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어 요새에서는 제법 성대한 위로회가 열렸다.
거대한 화톳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수십 명의 용병들이 빙 둘러앉아 무용담을 안주삼아 술잔을 부딪쳤다. 활기의 한편에는 죽은 자에 대한 추모가 있었다. 자작은 용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이들을 애도했다. 원래 돈에 팔려 신념도 없이 누구든지 따른다고 여겨지는 용병이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들이 기사나 정규군과 같은 영광을 누리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용병들은 이런 일을 신기해하면서도 한편으론 뿌듯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폼웰 가문의 로켈스, 파멘 가문의 레넬, 그 외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머지. 그들은 이 요새를 탈환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전사들로서 역사와 루나비 가문이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는 한낱 용병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허나 용맹하게 싸우는 자라면 누구든 칭송받아 마땅하다.”
자작은 흘끔 내게로 시선을 두더니 이내 다시 용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로 그대들도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
용병들이 술잔을 든 손을 쳐들며 환호했다. 나는 사내들 틈에서 빠져나와 요새의 샛길을 걸었다. 이 세계의 술이 그런 건지, 아니면 여기의 술만 그런 건지 입맛에 별로 맞지가 않았다. 현실의 것과는 다르게 쓴 맛이 강했고 목 넘김도 걸쭉했다.
나는 투구를 벗고 한숨을 돌렸다. 밤바람이 차갑게 머리를 식혀 주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머리 전체를 덮는 보호구를 쓴다는 건 예상 외로 매우 큰 고난이었다. 어쩌면 게임에서 ‘투구 숨김’ 설정 같은 게 있는 이유도 단순히 좋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별이 아름다운걸.”
밤하늘엔 은빛으로 반짝이는 점들이 가득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나는 문뜩 여섯 살 무렵에 시골에 갔을 때 본 밤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 별이 많았었는데. 뭐 이제는 판타지나 다름없는 얘기지만.
“역시 여자셨군요.”
배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투구를 쓰고 돌아봤다. 시골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방심했다. 제대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벗었어야 했는데. 혹시 내가 누군지 알아챈 건 아니겠지?
확률은 높지 않다. 저 시골뜨기가 성녀의 얼굴을 알 방법은 거의 없으니까. 소문으로 전해 들었다고 해도 구체적이진 않았을 테고.
“놀랐어요. 여자신데 그 정도 실력을 가졌다니. 게다가... 사실 저와는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죠?”
“그래서? 말이라도 까게?”
“아뇨. 그냥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죠? 그 검이나 갑옷... 당신은 마치...”
“네 착각이야. 그게 무엇이든.”
나는 끝까지 듣지 않고 딱 선을 그었다. 거기서 더 생각이 발전하면 위험하다.
“...그럴지도요.”
소년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뭐하는 거야?”
“절 제자로 받아들여 주세요.”
허.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고?”
“용병이시죠. 적어도 지금은요. 그게 아니더라도 당신은 강해요. 강하고 또 명예로우시죠. 희생할 줄 아시니까요. 제가 동경하는 모습 그대로에요.”
“네 착각일 수도 있지. 그리고 널 제자로 들인다 해도 내가 얻는 이득은 없어.”
귀찮은 녀석이 시종일관 곁에 붙어 다닌다는 건 오히려 재앙에 가까운 일이다.
“제 미래를 산다고 생각해 주세요. 저는 강해질 거예요. 맹세해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언젠가 제가 곁에 있음이 자랑스러워질 날이 올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녀석은 양손으로 검을 들고 아래로 하여 다소 어정쩡하게 기사의 자세를 흉내 내었다.
“절 거둬들여 주세요.”
이내 머릿속에 글귀가 떠올랐다.
[라크 / 종족 : 인간 / 타입 : 평민 , 용병 출신]
[그를 동료로 영입합니까? YES / NO]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은 NO였다. 일단 타입에서부터 페널티를 잔뜩 먹고 들어가니까. 게다가 자기 말대로 성장 기대치가 좋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일, 그때까지 이 철부지에 모험심 넘치는 소년이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난 널 가르칠 생각이 없어. 네가 아니라 누구더라도. 네가 굳이 날 따라오겠다면 난 널 부려먹을 거야.”
“종자Squire처럼요?”
