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해변. 파도에 부딪치는 빗방울들이 일어내는 파문이 요정들의 군무 같았다.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요정들. 나도 그런 요정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다현이의 허리를 감싸 내게로 가까이 당겼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여긴 참으로 낭만적인 것 같아.\"
엷은 미소를 띠며 다현이가 말했다. 나는 달싹이는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입을 맞췄다. 담배향이 조금 났다. 짙어지는 먹구름과 함께 해변가는 물기 젖은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속에서 우산 하나 펼쳐 놓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 참으로 낭만적인 풍경이긴 하였다. 딱 한 가지 빼고서 말이다. 속옷이 비치는 다현이의 봉긋한 가슴을 손으로 주물렀다. 그러자 그녀는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똑같이 내 가슴을 주물렀다. 다현이만큼은 아니지만 내 가슴도 봉긋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의 가슴을 애무해주었다. 우리 둘은, 나와 다현이는, 둘 다 여자였다.
*
다현이를 처음 만난 건 두 달 정도 전의 맑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로션이 떨어져 시내에 있는 마트로 향하는 중이었다. 도중에 아빠에게 잡혀 한 손에는 장 볼 목록까지 쥐고 있어서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짜증나, 촌 동네.\"
멀쩡한 화장품 가게를 찾으려면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의 대형 마트를 찾아가야만 했다. 심지어 높게 뜬 해마저 뜨거워서 고개를 들고다닐 수조차 없었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 구역질 나는 비료 냄새. 시골은 지겨웠다. 얼른 도시로 돌아가고 싶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그늘 밑에 잠시 쉬어가자 생각했다. 마땅한 나무도 보이질 않아 가게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동네 학생들 사이에서는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이 되어버린 생과일 쥬스 가게 앞에 도착했다. 그곳 야장에서 나는 다현이를 발견했다. 파라솔 밑에서 그녀는 연두색 원피스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칙칙한 시골 풍경에 홀로 선명한 유화 같아 무심코 중얼거렸다.
\".... 서울 여자네?\"
다현이는 그런 내 혼잣말이 들렸나보다. 얇게 립글로즈를 칠해 놓은 그녀의 입술새로 담배 연기가 나왔다. 그리곤 기다란 속눈썹이 치켜 올라가면서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쨍한 햇볕까지 더해져 뜨거울 지경이었다. 다현이의 입꼬리 말아지며 귀엽게 웃음 지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여자라고? 내가 미쳤나봐. 벌써 촌년 다 됐네.\'
나도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살았다. 나도 분명 서울 여자였다. 그런데 서울 여자 보곤 놀라는 꼴이라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입고 있는 후줄근한 티가 보였다. 또 아까 \'서울 여자\'가 입고 있던 산뜻한 원피스도 떠올려 봤다.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다. 오히려 아빠도 나처럼 시골의 보이지 않는 기운에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점점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아빠도 나만큼이나 시골 생활을 싫어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구시렁거리며 아빠 탓을 했다. 또 인간이란 원래 남탓을 해야만 하는 족속들이라며, 자기위안과 동시에, 너희도 남탓이나 해봐, 애꿎은 개미들을 밟으며 계속 걸었다.
그런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숨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너는.... 뭐 그렇게 걸음이 빨라!\"
뒤를 돌아보니 다현이가 헐레벌떡 쫓아왔는지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새 땀이 흘러 그녀의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왜 쫓아온 거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자 다현이는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 손에는 아까 생과일 쥬스 가게에서 파는 음료가 들려 있었다. 매끈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키위 쥬스는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이 무언가 다현이의 모습과 닮았다.
\"너 혹시 이 근처에 사니?\"
\"네....\"
\"네?\"
헛바람를 들이쉬더니 다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왜인지 몰라 그녀의 예쁘게 칠해진 손톱만 바라봤다. 다현이는 내 시선이 음료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음료를 한 번 더 내밀며 말했다.
\"마셔. 덥지?\"
덥지 당연히.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음료를 받았다. 시원했다. \"감사합니다.\"라고 작게 인사하자 그녀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왜 자꾸 존댓말을 하니?\"
\"당연히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셔서.\"
\"그래? 몇 살이야?\"
\"17살이요.\"
다현이의 눈이 반짝거리며 커졌다.
