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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좀 더 정확히는 세상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 눈을 떴다고 생각했을 때, 앞에는 책이 쌓인 작은 탁자와 그 옆에 앉은 단발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최초로 가진 것은 묘사였다. 그 남자는 계란형 얼굴에 높은 코, 큰 타원형의 짙은 쌍꺼풀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30대로 보이는 혈색이 좋은 피부를 가졌고, 인종적으론 이탈리아계와 유대계의 2:3비율 혼합처럼 보였다. 의상은 그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는데, 17세기 풍의 사제식 검은 예복엔 작은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빛을 따라가니 작은 액자 같은 창문 하나가 좁은 방안의 실루엣을 넌지시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외모 중에 그를 결정적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은 부분은, 무엇보다 단발머리였다.


「당신은 누구지?」그건 이 좁은 방안에서 처음 나온 질문이었다. 시공간을 구성하는 물리법칙 상으로, 자신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눈을 떴다는 막연한 느낌이 끌어올린 질문.


질문을 받은 단발머리는 시선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그 물음도, 그리고 거기에 대한 내 대답도 그렇지만, 그런 벌써 수십 번째 반복하고 있는 거라고. 내가 중요한지는 궁금치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고,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마치 준비했다는 듯 막힘없이 말이 나왔다.


「시…… 신인가?」


「대개 이 상황에서 인간은 <나는 죽은 건가?>와 <당신은 신인가?>, 이렇게 두 가지 물음 중 하나를 택하는데, 너는 후자로군. 물론, 처음에 네가 던진 <당신은 누구지?>라는 질문으로부터 그 두 번째 질문지가 도출되는 건 반쯤 필연적인 수순이긴 하지만, 그리고 여기에 대한 나의 푸념도 필연적인 수순이긴 하지만…… 뭐, 이미 도달한 필연이니, 내가 어찌할 순 없는 노릇이군. 좋아, 간단한 문답을 해보지. 내 물음은 이렇다. 네놈에게, 신이란 무엇인가?」단발머리의 목소리엔 장난끼가 가득한 듯보였다.


「나, 나는 죽었군…… 아니, 죽었군요. 왜, 왜 죽은 거죠? 왜 제가 죽은 거죠?」순간적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반말에서 갑자기 높임말로 어법이 달라졌군. 그 말인즉 내 눈앞에 보이는 나를 신이라고 판단한 거고, 또한 신을 보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야. 내 예측이 맞나?」단발머리의 눈썹 하나가 까딱했다.


「저,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가슴의 물결이 마구 일렁이는 것 같았다.


「이봐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죽음은 선호의 문제가 아닌 걸로 아는데? 게다가, 게다가…… 결정적으로 네 주장은 틀렸어. 적어도 논리적으론 말이지. 고전-논리학과 현대-논리학에는 몇 가지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제가 틀리면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도 틀리다>라는 거대한 공리에 대해선 모두 동의하고 있지.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너는 틀렸다고 표현해도 딱히 하자가 없다는 말이야. 너의 전제는 <내가 신이다>라는 확신에서 비롯되는데, 그건 전혀 논증되지 않는 부분이니까. 그런 건 선결문제의 오류라고. 라틴어로는 <Petitio Principii>라고 부르고, 나는 대개 앞자리 대문자만 따서 PP라고 부르곤 하지.」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그리고 여기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PP를 진리마냥 사용하더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어법이 높임말인 걸 보면 스스로의 PP를 수정할 생각이 그다지 없어 보이는군. 하지만, 괜찮아.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이봐, 하지만 누군가 오류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오류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교정의 문제니까. 따라서 지금 네가 느끼는 공포나 신비감, 혹은 경외감 따위의 감정들은, 이해한다고 사라지지 않아. 도리어 이해함으로써 더 깊어지겠지. 지금 내가 하는 말, 무슨 의미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단발머리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기울어진 얼굴을 떠받쳤다.


「그, 그럼 나는 안 죽은 겁니까?」뭐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질문에 단발머리는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가로젓고는, 탁자에 놓인 머그잔을 들어올렸다.「좋아,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면, 그쪽으로 질문을 바꿔보지. 아까부터 살고 죽는 문제에 집착하던데, 도대체가 살아있다는 게 뭐지?」


침묵 속에 답이랄 게 없었다. 단발머리가 들고 있는, 좀 더 정확히는 조심스럽게 마시고 있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이 처음부터 저 탁자 위에 있었던가? 확신할 수 없었다. 머그잔 뒤로는 헤드셋도 하나 놓여져 있었다. 중세풍으로 지어진 네모난 방안의 어둠이 지극히 어색하게 다가왔다.