“아니. 애초에 넌 기사도 아니잖아. 일단 오늘 번 돈을 내게 바치고, 앞으로 네가 벌어들이는 모든 돈도 내가 관리해. 넌 매일 아침 날 깨워야 하고, 온갖 심부름과 잡일을 해야 될 거야.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나보다 더 늦게 잠들어야 할 거야. 그건 당연히 네가 해야 되는 일들이 될 테고, 난 따로 너를 치하하거나 보상을 주지도 않아. 네게 직접 가르침을 주거나 훈련시켜 주는 일도 없을 거야.”
“그, 그건 그냥 하인이잖아요.”
원래라면 노예라는 말이 나와야 했겠지만 제국에는 그러한 제도가 없다. 그러니 저 순수한 소년이 알 리도 없고.
“싫으면 말든가.”
“할게요!”
소년이 즉시 대답했다. 그러자 오히려 내 쪽이 당황해버렸다.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하는 게 좋아. 너 마조히스트야?”
“마... 그게 뭐죠?”
“아무튼. 엄청 고생할 거라고.”
“견뎌낼 수 있어요. 저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제게 길을 알려 줄 거라고 저는 확신을 가졌어요. 안개 속을 헤매는 것보다는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난 가시밭길을 걷는 게 분명 더 나을 거예요.”
“...그럼 그러던가.”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참, 제 이름은 라크에요. 라크 펠다.”
“알고 있어.”
“예? 어떻게...?”
“어떻게든.”
[라크가 동료로 합류했습니다.]
[저장 위치가 갱신되었습니다.]
베일로 돌아온 후 나는 가장 먼저 영주의 저택에 들렸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나를 보고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미 게오르스가 말을 해둔 것 같았다. 입구를 지나자 익숙한 얼굴의 하녀가 마중을 나온 게 보였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대체 어느 쯤부터 내가 돌아왔단 사실을 알고 대기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성벽을 넘었을 때 경비병들이 나를 봤을 거고, 아마 그때 마법 도구 같은 걸 통해서 얘기를 한 게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무서울 정도의 정보력이다.
하녀는 곧장 서재까지 나를 안내했다. 베일 공작은 아침에 주로 책을 읽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그는 한손에 책을 든 채 나를 맞이했다.
“무사해 보여 다행이군.”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루나비 요새 탈환 건을 맡았다던데, 악마들은 그곳에 있었나?”
“아뇨. 적이라곤 고블린과 오우거 하나뿐이었습니다.”
“오우거라... 그 괴물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있었다니 섬뜩한 얘기군. 처리했나?”
“예.”
“다행이야.”
공작은 탁 하고 책을 덮었다. 그러더니 읽던 것을 도로 책장에 꽂아 넣었다.
“악마들이 그곳에 없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 악마왕 사후 그들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한순간에 제국에서 종적을 감추었어.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바람에 날려 사라진 신기루처럼 묘연하기만 하군. 그리도 많은 피해와 고통을 낳았거늘...”
“하지만 아직 악마들이 만들어낸 저주와, 그러한 불길한 기운이 담긴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있죠. 그게 악마가 아직 존재한다는 증거고요.”
나는 일부러 오우거에게 걸려있었던 흑마법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애니메이트 데드는 대상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긴 하지만, 오우거를 되살릴 정도라는 건 꽤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걸었다는 게 된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발동한 이상 아직 술자가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국 쪽에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일 거고, 이 과정에서 내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이 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수고했네. 식사를 하거나 씻을 생각이라면 하인에게 말하게. 가보아도 좋네.”
“그 전에, 혹시 제 쪽에서도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지요?”
“무엇이지?”
“성에 제 사람을 한 명 들이고 싶습니다. 이번 용병 일을 하면서 만난 소년입니다.”
“손님으로 맞이해야 하는가?”
“아니요. 그는 제 심부름꾼이 되기로 했습니다. 혹시 남는 하인 옷이 있다면 하나 빌려 주시고 다른 고용인들처럼 대하시면 됩니다.”
“종자도 아니고 심부름꾼이라... 자네에게 큰 죄를 지었나 보군?”
“그런 건 아니고, 제자가 되고 싶다더군요. 그걸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면서.”
“허, 요즘 세상에 흔치않은 열정적인 자인가 보군. 왠지 자네 말만 들어도 마음에 드는걸. 저택에 들여도 좋네. 당연히 귀족은 아니겠지? 혹시 괜찮다면 시간이 날 때마다 이쪽에서 예법 같은 걸 가르칠 수도 있는데.”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군요. 워낙에 철부지라서요.”
