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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약혼파기동맹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어째서 세계는 빛나 보이는 것일까--?


그런 들뜬 생각을 하면서 코우타는 방과 후의 교사를 전력 대시하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제발 시간에 맞춰 달라고―!"

저돌맹진. 귀기 서린 모습의 코우타에, 다른 학생은 「뭐야, 저 녀석」 하는 얼굴이 되어, 한순간 후에는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고등학교 1학년, 9월도 중순.
다른 동급생들은 이제야 겨우 여름방학 기분을 풀고 고교 생활을 만끽하고 있을 때이다.

하지만, 코우타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슈퍼의 특별 판매 광고지.
팔랑팔랑한 종이에는 『저녁 타임세일! 계란팩 십엔! ※수량이 한정되어 있습니다』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다.

(다음 기차를 타면 타임세일로 달걀 겟또! 그리고서 카페 알바 끝나면 부업 포켓 티슈를 받고....)

계획을 세운 코우타는 좋았어,하고 승리의 포즈를 취한다.

이대로라면 이달 말이야말로 그녀와 데이트할 수 있다.

그것이 코우타에게 최우선 명제였다.

좋아하는 애에게 고백하여 인생 첫 여친이 생긴 것이 약 2개월 전. 하지만 그들은 아직 한번도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

이유는 코우타에게 돈이 없기 때문이다. 코우타의 집은 가난한 라멘집으로, 용돈은 커녕 식비도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왕이면 영화관이나 놀이공원에 가고싶어!


둘이서 외식도 하고 싶고, 게임이나 노래방에서 커플답게 놀아보고 싶어!


그녀와 극히 일반적인 데이트를 하기 위해, 코우타는 날마다, 근검절약과 아르바이트의 귀신이 되어 있었다.


승강구까지의 시간은 최상. 빠른 속도로 신발을 바꿔 신고 교문까지 일직선이 됐을 때.


끼이이익-


교문을 가로막는 것처럼 검게 칠한 리무진이 멈춰 섰다.


"방해하지마! 어서 길을 비켜!!"


타임 세일이 걸려 있는 코우타는 멈추지 않는다. 검정 양복의 남자가 리무진의 문을 공손히 열었다.


고급차에서 내린 것은 그야말로 아가씨였다.


더러워지기 쉬운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은, 옷이 풍부한 셀럽의 증표다. 걷기 힘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것은 차로 이동하는 부유층의 증거다.


벌꿀색의 긴 머리카락이 가을 바람에 나부낀다. 찰랑거리는 건 분명 비싼 헤어오일을 바르고 있기 때문이겠지.


맑고 깨끗한 눈가에, 오똑한 콧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덧없은 얼굴에서는 고귀함이 배어 나온다.


뚜렷한 경제 격차를 느끼게 하는 소녀를 앞에 - 그런데도 코우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 너! 차가 방해되잖아!"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코우타를 보고 소녀는


「뭐...!?」


노골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하고 코우타는 생각한다.


마치 뜻밖의 지인을 만난 듯한 반응이다. 하지만 코우타는 그를 모른다. 어디선가 그녀의 얼굴을 본 것 같기는 한데--.


응시하고 있으려니 소녀의 뺨이 물들었다. 흥, 하고 그녀는 옆을 향한다.


"…헤에, 달려서 나를 마중 나온 거구나. 뭐, 당연하겠지"


 그녀의 중얼거림은 코우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문 앞에서 코우타는 어쩔 수 없이 멈춘다. 무릎에 손을 얹고,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자니, 소녀의 가는 다리가 보였다.


"어머? 그 기세로 안아올 줄 알았는데. 사양할 것 없어. 약혼자인 코우타는 그럴 권리가 있으니까."


소프라노 같은 높은 목소리. 뭔가 낯선 단어를 들었는데, 분명 산소 부족으로 잘못 들은 것 같다.


"...뭐?...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약혼자 이름을 모를 리 없잖아. 정말, 언제까지 숨 돌릴 거야? 마중 인사나 해"


"잘못 들은게 아냐.약혼자라니 무슨 말이야!?"


코우타는 화들짝 고개를 든다.


소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턱을 들고 있어서 그런지 업신여기는 느낌이 강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뭔가 잘못된 게 있었나?"


연극하는 것마냥 그녀는 트윈테일을 손으로 턴다.


"나는 크리스티나 웨스트우드. 10년 전부터 정해진 코우타의 약혼녀야."


