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울하고 침재된 분위기가 맴돈다.
께름칙한 박쥐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지고, 절망을 두른 듯한 칠흑의 병사가 푸른 화염에 휩싸인 말을 타고 종횡무진 질주한다.
거기에 더해 해골들이 달그락 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은 비현실적인 느낌과 심리적 혐오감을 가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가상현실 게임의 마왕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의 주인인 나(마왕)는 성의 분위기와 다르게, 현재 무료함에 빠져 커다란 홀 안에 배치된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아...심심해. 기껏 성을 마련했는데, 찾아오는 손님도 없고.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칙칙한 녀석들 뿐이니.”
나른한 울림.
권태에 찌든 모습은 위압감은 커녕 어떠한 포스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왕.
보통은 마를 대표하는 왕이며, 말만 들었을 경우 강대한 힘과 압도적인 권위를 두른 것만 같은 자가 연상되는 울림이지만 아쉽게도 이 가상현실에서는 그런 특별한 취급은 없었다.
마족 세력으로 시작하여, 성을 차지하면 누구라도 마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이라는 것은 쉽게 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강대한 무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왕 자체는 그렇게까지 특별하지 않다는 얘기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오히려 일반적인 마족 세력의 유저들에게는 기피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다수였다.
마왕성은 언데드 종류의 주민(?)이 대부분이기에 유지비도 크게 들지 않으며 거의 무한에 가까운 노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많은 유저들이 너도 나도 마왕이 되기 위해 전쟁을 벌였지만, 만약 신의 세력에서 시작한 이들에게 함락 당했을 경우 모든 제물과 자금.
심지어 성까지 빼앗기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마왕을 무찌른 자에게는 각종 혜택까지 주어졌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강대한 거대 길드들만이 마왕성을 차지하고 있으며, 매일매일 반대측 강대 길드들과 부딪히고 있는 것이 게임의 현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마왕도 방구석 백수 같은 느낌으로 여유롭게 마왕성의 홀을 안방 삼아 눕는 짓을 하고 있을리 없었을...터였다.
“아아, 메를의 마왕성은 서큐버스를 메이드로 쓰던데 말이야. 이런 구석진 곳에 마왕성이라니, 완전 땡큐하며 접수했지만 이래서야 언제까지고 다른 것들은 제작할 수 없잖아.”
누운 상태로 고개만 들어 제작 목록을 열자, 제작 목록이 눈 앞에 주르륵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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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100/100)
박쥐(200/200)
스켈레톤(100/100)
좀비(50/50)
늑대인간(30/30)
듀라한(20/20)
다크 나이트(5/10)
서큐버스(레벨 부족)
데스 나이트(레벨 부족)
뱀파이어(레벨 부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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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라는 것은, 성의 레벨을 뜻한다.
그리고 그 성의 레벨은 성에 쳐들어온 침략자를 쓰러트리거나 성의 발전을 꾀하여 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현재 이 글러먹은 마왕이 차지한 성에는 누구도 쳐들어오지 않았고, 성의 발전을 도와줄 동료 또한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찾기 힘든 곳에 자리했다는 이유로 둘째 치더라도, 동료가 없다는 것은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마왕성은 덩그러니 비어있지 않다.
처음에는 NPC로 이루어진 마왕이 그 성에 군림하고 있으며 같은 마족 세력이라고 한들, 그들의 사이는 적대적이었다.
자신의 권속과 주인 이외에는 모두 적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비단 NPC뿐만 아니라 유저로 이루어진 마왕 세력끼리 서로의 성을 차지하기 위해 부딪히는 일도 빈번할 정도로 동료 의식이 전무했다.
그리고 그런 마왕은 각 성마다 강함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약한 마왕이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겨우 일개 유저가 잡을만한 난이도는 결코 아니었다ㅡ 가 일반적인 상식이다.
마왕은 특별하지 않지만, 이 유저의 강함은 특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언제나처럼 나태한 백수의 하루를 보낼 예정...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할 일이 없을 뿐이지만, 이변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는 법.
꽈지지직ㅡ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 공간이 문자 그대로 찢어지고 있었다.
‘...?’
갑작스럽고 괴기한 이상 현상에 당황하거나 경계할 법 했지만, 이곳은 게임이다.