답을 기다리던 단발머리가 결국 대답을 대신했다.「……그렇게 숨 쉬고, 보고, 느끼고의 문제인가? 어우, 이거 어쩐지 질문지가 모피어스 냄새가 짙게 나는군. 마실 것도 커피밖에 없는 마당에, 인용의 즐거움이라도 만끽해야겠어. 만일 너의 대답이 그렇다면, <진짜란 게 뭐지? 만약 보고 듣는 게 진짜라면, 진짜는 그저 뇌가 받아들이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해.>」그리곤 자신의 코를 한번 찡긋하고는 물었다.「그런데 너는 지금 숨을 쉬고 있나? 뭔가를 느낄 팔다리가 있나?」


그 물음에 팔이 있다고 생각한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렸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좀 더 정확히는 몸이 없었다. 그것을 보는 시선은 있는데, 신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게 없었다. 시선에는 오래된 벽돌들로 메워 넣은 차디찬 바닥이 보일 따름이었다. 그 순간 자신이 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는 감각이 흐릿해졌다. 눈앞에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난로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매캐한 맛을 머금고 있는 먼지들이었다.


「어, 어디 있지? 내 팔, 내 팔! 으, 으으, 으아아—악!」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부터는, 감각도 아득히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비명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단발머리는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헤드셋을 꼈다. 그리고 연결된 MP3의 버튼을 누르며 볼륨을 높였다. 비명소리는 그 높낮이를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며 반복되었고, 단발머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헤드셋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했다. 때로는 눈까지 감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휘젓기도 하면서. 춤출 상대가 있었다면 가볍게 왈츠라도 췄을 것 같은 기세였다.


단발머리가 헤드셋을 벗은 것은 정확히 3분 53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비명도 정확히 그 정도까지만 울려 퍼졌다. 이제는 조용한 흐느낌만 들려오는 곳을 향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지금 뭘 들었는지 아나? Echosmith의 <Cool Kids>를 들었지. 가사보다는 선율위주로. 괜찮은 노래란 말이지. 아, 물론 이 노래 제목의 Cool이란 문장이, 방금 전 자네가 폭발할 듯한 감정과잉으로 미친 듯이 징징거린 걸 비꼬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우연이지. 우연, 우연. 이거 참 흥미로운 단어가 아닌가?」


「나는 죽었군요…… 왜 죽은 겁니까……」흐느끼는 목소리가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비명은 삭제됐지만, 물음은 그대로군. 어…… 지금 내가 해주는 이 말이 너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어쨌거나 지금 내 음성을 듣고, 또 너는 말도 하고 있잖아? 그래서 죽지 않은 건지도 몰라. 따라서 죽음의 공포에 너무 취하는 건 그다지 권장할 만한 선택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군.」안정시키려는 목소리 치고는, 역시나 가벼웠다.


「전 지금 영혼입니까?」물음은 단적이었다.


질문에 단발머리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뭐? 영혼이라고? 미쳐버리겠군. 기어코 신에서 시작해서 삶, 그리고 영혼까지 오게 만드는군.」그가 머그잔의 손잡이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괜찮아. 좋아, 그럼 거기서 시작해보자고. 다만 더 이상 내가 질문을 빙빙 돌리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적어도 나한테는 권태가 미덕이 아니거든. 다시 묻지. 영혼은 뭐지?」


「그, 그건…….」질문은 계속됐고, 답변은 궁색했다.