“그럼 그리 하지.”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돌아서서 서재를 나왔다. 문 밖에서 하녀가 다소곳이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그녀에게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말했다.
“길드에 가봐야 해서. 나가는 길은 안내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외워뒀으니까.”
“...예.”
나는 저택을 나와 곧장 용병 길드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베일에서 가장 큰 대저택에 있다가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협소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는 상담사에게로 가 저번에 맡은 일의 보수를 받았다. 아침이라 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덕분에 잠깐만 기다리면 됐다.
길드에서 소개해 준 일은 현장에서 돈을 주기도 하지만 이처럼 아예 길드 쪽에 돈을 보내 각자 받아가도록 할 때도 있다. 나는 차라리 이쪽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전자의 경우에는 돈을 받은 후 또 길드에 들려서 소개비를 내야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받고 내고 할 것 없이 그냥 길드에 와서 소개비를 뗀 보수만 받아 가면 된다.
성과급까지 합해 은화 11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액수다. 나는 은화를 양피지가 들어있는 주머니 사이에 넣어 두고는 길드를 나왔다.
다음으로 간 곳은 술집이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실 생각은 아니고, 만날 사람이 있었다. 애초에 난 이 세계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제 이후로 그렇다.
“어서 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주로 보이는 사내가 카운터에서 유리잔을 닦으며 인사를 건네다가 내 모습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 투구 정도는 벗고 들어오시면 안 되겠소?”
나는 양피지를 꺼내 잠깐 고민하다가 번뜩이는 발상을 떠올리고는 글씨를 띄웠다.
‘얼굴에 흉측한 화상 자국이 있어.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렇군. 실례했소. 어서 들어오시오.”
다행히도 잘 먹힌 것 같다.
나는 구석 자리에 가서 앉은 다음 녀석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리 판타지 세계에서도 낮술을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는지 술집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 외에는 근처 자리에 앉은 수상쩍어 보이는 두 명이 다였다.
그 둘은 똑같이 짙은 갈색의 망토로 머리부터 무릎 아래쪽에 이르도록 거의 온몸을 가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 술집인데도 잘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 말을 나누고 있어 괴이함을 한층 크게 만들었다.
그들 중 한명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딴 데로 돌렸으나 저쪽에선 나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앞에서 술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옵쇼... 뭐야 이번엔 꼬맹이잖아.”
“꼬맹이 아니거든요!”
“아니긴. 여긴 어린애한테 술 안 팔아.”
“어린애 아니라고요! 저도 이제 열여섯이거든요? 술 마실 수 있는 나이라고요. 봐요 이거. 용병 길드의 상징 보이시죠? 이제 믿을 수 있겠어요?”
“세상에, 요즘은 어린애도 용병을 하나? 말세야 말세. 어휴... 알았으니 들어 와.”
녀석은 점주와의 말싸움 끝에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발견하곤 앞자리로 와 앉았다.
“다들 알면서 놀리려고 일부러 저런다니까요. 고향에서도 몇 번 겪어 봤거든요.”
“아니 그냥 딱 보기에도 네가 또래보다 어려 보여서가 아닐까.”
아직 수염도 나지 않았고 덩치도 여자인 나보다ㅡ이렇게 말하니 뭔가 기분이 요상하다.ㅡ작으니까 말이다. 뭐 이건 리아가 여자에 비해 키가 좀 큰 것도 있지만. 그래도 눈앞의 이 소년이 평균보단 밑도는 체격인 건 확실하다.
촌에서 구르다 온 것 치고는 피부도 곱고 눈동자도 둥글둥글하고 큰 게 연하로 보이기 딱 좋은 모습이다. 조금 연령이 높은 쇼타라는 느낌이다. 쇼타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나무위키 켜라.
“당신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은근히 상처받는다고요!”
“왜? 네가 귀엽다는 의미도 되는데.”
“그, 그런가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녀석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볼을 붉혔다. 이상한 녀석이다.
“그보다 길드에서 보수 받아왔지? 내놔.”
“엑, 진짜로 뺏어가는 거예요?”
“그럼 가짜로 뺏어가겠냐? 왜, 싫어?”
“아뇨...”
녀석은 울상이 되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은화를 꺼냈다. 한 닢 한 닢 은화를 탁자 위에 내려 둘 때마다 녀석의 손이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쪽을 보는 점주의 눈초리도 묘해졌다. 거 괜히 오해 사게 시리... 누가 보면 강제로 뺏어가는 줄 알겠네.