거만하고, 불손하다. 미소를 머금은 소녀는 그렇게 선언했다.


평범한 남고생 앞에 자칭 약혼녀인 미소녀가 불쑥 나타나다니, 누가 그걸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 잘못 봤습니다"


삽시간에 코우타다는 잘라 버렸다. 머릿속에서 시간표를 펼친다.


(귀찮은 사람한테 잡혀버렸네. 다음 기차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초조해진 코우타에게 크리스티나는 눈을 부릅뜬다.


"뭐야, 지금 귀찮아하는 거지! 표정으로 다 안다고!"


"시간 없을 때 사람 잘못 본 거라면 귀찮아하겠지만"


"사람 잘못 본 게 아니야. 나의 약혼자는 고산지 코우타, 15살. 이 토키와 중앙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제보가 있어."


(뭐야, 이건……새로운 유형의 사기인가…?)


"사기 아니야! 정말 실례라고!"


또다시 코우타의 사고를 정확하게 읽고 그녀는 트윈테일을 흔들며 분개한다. 아무래도 이 아이는 묘하게 감이 날카로운 것 같다.


"아, 약혼자니까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나를 학교 현관까지 에스코트해. 나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영예를 누리며 살아도 되니까."


"기다려, 너가 내… 약혼자? 난 안 믿어! 유서 깊은 명문가라면 몰라도 우리 집은 가난한 라멘집이야. 약혼녀 따위가 있을 수 있나!


"에휴. 그럼 코우타의 아빠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러면 사실을 알 수 있겠지."


크리스티나는 자,하고 스마트폰을 코우타의 코앞에 들이댄다.


가난하지만 코우타도 현대인. 남에게 빌릴 필요도 없이 자산의 휴대폰 정도는 가지고 있다.


"알겠어, 아버지한테 확인하자.네 거짓말이 밝혀지면 즉시 이 차를 치워버릴 테니까!"


"그래그래, 좋아. 거짓말이었다면 말이지."


크리스티나는 어이없다는 듯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다.


타임 세일은 전쟁터다. 시작과 동시에 매장에 도착한 자만이 승리를 챙긴다. 부유한 여자의 잡담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다.


서둘러 차를 빼기 위해 코우타는 아버지 데츠지에게 전화를 걸었다...만


"어, 크리스한테 얘기 들었니? 나도 오늘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너랑 크리스는 약혼한 거야."


"네!?"


코우타 집안은 부자가정이다. 남자 혼자의 힘으로 키워준 아버지에게 코우타는 감사도 존경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코우타는 데츠지를 윽박지르고 싶어 안달났다. 빠직,하고 뺨에 경련을 일으키며 묻는다.


「아버지……뭐가 「그런 이유로」야?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그건 10년 전 일이었지. 우리 가게를 방문한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왕 타이렐 웨스트우드가 내 라멘을 먹고 감동했다.

꼭 함께 해외 출점을 하자고 권유받았지만, 나는 가족 이외에 비전의 레시피를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하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타이렐은, 아이끼리 결혼하면 가족이 된다고 말하고--"


"야아아악, 그런 옛날 이야기는 필요없어! 어째서 내 약혼자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정해져 있냐고 묻고 있는 거야!"


소리치는 코우타의 주위에서, 「와, 크리스 쨩이다!」라고 놀란 소리가 났다.


주변을 보면 남녀 불문하고 학생들이 이쪽을 멀찍이 둘러싸고 있다.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학생도 있어, 코우타는 재차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소녀는 겸연쩍은 듯이, 그런데도 사랑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다. 조금 전까지의 거만한 태도는 어디갔는지. 엉뚱한 내숭이다.

그녀가 반응할 때마다 학생들이 와글와글 달아올랐다.


생각났다! 얘 TV 예능에서 본 적 있어. 대부호의 딸로 모델도 하고 있는 초부호다!


더더욱 왜 그녀와 자신이 약혼했는지 모르게 됐다. 코우타는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린다.


"미안하다, 코우타."


평소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아버지 입에서 사과를 듣고는 코우타의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리 가게가 벌이도 안 되는 바람에 자식인 네가 그동안 고생했구나. 스스로 한심한 부모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만해, 아버지. 가게 사정은 나도 이해하-."


"이제 걱정이 없다. 네가 크리스와 결혼하면, 카지노 왕이 나의 가게에 투자해 줄거야!"