단발머리는 말을 끊으며 자기 말을 했다.「괜찮아. 그런 난감한 순간을 위해서 백과사전이란 게 존재하는 거니까.」그러면서 탁자 위에 올려진 두꺼운 책들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책장을 넘겼다.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따라가던 그는, 이내 다시 책을 덮고는 의자 뒤로 손을 넣어 노트북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 중세에나 입을 법한 검은 예복과 노트북은 그다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단발머리가 눈썹한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좋은 세상이잖아? 굳이 구닥다리 방법을 사용할 필욘 없지. 게다가 저 사전은 짜증나는 라틴어로 만들어져 있다고. 내가 모르는 개념을 찾기 위해, 그 개념이 적힌 정의를 <해석>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뭐랄까, 그건 사전의 본질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지.」단발머리는 멋쩍은 듯 혼잣말을 하며 웃고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저는 정말 죽은…….」


이번에도 단말머리는 말을 끊으며 자기 할 말을 했다. 대화예절이랄 게 없는 듯보였다.「역시 좋은 기술이야, 바로 나오는 군. <영혼>의 정의는, 죽은 사람의 넋, 혹은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라고도 말하는 것이로군. 동의하나?」


「예, 예……」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영혼과 삶이란 건, 모순되는 요소들이군. 아까 비명을 지르면서 삶은 팔다리로 감각되는 것의 총체라고, 다소 설치예술처럼 증명하던 것 같은데…… 이번에 영혼보고는 <비물질적 실체>라고 대답하는군. 비물질이라는 말은 비(非)감각인데, 그럼 영혼은 삶과 무관한 개념인가? 더 재미있는 건, 그걸 보고 <실체實體>라고 말했다는 거야. 실체란 말의 뜻은 실제의 물체, 또는 외형에 대한 실상이란 뜻인데 말이지. 비물질이 어떻게 실체가 된다는 거지? 그건 형용모순 아닌가? 그건 <네모난 삼각형>이란 말과 다를 바가 없잖아? 아니면 혹시 문학적 비유로 쓴 말인가?」


「그, 그건……」말문이 막혔다. 그 부분이 익숙했다.


단발머리는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미안해, 미안. 너무 퍼붓듯이 질문을 던져버렸군. 여러 개의 질문을 동시다발적으로 한다는 건,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지 않다는 뜻이지. 그건 그냥 자기 말이 하고 싶어서 상대방의 입을 일방적으로 닫아버리는 기술이니까.」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그리고 자네 입술이 닫힌 걸 보니, 아무래도 내 기술이 성공적으로 먹혀든 것 같군. 하지만 천박한 기술이지. 사과하네.」


「괜찮습니다.」이번엔 말을 더듬지 않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영혼과 삶이란 개념은 굉장히 이질적이야. 방금 자네는 자신이 신체 없이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상태가 영혼이라고 판단했지. 근데 웃기지 않나? 그런 게 가능할까?」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지금 벌어진 걸요.」다시 허공뿐인, 신체가 있던 자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쳐다봤다. 문득 궁금해진 건 저 단발머리는 자신을 어떻게 보고 말하느냐였다.


대답에 단발머리가 미소 지었다.「아니야, 잘 생각해보라고. 지금 그런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는 건, 둘 중의 하나는 오류란 말이지. 하나 팁을 주자면, 세상엔 모순이란 게 없어. 완벽하지. 다만 그 안의 인간이 그 완벽성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야. 오해가 곧 모순이네. 내 말 이해하나?」


「제가, 그런 걸 이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착하게 산 놈입니다, 저는 꽤 괜찮은 친구였고, 부모님한테도…….」갑자기 아무에게나 빌고 애원하고 싶어졌다.


「미치겠군. 내가 신이란 건 PP라고 말해줬고, 또 지금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판단도, 모두 증명되지 않는 PP라는 걸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망상이 자네를 병들게 하고 있어. 물론, 공포라는 게 확인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감정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확인되지 않은 것에 대해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는 거라고. 심리치료차,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있었던 말 하나를 인용해주지. Gnothi seauton. 번역하자면, 너 자신을 알라.」


반응이 없자, 단발머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잣말 비슷한 걸 했다.「……라틴어를 자꾸 인용하는 건 너그러이 넘어가주게나. 허세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적당한 허세는 삶을 윤택하게 하주는 조미료지. 그 정도는 즐겨도 되는 거라고.」


「왜 저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단발머리는 이번에도 말을 끊었다.「어쨌거나 다시 삶과 영혼. 분명 한 쪽이 틀린 거지만, 어쨌거나 돌 다 존재하는 개념인 건 확실하군. 심리적 실재도, 어쨌거나 실재는 실재니까. 꿈이 허구라 할지라도, 그게 꿈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잖아? 그럼……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군. 둘 중 하나가 망상이라면, 그건 어디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


