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입맛에 맞는 그녀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꾸었다.
나와 미쿠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의 꿈이다.
――차암, 소꿉놀이 중인데 소 군은 여전히 어둡다니까.
――미안해, 미짱. 하지만 나(보쿠)는 역시.
――아 참! 있지, 우리는 동거 중인 러브러브 커플이지?
――응. 이건 그런 소꿉놀이였지.
――그러니까 연인인 내가 기죽은 남친에게 기운을 줄게!
어린 미쿠는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세우면서 말했다.
――비밀로 키스해 버리자, 소 군.
덧없이 아름답고, 배덕감도 동반한, 내 소중한 추억이었다.
◇
교실에서 요시카와네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핸드폰에 미쿠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쿠【오늘은 혼자 자율연습하고 있는데 텐션 떨어졌어. 이제 돌아갈까…….】
미쿠【너 아직 교실에 있어?】
잘 모르겠지만 일단 답장해 두었다.
소이치로【아직 교실인데. 그럼 같이 돌아갈래?】
미쿠【그러자! 연인놀이하면서 돌아갈랭♪】
요시카와가 야유하는 눈길을 보내왔다.
"뭐야, 마쿠라기. 베니히메님의 호출이냐?"
"그런 느낌. 그래서 나 먼저 돌아간다."
"근데 너랑 베니히메님은 같이 사는 친척이지? 그런 미인이랑 사귀는 데다 동거까지 하다니 얼마나 행복한 놈이냐, 너."
"그러니까 사귀는 거 아니래도. 우리들은 정말 그냥 친척이고."
가끔씩 연인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수치스러워 말할 수 없다.
"뭐, 사귀지 않더라도 베니히메님과 함께 돌아가려면 크레이프 가게에나 들렀다 가라."
요시카와가 헤벌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여친이랑 방과 후 데이트할 때의 정석 코스. 둘이서 한 크레이프를 사고 서로 먹여 주는 거야. 러브러브감 폭발이라 엄청나게 재밌다?"
"흠……그러면 들렀다 갈까."
서로 먹여 주는 게 재밌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크레이프 자체는 조금 신경 쓰인다.
"뭔가 지금 얘기를 들었더니 나도 스위치 들어갔어."
라고 카토가 중얼거린다. 이 녀석은 자신의 책상에서 보습 과제 프린트에 도전 중이다.
"지금 이 순간만 여친 갖고픈 모드 발동. 나도 귀여운 여자애랑 꽁냥거리면서 크레이프 먹고 싶다. 글고 뒤끝 없이『바이바~이』하고 다음 날부터는 이제 평범하게 지내도 돼."
생각해 보니 나와 미쿠는 공교롭게도 그런 관계란 말이지.
연인놀이 때만 꽁냥거리고 그 이외엔 더없이 평범. 뒤끝은 일체 없다. 피차 자유롭게 언제든지 연인 기분을 맛볼 수 있는 무척이나 입맛에 맞는 관계…….
"나왔다. 카토의 이기주의 모드."
요시카와가 기가 찬 얼굴이 되었다.
"너 말이야. 뒤끝 없다고 말하는데 그런 입맛에 맞는 관계는 섹프랑 다를 게 없다?"
……그런, 가?
"오, 섹프 완전 좋은데! 그게 내가 추구하는 이상형일지도!"
이놈은 틀렸다. 머릿속이 꼬+밖에 없어.
"야, 마쿠라기. 너도 여친이 아닌 여자애랑 키스나, 세, 섹스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지? 사무적 관계라는 걸 동경하지 않아?"
"마쿠라기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카토랑 다르게 성실한 놈이니까. 그치?"
요시카와가 동의를 구하기에 나는,
"후하하하하! 당연하지이! 키스는 여친이랑 하는 것! 그 이외는 안 돼!"
일단 웃어 두었다.
뒷목이 얼얼해서 손으로 문질렀다.
벅벅벅벅벅…….
미쿠와 합류하고 학교를 나선 후 해변가의 해안길을 나란히 걷는다.
참고로 이곳으로 이사오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해변 마을은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머리가 어마어마하게 손상된다. 트리트먼트, 진심 중요.
"그러고 보니 미쿠, 자율연습 중에 텐션 떨어졌다고 했는데 왜 떨어진 거야?"
"혼자서 발성 연습하고 있었는데 육상부 남자놈들한테 끈질기게 시달렸어. 진심으로 개귀찮아."
"……이번엔 육상부냐."
미쿠는 오늘처럼 부활동이 없는 날에도 혼자 부실에 가서 발성이나 근육 트레이닝 등의 자율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이 녀석의 연극에 대한 열의는 진짜배기인데 부활동 이외에도 중3일 때부터 줄곧 지역 연극 워크숍 같은 데 참가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쪽은 진지하게 자율연습하고 있다구. 뭐~가『미쿠짱, 데이트하자~』냐구. 자율연습 방해하는 너희들은 우주 제일 사절이라구. 퉤퉤."
