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제목 : 운칠기삼(運七機三)






“ 자네 지지리 복도 없구만.”

연길에서 시흥으로 가는 고즈넉한 산길. 

나는 등에 지고 있던 책 보따리를 잠시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산길의 등성이에 앉아있던 한 노인(老人)을 바라보았다. 그 노인의 행색은 전형적인 걸인(乞人)이었고 전신에서 비루먹고 짠 땟국물 냄새가 흘러 나왔다. 

노인은 내가 멈춰서자 낄낄 웃으며 말했다. 

“ 왜? 가던 길 마저 안 가고.”

“ 어르신. 길 가던 행인에게 시비를 거는 게 취미십니까?”

나는 짐짓 정중하게 노인에게 항의를 해 봤다. 그러자 노인은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면서 마치 품평하듯이 내 전신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 어디 보자. 나이는 대충 스물을 조금 넘었고, 무예는 따로 익히지 않았군. 입고 있는 옷이 보통 서민들이 입는 재질이지만 꽤 입어서 옷자락이 헤져 있고... 책 보따리도 오래 된 걸로 보아하니 몇 년째 향시(鄕試)에 응시중인 서생(書生)이렸다?”

노인의 말은 상당히 조리있고 정확하게 ‘나’라는 인간을 통찰하고 있었다. 무엇하나 틀린 점이 없었기에 나는 잠시 침음성을 흘렸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 말은 그럴듯하게 하셨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조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 그래? 그럼 또 한 가지 맞춰볼까. 자네는 연길에서 시흥으로 가고 있어.”

“ ......”

나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왜냐하면 그건 행색만 보고 알아맞출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곳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지방으로 통하는 건널목 역할을 하는 백응산(白應山)이었고 이 길도 수백 개나 되는 오솔길 중의 하나였다. 내가 여기를 지나는 것만으로 행선지를 알아맞히는 건 불가능하다. 

노인이 껄껄 웃었다. 

“ 으허허. 자넨 표정관리가 잘 안 되는군. 글밥을 오래 먹은 티가 나.”

사람들과 많이 어울려보지 않았을 거라고 돌려까는 말인 듯 하다. 

“ 그건 어떻게 아신 거지요?”

“ 그야 백응산에 솔길이 많지만 이 길을 타고 두세 번 옮겨타다 보면 가는 곳이 뻔하기 때문이지. 더욱이 자네가 저 멀리에서부터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나? 가까운 조령 지방이나 사화 마을로 갈 생각이면 반 시진밖에 걸리지 않으니 벌써부터 서두를 이유가 없지. 게다가 자네의 시선 또한 지속적으로 우측을 살피고 있었으니 심리적으로도 시흥으로 향하는 것이라 보았네.”

“ 출발한 게 연길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 연길이 아니라 장락 마을이나 고두 마을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 허나 자네처럼 글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백 리 전부터 같은 능선을 쭉 타서 올 터고, 마차가 이용하는 관도를 피할 게야. 그러면 연길에서 출발하는 게 자연스럽지.”

“ 과연...”

나는 눈 앞의 노인이 수상쩍다는 것도 잊고 감탄했다. 노인이 말한 것은 전부 일리가 있었고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았다. 게다가 반경 백여 리 일대의 지리에 정통한 듯 하니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맥없이 남의 밥을 빌어먹는 보통 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노인이 잠시 후 말했다. 

“ 헌데 자네는 왜 이리 겁이 없나?”

“ 네?”

“ 이 길로 가다보면 녹림(綠林)의 도적떼들이 출몰하곤 한다네. 녹림삼십육채에도 속하지 않은 유랑도적떼라서 관부에서도 잘 모르지. 무공(武功)도 익히지 않은 듯 한데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 ......”

그저 나를 협박하거나 겁주려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글밥먹는 젊은 서생 하나에게 공갈을 쳐서 얻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녹림도적떼의 앞잡이라면 이런 사실을 굳이 경고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 운칠기삼(運七機三)이니까요.”

“ 응?”

노인이 황당한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세상 일에서 칠 할이 운빨로 흘러가는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떻습니까.”

“ 허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 허세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까지 저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 흐음...”