전화기를 든 데츠지의 목소리는 희망으로 가득 찼다.


마치 단 하나의 정답을 찾은 듯 데츠지는 말한다.


"나는 그 돈으로 해외로 나갈 거다. 가난뱅이 생활은 끝이야. 너도 매일 슈퍼의 타임 세일에 뛰어들거나 아르바이트에 열중하지 않아도 돼.

너 동아리 들어가고 싶지 않았니? 오늘 저녁은 좋아하는 거 사와라. 고기다, 고기!"


"……예, 아버지."


코우타는 현기증이 났다.


해외출점, 가난으로부터의 탈피, 고등학생다운 생활.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는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인가.


크리스티나를 보면, 그녀는 「거봐, 내 말대로지」라는 듯한 의기양양한 얼굴이다.


"코우타, 크리스는 만났냐? 귀여운 아이라 다행이잖아. 너도 크리스가 약혼자라면 불만 없겠지?"


그 대사가 한계였다. 툭,하고 코우타의 안에서 뭔가가 잘렸다.


"알겠냐, 잘 들어."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코우타는 낮은 소리를 낸다.


오렌지색이 번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코우타는 숨을 쉬었다.


휴대폰 너머에 있는 들뜬 데츠지. 어째선지 의기양양한 얼굴인 약혼녀 크리스티나. 그 양쪽에 선언한다.


"이 약혼은 무효다! 이상!"


'코우타!'「코우타!?」하고 두 사람의 외침이 겹쳤다.


"어이,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 역취집이라고. 네가 결혼하면, 우리 가계는 전부 해결되는건데!?


"거짓말이지, 코우타……왜 내가 약혼을 파기해야만 하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왜냐고? 생각을 해봐라.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결혼해.부모가 결정한 약혼녀 따위 알게 뭐야!"


코우타 역시 알고는 있다.이 약혼은 분명 좋은 조건이다. 아버지 가게에 있어서는 천재일우의 찬스로, 코우타의 생활은 틀림없이 편안해진다.

게다가 상대는 연예인인 귀여운 여자다.그녀와 약혼하고 싶은 놈은 얼마든지 있겠지.


단 한 가지, 희생되는 것은 코우타의 마음.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지고 싶다--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까.


지금 코우타에겐 사귀고 있는 여친이 있다.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사귀는 사이니까 결혼은 하나의 목표겠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녀를 제쳐두고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약혼할 수는 없었다.


"난 절대 크리스티나랑 결혼 안 할 거야! 다시는 이딴 말도 안되는 소리 꺼내지 마!"


"코우-"


데츠지의 부름을 가로막고 코우타는 통화 종료를 선택했다. 전화가 오지 않도록 스마트폰의 전원을 끈다.


코우타는 크리스티나에게 핏발 선 눈을 돌렸다.


"자, 이제 나와 너는 약혼자가 아니게 됐다. 차 좀 빼주시지?"


소녀는 멍하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이윽고 그녀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인, 인정 못해.내가 누군데...!"


콰득,하고 소녀가 이를 깨물었다.볼에 홍조를 띠고 있는 것은 분노 때문일까, 굴욕 때문일까. 그녀는 커다란 눈동자를 불태우며 코우타를 노려본다.


"나는 세계적인 셀럽, 크리스티나 웨스트우드야! 나와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다니 감히 용서 받을 생각은..."


"아, 그러냐. 그렇다면 강행 돌파다."


자존심 강한 초셀럽 여자 따위가 상대할 수 있을까. 조금 작게 혀를 차며 코우타는 도움닫기 거리를 잡았다.목표를 정하여 달린다.


"말도 안돼! 차를 뛰어넘는 건 무리야!"


크리스티나가 당황하지만, 코우타의 목적은 긁었다간 고액의 배상금이 청구될 것 같은 차는 아니었다.


땅을 세차게 차며 코우타는 학교를 둘러싼 울타리로 달려든다.교문을 나서지 못한다면 울타리를 뛰어넘을 뿐이다.


코우타는 고심하며 울타리를 기어올라 바깥에 심은 쪽으로 굴러떨어진다.


"아아악 기다려라 타임 세일아--------!!!"


"하아!? 기다려, 코우타--!"


소녀의 외침을 뒤로 하고 코우타는 달렸다. 그의 머리는 이미 십엔짜리 계란 팩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



결국 코우타는 타임세일 달걀팩을 구하지 못했다.