「말미암았다니, 영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올 커니, 아주 멍청한 줄 알았더니, 그래도 생각이란 걸 할 줄은 아는 모양이군.」단발머리가 책상을 한번 손바닥으로 치고는 말을 이었다.「하기야, 상식적으로 감각되는 현실이 먼저 있는 것처럼 여기지는 건 지극히 정상이지. 여기서 감각은 보고 느끼는 수많은 감각적 정보들을…… 하나의 저장고 안으로 넣어주지. 혹시 그게 정신인가? 자네가 영혼이라 부르고 싶어 하는 바로 그거 말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정신이라면, 그건 눈코입팔다리 같은 감각을 하게 해주는 신체에 선행하는 존재는 아닌 것처럼 보이는군. 맞나?」단발머리는 신나서 곧바로 질문을 덧붙였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체는 정신에 선행하는군. 그렇다면 정신은 그런 신체가 감각한 것만 정신으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정신은 신체의 관념인가?」단발머리가 <신체의 관념>이란 말에 무게를 실으며 물었다. 쌍꺼풀이 짙게 진 눈으로 힘이 들어갔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 지금 자네가 한 그 <무슨 말>이지 않은가?」단발머리가 입을 귀에 걸고는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지만…….」


「그런데 그렇지 않고 싶다는 건, 사실이 당위의 저항을 받고 있다는 뜻이지. 마음속에 이해를 가로막는 방어기제 같은 게 있나보군.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자네만 그런 건 아니거든. 자네가 처음도 아니고, 또 끝도 아닐 거야. 끝이어도 안 되겠지…… 망상이 세상을 지옥으로 몰고 가지만, 동시에 그게 세상을 흥미롭게 해주거든. 허세보다 더 괜찮은 조미료지.」


거기까지 말하고는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머그잔을 도로 내려놨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머그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큭, 커피가 식었군. 이봐, 잘 보라고. 나는 식은 커피도 어찌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놈이라고. 이런 게 신이라면, 그 속성들 중 하나인 전지전능이란 권능이 너무 우스꽝스러운 걸로 전락하는 게 아니겠나? 단테에 따르자면 신성모독자에겐 지옥의 가장 밑바닥이 기다리고 있다니, 누군가를 신이라고 부르는 이에 신중하시게.」단발머리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이가 보이게 싱긋 미소 지었다.


「정신이 신체의 관념이라면…… 영혼은 무엇인지요?」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처럼 질문하는군. 그런 태도는 노예를 만들지. 하지만 진리에 취한 노예보다는, 오해를 붙들고 뛰어다니는 자유인이 더 괜찮아. 그러니, 그런 태도를 경계하시게.」


그의 조언을 무시하고 곧바로 말을 던졌다.「그렇다면, 저는 당신을 보고, 또한 그 말을 듣고 있으니…… 살아 있는 것입니까? 그럼 저는……」


「워—!」단발머리가 말을 끊었다.「결론으로 빨리 도달하려고 하는군. 카프카가 말하길, 모든 죄악의 근원은 성급함과 게으름이라더군. 조급함은 세계의 풍부함을 가로막네. 물론,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이 방안이 조급함을 유발할 만큼 좁다는 건 인정하네만…… 그건 모자란 내 주머니 사정 때문에 비싼 월세방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좁은 방 안에 있어도 상상력은 넓게 가져보세나. 자네가 도출한 정의의 함의(含意)가 뭐지?」


「함의라고요?」


「그래, 숨겨진 의미. 혹은 내포하는 좀 더 풍부한 뜻들…… 가령, 신체가 없다고 생각되는, 하지만 감각은 하고 있는 자네의 현재 상태. 그건 뭐지?」


「전 지금 꿈을 꾸는 건가요?」


그 대답에 단발머리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스트레칭을 하듯 목을 돌렸다.「……그건 좀 더 일찍 나왔어야하는 질문인데, 사실 그래서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던 부분이지. 어…… 거기에 대한 질문으로는 다시 모피어스를 인용해보자고. <진짜 현실 같은 꿈을 꿔 본 적이 있나? 만약 그런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지?>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자면,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사자성어도 괜찮겠고. 어감이 괜찮은 걸 골라잡으시게나.」


「정신은 신체의 관념이라 하셨고, 진짜 같은 꿈은 완벽한 감각을 선사해 줄 텐데…… 하지만 저는 신체가 없습니다. 이거는……」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단발머리는 다시 미소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미소였다.