노인이 기묘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노인의 시선도 잊고 내 처지를 새삼 떠올렸다. 

그렇다. 이 세상은 운이다. 오로지 운빨로 이루어져 있다.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천민 집에서 태어나서, 그대로 백정짓을 하며 고기나 썰다가 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운좋게 돈을 많이 얻고 면천(免賤)을 받은 후 평민이 되고, 내게 관리의 길을 선택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십대 중후반까지 계속 익히던 돼지 소 잡는 기술을 모두 버리고 팔자에도 없는 글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안 되는 건 안되는지, 머리가 굳어버린 나는 벌써 오 년 동안 가장 기본적인 향시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집에 모아뒀던 돈도 서서히 날아가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조급해졌고, 얼마 전에는 인맥을 타려고 부잣집에 머리를 조아리러 갔다. 하지만 역시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은 나같은 비렁뱅이 서생은 상대도 해 주지 않았다.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다. 나같이 병신처럼 사는 놈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기껏 백정노릇을 면했는데 이번에는 노력이 부족해서 삶이 고꾸라질 위기라니. 지금에 와서도 정말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후우 - 

노인이 갑자기 품 속에서 장죽(長竹)을 꺼내더니 불씨를 지폈다. 잠시 후 뻐끔하고 둥근 연기바람을 내뿜은 노인이 말했다. 

“ 운칠기삼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구먼.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네.”

“ 제가 어떻게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 세상은 자네 생각보다 노력의 비중이 크다네. 노력 하나만으로 모든 걸 뒤집고 분연히 일어선 호걸이 현재 천하십대고수(天下十代高手)의 한 명이 되어있고, 맨주먹으로 일어서서 산동일대를 주름잡는 대거상(大巨商)이 된 친구도 알고 있지.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운칠기삼이란 단어를 결코 그렇게 써서는 안 돼.”

정론(正論)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어르신이야말로 운칠기삼이란 말을 잘못 이해하고 계시군요.”

“ 뭐라고?”

“ 제가 생각하기에 운칠기삼에서 운이 칠인데, 그 중에서 태어난 운이 육(六) 정도 됩니다. 나머지 일 할의 운을 인생에서 쓰게 되어있는 거죠. 그 자들은 일 할의 운과 삼 할의 노력으로 간신히 일어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으허허허, 태어난 운이 육이라...”

나는 경험과 생각, 그리고 알 수 없는 퉁명스러움을 담아서 한껏 말을 이어나갔다. 

“ 그리고 노력이라고 하셨는데, 노력할 수 있는 천성(天性)을 타고난 것 자체가 칠 할의 운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태어난 운이 좋거나 자신의 자질(自質)이 좋거나 둘 중 하나를 얻은 자라면 운칠기삼을 반박할 수 없습니다.”

“ 으음...”

노인은 기가막힌 듯 웃으면서 내 말을 듣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노인은 장죽을 근처의 바위에 톡톡 치다가 말했다. 

“ 하지만 말일세, 노력도 재능도 운도 없는 자가 성공하는 건 불가능하다네. 다른 걸 다 떠나서 성공할 수 있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재능과 노력 모든 것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 자체를 사도(邪道)라고 본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지.”

“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서 말을 이었다. 

“ 저는 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력해야 성공하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에게 대운(大運)이 다가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죠. 왜냐하면 노력이란 건 힘들고 구차하고 짜증나니까요. 노력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게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 자네는 운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 그렇지 않습니까? 노력하는 재능을 타고나는 운, 좋은 부모를 만나서 태어난 운, 좋은 인맥을 만나서 성공하는 운, 훌륭한 무술재능을 타고나는 운... 모든 것은 운(運)입니다. 그리고 제가 운이 좋다면 이 앞에서 산적을 만나지 않을 거고, 만나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 ... 운이 나쁘다면 죽는 거고 말이지.”

“ 네.”

정적이 흘렀다. 

노인은 한참동안 기가 막힌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고요한 가을바람이 부는 언덕의 오솔길에서 노인과 나의 기묘한 대치가 한동안 이어졌다. 노인의 장죽이 정확히 세 번 연기를 내뿜은 후에야 노인이 입을 열었다. 