생명의 위협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무언가의 이벤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에
그 나른한 자세를 바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찢어진 공간을 응시하고 있자, “꺄악!” 하는 가련한 음성과 함께 한 여성이 그 공간에서 튀어나왔다.
거칠게 내팽개쳐지기라도 한 듯, 삐뚤어진 보라색 꼬깔 모자 밑으로 허리까지 늘어트린 백금발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으며, 그녀가 두르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보라색 외투도 그에 못지 않게 사납게 헤집어진 탓에 안에 입고 있던 얇은 티 위로 검은색과 살색이 약간씩 비쳐보였다.
이국의 미인이 이러할까?
백옥 같은 희고 깨끗한 피부가 유독 시선을 이끌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격한 운동을 마친 후의 운동 선수처럼 거칠어진 숨을 격하게 내뱉더니 이윽고 ‘욱-’ 하는 불길한 음성이 들렸다.
“아니, 잠깐만. 잠깐, 기다려..!!”
“우웨에엑.”
다급하게 책상을 발판 삼아 뛰어드려는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멋들어진 레드 카펫 위로 형형색색의 무지개가 성대하게 쏟아져내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평소라면 고요한 마왕성에서 언제나 같이 느긋할 일상을 보내고 있을 터인 시각.
그 마왕성의 안에서는 분위기에는 안 어울리는 가련하고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사실이라구! 왜 안 믿는 거야?”
“아니, 그렇게 말해봐야...”
허리에 손을 얹은 상태로 책상 위에서 빈둥대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이름은 ‘리리엘’.
그녀가 말하길 자신은 ‘차원의 마녀’ 이며, 다른 차원(이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NPC라면 게임 내의 이벤트 설정이라며 납득할 수 있겠지만, 명확하게 플레이어라고 표시되어 있는 시점에서 유감스러운 소리를 하는 유저로 보일 뿐이었다.
‘아! 그런 컨셉인가?’
게임 내에서 자신의 컨셉을 정해놓고 즐기는 자도 나름 있다고 들었다.
게임을 즐기는 방식에 대해 딱히 왈가왈부할 생각도 펌하할 마음도 없었기에 적당히 그녀의 설정에 맞춰서 맞장구 쳐주기로 할까, 하며 아직까지도 자신을 노려보는 벽안에 눈을 맞춰 그녀가 꺼냈던 말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너...”
“리리엘.”
“리리엘은 원래 마녀가 박해받던 세계에 있었고, 그 세계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쪽 차원으로 넘어왔다...라는 이야기지?”
확인하는 나의 말투에 그녀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너무 당당한 태도에 진짜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역시 그런 설정인 것 뿐이라는 생각으로 대충 넘겼다.
“그보다 차원도 이동하면서 좌표는 지정 못하는 거야? 내가 평화에 찌든 마왕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쯤 감금 당해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의 설정에 자신의 말은 정곡이었던 걸까?
리리엘이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좌로 살짝 돌리며 발그스레 물든 볼을 긁적인다.
“나도 차원 이동은 처음 써보는 거였으니까...애초에 그런 세세한 설정이 가능할 정도로 상냥한 기술이 아니라구.”
설정 놀이와는 별개로 미인이 수줍어 하는 모습은 역시 귀여웠다.
“그, 그나저나 마왕이라도 신에게 개입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녀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개입?”
그녀의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기울이자, 방금까지 부끄러워 하던 기색은 그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리리엘이 가슴을 피며 주장했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주장하는 부위는 평평한 벽과 같았다.
“그치만 너, 에 그러니까...이름이...”
기세 좋게 자신 쪽으로 검지를 향하며, 무언가를 설명하려다가 갑자기 혼자서 맥이 빠지느라 바빠보이는 리리엘을 향해 건성으로 대답했다.
“적당히 마왕씨라고 불러.”
“정말 적당하네.”
설정 놀이에 심취한 그녀에게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의를 집중 시키기 위함인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재차 리리엘의 검지의 끝이 제 미간을 향한다.
“그야 마왕씨는 육체가 두 개잖아? 아무래도 링크 시켜둔 모양이네. 이래서 신이란 것들은...”
“두 개의 육체?”
“모르고 있던 거야? 다른 세계의 육체에 영혼이 링크 되어 있으니까.”
마치 벌레를 곱씹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 또한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오프라인을 다른 세계라고 표현한 건가? 놀라운 발상이랄까, 진지하네 이녀석.’