"하아, 역시 교문에서 발이 묶인 것이 패인이었군……"


어둑어둑한 밤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한 손에는 슈퍼마켓 쇼핑백, 다른 한 손에는 부업 포켓 티슈가 담긴 종이 상자를 메고 있다.


(돌아가면 저녁밥 해야겠지……오늘의 메인은 콩나물이네. 밥먹으면 부업도 있고 숙제도 있고...)


하루종일 학업와 아르바이트에 힘쓴 코우타는 기진맥진.


하지만 이 역시 여자친구와 데이트하기 위해서다.


매일이 아르바이트에 절여져도 저녁이 콩나물이라도, 여자친구를 생각하면 분발하게 된다.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코우타의 자택은 허름한 2층짜리 아파트의 방 한 칸이다.녹이 슨 계단을 올라가 열쇠를 꽂는다.


「다녀왔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코우타는 경직됐다.


코우타의 집은 세로로 긴 1 DK로, 현관, 부엌, 일본식 방이 이어져 있다.제일 안쪽의 일본식 방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있었다.


굳어진 코우타의 팔에서 골판지 상자가 미끄러져 떨어져, 쿵 소리를 낸다.


"어머,어서 와."


금발의 소녀가 다다미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텅 빈 감자칩 봉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마치 우리 집에 있는 듯한 안락함이다. 놀라는 코우타를 보고 소녀는 흥하고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크리스티나·웨스트우드가 코우타의 집에 강림해 있었다.


"왜...? 초셀럽 여자가 왜 집에 있는 거야아아!?"


청천벽력. 다시는 볼일 없을 것 같던 소녀를 보며 코우타는 외친다.


크리스티나는 감자칩을 집어 들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약혼녀라서 그러는데?"


"그건 거절했을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빌어먹을 아버지...!"


그녀가 집에 있는 것은 테츠지가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코우타는 쭉 꺼두고 있던 스마트폰의 전원을 켠다. 여느 때 같으면 퇴근했을 테츠지에게 전화를 걸지만,


"코우타네 아빠한테는 안 연결될 거야. 지금쯤 비행기 안이니까."


크리스티나는 감자칩을 바삭바삭 먹으며 말했다.

실히 스마트폰에서는 「전파가 나쁜 장소에 있거나 전원이 꺼져 있기 때문에, 걸리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정형문이 들린다.


"비행기……?"


"해외 출점 준비하러 미국에 갔지"


"미국이라고!?"


"그리고 코우타의 아빠가 없는 동안 나는 이 집에서 코타와 살게 되었으니까"


잘 부탁해,라고 하면서 크리스티나는 손가락을 핥고 있다.


말문이 막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코우타에 크리스티나는 볼을 볼록하게 만든다.


"야, 거긴 눈물 흘리며 좋아하는 곳 아니야? 천 년에 한 번 나올 하프 모델인 나와 동거할 수 있는 거야.

이런 행운은 코우타의 인생에서 처음 아니야?"


(행운일 리가 있나!)


"재앙이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말도 안 했는데!"


코우타는 가슴을 움켜쥐고 뒷걸음질쳤다.


(뭐야 이녀석.... 내 생각을 읽고 있어....?)


너무 날카롭다.돌이켜보면 교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경계하는 사이에, 크리스는 킁킁거린다.


"카지노 왕의 딸을 얕보면 곤란하지. 포커로 상대편 손에 든 패를 읽듯 코우타의 마음의 소리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


정말인가……하고 생각했다.


"내 마음을 알면 얘기가 빠르지. 니가 집에서 묵는다면 난 집에서 나갈 거야! 내일이면 나가줘"


부모가 해외에 가서, 약혼녀(게다가 꽤 귀여움!)와 단둘이 생활. 건강한 남고생이라면 꿈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코우타에는 여자친구가 있다.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다.


말을 내뱉고 자택에서 도주하려던 코우타였지만,


"헤에, 여기서 도망쳐 봤자 소용없다는 걸 모르니?"


툭 던진 크리스티나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소용없다고……?"


"나와 코타의 약혼은 결정사항이야. 지금 도망쳐 봤자 코우타의 아빠가 돌아오면 그냥 데려다 주면 돼."


"……어째서지. 나는 아버지에게도, 네게도 말했을 텐데. 이 약혼은 무효라고."