“ 아무래도 입만 산 건 아닌 듯 하구만. 썩은 동태눈에 확실히 의지가 깃들어 있어. 내가 좋아하는 눈은 아니지만 자기 말에는 책임을 지는 친구겠어.”

“ 무례하시군요. 썩은 동태눈이라니.”

내가 불쾌해서 따지고 들었지만 노인은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그럼 뭐 아닌가?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눈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야. 그리고 경험상 자네의 말과 의지가 일치한다고 믿는 것이라네.”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껄렁거리며 반박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노인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기묘한 기운이 내 마음을 제압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게 말로만 듣던 고수의 기세라는 걸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 것참... 그냥 간만에 선행(善行)이나 하나 하고 갈려고 했는데 맹랑한 인연(因緣)이 생겨버렸군, 끌끌.”

“ 네?”

“ 여기서 잠시 기다려 보게나.”

스르르륵

“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인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희끄무레한 잔영을 남기고 사라졌고, 어느새 언덕 저 너머 삼십 장도 넘는 곳에 나타나 있었다. 노인의 모습이 내 시야 전체에서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 허깨비같은 모습에 나는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의 신체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도, 도망칠까?’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인간에게서 도망치는 게 더 허황된 일이었다.  

파바바밧

잠시 후 노인의 모습이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어딘가를 갔다온 듯 했고, 노인의 손에는 뭉툭한 덩어리가 큼지막하게 들려 있었다. 노인은 그 덩어리를 뒤에 있던 소나무에 휙하고 던져 버렸다. 덩어리가 소리를 내며 소나무 가지에 꽂히는 걸 확인한 나는 그만 비명소리를 삼켰다. 

“ 으윽...!!”

사람의 머리통!

‘ 반 각도 되지 않는데 그 사이에 사람의 목을 베어 왔다는 거야?!’

40대쯤 되었을까, 눈을 부릅뜬 채 나뭇가지에 꽂혀 있는 그 머리통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나는 설마하는 생각에 노인의 손을 바라보았으나 그 손이나 옷자락에는 피 한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노인이 따로 무기를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일에 쓰지 않고도 사람의 목을 베었다면 그게 더 무서운 일이라서 생각을 멈췄다. 

노인이 비직하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심하게 공포스러웠다. 

“ 자네, 저 대갈통이 누군지 아는가?”

“ 모, 모릅니다만...”

이어진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냥 이 근처에 산적이 있다길래 때려잡은 것 뿐이고 뭐하는 놈인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 껄껄.”“ ... 저 사람만 죽였습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노인이 눈에 이채를 띄며 대답했다. 

“ 흠, 생각보다 담력은 있군. 그걸 질문할 깜냥이 있다니.”

“ 구, 궁금한 건 알고 죽고 싶어서...”

“ 자네 생각대로야. 거기에 노략질을 하던 산적놈들이 서른 명 정도 있길래 전부 머리통과 몸을 분리시켜 줬지. 규모가 꽤 있는 걸로 봐서는 하루아침에 급조된 산채가 아닐텐데 그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 ......”

나는 기가 질린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즉, 노인은 최소한 백여장 밖까지 순식간에 날 듯이 달려가서 도적떼의 기척을 감지한 후, 우두머리를 포함해서 떼몰살시켜버린 다음, 반 각 내에 이 자리에 되돌아 온 것이다! 서른 명이나 되는 인간을 쳐죽인 잔혹성은 그렇다 치고 도저히 인간의 전투능력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말했다. 

“ 나는 원래 내키는대로 죽이는 사람일세. 인간말종은 더 볼 것도 없으니 때려죽이고, 못된 놈은 못되니까 때려죽이고, 남을 뜯어먹는 놈은 개새끼니까 죽인다네. 방금 내가 죽인 도적놈들은 근처 마을의 아낙네들을 납치하고 양민들을 살해하던 놈들이라서 관부(官府)에서 토벌의뢰가 들어왔다네.”

“ 그렇군요.”