“로아니아 폭풍 왕감자 사먹으려고 했는뒈...”
뭐냐 그건. 누가 작명 했는지는 몰라도 엄청 대단해 보이잖아.
그런 거 사먹지 말고 갑옷 살 생각이나 하라고. 기사가 되겠다는 녀석이 말이야.
“그게 얼만데?”
“알자스 동화 60개요.”
“뭐? 엄청 비싸잖아. 너 그게 얼만지 알아? 이 근처 여관방을 하루 빌릴 수 있는 돈이라고.”
“잠은 바깥에서 자도 되는걸요.”
잠 < 군것질이라니 이 녀석의 사고 회로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대체 어떻게 날씬한 거야? 혹시 이게 그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가.
“그래. 그럼 그거는 사 먹어라.”
나는 은화 하나를 튕겨 녀석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열 개를 쓸어 담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은 먹었고?”
“그거로 때우려고 했는데요.”
“간식 아니었어?”
“간식이라니, 그런 건 씀씀이가 너무 헤프잖아요. 아버지가 말했는걸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기부는 하더라도 사치는 부리지 말라고. 베풀다가 망하면 자부심은 남아도 과소비하다 망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서요.”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나는 양피지를 들어 주문을 했다.
‘여기 식사 하나 줘. 술은 됐고, 일인분이면 돼.’
혼자만의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녀석을 데리고 쿠람의 대장간에 들렸다.
녀석은 한쪽 벽에 걸려있는 갑옷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휙 돌아봐 말했다.
“저한테 갑옷을 사 주시려고 하는 거죠? 맞죠?”
“아닌데.”
“엥?! 그럼 왜 온 거죠?”
“잠자코 따라 와.”
나는 안쪽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때마침 불에 달군 검을 두드리고 있던 쿠람이 내 쪽을 스윽 보더니 다시 작업을 이어갔다.
“미스릴의 주인이구만. 투구는 괜찮나?”
“쓸 만해. 계속 착용하고 있으면 더운 게 탈이지만.”
“갑옷이란 게 원래 그렇지 뭐. 미스릴은 아니겠지만. 뭐 버티기 힘들면 버퍼한테라도 가서 냉기 계열 주문을 걸어달라고 부탁해 보든가.”
“이 도시에 있어?”
“글쎄. 워낙에 이곳저곳 바꿔 다니는 녀석들이라. 왔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군.”
대장장이인 쿠람이 알지 못한다면 굳이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버퍼들은 버프를 걸 장비나 아이템의 공수를 위해서라도 무기나 방어구상이 있는 곳은 꼭 한 번씩 들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뭔 일로 왔지?”
“무기를 살까 해서.”
“저기 진열대에서 아무거나 골라 가. 이번엔 공짜 아니니까 돈은 제대로 내고.”
쿠람이 한쪽 벽에 걸린 무기들을 가리켰다. 나는 그곳으로 가 종류별로 무기들을 다 쓸어담았다.
“뭐야?”
쿠람이 무기가 떨어지면서 난 큰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나는 무기들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다 살게. 배달은 해 주지?”
“염병하네. 직접 들고 가!”
나는 대장간에서 산 무기들을 들고 성까지 이동했다.
정확힌 내가 든 게 아니라 내 시종이 들었다. 녀석은 차마 양손으로 다 들 수도 없는 무기를 자루에 넣어 질질 끌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쫓아오는 게 너무 느려 세 발걸음을 걸으면 일이 초를 멈춰 서야 했다.
“속도 안 내? 진짜 버리고 간다?”
“무겁다고요. 하나만 들어 주면 안 돼요?”
“내가 그걸 들 거면 뭐하러 널 쓰냐?”
녀석은 죽을상을 지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왔다. 뭐 우직한 게 유일하게 장점인 녀석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보다 어디로 가는... 우왓!”
녀석은 고개를 들어 정면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을 발견하고는 놀라 자빠졌다. 장점 리스트에 리액션 항목을 추가해야 될까? 글쎄. 저게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 저길 가는 거예요? 혹시 스승님 엄청난 부자라거나... 사실 높으신 분 따님?!”
“내가 왜 네 스승이냐 하인아. 주인님이라고 불러라. 그리고 내 저택은 아냐. 그냥 좀 친분이 있는 사람 집에서 식객으로 얹혀사는 것뿐. 그러니 괜히 아무한테나 무례하게 굴지 마.”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한걸요. 스... 아니 그, 주인님은 이런 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높으신 분과 친구 관계라는 거잖아요. 그럼 저도 그곳의 손님으로 받아들여지는 건가요?”