보통은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이 만든 설정에 스스로 혼선이 와서 당황하거나 실수하는 모습도 보일 법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줄곧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마치, 그 모든 게 사실이란 것처럼.
“아아, 그거라면 알고 있어. 그보다 너...”
“리리엘.”
“리리엘도 두 개지 않아? 몸.”
그녀의 꼬깔 모자 위에도 자신처럼 플레이어라는 초록색 글씨가 떠있는 것을 보고 새삼스러울 것 있냐는 듯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절레 내젓는다.
“그럴리가 없잖아? 애초에 신에게 멋대로 내 영혼을 주물러진다니, 그런 성희롱은 사양이니까.”
성희롱인 건가 하고 작게 풉 실소를 흘리자, 그녀에게서 한심하다는 것 같은 눈초리가 느껴졌다.
“큼, 아무튼 사정은 알겠어. 그런데 여기는 내 성이라서 말이야? 난 불법 침입자를 환대해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현재 자신의 성에 무단으로 침입한 상황이었고, 그것은 모처럼 성의 레벨을 올릴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였다.
고작 한두 명 쓰러트린다고 쉽게 오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녀를 죽이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 이해가 빠른(아마도) 리리엘은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몸을 움찔하고 작게 떨더니, 이내 시선을 비스듬히 흘기며 제 몸을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붉혔다.
“숙박비라면 지불할 테니까.”
정정.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아니. 애초에 이 게임에서 그렇고 그런 행위는 프로텍트가 걸려있다고? 뭔가요, 그 태도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설정 놀이에 어울려주던 것조차 깜박하고는 게임이란 점을 언급하며 리리엘보다도 더욱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오히려 이쪽이 더 성희롱 답다며 그녀에게 재차 나무라려 했지만, 뺨에 홍조를 띄운 채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는...굉장히 안고 싶다는 느낌을 주었다.
정신계 마법에 걸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지만 그 미묘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파창-! 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홀 안을 울렸기 때문이다.
“침입자인가?”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깨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털어내고 마왕의 권한으로 성 내부의 영상을 벽에 위치한 스크린에 투영하였다.
그리고 투영된 스크린에는 나름 오래 게임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 쌍의 순백의 날개.
들고 있는 무기는 모두 하나 같이 전설급 무구이거나 그에 필적하리라 생각되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그녀)들이 들어오고, 정정.
나오고 있는 곳은 공간이 깨어진 듯한 1층 홀 내의 상공이었다.
“뭐야, 이런 기술이 있었나? 그보다 침입자 알람도 안 울리다니, 버그라도 발생한 건지.”
홀 안을 두리번 거리며 활공하는 천사(임시)들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깨어진 듯한 공간이 리리엘의 자칭 차원 이동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싶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모자를 두 손으로 푹 눌러쓴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리리엘이 보였다.
“리리엘..?”
방금까지 활발하고 말괄량이 같던 태도는 어디에 갔는지, 그녀의 눈은 심하게 흔들렸으며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생기는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게임이 실감난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포에 물든 모습을 보이는 유저는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건 게임이며, 죽어도 다시 부활하기 때문이다.
고통 또한 최소한으로 억제되고 있는 이 세계에서 죽음은 그저 조금 불쾌한 정도의 패널티었다.
하지만 공포에 떠는 리리엘의 모습은 단순히 연기라고 보기 어려운 절박함이 담겨있었다.
“리리..”
“빠, 빨리 도망쳐야 해...싫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 마왕씨, 도망가자..! 다시 거기로 끌려갈 거야..! 싫어...싫어, 싫어!”
리리엘이 패닉에 빠져 있는 사이, 이미 스크린에 비추고 있는 천사들은 각 층에 배치된 마물들을 뿌리치며 빠른 속도로 성을 돌파하고 있었다.
이대로 어영부영 하다가는 무방비한 상태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터.
상냥하게 달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기에 다소 거칠게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리리엘, 잘 들어. 나는 도망치지 않아. 이 성은 내 소유고, 나는 내 집에 함부로 침입한 녀석들을 상냥하게 타일러서 보내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어.”
눈물로 범벅이 된 상태로 고개를 들고 자신을 보는 리리엘을 마주보며 은은한 녹빛을 흘리는 에메랄드 목걸이를 목에 걸어준다.