"너의 말 한마디에 십 년 전부터 잡혀 있던 약혼이 번복될 줄 알고? 우리들 약혼에는 두 아버지의 사업이 얽혀 있는 거야."


"어른의 사정이란 말이냐.우리 얘긴데!"


"사실 코우타의 아빠는 코타가 갑자기 당황해서 그런 말을 한 줄로 알아. 시간이 지나면 코우타도 냉정해져서 약혼을 받아줄 거라며."


"나는 당황한 것도 이성을 잃은 것도 아냐! 좋아하는 사람 이외엔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건 절대적인 진리다. 내 의견은 변하지 않아!"


"좋아하는 사람 이외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있잖아……"


의미심장한 듯 크리스티나는 반문했다.


"코우타는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뭐?' 라는 소리조차 안 나왔다.


크리스티나가 코우타의 정면에 선다. 발끝이 맞닿는 거리다. 노출이 많은 실내복 탓에 투명하게 하얀 피부가 싫어도 눈에 들어온다.


글로스로 윤기나는 입술을 가까이 대고, 그녀는 초대하듯 속삭인다.


모르는 것 같으니 가르쳐 줄게. 우리 아빠, 매년 세계 억만장자 명단에 오르셔.

지난해 총 자산액은 8조 5000억엔. 전 세계에서 카지노를 경영하고 있고 별장도 열 채 이상 갖고 있어.


「──」


"나는 지금 모델업을 하고 있고 SNS 팔로워 수는 5000만 명.

매월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며, 천년에 한 번 있는 하프 모델이라고 매스컴에서는 알려져 있어.

이건 코우타도 알고 있었을려나?"


「──」


묵묵부답인 코우타, 크리스티나는 훗 하고 웃었다. 완전히 승리를 확신한 미소다.


"여기까지 들으니 코우타의 마음도 달라졌겠지? 넌 분명 세계 최고의 행운아야. 이 여자와 결혼할 수 있으니까."


"……변할 리가 없잖아."


"어--?"


"너 지금 셀럽 자랑으로 자기 어필 한 거냐? 그래서 내가 약혼하고 싶을 줄 알면 오산이다!"


"엣!?"


"부자에다 예쁘면 세상 남자들이 다 반할 줄 알아? 너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윽, 하고 크리스티나가 숨을 죽인다.


그 틈에 코우타는 그녀로부터 거리를 벌린다. 싱크대를 등지고 소녀와 대치하다.


"뭐,아무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뭐야."


"넌 나랑 약혼해도 되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내 쪽에 뭔가 약혼할 수 없는 요인이 있다고?"


"있지! 너나 나나 입장은 똑같아.아버지가 마음대로 결정한 약혼에 휘말린 피해자다. 그런데 너는 약혼에 반대하지 않고 있어. 어째서지?"


그렇다, 어찌된 영문인지 과거의 약혼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코우타뿐이다. 스펙적으로는 코우타가 월등히 뒤떨어지는데.


"네가 초셀럽이라서 대단한 것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약혼자도 그에 걸맞은 셀럽의 미남이 좋은 거 아냐?"


"나 집이 부자라서 상대방 경제 상황 신경 안 써."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잘생긴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장점만은 아니야. 인기남은 바람핀다고 하고."


"그것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10년 전부터 코타가 약혼녀라는 말을 들어 왔어. 그래서 아빠가 좋은 과외 선생님을 모두 모셔와 일본어 영재교육까지 받았다고. ."


"아버지가 하라는 거냐! 넌 그걸로 납득해?!"


"그래, 아빠 카지노에 맛있는 라멘집을 유치하기 위해서야. 나도 기대할게."


"우리 라면을 좋아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그 때문에 너는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거야!?

라면가게 유치와 결혼. 어느쪽이 너의 인생에서 중요한거야!?"


"질문이 난센스야. 그 둘은 양립하느냐 아님 전부 파탄나느냐의 문제인 걸."


"왜 거기서 결혼이라고 대답을 못해! 이상하잖아!"


너무 비즈니스적이다. 아버지 사업을 위해 자신의 결혼을 이렇게 깨끗이 포기할 수 있을까?


"아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왜 아버지가 약혼자를 정했는데 얌전히 따르는 거야? 결혼하는 건 너인데?

너도 좋아하는 놈과 결혼하고 싶지!? 네 뜻은 없는 거야!? 너는--"


"집요하네.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초조한 목소리가 코우타를 가로막는다.


"-어차피 누구랑 맺어져도 똑같아."


