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맹렬한 사이렌 소리가 거대한 배수로 안으로 울려 퍼진다.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가 10m이상 되는 거대한 배수로. 지저분한 배수로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황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레인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젠장, 이걸로는 부족한데."
사람들의 행렬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어딘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배수로 안에는 갖은 오물과 이끼들이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몸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윽!"
그 중, 백발의 한 노인이 미끄러운 바닥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져 내렸다. 미끄러지면서 뒤통수를 바위에 심하게 부딪힌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레인걸은 이 광경을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노인은 동료가 없는지, 쓰러진 그를 챙기려는 사람은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
레인걸은 미끄럼 방지용 부츠를 신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신중하게 이끼바위 위를 걸어 나가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뒤로 묶은 포니테일이 거대 거미줄에 뒤엉켜 애를 먹는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없다. 레인걸은 이후 재빨리 노인의 소지품을 확인한다. 물론 돈 따위를 훔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분증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다. 이 공간에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노인의 쓰러진 주위에는 거무스름한 가죽 보따리가 하나 있었다. 본능적으로 레인걸은 보따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다.
"거대 쥐... 통조림..."
레인걸은 자신의 식량과 노인의 식량을 합산해 본다. 이 정도 양이라면 쉘터에서 생활하는데 지장 없으리라.
노인의 보따리를 움켜쥐고 떠날 채비를 한다. 울려 퍼지는 사이렌의 간격이 더 짧아졌다.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뜻한다.
"으, 으으..."
그때, 노인이 떠나려던 레인걸의 발목을 붙잡았다.
"살, 려줘..."
화들짝 놀라 레인걸이 뒤를 돌아보자, 노인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말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그건, 우리 손자놈 먹일 거라오..."
레인걸은 노인이 붙잡은 손목을 걷어 찼다.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노인의 손은 풀려져 버렸다.
"제발, 제발..."
지금 이 노인은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늙은이들은 너구리 같은 인간들 뿐이다. 자신이 약자라는 걸 이용해서 동정심으로 생존하는데 특화된 인종들이다.
"하다못해, 하다못해..."
레인걸은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사이렌 소리가 더욱 긴박해졌다. 가까운 쉘터까지 가려면 이제 달리지 않으면 시간이 위험하다.
노인이 쓰러져 있는 이끼바위를 탈출한 레인걸은, 신속하게 쉘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난 나쁘지 않아. 어린아이와 여자가 먼저 사는 게 당연한 거야.
당신은 늙은 남자잖아. 죽어, 그냥.
지금부터는 세상이 이렇게까지 될 때까지의 이야기.
나, 레인걸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였다, 고 한다. 나도 잘 모른다. 그게 유복한 건지 아닌지.
비가 오는 날 태어난 나는, 부모님께 레인걸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무튼 17살 정도 될 때까지 정규과정대로 학교를 다니고, 집에 적당히 속도 썩이는 그런 아이였다.
그 날은 여름이었다. 모든 일의 원인은 기상이변이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른다. 하지만 바다가 메마르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걱정했다. 매스컴은 연줄 보도를 해 댔다. 사람들은 걱정했다. 어린 나이의 나였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원래 학교에서 배우던 사실은,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날은 반대였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거 아니었다.
바닷물은 하늘로 올라갔고, 하늘로 올라간 물은 다시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기록적인 장마, 100년에 한번 있는 폭우. 그래, 여름은 항상 그랬다.
그래. 여름은 그랬지.
가을도, 겨울도, 그 다음해 봄이 되고 또다시 여름이 될 때까지 계속 그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는 비, 비, 비, 비, 비, 비, 비. 기상청은 가끔 틀렸다. 가끔 폭우?
날씨가 이렇다 보니 행정이 마비된 정부는, 재난대비 구축타워를 세우기 시작했다.
전 세계 곳곳에 구축타워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이른바 재난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타워로 몰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비가 내려도 부모님의 생업에는 지장이 없었기에 이사를 가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구축타워의 시스템은 배수시스템이었다. 높은 탑처럼 생긴 구축타워는, 비가 내리면 비를 하층으로 강제 배수시켜 침수피해를 막는 구조였다.
그렇게 강제 배수된 물은 타워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그런 타워는 세계에 수도 없이 많이 있다. 그럼 보통용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나?
그날의 일을 대범람, 혹은 대홍수라고 부른다. 노아의 방주가 있었다면 살수 있었겠지. 세계 각국의 선박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지만 한계가 있었다. 부모님도 대범람에 희생되셨다. 이제 와서 유체를 찾지도 못한다.
이제 와서 일반용지에 살겠다는 것은 자살지원이다. 생명의 어머니로만 여겨졌던 물의 공포! 이제 사람들은 물을 무서워한다!
유복한 가정이던 뭐던, 나는 그 순간 부모를 잃은 철부지 여자아이가 되었다. 자기 먹고 살기 바쁜 환경에 사람들은 호의적이지 않았고, 가끔 호의적인 사람들은 사기꾼, 아니면 몸을 노리는 천박한 사내놈들 뿐이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만 했다. 나는 구축타워에 들어가려 했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구축타워는 재난민의 수용을 거절했고, 결국 나같이 힘이 없는 사람들은 구축타워의 배수로에서 숨을 죽이며 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생활도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배수로에는 보통 일주일에 한번씩 배수가 시작되는데, 그때 물살의 폭력에 휩쓸리면 무조건 죽는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 해도 일반용지로 휩쓸려 나갔다는 것은 바다에 버려졌다는 것과 동일. 죽는다. 게다가 배수로는 구축타워의 저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배수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침수된 물이 빠질 때까지 며칠간 쉘터 내에서 버티고 있어야 한다. 마치 잠수함처럼.
쉘터는 본래 배수로를 점검하던 관리인들이 긴급하게 숨을 수 있는 용도로 지어진 시설이라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부랑민들의 피난처로 쓰이고 있지만.
그리고 나는 지금, 쓰러진 노인의 식량을 가지고 쉘터에 들어와 있다.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수도 없이 그런 일들을 봐왔고, 그런 일들을 당해왔다.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자, 그럼. 이렇게 또 며칠을 지내야 할지 모르는데, 자기 소개라도 할까요?"
쉘터의 방호문을 굳게 잠근 남자는 스스로 나서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쉘터에는 4명의 사람이 들어와있다. 모두 각자의 거리를 유지하며 쉘터의 벽에 붙어 앉아 있었다.
"저는 다니엘. 전직 군인이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근육질의 팔뚝을 가진 남자다. 어쩐지 힘이 좋아 보이더라니. 하지만 예의 바른 인사에도 사람들의 박수는 없다.
"그럼, 누구부터 시작하실까요?"
남은 세명을 두런두런 살펴보며 붙임성 있게 말을 붙이는 다니엘. 하나는 꼬맹이 남자아이고, 하나는 아줌마... 그리고 나 뿐.
남들과 친해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차피 며칠은 지내야 하기에 좋은 분위기에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이 든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레인걸."