"전에 미쿠도 말했지만 차라리『이미 남친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언해 버리지? 그러면 그런 놈들도 줄어들지 않을까?"
"그 방법 말이지……역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달까, 그런 소문 퍼뜨려봤자 어차피 꼬이는 놈들은 꼬일 테고……게다가 피해 주잖아?"
미쿠는 미안한 듯이 나를 곁눈질로 봤다.
어디서 돌았는지 이 학교에 미쿠의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문은 벌써 일부에 퍼져 있다.
미쿠 자신은'없다'고 부정하고 있지만 나는 곧잘 함께 있는 탓에 낯선 남자가"네가 미쿠짱 남친이냐"라며 지근덕지근덕 귀찮게 구는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 친구인 요시카와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뭐, 인기 많은 여자도 고생이라는 건가."
놀리는 듯한 눈길을 보내 주니,
"그래 맞아. 인기가 많으면 정말 피곤해."
"부정하지 않긴커녕 스스로 인정하는구나."
"응. 나 인기 있는 여자란 자각 있으니까."
당당하게 대꾸하는 베니히메님. 간지 철철이다.
"그보다 이런데 자각 없는 여자는 오히려 위험하지. 아니면 뭐야?『에이― 난 전혀 인기 없엉』이라고 말하는 게 좋았어?"
"하긴 미쿠가 그렇게 말하면 비꼬는 것밖에 안 되지."
"그치? 그러니까 인기 많냐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다 이겁니다. 겸손해도 분위기 안 좋아지고, 정색해도 분위기 안 좋아지고, 이제 어떡하면 되냐고 싶은 느낌. 그래서 나, 그 말 들으면 항상 쓴웃음으로 얼버무리곤 해."
"아―……."
"결국 인기 많아서 제일 곤란한 건 여자한테 시샘당하는 거란 말이지. 반 애들도 겉으론 친하게 굴어도 뒤에선 말들이 많은 건 알고 있으니까. 이를테면『미쿠랑 같이 있으면 안면 열등감 장난 아냐~. 솔직히 별로 같이 있고 싶지 않아~』라든가. 그래서 나 별로 친구 없수다……훌쩍."
그건 나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이 녀석은 반 여자애들과도 얼핏 잘 지내고 있지만 왠지 표면상이랄까,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점심 때도 항상 나와 둘이서 먹고 있으니까.
"그보다. 그렇게 인기 없고 싶으면 차라리 머리 뻗친 채 등교하면 어때?"
"네, 나왔습니다. 여자가 멋부리는 건 전부 남자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스페셜 동정 발언. 수준 떨어져―, 수준 떨어져―. 그럼 네가 아바타 스킨 사는 건 뭘 위해서인가요―?"
"……자기 만족으로."
"그것봐. 나도 자기만족으로 멋부리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서 머리나 화장품 같은 데 과금하는 겁니다.『인기 없고 싶은 여자는 멋부리지 마!』라니 폭언도 정도가 있지옹? 알겠냐옹?"
"알았으니까 그 말투 좀 그만해."
미쿠는 학교 가방째 자신의 두 팔을 머리 뒤로 돌렸다.
"다들 나 같은 건 하―나도 모르면서? 그런데 왜 남자놈들은 간단히 좋다고 하는 걸까. 연애라는 건 진정 요상야릇하올시다."
"확실히 집에서의 미쿠는 가슴팍 확 벌린 캐미솔로 어슬렁거린다는 건 아무도 모르지."
"왜냐면 편한걸. 참고로 겨울엔 도테라야. 이것도 아무도 모르지." *일본 전통 깔깔이 같은 것
"그리고 요리도 지지리 못해서 식칼도 제대로 못 잡아. 밤중엔 혼자 화장실에 못 갈 만큼 겁쟁이라『그치만 고스트가 나오면 위험하잖아』라고 하면서 일부러 나를 깨우러 와. 아침엔 묘하게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 흥얼거리며 이를 닦는데 머리가 폭발한 채인 게 바보 같아서."
"내 험담 하는 게 재밌어 보인다?"
"아니, 그치만."
"하지만 확실히 웬만한 남자는 나랑 사귀면 금방 환멸하겠지. 역시 누구랑 사귄다면 처음부터 본성을 전부 아는 사람이 제일 편하겠다아."
"하하. 거기에 해당하는 남자는 나밖에 없잖아."
가벼운 농담조로 말해 본다.
"아하, 정말이네. 역시 나한텐 소 군이 제일이야. 좋아해, 소 군."
"나도 좋아해, 미짱."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소꿉놀이로 이행하고 있었다.
미쿠가 함박 웃음으로 나에게 어깨빵을 갈긴다.