“ 결과적으로 자네는 산적을 만나서 죽을 위험이 사라졌으니 운이 좋은 거겠지. 만일 내가 우연히 이 자리에 산적놈들 때려잡기 전에 바람 좀 쐬려고 쉬고있던 중이 아니었다면 - 자네는 틀림없이 산적들 활에 맞아서 죽었을 게야. 그렇지 않은가?”

“ 음... 그렇겠군요.”

나는 노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든간에 산적들을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때려잡지는 않았으리라. 이 앞에 좁은 길목이 두세 개 꼬불거리며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산적들이 틀림없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노인이 껄껄 웃었다. 

“ 헌데 자네는 정말 재밌는 친구야. 내가 수십 명을 쳐죽이고 온 걸 알고 있을텐데도 벌써 냉정을 되찾아 버렸군.”

나는 썩은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 그야... 어르신께서 제 목을 따려고 하면 저항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이러든 저러든 제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면 순응하는 수밖에요.”

“ 그것도 그렇군. 다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죽이려고 한다면 육대세가(六大世家)의 가주라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어.”

“ 어르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 나는 월광신군(月光神君) 유백(柳栢)이라고 하는 사람일세. 무림에서는 나름 이름깨나 날리는 부류지.”

월광신군 유백의 자기소개에는 자조어린 비웃음이 희미하게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자기혐오 기질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무림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지만, 확실한 것은 나같은 놈이 몇천 명이 있어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 월광신군 유백 어르신. 아까 잘난 척 허세부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산적에게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갈 길을...”

이런 괴인과 더 엮여서 좋을 일이 없다. 

내가 꾸벅 인사를 하고 책보따리를 거머쥔 채 앞으로 걸어나가는 순간이었다. 

덥썩!

뒷덜미를 잡혔다. 세게 당기는 손길은 아니었으나 그 손의 주인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자인지 알고 있는 나로써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월광신군 유백은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재미있어. 운칠기삼(運七機三)이라? 정말로 노력이란 게 그토록 쓸모없는 거라고 생각하는가?”

“ ... 아, 아뇨. 노력은 소중한 거죠! 운빨도 별로 안좋을 땐 안 좋은거고 뭐...”

내가 허둥지둥대며 알 수 없는 변명을 하자 유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자네가 살아온 과정도 보통 사람보다 굴곡이 심했을 게야. 그렇지 않다면 그런 소리는 할 수 없지. 인생에 타의(他意)가 섞인 채 휩쓸려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는 걸 알고 있네.”

“ 하하, 알아주셔서 다행...”

“ 헌데 자네는 그렇게 살아도 좋은건가?”

“ 네?”

뜬금없는 소리에 내 몸이 경직되었다. 유백의 눈빛에서 처연함과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수십 명의 목을 쳐낸 무림인에게서 이런 눈빛을 볼 줄은 몰랐기에 나는 마음이 뒤흔들렸다. 

“ 자, 저 머리통을 보게.”

유백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머리통이 있었다. 내 시선이 그 머리통을 향하자 유백이 말했다. 

“ 저 친구는 나와 일면식도 없었고 원한 진 것도 없었다네. 하지만 오늘 갑자기 나와 조우해서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내 수도(手刀)에 사망했다네. 저 친구가 저 꼴이 되어서 죽은 건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 그건... 월광신군 유백님이 관부에서 도적 토벌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죠.”

“ 그렇지. 내가 의뢰를 받은 까닭이 뭔가?”

나는 들은 대로 대답했다. 

“ 저 도적들이 아낙네를 노략질하고 양민들을 살해해서입니다.”

“ 그래. 결과적으로는 죽을 만 하니까 죽은 게야. 저 놈들이 하다못해 녹림삼십육채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관부에게 안 들키게 소규모로 행인 몇놈만 털었다면 나도 이런 일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걸세. 이래봬도 나는 꽤 거물이라서 자잘한 일은 받지 않거든.”

“ ......”

자기 입으로 거물이라고 하는데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화자찬이지만 전혀 과장된 게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백은 장죽을 꺼내서 다시 한 모금을 뻐끔 하고 피워올렸다. 