"레인걸? 좋은 이름이네. 나는 마담, 아니, 앨리스라고 불려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줌마가 내 소개를 듣고는 입을 열었다. ...불려요? 이 사람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만. 뭐, 흔한 일이다.
"반갑습니다. 레인걸. 앨리스. 그리고 그쪽 꼬마 신사님은?"
"저, 저는 피터에요."
좌측에 앉아있던 꼬마도 다니엘의 부드러운 추궁에 대답을 했다. 7살쯤 되려나. 머리를 자르지 못했는지 갈색 머리가 덥수룩하다. 이 쉘터 내의 계급은 굉장히 명확해 보인다. 전직군인인 다니엘이 최상위, 나와 아줌마가 비슷할 것이고 꼬맹이 피터가 최하위. 차라리 이런 편이 낫다. 분쟁의 요소가 없으니까.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자 두꺼운 쉘터의 문 밖에서 격렬한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배수의 시작이다. 아까 그 노인도 이 배수에 휩쓸리겠지.
"뭐, 뭐죠 이 소리는?"
피터는 쉘터를 울리는 진동음에 불안한 듯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래가지고 언제까지 버틸 수나 있을까?"
스스로를 앨리스라고 칭한 아줌마는 묘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로 피터에게 이야기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인성이 느는 것은 아니니까.
앨리스의 옷차림은 이곳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넝마차림이지만, 묘하게 행동거지에 약간의 기품이 엿보인다. 지금은 엉망이 된 붉고 풍성한 그녀의 머리카락도 한때는 빛을 발했겠지.
"방금 소리는 배수의 소리란다. 너도 여기까지 왔다면 대범람의 일은 알고 있겠지?"
"네..."
앨리스와 대조되게 전직군인이라던 다니엘이 피터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다 저런가. 이런 상황에서까지도 예절 바르고. 뭔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는 것 같다. 그야 그게 직업이었으니까 당연했겠지만.
"피터, 저기... 부모님은 혹시?"
"다니엘.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죽었겠지 뭐."
피터와 대화를 나누던 다니엘의 질문을 앨리스가 딴지를 건다.
"살아있어요!"
그 동안 소극적이던 피터는 앨리스의 말에 큰 소리로 외쳤다.
"살아있다고요! 안 죽었어요!"
"어... 그래. 진정하렴, 피터."
피터의 격한 대꾸에 다니엘이 진정을 시키기 시작한다.
"흥. 그런 것보다 식량문제부터 확실히 하죠?"
앨리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이곳의 생활패턴에 몹시 익숙한 사람인 듯 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보따리 두개를 내 무릎 앞에 내려 놓았다. 하나는 갈색, 다른 하나는 아까 '우연히 주운' 거무스름한 가죽 보따리. 보따리를 열어 내가 가지고 있는 식량을 내보였다.
"레인걸, 꽤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통조림이 특히 많네요. 내 것과 바꾸지 않을래요?"
앨리스는 내 식량을 보더니 유독 통조림에 관심을 가졌다. 통조림은 보관이 오래 동안 가능한 식량이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앨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내 보였다. 대부분 죽은 폐수어와 쥐고기, 혹은 박쥐날개다.
"어때요, 레인걸? 그 통조림 하나랑 폐수어 세마리랑 바꾸지 않을래요?"
앨리스는 손바닥만한 폐수어 세마리를 들어 보였다. 폐수어는 이곳의 환경에서만 자라는 일종의 변종 물고기이다. 그 형태도 제멋대로이고 종도 아마 다른 것 같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다 폐수어라고 부른다. 맛은 대단하지 않지만 일단은 사람이 먹어도 해가 없는 것 같다.
"...거절."
"흥. 많이 쳐준다. 자 이건 어때요?"
이번에는 앨리스는 팔뚝만한 폐수어 한마리를 들어 올려 보였다. 눈이 썩지 않은 것 보니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폐수어는 부패가 너무 빠르다. 하루 이틀 내에 먹기엔 문제 없겠지만 나도 당장에 식량이 부족한 건 아니다.
"...거절."
"흥. 싫으면 말던가. 다니엘은 뭐 가지고 있어요?"
두 번의 거절이 이어지자 앨리스는 다니엘로 방향을 돌렸다. 그렇다. 쉘터에서는 이런 식으로 자연스러운 물물거래가 일어난다.
"저는 별건 없습니다만."
피터를 진정시키던 다니엘은 자신의 가방을 뒤지더니 정글 나이프를 하나 꺼낸다.
"자, 잠깐만! 당신 지금..."
앨리스는 날붙이를 보자 안색이 급히 바뀌었다. 나도 순간을 놓치지 않고 뒷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었다. 단단한 금속감이 잡힌다.
"아, 아닙니다. 저는 식량을 거래할 생각이 없을 뿐이니까요. 단지 도구를 팔 생각은 있습니다."
쉘터는 도망칠 수 없는 밀실이다. 그렇기에 사람들과 신뢰가 깨지거나, 살인이 발생하면 그땐 정말 곤란해진다.
다니엘은 나이프를 바닥에 내려 놓더니 양 손을 하늘로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체구의 남성은 맨손으로라도 이길 자신이 없다.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다니엘은 가방에서 천천히 이것저것 꺼내놓기 시작했다. 주로 칼과 낚시도구가 많이 있었다. 생필품이랄 것까진 없지만 생존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끈 건 한가지 물건이었다.
"이건... 저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인데요. 필요하신 분 있으신가요?"
다니엘의 손에 들려 나온 물건은 생리대였다.
"어머나."
앨리스는 조금 의외라는 눈치였다. 이곳에 온 뒤로 제대로 된 식생활이 유지가 되지 않아 불규칙하게 생리가 발생하긴 하지만, 일단 시작되면 몹시 번거롭다. 속옷도 제대로 빨 수 없는 환경에서 생리혈이 속옷에 묻는 만큼 불쾌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콜."
나의 거래의사에 다니엘은 호의적으로 응해왔다.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식량은 필요하지 않은데요. 다른 건 있으신가요?"
아쉽게도 나는 식량을 제외하면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뒷주머니의 나이프를 제외하고는.
"...없어."
"그렇군요. 혹시 앨리스는 필요한가요?"
다니엘의 물음에 앨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만큼 나이 먹은 여자들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서. 딱히 필요한 물건은 아니네요."
확실히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다. 개인차가 있는 거겠지.
"그런데... 이 꼬맹이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생리대를 협상 하던 중, 앨리스는 피터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했다.
"흠. 피터, 무언가 가지고 있나요?"
"아, 이거..."
다니엘의 부드러운 질문에 피터는 가슴팍 안을 더듬더니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종이상자를 꺼냈다.
담배다.
"다, 담배를 너 같은 꼬맹이가 왜?!"
그 모습을 본 앨리스가 역정을 낸다.
"하, 할아버지가 일단 가지고 있으라고 했어요..."
피터는 기가 죽어 담배를 든 채로 시선을 바닥에 내리 깔았다.
"흐음... 잘됐군요. 저는 담배를 피우니까요. 피터, 그 담배를 제 생리대와 바꾸지 않겠어요?"