"타악, 타악, 타악!"
"왜 때려? 심지어 효과음 붙이고."
"그치만『나밖에 없다』고 하면 좀 기쁘잖앙. 타악, 타악!"
그것은 맨 정신으로 말하는 건가.
아니면 연인놀이로 말하는 건가.
한물 간 상점가, 괭이갈매기 스트리트의 크레이프 가게에 들르고 나서 곶으로 찾아왔다.
거리의 랜드마크, 하얀 등대가 우뚝 솟은 이 곶은 파릇파릇한 잔디가 쫙 깔려 있는 공원이 되어 있다.
전망도 대단히 훌륭하여 전방도 좌우도 전부가 푸르른 바다.
우리들은 곶의 철책에 몸을 기대고 아직 뜨거운 크레이프를 먹으면서 광대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시카와가 말했던 것처럼 처음엔 둘이서 하나의 크레이프를 사서 서로 먹여줄까도 했지만 결국은 자기들이 먹고 싶은 크레이프를 한개씩 샀다.
우리들은 진짜 연인도 아니니 그걸로 좋다고 생각한다.
"이 곶, 내 마음에 든 장소야. 여기서 보는 바다 굉장히 아름답잖아."
해안가 마을, 마나미하마초는 이 툭 튀어나온 곶을 꼭지점으로 부채꼴로 펼쳐져 있다.
"아침엔 저쪽 바다에서 태양이 오르고, 저녁엔 반대쪽 바다로 저물어 가."
미쿠는 동쪽으로 가리킨 검지를 서쪽으로 옮겨 갔다.
큰 아치를 그리듯이.
가녀린 손가락으로 아직 푸른빛의 하늘에 스윽 선을 긋는다.
"옛날엔 할아버지 저택 뒷산에서 종종 함께 저녁놀을 봤었지."
"그래. 그립다."
"……네가 부모 곁을 떠나 이사온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 또 소이치로랑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우리 할아버지는 해마다 몇 번인가 시골 저택에 일족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연회를 연다.
미쿠와는 거기서 늘 얼굴을 마주했지만 우리들은 각자의 가정 사정 때문에 도중부터 별로 오가지 못했다.
미쿠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끝무렵이었다.
그 후 내가 이 마을로 이사올 때까지 우리들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쿠와 내 사이에는 약 5년의 공백기간이 있다.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소이치로도 변했더라. 옛날엔 너랑 말할 때도 이렇게 안 올려다봐도 됐는데. 그리고 더 얌전한 남자애였던 것 같아."
"그렇게 따지면 미쿠도 변했잖아 막돼먹은 정도도 꽤 심화가――."
거기서 불현듯 알아차렸다.
어쩌면 학교에서도 피로하고 있는 저 막돼먹은 일면은 미쿠 나름의 방어막일지도 모른다고.
여자로서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막. 우리들이 만나지 않은 사이에 몸에 익힌, 이 녀석 나름의 처세술일지도 모른다.
"하긴 우리들 벌써 고1인걸? 그 시절과 다소 캐릭터가 다른 게 당연한가."
나머지 크레이프를 단숨에 베어문 미쿠는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아름다운 흑발을 귀에 걸쳤다.
그 표정은 어린애와 어른의 경계선과 같은.
순진무구하게도 보이고, 늠름하게도 보이는, 신비한 미소였다.
그것은 성장으로 해석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상실로 해석하고 슬퍼해야 하는지.
지금의 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쌤― 질문입니다! 남자애는 언제『보쿠』에서『오레』로 바뀌나요―!?"
"누구 이야기야. 그건 남자한테 물어봐선 안 되는 질문 중 하나인데."
"타악, 타악, 타악!"
"그러니까 왜 때려? 그리고 그 효과음도 그만해."
"아하핫, 즐겁다, 소이치로! 너랑 같이 있으면 매일이 정말 행복해!"
"……나도야, 미쿠."
이 녀석이 나를 대하는 방식은 예전부터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아서.
그것만큼은 틀림없이 진심으로 기쁜 일이었다.
히메바쇼 미쿠――.
휴일 때마다 시골에서 만났던 남매나 마찬가지인 소꿉친구.
둘 다 키는 컸지만. 미쿠는 머리가 길어졌고 조금 어른스러워져서……뭐, 가슴도 다소는 커졌지만. 아니, 상당히 커졌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의 도타운 관계만큼은 분명 언제까지고 변치 않을……터다.
"옛날엔 한이불에서 자기도 했지~. 담에 또 같이 자볼래?"
"……미쿠."
"나하. 아무리 그래도 이제 그렇게까지 어린애는 아니니까."
변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 역행하여 우리들은 조금씩 어른의 몸이 되어 간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소꿉놀이'를 계속하면서――.
good
여자련 무조건 좋아하네 쌍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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