그 대사는 코우타의 가슴을 뜻밖의 각도에서 찔렀다.


크리스티나는 고산지(남주 성씨) 가의 허름한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관의 낡은 전구에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몇 사람이나…아니, 몇 십명이나 나에게 구혼해 왔어. 꽃미남 배우에 청년 사업가, 국회의원 아들, 파일럿, 의대생까지.

남자들은 모두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신사적으로 대했지 .왜 그런 줄 알아?"


코우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크리스티나는 계속한다.


"내가 카지노 왕의 딸이기 때문이야"


그건 자랑이 아니라 자조였다.


"나하고 결혼하면 아빠 재산이 굴러들어오니까. 꽤 매력적이잖아. 그들은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주제에 내가 어떤 성격, 어떤 것을 좋아하고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무 관심이 없어. 정말 아무래도 좋은거야."


크리스티나가 불끈 쥔 두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보석 같은 눈동자에 격정을 태우며 그녀는 내뱉는다.


"약혼자 따위는 누구라도 좋아. 어차피 아빠 재산밖에 보지 않는 남자들뿐인걸. 다 똑같으니 누굴 뽑아도 내 미래는 달라질 게 없는데 내가 뽑을 필요 있겠니?"


"너 말이야, 사랑한 적 없지"


하아!? 하고 크리스티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갑자기 무슨 말을 꺼내는 거야?"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하찮은 남자밖에 몰랐지? 좋아하는 사람이라곤 없었잖아?'


"...맞아. 그러니까 뭐? 말했잖아.남자들은 모두 아빠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고. 나를 좋아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어!"


"네 말은 한 가지 치명적으로 틀렸다"


크리스티나가 코우타를 노려본다.


날카롭고 따가운 시선을 코우타는 애써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남자들은 모두 네 아버지 재산밖에 안 본다고? 그건 거짓말이야. 내가 아까 말했지. 셀럽 자랑으로 내가 약혼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어! 이상해...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크리스티나 웨스트우드인걸 알고도 약혼을 거부하는 바보는 코타 정도밖에 없어!"


"바보인건 나냐 아니면 지금까지 너에게 접근해 온 남자들이냐? 하여튼 세상 모든 남자가 네가 지껄이는 것처럼 별 볼일 없다는 설은 부인된 셈이야."


문득 크리스티나가 눈을 부릅떴다.


"게다가 나는 너에게 묻고 싶어! 아직 약혼자는 누구라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터엉, 하고 코우타는 싱크대를 두드렸다.


"지금은 아직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거야. 하지만 재산에 상관없이 너를 봐주는 남자는 반드시 있어.

내가 그 증거니까. 앞으로 네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건--"


"연애를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잖아. 언젠가 너는 너 자신을 잘 봐주는 남자와 사랑을 할 거야."


분명 그동안 크리스티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운이 나빴던 것이다. 계산밖에 생각하지 않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모여 버렸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너가 사랑을 할 때 이미 결정한 약혼자가 있다면 반드시 후회할 거다. 니가 후회할테니 난 약혼같은거 안할래.

그런 약혼, 서로 불행해질 뿐이니까. 나는 너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것은 틀림없이 코우타의 본심이었다.


상대가 초셀럽 여자라도, 코우타가 바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너도 아버지한테 세게 나가. 네 인생이잖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아니면 결혼하기 싫다고 해도 돼!

너네 아빠가 무섭냐? 혼자 반항할 수 없으면 나한테 전화번호 알려줘.

상대가 대부호인지 알 게 뭐냐. 라면 가게 유치 따위로 약혼녀를 결정하지 말라고 나도 항의할 거야!"


뜨겁게 역설하는 코우타를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반박하는 말이 없다. 납득해 준 것으로 생각해, 코우타는 정리한다.


"너의 상대는 너의 의사로 결정해라. 나도 그렇게 할테니. 우리들의 약혼은 일단, 우리 사이에서는 없어. 그러면 되겠지--?"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중력에 이끌리듯 크리스티나는 깊이 고개를 끄덕인다.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한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갑작스럽고 초봄의 얼음 녹은 물처럼 맑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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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이 무너진듯 오열을 터뜨리기 시작한 그녀에게 코우타는 적잖이 당황했다. 여자를 울린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녀석도 낯선 남자와 약혼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불안했겠지……)


코우타는 숨을 몰아쉬며 싱크대에 기댔다. 크리스티나와의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문제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었다.