다니엘는 담배를 가지고 있던 피터와 거래를 제안했다.
"네? 하지만, 저는 그게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는데요..."
"하하. 몰라도 된답니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을 거에요."
다니엘은 나에게 찡끗 윙크를 던지면서 피터와 거래를 했다. 생리대와 담배가 뒤바뀌는 순간이다.
꼬맹이에게 거래를 가르치려는 건가. 이 군인. 성격이 너무 좋다.
"그, 그럼 이 휴지로 뭘 해야 하죠...?"
"...골라."
나는 피터에게 내 보따리를 가리켰다.
"네, 네?"
"... 그걸 나한테 주면, 먹고 싶은 거, 줄게."
피터는 약간 이해가 부족한 듯, 의아해 하면서도 내 보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피터가 가리킨 건 아까 '우연히 주운' 통조림 중 일부였다. 고등어 통조림이다.
"저, 이거 좋아해요!"
"...그거면 돼?"
"그럼요!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통조림이거든요!"
생리대 한 묶음과 통조림 하나라. 뭐 어떤가. 거래는 각자가 만족하면 그만이다. 나는 고등어 통조림을 건네주고는 생리대를 받아왔다.
"히히! 나중에 할아버지랑 나눠 먹어야지!"
"당장 네 먹을 것도 없는 게 뭘 나눠먹겠단 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난 안 나눠줄 거야."
거래에 기뻐하는 피터에게 앨리스는 또 까칠하게 대꾸했다. 어린애가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냐만 쉘터에서 식량문제에 민감한 것은 사실이다.
"네 네, 좋습니다. 식량은 각자 자신 것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하죠. 그럼 이제 화장실 문제인데..."
다니엘은 이런 일에 익숙한 모양이다. 적당히 중재를 하고는 쉘터 내의 화장실을 구역을 정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1주일 이상은 함께 생활해야 하는 쉘터이기에 시작부터 서로간의 약속이 중요한 법이다.
"그럼... 저쪽 구석을 사용하기로 하죠. 수면구역은... 뭐, 네 명이니까 안 정해도 되겠죠?"
"흥. 화장실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자리는 내 꺼야."
"사실 큰 차이도 없는데요. 앨리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여전히 까다롭게 구는 앨리스를 다니엘은 적당히 넘겼다. 화장실이라고 해도 별게 없다. 그냥 쉘터 한쪽을 천막으로 가려놓고 그곳에 용변을 보는 것이다. 쉘터에 10명 정도 모이기 시작하면 수면구역에 대한 싸움이 치열하다. 화장실에 방치된 오물의 악취가 새어 나오기 때문이다.
"또, 똥은 제가 치울게요."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 쉘터를 이용하고 난 뒤에 이용자들은 적어도 화장실을 비워주고 떠난다.피터는 아마 다른 쉘터에서도 위치가 가장 밑바닥이었을 테니 그런 역할을 맡았겠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식량이 없는 사람들이 식량을 얻어 먹는 대신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쉘터의 공통적인 규칙이다.
"그럼 대충 규칙은 정해진 것 같군요. 앞으로 잘 지내 봅시다."
그렇게 다니엘이 박수를 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따라 오는 박수는 피터의 박수 뿐이었다.
며칠 뒤, 쉘터의 평화는 얼마 가지 못하고 금이 갔다.
피터의 식량난이 문제가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식량은 자신이 처리하는 것이 약속이었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피터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일은 없었다. 사실 이 정도는 예상을 한 일이었다. 담배 하나 달랑 들고 온 애가 쉘터에서 1주일 넘게 버티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나마 통조림 하나로 며칠 버텼다.
통조림이 다 떨어진 피터는 쉘터 구석에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어쩌죠?"
다니엘은 나와 앨리스와 함께 피터가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흥. 뭘 어쩌긴 어째요? 죽고 남은 물건은 공평하게 나누죠."
"앨리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아무튼, 난 도와줄 생각 없어요."
오늘도 앨리스와 다니엘은 충돌했다. 두 사람은 생각의 근본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다.
"앨리스, 어차피 폐수어는 조금 있으면 썩을지도 모르잖아요. 조금 나눠주는 게 어때요?"
"그럴 거라면 다니엘,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식량이나 나눠줘요. 왜 나한테만 식량을 나누라고 하는 거에요?"
"저도 조금 줄 거라니까요. 우리 셋이 조금씩 도와 주자고요."
"그렇게 돕고 싶으면 다니엘, 당신 혼자 도와요. 오히려 저 꼬맹이가 죽으면 뭐라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살리겠다는 거에요?"
"앨리스!"
다니엘의 큰 목소리에 순간 피터가 몸을 추스렸다. 잠에서 깬 것 같지는 않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주의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좋아요. 앨리스는 돕지 않겠다는 거죠. 대신 제가 당신을 돕는 일도 없을 거에요."
"흥. 그럴 일이 있기나 할까?"
앨리스는 입술 한쪽을 일그러뜨리며 웃어 보였다. 다니엘은 포기한 듯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인걸. 당신 생각은 어때요?"
"... ..."
나도 식량이 여유로운 편은 아니다. 부패가 빠른 음식들은 쉘터에서 생활하면서 먹으려고 했고, 통조림은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남겨 두려고 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음식을 나눠야 한다면 통조림을 쓰는 수 밖에 없다. 계산을 해보면 당연히 돕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와 여자는 먼저 살아야 한다.
"...돕죠."
"잘 생각했어요, 레인걸. 정말 고마워요."
"흥. 바보들."
앨리스의 차가운 비난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니엘은 식량을 나누기로 했다. 나는 참치통조림 하나를 제공했고 다니엘은 쥐고기 소금절임을 나눠 주기로 했다. 불을 피웠다면 좀더 그럴듯한 요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쉘터는 폐쇄공간이기에, 불을 피우는 것은 산소를 잡아먹는 자살행위다.
"자, 피터. 이것 좀 먹어요. 정신 차려봐요."
음식을 나누어 주려 피터를 흔들어 깨운 것은 다니엘이였다. 나는 별로 말주변도 없기에 그냥 옆에서 보고만 있었다.
"고...맙습니다..."
피터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격한 배고픔의 겹침 때문인지, 인사치레상의 거절조차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식량을 먹기 시작했다.
"피터, 배고픈 건 알지만 천천히 먹어야 돼요. 체할지도 모르니까요."
다니엘이 부드럽게 피터를 어르면서 식량을 먹는 방법을 지시해주었다. 피터는 시키는 대로 천천히 식량을 먹으면서 체력을 회복해갔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피터는 식사를 마치자 바로 다니엘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하, 이 누나도 널 도와줬단다. 음식의 반은 이 누나 거에요."
"고맙습니다! 누나!"
피터는 해맑게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나는 왠지 그런 밝은 미소를 보는 것이 꺼려져 고개를 돌렸다.
침수기는 끝났다. 쉘터의 문을 열자 언제나의 배수로가 눈 앞에 펼쳐졌다. 약간 주변이 조금 더 촉촉해진 느낌이다.