\"나도야! 나도 17! 우리 같은 학교일지도 모르겠네?\"
\"17이라고요? 그런데....\"
나는 그녀의 핸드백 안에서 얼핏보이는 담배갑을 힐끔 쳐다봤다. 다현이는 그 잠깐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담배갑을 꺼내들었다. 눈치가 빠르다. 그녀는 도저히 그 순하고 예쁘장한 얼굴에서 나올 수가 없을 법한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짓고 물었다.
\"펴 볼래?\"
\"아니요....\"
\"그럼 왜 그렇게 뚤어져라 봐. 신기해?\"
그러더니 한 개비를 꺼내들어 그 조그마한 입술에 문 뒤 라이터를 주섬주섬 꺼내서 불을 지폈다. 조그맣게 종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바스락 거리며 담배 끝이 붉게 빛났다. 다현이의 입술에서 담배가 멀어지고 대신 하얀 날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보면서도, 어쩐지 담배에 남은 그녀의 입술 자국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어때 펴 볼래?\"
\"아니요.\"
\"하, 아직까지도 존댓말하네. 뭐 괜찮아. 천천히 친해지면 되는 거지.\"
친해진다고? 17살이라고 했지. 이 동네에는 고등학교가 한 군데 뿐이었다. 반도 겨우 두 개. 정말로 같은 반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다현이가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봤다.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왜, 친해지기 싫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오늘부터 친구하자. 안 그래도 이사와서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거든.\"
아직 반도 피지 않은 담배를 튕겨버리고 이번에는 빈 손을 다현이가 내밀었다.
\"내 이름은 신다현이야. 네 이름은 뭐야?\"
\"네? 아, 김한솔이예요.\"
\"한솔이라고? 예쁜이름이네. 자, 오늘부터 우린 친구야.\"
그녀는 음료수를 쥐고 있는 내 손을 맞잡고 밝게 말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칼에서 어렴풋이 과일향이 났다. 무슨 과일일까? 내 손에 들려 있는 키위 음료를 바라보다가 문뜩 키위 냄새라고 스스로 단정지어 버렸다. 키위에 향이 나긴 했었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한솔아, 나 그거 한 입만 주면 안 될까?\"
\"아, 드세요. 어차피 그쪽 건데요.\"
\"그런게 어디있어. 친구가 되자는 증표로. 선물해준 거야.\"
그녀는 옆머리를 다소곳하게 넘겨잡곤 빨대에 입술을 댔다. 나는 그녀의 앙다물어진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술을 핥았다.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는 됐지만 또 한편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달다.\"
그녀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저요?\"
\"응!\"
굳이 말해줘야 하나. 약간 부담스러웠다. 당연하지. 초면이었는데. 하지만 기대 어린 다현이의 눈빛을 보니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마트에 심부름 하러 가는 중이었어요.\"
\"마트? 저 밑에 있는 큰 데 말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어차피 오늘은 할 일도 없었거든.\"
그러더니 내 손목을 꽉 쥐고 그녀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다현이의 손길은 무척이나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살랑거리 머리. 재잘거리는 말들. 시원스런 걸음거리.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걷다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로 가면 안 되는데....\'
이쪽 길로 가면 마트까지 빙 돌아서 가야만 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급한 심부름도 아닌데. 나는 시골의 한적한 거리를 배경으로 그녀의 세상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는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에 묻혔고, 역한 비료냄새는 알 수 없는 과일 향에 지워졌다.
\'그래도 더운 건 어쩔 수 없네.\'
나는 한 손에 쥐어진 키위 음료를 봤다. 빨대를 입에 가져다 대려다가 아까 다현이의 입술 자국이 새겨진 담배 꽁초가 떠올랐다. 담배란 왜 피는 걸까. 단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질문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또 \'펴 볼래?\'라는 질문이 돌아올까봐 마음을 접었다.
드디어 빨대에 입술을 댔다. 차갑고 상큼한 액체가 입 안으로 퍼져나갔다. 맛있네. 갑자기 궁금해져서 코를 가져다가 음료 냄새를 맡아봤다. 음료 냄새 대신 다현이의 머리칼 향이 풍겨왔다. 이제부터 키위 향이라 그러면 다현이의 윤기나는 머릿결이 생각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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