「신체가 없으면 들을 수 없는데, 자네는 지금 듣고 있으니, 자네에게 신체가 없다는 건 모순이지 않은가? 모순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은 인간의 오해지. 자네는 지금 뭘 오해하고 있지?」그의 질문이 송곳 같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제 팔이 보이지 않습니다.」그건 자명하게 생각되는 사실이었다.


「우선은 자신이 오해하고 있지 않다는 오해를 하고 있군. 하지만, 괜찮아. 그건 모든 오해의 대전제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이번에는 이쪽에서 단발머리의 말을 끊었다.「전 지금 제 팔다리가 보이지도 않고, 그냥 허공에 떠있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먼지가 된 것 같다고요. 익살을 부릴 때가 아닙니다. 왜 저를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지금 저는, 저는…….」울먹거림이 목까지 차올라, 더 이상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단발머리는 눈을 깜박이며 잠시 바닥을 바라봤다.


「미안하네. 자네는 지극히 심각한 상황일 텐데 말이지…… 하지만, 그래도 어조가 바뀔지언정, 질문지가 바뀔 순 없네. 다시 묻네. 자네는 지금 뭘 오해하고 있는가?」그의 목소리가 다소 진지해져 있었다.


「저는 그 질문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지. 좀 더 정확히는,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은 거지. 모든 무지가 다 그렇게 구성되는 것처럼.」단발머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머그잔을 들어 올려 차가워진 커피를 마셨다.


「온도가 차가워지면 맛이 쓰게 느껴진단 말이야…… 뭐, 어쨌거나 답은 뭐지? 나는 지극히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니, 질문은 다른 방식으로 우회해주지. 자네는 세계의 존재를 어떻게 확신하나? 지금 자네 눈앞에 있는 나는 왜 존재하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대화는 점점 수수께끼가 되어갔다.


「단순한 질문이네. 이렇게도 물어볼 수 있겠지. 존재하니까 보이는 건가, 아니면 보니까 존재하는 건가?」


「그 둘이 다른 말입니까?」


「같지만, 동시에 아주 다르지.」단발머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신체라는 건 말이야, 아주 포괄적인 의미일세. 예컨대 그게 단순히 느낌의 문제라고 한다면, 너무 능숙해져서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장인들의 도구, 그걸 비(非)신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이미 그건 몸의 일부가 된 거거든. 경우에 따라서는 감각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신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단발머리가 머그잔의 손잡이를 쥔 채 말했다.


「그건 정신병입니다.」단호한 대답이었다.


「실재를 말하지도 못하는 자가 정신병을 논하려고 드는가? 오늘 들은 유머들 중에선 가장 우수했다고 평가해주지.」그가 웃으며 머그잔을 도로 탁자에 내려놨다.


「……모든 것에 제 의지가 닿을 순 없는 겁니다.」푸념처럼 대꾸했다.


「의지라. 자네가 눈을 감으면, 그리고 내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지금의 나와 이 방의 존재들은, 여전히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정신은 신체의 관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신체가 닫히면 인식을 위한 정신이랄 게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눈을 감고 자네가 존재라 부르는 건, 사실은…… 그냥 믿음이 아닌가? 그곳에 그게 존재할 거란 믿음.」


「자명한 믿음입니다.」목소리가 살짝 격양됐다.