"그럼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흥."
다니엘과 앨리스는 마지막까지도 부딪히며 헤어졌다. 이제부터는 또다시 생존을 위한 시간싸움. 적절한 식량과 쉘터를 찾지 못하면 다음주 배수를 견딜 수 없다.
두 사람이 떠나 간 쉘터. 피터는 약속대로 화장실에 쌓인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삽이나 가래 같은 도구가 있을 리는 만무하다. 수단은 오로지 손.
"...써."
나는 가지고 있던 코팅장갑을 피터에게 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피터는 궂은 일을 하면서도 항상 남에게 도움을 받을 때면 웃음을 잃지 않는다. 왠지 이 녀석의 얼굴 속에 보석 같은 영롱함이 숨어있는 것 같다.
어차피 쉘터 내의 사람들도 배가 부를 정도로 먹으며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용변의 양도 매우 적다. 그럼에도 불쾌한 일임에는 틀림 없으리라.
"...어떻게 할까."
잠시 쉘터의 밖으로 나왔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앨리스와 다니엘처럼 살 방도를 궁리하며 또다시 출발을 해야 한다. 이 쉘터를 본거지로 삼아 생활을 하는 방법도 한가지 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올라가야 한다.
상층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같은 배수로라고 해도 침수기가 천차만별이다. 내가 있는 최저위 배수로의 침수기는 10일 이상 가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최고위 배수로는 침수기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식량을 구해야 하는 문제도 많이 완화된다.
"어? 누나, 아직 안 갔어요?"
오물을 한웅큼 쥐고 쉘터 문을 열고 나온 피터가 말을 걸었다.
"...응."
피터는 오물을 쉘터 박으로 털어 버리면서 밝게 이야기 했다.
"아~ 장갑 돌려 받으려고 기다렸구나? 미안해요! 빨리 씻어서 드릴게요!"
"...버려."
"네?"
"...필요 없어. 버려."
순수한 건지 모자란 건지. 오물냄새 밴 장갑 따위 필요 없다. 어차피 버리라고 준 물건이다.
"아~ 그럼. 어떻게 하죠.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은혜는 무슨. 신경 쓰이는 일도 좀 있고. 나는 이 녀석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따라와."
"따라 오라고요?"
"...은혜를 갚아."
"어~ 무슨 일을 하는데요?"
"...네 맘대로 생각해. 싫으면 관둬."
나는 그대로 발치를 돌려 배수로의 상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만요! 누나! 이것만 다 치우고 따라 갈게요!!"
피터는 허겁지겁 지갑을 벗어 던지더니 냄새 나는 손을 어디다 닦아야 할지 두리번 거리면서도 나를 따라오려 한다.
앨리스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은 그녀를 따라 해야 할 것 같다.
"...흥."
피터는 말하자면 햇병아리였다.
"으웩! 이게 뭐야! 써!"
"...붉은 뿌리."
"뿌리를 왜 먹어요?"
"...나름대로 먹을 만 해."
무엇을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지도 몰랐으며,
"와! 누나! 이렇게 큰 물고기는 처음 봐요!"
"...변종 뱀."
"네?"
"...변종 뱀이라고."
이곳에서 피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배수로의 상층을 향해 복잡하게 꼬인 배수로를 함께 걸었다. 함께 며칠간 함께하면서 나는 피터에게 살아남는 법을 알려 주었다. 피터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빠는 이 구축타워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찾으러 가야 해요."
"...응."
"원래는 할아버지랑 같이 다녔는데, 어디서부턴가 헤어져 버려서..."
"...그래."
"구축타워 꼭대기에 가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고 했어요. 거길 가면 아빠도 만날 수 있고, 할아버지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겠네."
피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의 부모님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해두고 사라진 모양이다.
물론 피터가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란 걸 알아차릴 일은 없었고, 나도 지적해 주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타워의 꼭대기에는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쉽게도 나는 그렇게까지 순진한 나이는 지나 버렸다. 나의 부모님은 예전에 돌아가셨다.
피터와 다니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동료라기에는 사냥도 제대로 못하고 식량만 축 낼 뿐이었지만, 피터와 함께 있으면 무엇보다 외롭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배신할 지 모르기에 혼자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순진한 꼬마에게 마음이 풀어진 걸까.
"누나, 오늘은 어디서 자죠?"
"...글쎄."
며칠간 배수로 안을 헤매듯이 돌고 있다. 왠지 이 곳은 지나온 길인 것 같은데. 사실 배수로 안에서는 시간개념은 없다. 해가 보이지 않으니까. 졸리면 자고 일어나서 다시 식량을 찾아 떠난다.
"쉘터에서 자는 건 어때요? 저기 있는 것 같은데요?"
피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높은 곳에 위치한 쉘터였다. 질척한 배수로의 이끼바위 틈에서 잠을 청하는 것보단 좋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아니. 다른 델 찾아보자."
"예에? 왜요? 저 이제 다리가 딱딱해져서 못 걸을 것 같아요~"
피터는 어린아이 특유의 떼를 썼다.
"...쉘터는 위험해."
"네? 쉘터가 제일 안전한 거 아니에요?"
"저 빛을 봐. 이미 누가 쓰고 있단 소리야. 그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할 수 있어."
이곳에서 사람과 마주 치는 것은 배수 때, 어쩔 수 없이 쉘터를 이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피하고 있다. 사람이 생기면 문제가 생긴다. 저번 쉘터에서도 앨리스는 피터를 방치해서 죽게 내버려 두려고 했다. 하물며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사냥하는, 말하자면 강도단이라도 만나면 곤란해진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 가봐요~"
"...안돼."
하지만 이런 사정을 피터 같은 꼬마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윤리관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꼬마가 배신과 약탈의 편리성을 맛보게 되면 계속 배신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배수로 안의 사람들 사이에도 정보공유라는 게 있어서, 일단 소문이 나면 그 누구도 호의적으로 봐 주지 않을 것이다.
"치! 나 혼자라도 갈 거야!"
"안돼!"
피터는 이끼바위를 기어 올라가 쉘터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리기로 따지자면 당연 내가 빠르겠지만, 이끼바위 위에서 뛰는 행동은 위험하다.
"기다려! 멈추라니까!"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피터를 따라간다. 멈추라고 몇 번을 외쳐봐도 피터는 달아날 뿐이다. 꼬마아이의 참을성이란 게 이정도 뿐인가. 어쩔 수 없다. 제발 쉘터에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피터의 뒤를 따라 들어간 쉘터. 예상대로 내부는 불이 켜져 있었고, 큰 택배박스가 하나 뒤집어져 있었다.
"이것 봐요! 아무도 없잖아요! 내 말이 맞지!"
의기양양하게 양 팔을 허리춤에 들어 올려 보이는 피터. 켜져 있는 불. 반쯤 열려 있던 쉘터의 문. 드문드문 눌린듯한 자국. 쌓여있지 않은 먼지.
인간 덫이다!
"빨리 나가자, 피터. 여긴..."
