐링 운운하는 현대인은 비극을 이해할 수 없다—우매한 그들은 <비관적>이라는 스스로의 평가가 뭐를 지향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또한 이런 이유에서 모든 인간적인 소설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이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가진 태생적 한계에서 도출되는 필연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중에 현실을 예찬하는 책이 단 한권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찬은, 인간성에 대한 어리석은 모독이다. 희극은 비극적 인물이 현실에 대처하는 저항의 한 방식이다. 비극 바깥에 인간성은 없다. 소설을 떠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잠깐, 현실이라고? 소설과 구분되는 그게 도대체 뭔가? 오래된 유머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