“ 그리고 그건 결과적으로 운(運)이 없어서 죽은 게야. 운이 좋았다면 저 친구도 산적질하는 인생이 되지 않았을 거고, 머리가 좋았다면 쓰잘데기없는 노략질을 할수록 언젠가 뒈질 가능성이 높다는 걸 깨달았겠지. 안 그런가?”

“ 흠,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거 같군요.”

“ 대답이 왜 그래? 한 대 때리고 싶군.”

흠칫!

나는 약간 몸을 떨었다. 아까 전에는 그냥 농담따먹기나 하는 분위기였지만 눈 앞의 유백이 맨손으로 사람 목을 몸통과 분리시킬 수 있는 무림고수라는 걸 알게 되니 농담을 하기가 힘들었다. 유백이 장죽을 바위에 톡톡 두들겼다.  

“ 그래... 자네 말대로 사람은 운(運)에 치이고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존재야. 운이 좋으면 자네처럼 산적에게서 죽을 운명에서 살아남게 되고, 운이 나쁘면 인생을 막 휘둘리다가 저렇게 산적질하다 목 잘려서 뒈진다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나?“

“ 어떤 생각요?”

“ 저 머리통과 자네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네.”

“ ......”

유백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유백이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게 아니라는 게 알고 있었으므로 좀 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대충 운빨 믿고 살다가는 저런 밑바닥 인생이 되기 쉽다는 말씀이시군요.”

“ 그렇다네. 운칠기삼에서 기삼(機三)이 무슨 의미냐면 그런 걸세.”

노인, 유백은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 시작부터 평범하게 살려고 하면 밑바닥이 된다네. 시작부터 끝내주는 삶을 살려고 박터지게 노력하다보면, 결국 평범해지지. 다른 게 노력이 아냐. 자네 목숨줄을 붙어있게 만드는 게 바로 노력의 정체일세.”

“ ......”

나는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유백은 딱히 나를 선도하거나 계몽할 의도에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 의견에 대해서 순수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시흥의 소학원(小學院)에 있던, 입만 살아있고 오만한 유생(儒生)들의 입발린 소리보다 진솔하게 내 마음속을 파고든 것이다. 

유백이 말했다. 

“ 이것도 인연인데 자네 나한테 무예나 몇 년 배워보는 게 어떤가? 내가 이런 제안을 남에게 해 보는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일세.”

왔다. 예상한 제안이 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 무림인(武林人)은 은원(恩怨)을 달고 산다던데 설마 원한을 많이 갖고 계신지...”

내가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유백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 크하하하! 월광신군 유백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데도 그딴 질문부터 하다니 자네 정말 재밌는 친구야!!”

미친 듯이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모습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 반정반사(半正半邪).’

이 인간은 결코 껍데기뿐인 정도(正道)을 추구하거나 설파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힘만 믿고 원하는 대로 제멋대로 한평생 살다가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내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대답이 들려 왔다. 

“ 당연히 원한같은 건 쌔려배겼다네. 내가 강호행(江湖行) 하면서 죽인 놈만 수백 명이고 불구로 만든 놈도 셀 수가 없지. 날 죽이려고 살수집단에 의뢰했던 놈만 다섯 명인 것 같군. 아마 내 제자가 되면 바람 잘 날이 없을거야, 허허허.”

“ ......”

너무나 예상대로라서 할 말이 없었다. 역시 제 잘난 맛에 내키는대로 싸움박질 하고 다니는 인물인 것이다. 무공의 수준은 그렇다 치고 이런 사람의 제자가 된다면 정말로 일 년도 되지 않아서 어디서 칼맞고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 제자가 되겠습니다.”

“ 좋아, 나 월광신군 유백은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그러고보니 이름이 뭔가?”

내가 유백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 - 그것은 바로 이게 내 인생의 운칠기삼에서 일 할(一割)의 운이 다가온 순간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또한 백 날 백정의 자식출신으로 되지도 않는 글공부를 하면서 굴러먹다가 늙어죽는 것보다는 기약없는 강호행에 몸을 담는 게 재밌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앞으로 기삼(機三)이 얼마나 좆같이 힘들고 괴롭고 짜증나는 것인지 진절머리나게 깨닫게 될 것도 모른 채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 지호(紙湖)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