"이런 이런. 어딜 그렇게 가시나?"
뒤를 돌아보자 쉘터의 밖에서 남성이 기대어 서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유 있는 듯한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가까이 오지마."
나는 뒷주머니에 재빨리 손을 넣어 나이프를 꺼내 들어 보였다. 피터를 등 뒤로 숨긴다. 피터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깜짝 놀란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아니~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놓고 그렇게 당당하시나?"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한번 끼더니 준비해 둔 듯한 야구방망이를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캔과 콘크리트가 부딪히는 소름 돋는 소리. 고의적인 위협.
"그냥 실수야. 나갈 테니까 비켜 주시지."
"뭐, 비켜주지 그럼~ 대신 훔친 물건이 없나 확인해 봐야겠는데?"
남자는 방망이를 들어 나와 피터가 메고 있던 보따리를 가리켜 보였다.
"훔친 물건 따위 없어."
"아니지~ 검사는 해봐야 아는 거 아니겠나?"
이런 놈들의 수법은 잘 알고 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순순히 보여주면 전부 자기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빼앗는다.
"당신 집에 있던 것 들이 뭔지 말해. 내가 가진 것 중에 그게 있다면 돌려주지."
"으음~ 너무 많아서 다 기억이 안 나는데? 보면 알아."
남자는 딴청을 피우며 실실 웃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비열한 놈. 어차피 그냥 보내 줄 리는 없다. 싸움을 강행하는 수 밖에 없나. 아니면 약간의 식량을 주는 걸로 합의를 봐야 하나.
"...싸우게 되면 그쪽도 피를 볼걸."
나는 나이프를 들고 있던 손목을 한번 돌려 위협했다.
"흐음~ 나는 안볼걸? 왜냐면 말이지..."
남자는 공중에 야구방망이를 한두번 헛스윙을 했다. 위협인가. 언제 저 방망이가 내 쪽으로 날아올지 모르기에 나는 거리를 쟀다. 그때였다.
"앗!"
등뒤에 피터가 비명을 질렀다. 급히 돌아보니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피터를 뒤에서 잡아 챘다! 꼬마의 손에는 과도가 들려있다!
"젠장!"
저 택배박스! 그 아래에 숨어있었구나! 빌어먹을 놈들. 애한테 이런 짓까지 시키다니!
"저 애를 살리고 싶으면 가진 거 다 내놔."
남자의 말투가 바뀌었다. 본격적인 시작이다. 젠장! 피터는 목주변에 들어온 칼 때문에 공포에 질려 보인다.
"...다 줄게. 일단 애는 풀어줘."
"그걸 어떻게 믿지? 일단 칼부터 내려놔."
여기서부터는 신경전이다. 칼을 내려 놓는다고 애를 살려준다는 보장을 받아내야 한다.
"그럼, 일단 애를 쉘터 밖으로 보내줘. 그럼 칼을 내려놓지."
"좋아. 대신 애가 메고 있는 보따리는 내려놓고 보내주지."
남자가 턱으로 지시를 하자 피터를 붙잡고 있던 남자아이는 피터의 보따리를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으... 우... 누나!"
그리고는 끌려가듯 쉘터의 입구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누나! 누나는요!"
"...먼저 나가있어. 금방 따라갈게. 일단 아까 본 커다란 이끼바위에 숨어있어."
피터 같은 어린 아이가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지시한 대로 잘할 수 있을까.
"저리 꺼져!"
"으, 우으으..."
칼을 든 아이의 위협에 피터는 억지로 쉘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피터는 살렸다.
"자, 그럼 칼을 내려 놓으시지."
이제 남자와 아이를 눈 앞에 놓은 채, 나는 천천히 칼을 내 발치에 내려 놓았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아이에게 턱짓으로 지시를 했다. 아이는 내 발밑에 내려놓은 칼을 줍기 위해 다가왔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가 사정권에 들어온 찰나 팔을 붙잡아 꺾는다! 그리고는 칼을 아이의 목 아래에 들이민다!
"아아악!"
"...꼼짝 마. 죽여버린다."
이제 상황은 반대다. 아이는 고통스럽다는 듯 버둥거렸지만 서늘한 칼날을 보더니 이내 저항을 멈췄다.
"...보따리 하나는 주지. 난 이대로 이곳을 나간다."
어차피 이런 자세로는 보따리를 주울 수도 없다. 지금 메고 있는 보따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음~ 뭔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남자는 방망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난, 그 애 죽어도 별 상관 없거든?"
"뭐?"
허세인가, 인간쓰레기인가. 하이에나도 자신의 동료를 버리진 않는다. 하물며 이 인간은.
"맘대로 해~ 죽이든 말든. 셋 세면 이 방망이는 네 머리 위로 떨어질 거다. 하나, 둘..."
남자는 나와 거리를 좁혀왔다. 젠장!
방망이를 높게 들어 올렸다! 이대로는 피할 수 없다! 아이를 앞으로 밀쳐내고 뒤로 튕겨지듯 피한다!
-콰지끈.
이걸 무슨 소리라고 할까. 수박 깨는 소리? 아니다. 좀더 딱딱하지만 살짝 물컹한 소리.
"아~ 젠장. 한번에 못 맞췄네."
남자의 방망이에는 아이의 머리가 맞았다. 아이는 남자의 발치에 쓰러진 채. 피는 나고 있지 않지만 치명상임에 틀림없다.
귀찮은 일을 하는 듯, 남자는 아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쯧. 죽었나? 아까 그 꼬맹이도 잡아다 사육할걸 그랬네."
"...미친 새끼."
이 남자, 아니, 이건 해충이다. 죽여도 상관없다. 기본적인 도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 결정했다. 이 짐승은 죽여도 된다.
"꽤 깡다구 있는데? 난 반항적인 여자가 좋더라. 나랑 같이 팀 할래?"
"헛소리 집어치워."
더러운 오물 같은 놈. 누가 너 같은 거랑.
"흐음~ 그래도 칼은 한번 들어오면 치명상이니까~ 싸우고 싶지 않은 걸?"
짐승은 방망이를 바닥에 세우더니, 기둥 삼아 비스듬하게 팔로 지탱하여 기대었다.
"...그럼 내보내 주던가."
"그건 아깝지. 어떻게 잡은 먹잇감인데."
"...어쩌자는 거야."
짐승은 수염을 꼬면서 잠시 고민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몸 한번 대주면 풀어주지."
"...지랄하네."
"어차피 너도 못해서 근질근질 하지 않아? 너무 안 쓰면 곰팡이 피어난다고?"
짐승은 추잡한 농담을 하며 재미있다는 듯 낄낄댄다. 나는 시선을 유지한 채, 피터가 빼앗겼던 보따리를 곁눈질로 살폈다. 잡아둔 폐수어와 쥐고기가 널브러져있다. 이 상황에서는 못 줍는다. 포기하자. 칼날을 고쳐 세운다.
"...나간다. 비켜."
"어이쿠. 그러지 말고~ 대신 쏟아진 보따리도 전부 돌려주지. 어때, 이래도 안 할래?"