“아니. 넌 그냥 내 하인 취급이야. 거기서도 달라질 건 없어.”
“그렇군요... 쩝.”
“왜? 귀족 대우라도 받고 싶었어?”
“그건... 솔직히 말할게요. 아주 조금은 기대했어요. 하지만 뭐 그럴 리 없죠. 예. 이젠 알아요. 아는걸요. 사실 이 무기도 절 위한 게 아니죠?”
“아닌데? 그건 전부 네 거야.”
“예? 전부요?”
녀석은 놀라 자루 안에 담긴 무기를 보았다. 눈대중으로 세어 봐도 6~7개는 된다. 넉넉히 샀지만 덕분에 은화를 다 써버리고 말았다. 뭐, 그 정도 돈쯤이야 언제든지 공작한테 빌릴 수 있는 액수이기도 하고, 벌 방법도 많고. 별로 신경은 쓰지 않는다.
“그럼 뭐하러 이렇게 많이 산 거죠? 하나만 사고 나머지 돈으로 갑옷을 샀어도 됐잖아요.”
녀석이 원망어린 목소리로 따져댔다. 역시 뭘 모르는 녀석이다.
“일단 너한테 어떤 무기가 잘 맞는지 알아야지. 그리고 갑옷이라는 건 사실 큰 의미가 없어. 버퍼한테 버프도 못 바른 무기나 들고 다니는 찐따들 전투라면 모를까, 당장 어느 전쟁터를 나가든 판금 갑옷을 꿰뚫을 수 있도록 적당히 날카로움 버프를 바른 화살을 쓴단 말야. 그런 건 진짜 장인이 제작한 갑옷밖에 막지 못해. 그걸 은화 몇 푼으로 산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당장에 숲에서의 전투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가레스의 갑옷은 내 미스릴 제 갑옷과는 달리 강철 재질이라 버프를 받은 화살을 막지 못했다.
참고로 내 미스릴 갑옷에도 버퍼의 버프는 걸려있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버프는 동일한 스텟을 올려 주는 버프끼리 중복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나는 온갖 종류의 버프들을 전부 시전해 한순간만이라도 행성파괴자 급 파워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여명 기사단에는 그 어떤 버퍼들의 버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버프를 걸어주는 보조계 직업이자 전사계 직업도 되고 마법사도 흉내낼 수 있는 사기캐 한 분이 계신다. 그러니 딱히 버퍼들의 버프를 장비에 걸어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게 누구일진 흠흠. 왠지 자뻑이 될 것 같으니 언급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게 결국 가레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마냥 농담은 할 수 없다. 그건 분명한 내 자만이고 실수가 되니까.
“버퍼들... 들어본 적 있어요. 분명 버프를 영구적으로 지속하게 만들 수 있는 비법을 알아내서 그걸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고 하던데요. 근데 그들은 이단자가 아닌가요?”
“이미 그 낙인은 인마전쟁 중반부에 사라졌어. 성녀라고 불리는 어느 대단한 작자께서 그들의 유용함을 알아보고 황제에게 부탁해 정규군으로 편입시켰거든.”
덕분에 황제의 전력은 엄청나게 상승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고난이도에 이를수록 지옥에 가까워지는 난이도가 한층 낮아지는 거라 매우 반길 일이지만, 그래서 지금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역시 성녀님이네요. 버퍼들 덕에 제국이 한층 더 안전해진 거니까요.”
“역시 성녀님이지. 어쨌거나 그래서 무기만 산 거야. 그리고 너 어차피 갑옷 사봤자 무거워서 걷는 것만으로 지치잖아? 갑옷은 네가 좀 더 근육이 잡히면 입도록 해. 그런 날이 올지가 의문이지만.”
“온다구요! 왜 절 그렇게 불신해요?”
“몰라. 네가 좋아서 그런가 보지 뭐.”
나는 앞서 가면서 얼빠진 표정을 한 녀석에게 손짓했다.
“뭐해? 어서 안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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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나 덥다 진짜
참고로 작중 계절은 겨울임
어제 못 올린 이유 :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병역검사 받으러 감
군대라니 씨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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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음
이거 여기에만 올리고 있는 거임?
왜 연재사이트에 안올리고
군대? 2년 연중? 뒈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