「모든 믿음은, 그 자체로 믿는 걸 자명하게 만들어주지.」단발머리가 일침을 놓듯 말했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속으로 말을 곱씹던 단발머리가, 이마를 살짝 긁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신체의 관념에 불과한 정신이,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 같은 영혼을 생각해낸다는 것……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지. 인간의 신체는 왜 그런 환상을 유발시키는가? 그건 정말 환상인가? 자네의 시선은 세계를 보지만, 동시에 그 세계를 구성해낸다네. 그러니 자네의 감각이 모두 닫힌다면, 자네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지. 그건 일종의 종말이야. 자네는 죽음이 뭐라 생각하나?」단발머리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오해하고 있군.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으니 딱히 이상할 건 없겠지. 그 <무슨 말>이란 걸 하고 싶은 건 자네고, 또한 <당신은 누구지?>의 당신도 궁극적으론 자네겠지. 지금 말하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모든 걸 알고 있으며, 알지 못하네. 모든 게 엉뚱한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것이고, 질문보다 답이 선행하는 세상 속에 던져지겠지.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질문은 사후적이기도해. 우린 여기서 질문의 본질이란 게 뭔지 엿볼 수도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란스러웠다. 좌우로 흔들리는 풍경의 단발머리가 다시 싱긋 미소 지었다. 엉뚱하게도 문득 고풍스럽다는 것은 오래된 굴뚝의 탄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莊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꿈을 꿨는데, 그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자기가 실제로 인간인지, 아니면 지금 나비가 인간이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이야기…… 그 얘기의 핵심이 뭔 것 같나? 그건 말이야, 구분되지 않는 몽상의 유무 따위가 아니네. 핵심은 그 <구분되지 않은 세계>를 구성해내려는 인간의 상상력 그 자체지. 프로이트의 따르자면 꿈은 소망이라고 하더군.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싶었던 것이고, 좀 더 정확히는 나비의 세계를 욕망했던 것이지.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은 간단하네. 왜 나비를 욕망하나? 자네는 욕망이 뭐라 생각하지?」


단발머리의 질문이 끝났을 때, 굴뚝을 밑에서 검은 숯가루를 묻힌 검은 나방하나가 날아들었다. 그 나방의 날개짓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자신이 나방의 시선으로 방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연스럽게 카메라 앵글이 돌아가듯, 머리 안에서 단발머리의 좌우얼굴이 동시에 비춰졌다. 단발머리는 나방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요…… 욕망은 소유하고픈 마음입니다.」나방이 대답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소유욕은, 잃었던 것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지. 장자는 나비를 한때 소유했던 것일까? 자신의 감각 안에서 만들어진 나비의 관념을?」단발머리가 웃으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욕망은 결핍이지. 아무도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욕망하진 않아. 그런데, 그러면 또 궁금해지지. 왜 인간인 장자는 미천한 미물인 나비가 되기를 욕망했을까? 단순히 인간-혐오론자였을까? 벌레가 되고 싶은 욕망은, 그러한 결핍은 어디서 비롯되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저는 그것들을…….」말을 잇지 못했다. 답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답을 꺼낼 수 없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단발머리의 표정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뗐다.


「세계라는 말은 우습다네. 전체라는 말도 마찬가지지. 그건 물질이겠지만, 우리의 의지가 닿지도 않고, 또한 무한히 증식한다는 점에서 결코 전체일 수 없어. 따라서 전체라는 말은 육신이 없네. 그 말은 항상 그것이 뜻하는 것 이상이지. 지칭대상이 매번 일그러진다는 점에서 정신병스럽네. 그래, 자네 말처럼 이건 정신병이 맞아.」단발머리가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때 방을 날아다니던 나방이 단발머리의 탁자로 내려와 지그시 착지했다. 단발머리는 눈꺼풀을 반쯤 내리며 더듬이를 까딱거리는 나방을 바라봤다.「친구여, <비물질적 실체>라는 형용모순은 심오하고, 또한 매력적인 오류라네. 세계가 어디로부터 열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왜 자꾸 욕망하고 또 욕망하며, 그렇게 영혼과 삶을 논하다보면 신이 무엇인지에 도달하겠지…… 그리고, 그리고……」


말미가 아득해져갔다. 그가 한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단발머리는 나방을 향해 가볍게 입김을 불었다. 그 바람에 나방이 더듬이를 부르르 떨며 황급히 날개짓을 했다. 어두운 굴뚝으로 들어온 나방은, 나갈 땐 단발머리의 검은 옷을 비추는 빛이 들어오는, 작은 액자 같은 창문을 향해 날개짓을 했다. 삽시간이 모든 것이 환해졌다. 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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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생각했던 게임-판타지 소설의 도입부로 기획된 글. 첫화 제목이「로그인」이었는데, 문자 그대로 게임세상으로 들어가는 장면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소설이었는데,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게임-판타지 소설답게 주제의식은 세계 그 자체로 놔두고, 그 안에서 수많은 소(小)주제들을 뽑아낼 요량으로 스토리를 구상해봄—중심스토리의 의도된 부재. 중단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현존하난 RPG와 같은 각종 게임들의 요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게임들을 알기 위해 게임을 하다보니까 글 쓸 시간이 없다는 것. 딜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