"... ..."
짐승은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런 제안을 했다. 피터의 보따리에는 그래도 상당한 식량이 들어 있었다. 저 보따리를 잃게 된다면 앞으로 더 고생은 심해질 것이다.
"생각을 해봐. 내일 아니면 모래 쯤에 배수가 시작된다고. 너, 그때까지 식량 다 모을 수 있겠어? 그 꼬맹이가 먹을 것까지?"
배수 때 쉘터에서 먹으며 버틸 충분한 식량. 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도 일단은 쉘터야. 다른 쉘터를 못 찾았으면 여기서 지내게 해주지."
잘못 길을 들면 배수로를 헤맬 수도 있고, 또 다른 쉘터를 찾을 거란 보장도 없다.
"생각 잘해라~ 후딱 해치우고 아까 그 꼬맹이 보러 가야 되지 않겠어? 이 동네엔 독거미가 많다?"
짐승은 여유롭게 큭큭대며 웃었다. 젠장. 피터가 잘 숨어있어야 할 텐데.
"미리 말해두는데, 네가 안 하겠다고 해도 팔다리 부러뜨려서 강제로 할거야. 이미 결심했어 난."
짐승은 입가를 혓바닥으로 핥았다. 저런 어린 아이도 서슴없이 때려죽이는 놈이다. 일단 싸우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죽겠지.
"...약속은 확실한 거겠지."
"당연하지~ 너는 칼도 있잖아? 뭣하면 날 죽여버리면 되잖아. 정 못 믿겠으면 하는 동안 칼 들고 있어."
짐승은 방망이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그래, 가까이 왔을 때 목을 베어 죽여버리자. 그리고 도망가자.
하지만 짐승의 손이 내 가슴에 닿을 때까지, 나는 그 놈의 목에 칼을 넣지 못했다.
"피터, 괜찮니?"
빼앗길 뻔 한 식량을 모두 챙긴 뒤, 미리 말해둔 이끼바위로 돌아왔다.
"아, 누나..."
다행히 피터는 제대로 숨어 있었다. 두 다리를 웅크린 채 작게 울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괜찮아."
나는 피터를 끌어안아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피터의 울음이 더 거세진다.
"앞으로는, 말, 잘 들을게요... 으아아앙!"
"...괜찮다니까. 오늘은 그만 자자."
이제는 한 뭉치가 된 보따리를 베게 삼아 피터를 눕혔다. 이끼바위 틈 사이는 충분히 어둡지만, 자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발견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에 배수로에 쌓여있는 이끼와 쓰레기들을 모아 자연스럽게 쌓아 둔다.
한동안 훌쩍거리던 피터의 배에서는 꼬르륵하고, 소리가 울렸다.
"...배고프니?"
피터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배고픈 것이 맞겠지. 한창의 긴장이 풀리니 인간의 생리현상이 다가오는 것이다.
"...폐수어가 상할 지도 모르니까, 오늘 먹자."
나는 피터를 일으켜 세웠다. 보따리를 열어 죽은 폐수어를 몇 마리 꺼낸다. 낚시의 성과가 좋지 못해서 큰 녀석은 없다. 손바닥 반 크기만도 못 되는 잔챙이들. 내장은 이미 손질해 둔 채로 말려 두었기 때문에 그냥 먹으면 된다. 하지만...
"...불을 피우자."
피터도 많이 지쳤을 것이다. 배수로 안은 항상 습기에 차 있기 때문에 틈틈이 몸을 녹여줄 필요가 있다. 오른쪽 허벅지에 달린 건빵주머니에 손을 넣어 성냥갑을 꺼낸다. 성냥은 충분하다. 문제는 불을 지필만한 마른 이끼나, 기름이 없다.
"...어쩔 수 없네. 피터. 오늘은 쥐고기를 먹자."
젖은 이끼들은 주변에 넘친다. 이끼들을 한 웅쿰 모으고 그 안에 말린 폐수어 두 마리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성냥에 불을 붙인 뒤 그곳을 향해 던진다. 단숨에 폭발적인 불꽃이 피어 오른다.
"우, 우와! 누나! 이게 뭐에요?"
"...폐수어는 기름이 많아서, 불이 잘 붙어."
쥐고기를 두 개 준비한다. 나름대로 살이 잘 붙은 녀석이다. 나이프에 쥐고기의 몸통을 꿰뚫어 박고, 불꽃 속으로 집어넣었다.
"...같이 하나씩 먹자."
"네~"
갑작스런 불꽃과 오랜만에 요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음식에 신이 난 건지, 피터는 기분이 한결 풀어져 보였다. 그래, 그러면 된 거야.
타닥타닥. 불꽃이 타 들어 간다. 불똥이 하늘로 슬며시 피어 올라간다. 피터는 하늘로 솟는 불똥을 구경하더니,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누나! 저기 봐요! 반딧불이가 있어요!"
피터의 말 대로 천장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초록색 불빛이 여덟 개 빛나 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면서도 불규칙적으로 빛난다. 마치 반딧불이가 모여 있는 것처럼.
"...저건 형광거미야. 독거미니까 조심해야 해."
"형광거미요?"
"응. 불빛으로 먹이를 유인하는 거미야. 다리 관절 사이가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지. 봐봐, 여덟 개잖아?"
"아! 정말이다!"
사람에게는 그다지 공격적인 녀석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호기심에 만지려 한다면 대번에 물어버리는 녀석이다. 이곳에서 치료약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물리면 죽는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예쁘네요~"
타 들어 가는 소리에 나이프를 한번 돌려 쥐고기를 뒤집는다. 피터는 어느새 정신 없이 형광거미를 구경하고 있다.
"할아버지네 뒤뜰에 가면 저런 반딧불이가 많았어요!"
"...시골에 있었나 보구나. 재미있었겠네. 누나는 반딧불이를 별로 본 적이 없어."
TV를 통해서나 보았을까. 도시에 살았던 나는 그런 경험을 해 볼 수 없었다.
"신기한 곤충들도 많구나~ 여기에도 반딧불이가 있을까요?"
"...위로 올라가면 있을 지도 모르겠네."
적어도 이 배수로에는 반딧불이가 없을 것이다. 배수로 내의 생명들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환경에 맞게 변형되었다.
"누나는 여기 사는 동물들에 대해 많이 알아요?"
"으음... 어느정도는?"
"우와! 이야기좀 해 주세요! 네?"
"...그래. 리바이어던 이라고 아니?"
"아뇨? 그건 뭐에요?"
"고래에서 변한 동물인데 말이야..."
나는 쥐고기를 헤집는 동안 이런저런 동물들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피터는 동물과 곤충들에 관심이 몹시 많아 보였다. 그럴만한 나이긴 하지. 다만 식물이야기에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자, 먹자. 뜨거우니까 조심해."
쥐고기가 다 익어 불에서 꺼냈다. 불씨가 꺼져 가고 있기에 고민을 조금 했다.
"...피터, 혹시 춥니?"