“행운을 올려주는 아티팩트야. 들키지 않게 도와줄 테니, 숨어있도록 해.”
가르키는 방향에 위치한 벽이 끼긱 하면서 반쯤 회전했다.
일명 회전문이라고 불리는 장치였다.
“읏.”
무언가 말하려던 걸까? 입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체념한 듯 입술을 꾹 다물은 그녀가 벽 뒤로 들어가자 벽이 회전하며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자, 그럼 어쩐다.”
이제는 거의 근접한 곳까지 도달한 천사들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며, 정말로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저런 화려한 무구를 사용하려면 당연히 레벨은 최상급 수준으로 추정됐다.
아마도 1:1로 상대하는 것조차 상당히 벅차리라.
그런 천사의 수가 20.
그녀의 말대로 도망치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정공법으로 나섰을 경우의 이야기.
“뭐, 마왕이 정정당당히 상대하는 건 말도 안되고 말이지.”
그가 이 성을 점거할 때 1:1로 싸웠던 마왕은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아스라진 모양이다.
“조금 아깝지만 어쩔 수 없나.”
마치 즐거운 장난을 꾸미는 악동 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조용히 드리웠다.

&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른다.
아마도 문으로 추정되는 그것은 섬광과 함께 두부 마냥 가볍게 반으로 갈라지며, 그 뒤로 순백의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귀하다는 건 이들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단순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지는 그들의 맞은 편에는 그와 대조되는 휑한 원탁을 사이에 두고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마왕씨가 있었다.
“강도 주제에 꽤나 화려한 행차네. 어떤 방법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 마왕성에 온 것을 환영해.”
거만하고 깔보는 그의 말투에 동요하거나 반대로 코웃음 치는 반응을 보일 법도 하건만, 그들은 감정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에 어떠한 변화도 없이 일제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그대로 날아서 덤벼올 생각이었던 걸까.
이내 그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하나 둘 총을 맞은 새처럼 순서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마왕의 입에서 읊조려진 마법은 사물과의 마찰력을 없애는 기술로 보통은 상대를 넘어트릴 때 사용하지만, 하늘에 떠있는 사람이 넘어질수는 없는 법.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에 의해 부유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음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서 예의라는 걸 못 배운 모양이네. 뭐, 그러니까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거겠지만.”
비아냥 거리는 마왕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재차 날개짓을 반복하고 있는 그들의 날개에서 풍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날개라는 건 중력을 무시하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서 말이야. 바람과의 마찰을 없앤다는 행위 하나만으로도 무력화 되는, 실로 단순한 트릭 같은 거라고?”
간단하죠? 하고 묻는 듯한 그의 태도는 명백히 조롱이었지만, 천사들은 그저 제 할 일을 행할 뿐이라는 듯 묵묵히 검을 다잡고 일어섰다.
걔중에는 미리 떨어져있던 동료의 검에 꿰뚫리기라도 한 것인지, 날개에 구멍이 뚫린 녀석과 날개죽지 부분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녀석도 보였지만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송곳 형태로 돌진해왔다.
“진짜 학습 능력이란 게 없는 건지.”
쯧, 하고 혀를 차는 그가 무언가를 읊조리자, 달려오던 이들이 우당탕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두 바닥을 뒹굴었다.
이번에는 정직하게 발 밑에 그리스를 사용한 것이다.
“상대가 어떤 기술을 가졌는지 파악했으면 거기에 대한 대처가 우선 아니겠어? 나참, 장비가 최상급이어도 다루는 녀석들이 이 모양이어서야.”
그들에게 설교 아닌 설교를 하는 사이, 뒤늦게 도착한 덕분에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아 날개가 멀쩡한 천사 하나가 검을 들고 빠른 속도로 공중을 가르며 쇄도했다.
예상대로 그들은 공중 전투에 특화된 모양인지, 날카롭게 날아드는 천사의 모습은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의 매와 같았다.
확실히 보통의 마법사라면 공중에서 매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천사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꼬챙이처럼 꿰뚫리고 말리라.
“슬로우.”
물체의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마법으로 천사의 돌진은 약간 느려졌지만, 여전히 사람 하나 둘 관통할만한 위력을 내포한 천사의 공격은 마왕의 배에 구멍을 내기 위해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날아들었다.