   ***




"지금부터 작전 회의를 시작하겠다!"


코우타는 식탁에서 그렇게 선언했다.


맞은편에 앉은 금발 소녀는 이제 울음을 그치고 있다.코우타가 우려낸 따뜻한 차를 마시고는 안정이 된 것 같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인정하고 코우타는 계속한다.


"우리는 아버지끼리 결정한 약혼을 깨고 싶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들에게 약혼 해소를 허용할지 방안을 강구해 보겠다."


네 하고 즉각 크리스티나가 손을 든다.


돌변하여 기특한 태도다. 코우타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웨스트우드 씨, 말씀하세요."


"이 약혼에는 두 아빠의 타산과 야망이 얽혀 있어요. 아빠들에게 그저 파혼하고 싶다고 호소해도 소용없다는 건 오늘 코우타가 몸소 증명한 그대로죠."


코우타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츠지는 코우타의 약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외 출점에 잔뜩 들뜬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그에게는 계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나름의 작전회의였다.


"너희 아버지께 호소해도 안 되겠냐? 나랑 만났는데 마음에 안 들었다느니 하면서"


"코우타, 이 약혼은 비즈니스의 일환이야. 정략결혼 알지? 우리 감정만 갖고 상황은 안 움직여"


정략결혼. 내 인생에 가장 관계없는 단어라고 생각했어..


대다수가 정략결혼과는 무관한 삶일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찻잔만을 만지작거리면서


"정략결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있잖아."


후딱 코우타는 고개를 든다.


"코우타가 다른 사람과 약혼하면 돼."


"네!?"


뜻을 모르겠다. 느닷없이 괴상한 소리를 내는 코우타. 크리스티나는 명안이지? 라고 미소지었다.


"코우타에게는 다른 약혼자가 있었다고 해. 오늘까지 코우타는 나란 약혼자가 있는 줄 몰랐고, 누군가와 약혼해도 이상할 게 없잖아."


"기다려줘. 나한테 약혼녀는 없어."


"없으면 만들 뿐이지!"


자신만만하게 크리스티나는 펄쩍 뛴다.


" 시나리오는 이래. 코우타에게는 예전부터 약혼한 사람이 있었어. 갑자기 나와의 약혼 이야기를 가져와도 곤란하다며 그 약혼자와 함께 항의하는 거야.


그래서 아빠들이 납득하면 OK. 납득하지 못하면 코우타가 18세가 됨과 동시에 사랑의 도피를 해서든 뭐든 해버리면 되는 거야.


의논해서 헛수고라면 실력행사 할 뿐."


"사랑의 도피라니… 내 경제력에 불안감이 엄청 나는데……"


"코우타, 니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아?"


크리스티나가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온다.


모델을 하고 있는 만큼 빨려들어갈 듯한 눈동자다.속눈썹이 긴 것을 잘 알 수 있다.그녀의 눈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코우타는 시선을 방황했다.


"글쎄요……"


"나야, 나. 세계적인 셀럽인 크리스티나 웨스트우드가 이 작전을 백업하고 있단다. 내가 다 도와준다니까."


"에, 원조라니, 그럴 수는……"


상대는 갑부라고 알고 있지만, 원조를 받는 것에는 저항이 있다. 쭈뼛쭈뼛한 코우타에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야, 이거 우리 둘의 문제라는 거 알아?"


"우리 둘...?"


"코우타의 파혼은 나의 파혼이기도 해. 왜 내 약혼 파기를 위해 내가 돈을 내놓으면 안 되지?"


코우타에게 반론은 할 수 없었다.


"결정해. 결정된 작전은 회의록에 적을게."


크리스티나는 테이블에 있던 메모장을 끌어당긴다.



"작전: 코우타가 다른 약혼자를 만든다"



쓸데없이 귀여운 동그라미 글자였다.


"그렇게 되면 코우타의 약혼녀가 되어줄 사람을 찾아야겠지."


쇠뿔은 단김에, 라는 듯이 크리스티나는 스마트폰을 만지기 시작한다.


"내 모델 동료 누구 소개시켜줄까? 코우타는 어떤 애가 취향?"


"아니, 잠깐. 소개는 필요 없어. 나는 지금의 여친에게 프러포즈할 꺼야!


"헤에, 여친……"


"그래"


「……」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손이 멈춘다.


"뭐어어어엇!? 여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