"아뇨. 괜찮아요. 잘 먹겠습니다!"
피터는 전혀 문제 없다는 듯 쥐고기를 덥썩 붙잡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기에 걸리거나 저체온증에 걸리면 큰일이다. 폐수어가 아깝긴 하지만 불에 한 마리 더 던져 넣었다. 어차피 부패하면 먹지 못하게 된다. 다시 한번 큰 불꽃을 쏘아 올리며 타 들어간다.
피터가 쥐고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는 보따리 속 내용물을 확인한다. 통조림 5개. 잔챙이 폐수어 두 마리. 쥐고기 세 개. 이 정도로는 우리 두 사람이 쉘터에서 버티기는 빠듯하다. 며칠간은 반드시 굶게 될 것이다.
"뭐, 내일 많이 잡길 바라는 수 밖에..."
식사를 마치고 나자 수마가 찾아왔다. 잔불이 살짝 남은 이끼바위 밑에서 보따리는 내가 베고, 나는 팔베개를 해서 피터를 옆에서 재웠다. 내일은 많이 잡아야 한다. 내일은 많이...
아침에 뒤통수가 꿈틀거리는 감각에 눈을 떴다.
"...뭐지?"
피터는 아직 자고 있었다. 피터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팔베개를 살짝 빼낸 뒤, 머리 뒤를 확인해 본다. 보따리 속이 꿈틀대고 있다!
"젠장!"
황급히 보따리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악어도마뱀 세 마리가 안에서 뒤엉키듯 얽혀 있었다! 녀석들은 나를 보자 보따리에 낸 찢어진 틈을 통해서 후다닥 달아났다.
"하아..."
보따리 내용물을 확인해 본다. 그나마 남아 있던 폐수어와 쥐고기를 먹어 치워 버린 것이다. 턱이 강한 녀석들이기에 통조림도 씹어 삼키려고 했지만, 다행히 통조림은 겉이 조금 찌그러졌을 뿐, 5개 모두 멀쩡하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한숨이 나온다. 악어도마뱀은 따듯한 걸 좋아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잔불을 남겨 둔 채 잠에 든 것이 화근이 되었겠지. 전부 내 탓이다.
"...피터, 괜찮니? 조금 빨리 일어나야 될 거 같아."
"으, 으응... 네..."
나는 피터를 흔들어서 깨웠다. 피터는 충분히 잠들지 못한 듯 눈을 비비며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오늘 배수가 시작된다.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체감상 이정도 쯤이다. 어제 그 짐승 놈도 배수에 대해 언급했었지. 게다가 아직 적당한 쉘터도 찾지 못했다!
"...피터, 역할을 나누자."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긴급사태다.
"어떻게요?"
"누나는 쉘터를 찾으러 갈게. 피터는 이 근처에서 낚시를 하고 있어."
"으응... 그치만, 무서운데..."
피터는 불안한 듯 내 소매를 붙잡았다.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이 방법 뿐이야. 혹시라도 누가 오면 꼼짝 말고 숨고. 알겠지?"
"그치만 아빠도! 할아버지도 그래 놓고 안 왔단 말이에요!"
소매를 붙잡던 피터의 힘이 강해졌다.
"기다리면 된다고 해놓고! 그랬는데 다들 돌아오질 않는단 말이에요!"
피터의 얼굴에는 강한 원한 비슷한 것이 비쳐 보인다. 다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차분하게 피터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피터, 어쩔 수 없는 거야. 누나를 믿어야 해. 아빠도 할아버지도 어딘가에서 피터를 만나러 오고 계신 거야. 단지 조금 늦는 것 뿐이야. 꼭 돌아 오실 거야."
그렇게 말 하고 피터를 꼭 감싸 안았다. 피터도 작은 팔로 나를 꼭 끌어안는다.
"알겠지? 걱정하지 마. 누나는 꼭 돌아올 거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피터는 침착해졌다. 피터는 낚시바늘을 이용한 작은 낚시대를 만들어 준다. 이 정도는 주변에 널린 쓰레기를 이용하면 금방 만들 수 있다.
"자, 그리고 이건 미끼야. 조금씩만 써야 돼. 알겠지?"
그리고 찌그러진 통조림을 하나 건넸다. 평소라면 다른 고기를 미끼로 썼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으니 통조림을 쓰는 수 밖에.
깊은 웅덩이가 있는 터를 하나 골라 준다. 피터는 여기 앉아서 낚시를 하다가, 주변에 사람이나 인기척이 들릴 경우 도망 갈 망한 장소도 지정해 주었다.
"그럼, 다녀올게."
"... ..."
나의 손인사에 피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아빠와 할아버지의 기억 때문일까. 어찌 보면 아이의 트라우마를 내가 생각하지 못해 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제 통조림도 4개가 되었다. 쉘터를 찾으러 가는 길에 누가 '흘리고 간' 식량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배수로의 코너 구간을 돌기 직전, 고개를 돌려 피터를 바라 보았다. 피터가 작은 점처럼 보인다. 팔을 들어 손을 흔들어 보았다. 피터도 이곳을 보고 있었는지 마찬가지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 때 마침 낚시대가 반응한다. 한 손으로 허둥지둥 낚시대를 끌어올리는 피터를 보니 웃음이 살짝 나왔다.
"...잘 하겠지."
발걸음을 계속한다. 기나긴 배수로가 또다시 어김없이 펼쳐진다. 지금은 고지대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어디든 쉘터를 확보해 두어야 한다. 한참을 축축한 바닥을 걷고, 쓰레기를 해치고, 때때로 바위를 기어 오르며 계속 나아간다. 기어 올라간 그곳에는 모닥불을 떼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흥, 이게 누구야?"
불을 떼던 주인공은 앨리스였다. 그녀는 쉘터의 방호문 바로 앞에 앉은 채, 불을 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앨리스."
"흐응~ 슬슬 배수니까 말이야. 쉘터 들어올 거지?"
앨리스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앨리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식량부터 보여줘."
"...네?"
"이 쉘터는 식량이 확보되어있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어. 식량 때문에 싸우는 건 싫은 사람들이라서?"
앨리스가 엄지손가락을 등 뒤의 문으로 가리켰다. 열려있는 쉘터의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이미 있는 것 같다.
"그럼, 얼마나 있어야 되는데요?"
"여기는 특히 저지대니까, 물이 빠질 때까지 15일 걸린다고 치고. 부족해도 최소 10일분은 있어야지?"
합리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나와 피터, 두 명. 어린 아이니까 적게 먹는다고 우겨도 17일분은 필요할 것이다.
"...앨리스. 미안하지만 식량이 좀 부족한데요. 어떻게든 안될까요?"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
"통조림 네 개."
앨리스는 고민하는 듯 했다.
"흥. 거래를 잘 한다면 어떻게든 10일분을 만들 수는 있지 않겠어? 안에 들어가서 거래를 해 보던지? 나도 통조림 하나는 사지."
앨리스는 자신의 가방에서 폐수어 손바닥만한 두마리를 꺼내 보였다.
"...세마리로 해 줘요."