이윽고 지근거리까지 날아든 천사의 모습에도 전의를 상실한 것 마냥 미동도 않던 그가 문득 한 발짝 내딛으며 뒤로 돌아 자세를 낮추자, 필살이라 불릴만한 천사의 일격이 허무하게 마왕씨의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직후, 자연스럽게 천사의 품으로 파고든 형태가 되자, 오른 손으로 멱살을 낚아채고 왼 손으로는 검을 든 팔을 붙잡더니 가속력이 붙은 천사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꽂아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단순한 엎어치기로는 이러한 위력이 나올리가 없지만, 엎어치는 순간 그래비티를 사용하여 더욱 위력을 높힌 것이다.
아마도 그는 즉사했으리라.
“...”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보고 있던 천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분명 아군의 칼날이 적을 꿰뚫었을 터인데 왜인지 반대로 아군이 당했기 때문이다.
이내 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광경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머리의 형체는 온데간데 없었고 천사의 몸은 폭사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방에 살덩이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다름아닌...마왕씨었다.
“이, 이게, 무슨..?”
자신이 저지른 짓임에도 어째서인지 그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이내 욱- 하는 소리와 함께 웨엑-하며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뭐야, 이런 그로테스크한 연출 여태까지 없었다고..!’
본래 게임 내에서 생물이 죽게되면 하얀 가루가 되어 산산히 흩어진다.
이런 충격적인 연출은 듣도보도 못했다.
꼭 현실 같은 리얼함에 결국 구역질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회라고 여긴 것일까? 천사 중 하나가 멀리서 자신의 창을 집어던졌다.
“컥-!”
결과는 당연히 적중.
그의 어깨는 관통 당해, 어깨에서는 무수한 출혈 대신 가루가 흘러나오며 흩어지는 연출이 이어졌다.
‘이게 대체..?’
자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가루를 보고 천사의 시체는 착각인가 하여 고개를 들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살덩이가 사방으로 흩어진 천사의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푸욱-, 푹-, 푸북- 하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린다.
마왕씨의 등은 벌집처럼 꿰뚫려있었다.
“커헉-!”
아프다.
당연히 날붙이에 찔리면 아픈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게임.
아무리 괴로울 고통이라도 가렵다는 정도로 느껴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등에 무기가 날아와 꽂힐 때마다 진짜 날붙이에 찔린 수준은 아니여도 망치로 후려친 것 같은 격통을 가져왔다.
“쿨럭, 쿨럭.”
고통으로 인해 기침이 연신 나오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몸이 늘어졌다.
“대체...뭐냐고.”
누워있는 그의 몸 아래로 자신이 죽인 천사의 피가 흘렀다.
차가웠다.
생생한 촉감이 리얼함을 더했다.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마치 생생한 꿈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아, 한심하긴. 게임에 빠져서는 꿈에서 나올 지경에 이른 거냐. 웃지 못하겠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바닥을 굴러 천장을 바라보자, 어느 새 그리스가 풀린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처피 게임. 아니, 꿈이려나? 어느 쪽이든 딱히 상관없겠지.”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고 있으려니, 문득 덜컹하고 문을 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이 방에 하나 있는 문은 천사들이 돌입하면서 파괴되었다.
당연히 누군가 들어온다 하더라도 문을 여는 소리가 날 리 없었다.
이내 의문을 해소시켜줄 해답이 들려왔다.
“마왕씨..!”
칙칙할 뿐인 성에 어울리지 않는 가련한 미색이 울려퍼진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쪽에는 리리엘이 반쯤 회전한 벽에서 이쪽을 향해 뛰쳐나오고 있었다.
의문의 방문자.
알 수 없는 기술로 성을 찾아온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꿈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그녀의 다급한 몸짓도, 눈물로 얼룩진 얼굴도 환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이런 미녀를 울게 만들다니, 어디의 잘난 바람둥이냐?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작게 웃어버렸다.
“마왕씨, 마왕씨!!”
분명 꿈일텐데, 그녀가 맞잡은 손은 따스했다.
“미안, 미안해...나 때문에...미안해.”
그녀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진다.
“쿨럭, 호들갑이 심하다고. 저런 걸로 죽을리가 없잖아?”
손을 뻗어, 눈물이 흐르는 그녀의 눈가를 훑어주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마왕이니 뭐니 실컷 허세부린 주제에 여자를 울리다니, 쥐구멍이 있다면 기어서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길이가 너무 길어서 짤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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