"그건 저번 이야기고. 지금은 그쪽이 급하지 않아?"
"...일단 그럼 보류."
"이따가 오면 한 마리로 줄어든다?"
"...농담이죠?"
"흥."
통조림 하나가 손바닥만한 폐수어 하나와 바뀔 수준은 아니다. 적어도 세마리는 쳐 줘야... 고민을 해 본다. 쉘터 안쪽에도 사람들이 몇 명인가는 있다. 하지만 이 쉘터는 식량확보를 한 사람들만 들어오는 것이 약속. 그렇다면 10일분을 아슬아슬 채운 사람은 거래를 할 수도 없겠지.
가지고 있는 통조림은 4개. 폐수어 3마리와 바꾼다면 폐수어 12마리. 피터가 낚시를 좀 해 두었다면 17인분까지는 안 되도, 어떻게든 비빌 수 있을 지 모른다.
"...거래하죠."
"잘 생각했어~"
앨리스는 폐수어 두 마리를 건네 주었다. 나도 통조림 하나를 건네준다. 손해지만 어쩔 수 없다. 쉘터 안으러 발을 옮긴다.
쉘터에는 네명의 사람이 있었다. 모두 성인이다. 이렇다 할 노인도 없고 어린 아이도 없다. 내가 들어오자 모두 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저, 거래를 하고 싶은 데요."
내가 하고 싶은 거래의 내용을 말한다. 가지고 있는 것은 통조림과 그 숫자. 원하는 건 쉘터에서 버틸 수 있을만한 식량.
아쉽게도 두 사람은 식량이 아슬아슬해서 거래를 거부했다. 남은 두 사람 간에 통조림 하나를 건 경매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낙찰은 폐수어 세 마리. 이걸로 통조림 두개와 폐수어 다섯마리가 생겼다.
쉘터를 빠져 나온다. 앨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어때? 레인걸, 거래는 잘 됐어?"
"...보통."
"거봐, 여기 사람들도 그렇게 넉넉하진 않다니까?"
"...그에 비하면, 앨리스는 엄청 넉넉해 보이네요."
"나야 여기서 그런 사람들 등쳐먹으면서 사니까! 깔깔깔깔!"
기분 나쁘게 웃는 앨리스를 뒤로 했다.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다. 아무튼 쉘터의 위치는 알았으니 남은 건 식량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돌아가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린다. 이런데 낭비할 시간이 아닌데. 제발 피터의 낚시가 성공했기를.
"아, 누나! 돌아왔네요!"
돌아가자 피터가 반갑게 마주해 주었다.
"별일 없었어?"
"네, 뭐. 근데 낚시가 잘 안돼서..."
피터가 내리 깐 발치에는 잔챙이 폐수어 뿐이었다. 이래가지고는 17인분은 턱도 없다.
"...아냐, 잘했어. 쉘터를 찾았으니까 일단 거기로 가자."
낚시대를 정리한다. 다시 앨리스가 지키고 있던 쉘터로 향한다. 피터의 키로는 잘 닫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어서 시간이 또다시 정체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사이렌이 시작되었다! 피터는 갑작스로운 큰 소리에 깜짝 놀라 보인다. 그래도 쉘터가 머지 않았다. 방호문 앞에서 불을 정리하고 일어나는 앨리스의 모습이 보인다.
"앨리스!"
"흥, 아슬아슬했네. 식량은 구해 왔어?"
"통조림 두 개. 폐수어 5개."
"음~ 이건 좀 아니지? 이걸로 두 사람이 15일을 버틴다고?"
확실히 터무니 없는 숫자다. 이런 와중에도 사이렌 소리가 점차 긴박해진다.
"어떻게든 해줘요!"
"내가 허락해도,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을 걸? 여기는 그런 규칙인 곳이니까."
"일단 말이라도 하게 해 줘요!"
"내가 들어가서 물어보고 올게 그럼."
"사이렌 안 들려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흥, 난 상관 없거든?"
역시 저번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앨리스는 매정했다.
"그럼, 일단 애라도 들여보내 줘요! 애가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어요?!"
앨리스는 피터의 체구를 힐끗 보았다.
"뭐~ 그 정도라면 괜찮지. 꼬마야, 넌 들어와."
"누, 누나..."
하지만 피터가 내 손을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 피터와 눈높이를 맞춘 뒤,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피터. 먼저 들어가 있어."
"하, 하지만..."
"아까도 그랬잖아? 누나는 돌아올 거니까. 피터가 누나를 믿어야 해. 알겠지?"
내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걸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더 세게 끌어안았다. 피터의 등뒤에서 몰래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사이렌 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몹시 급박해졌다.
"자, 이제 시간이 없어. 어서 들어가. 이 보따리는 너가 챙겨둬."
식량이 든 보따리를 피터에게 건넨다. 피터는 말없이 보따리를 안고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앨리스는 그런 광경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끼어 들었다.
"이제 들어가도 될까? 우리도 문 잠가야 되거든?"
"...네,그러세요."
피터는 앨리스에게 끌려가듯 쉘터 안으로 들어갔다. 보호문이 잠긴다. 끼익끼익. 안에서 걸어 잠그는 쇳소리.
이윽고, 배수로를 지배하던 사이렌 소리가 멈췄다.
그러자마자 배수로 안은 엄청난 진동이 휩싸이기 시작한다. 배수가 시작되었구나. 물이 배수로를 때리는 둔탁하고 빠른 소리. 나지막한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하, 하하..."
참고 있던 밀린 울음이 웃음과 함께 튀어나온다. 무서워서 다리가 떨린다. 이제 죽는 거구나. 드디어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는 거구나.
파도소리가 커졌다. 지진과도 같은 진동 때문에 다리를 바닥에서 뗄 수 없다. 무서워서 다리가 떨리는 게 아니었구나. 하하, 하하하.
등뒤에서 차갑게 부딪히는 물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본다. 커다란 해일의 소용돌이가 배수로를 타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누군가도 이런 광경을 보았겠지. 하지만 쉘터 안에서 이런 소문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보면 죽으니까!
코앞까지 물의 폭력이 다가왔다. 거대한 하나의 주먹 같은 파도는, 온갖 쓰레기들과 함께 나를 집어 삼키려 여기까지 왔다.
갑자기 뒷주머니의 나이프가 떠올랐다. 이것도 피터한테 줄 걸. 어차피 이제 쓸모 없는데. 마지막 후회. 어린아이와 여자는 먼저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만 살수 있을 땐 누가 살아야 할까. 난 옮은 결정은 한 걸까?
뭐, 그래, 이제,
내 차례가 된 것 뿐이다.
쭉 읽어봤는데 설정은 괜찮은데? 설마 진짜로 생수하고 그래도 보내줄 진 몰랐지만
꼴렸음 - dc App
선추. 머냐 섹스함? - dc App
느낌 좋다 ㅊㅊ
존나쓰레기같은 한세계 글보다 이게 훨씬낫네
오.타.쿠
오탈자 고쳐야하는데 수정이 안되네 쒸,,;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