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밑에 광야라는 습작글을 보고 생각나서 올려봄.
혹시 WOD(World of Darkness) 라는 걸 들어 본 적이 있어?
상당히 매니악한데다가 TRPG(Table RPG)의 룰북이라서 사실 요즘 세대에서는 쉽게 알기가 힘든 세계관이야.
하지만 이 WOD는 굉장히 판타지 문학상, 그리고 세계관의 확장으로써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한 번 소개를 해볼까 해.
우선 다시 한 번 WOD가 뭔지 정의해 볼께.
The World of Darkness(통칭 WoD). 화이트 울프(White Wolf) 출판사에서 1990년대부터 내놓고 있는 TRPG 시리즈의 이름이며,
'스토리텔링 게임', '고딕펑크'라는 유행어를 낳았고,
1990년대를 풍미하며 TRPG의 역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작품이야.
그래, 다들 판타지 소설을 쓰려고 하는 작가들이니까 고딕펑크나 스토리텔링 이라는 단어는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꺼야.
이 WOD는 그 중에서도 고딕펑크라는 유행어의 원산지이며,
후일 유행하게 되는 어반 판타지(Urban Fantasy),
즉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초현실적 존재들의 이야기의 원산지가 돼.
이전까지도 어반판타지와 유사한 시도는 있었지만
대부분이 일본의 백귀야행처럼 요괴들이 날뛴다는 수준이었을 뿐이야.
그러나 WOD는 그 '초현실적' 존재들이 현대문명의 상징인 '도시'에서 음(陰)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는,
보다 으시시하고 밀접한 세계관의 확장에 성공했어.
WOD의 세계관은
초자연체들이 전세계적 단체를 이루지만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규칙을 만들고,
권력의 핵심을 조종한다는 음모론적 측면이 존재해.
그리고 그 와중에 초자연체 파벌들이 서로 암투를 벌인다는 측면,
그리고 도시마다 시장에 해당하는 권력자와 흡혈귀 의회가 존재한다는 설정 등의 정치물적인 측면도 존재해.
그리고 놀랍게도 이건 월드 오브 다크니스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컨셉이야.
우리는 너무 흔하게 볼 수 있고, 웹툰 및 웹소설에서 질리도록 보고 있는 전통이자 클리셰지만 -
1990년대에 WOD가 출시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런 컨셉을 창조한 적이 없었다고!
말 그대로 세계 최초야.
뭐 월드 오브 다크니스 이후로는 너무 대중화되어서 거의 모든 흡혈귀 어반 판타지에 적용되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판타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셈이지.
굳이 예로 들자면, 웹툰 노블레스나 더게이머를 포함해서 영화 [언더월드], [트와일라잇] 등등이
전부 WOD의 영향권에 있어.
특히 언더월드는 너무 WOD 설정을 파쿠리 친 티가 많이 나서, 영화제작자한테 화이트울프사가 표절소송을 냈을 정도야(...)
웹툰 더게이머는 흡혈귀물이 아닌데 왜 WOD의 영향권인지 궁금할텐데, 그건 WOD 메이지 디 어센션의 패러다임(Paradigm) 항목과 연관이 있어.
그건 다음에 설명해 줄게.
그리고 WOD는 롤플레잉 게임이야.
컴퓨터 게임으로써의 롤플레잉 게임이 아니라,
마스터를 포함한 4~5명의 플레이어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자신이 맡은 역할극을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RPG 룰인 거지.
여기서 PC들은 고딕 서사장르의 전형적인 괴물(흡혈귀, 늑대인간 등)이 되어서 현대의 도심 속을 살아가게 돼.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며 실제로 앤 라이스의 소설에 많은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어.
그리고 또 WOD의 묘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난관 제시 -> 극복이라는 전통적인 게임 구조보다는 캐릭터 연출과 서사에 더 집중하는 TRPG라는 거야.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와 설정덕후 성향 및 겉멋 덕분에 많은 인기를 누렸어.
... 그래, 겉멋.
WOD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 겉멋 이야.
흡혈귀나 늑대인간이 도시의 어둠을 활보하고 다니는데,
이들은 우리가 재패니메이션풍 미소년이나 미소녀를 보는 것처럼 마냥 멋지고 아름다운 존재들이 아니야.
그렇다기보다 흡혈귀는 전원이 저주받은 존재야.
그 이유는 흡혈귀의 출신에서 설명돼.
흡혈귀들은 자신들을 세대(Generation)로 구분하고, 이 세대라는 건 자기가 살아온 세월이랑 연관이 없어.
자세한 설명은 룰적으로 복잡하니까 하지 않겠지만,
흡혈행위인 '포옹'을 해서 상대방을 흡혈귀로 만들면
그 상대방은 자신의 자식세대, 즉 바로 다음 세대가 되는 거야.
그리고 그런 흡혈귀들 중에서도 최초의 흡혈귀이자 1세대의 흡혈귀가 바로 카인(Caine)이라는 존재야.
알다시피 이 카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그 인물이 맞아.
신이 제물을 바치라 하였을때 아벨의 것은 받고, 카인의 것은 받지 않자 동생 아벨을 번제지내서 신에게 바친 인물이지.
인류 최초의 살육자이자 범죄자.
하지만 WOD의 세계관은 이 창세기를 교묘하게 자신들의 세계관과 연결시켰어.
WOD의 카인은 창조주 야훼에게 저주를 받는 게 아니야.
자신의 아버지인 아담에게서 저주를 받지.
그리고 최초의 땅에서 쫓겨난 후, 동쪽 노드 땅을 헤매다가 최초의 마녀인 릴리스(Lilith)의 유혹에 빠져서 그녀의 피를 마시게 돼.
이건 그녀의 함정이었고, 카인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대신 뱀파이어의 권능, 디시플린(Discipline)을 배우게 되는 거야.
그리고 카인은 신이 보낸 네 천사와 만나서 회개의 기회를 얻지만 그때마다 거절했고,
그 벌로 불의 저주, 태양빛의 저주, 피에의 갈증과 영원한 배반의 저주를 받게 돼.
바로 이게 흡혈귀가 불에 약하고, 태양빛에 약하고, 피를 갈증하며, 영원히 서로를 배신하게 되는 이유야.
신에게 반역한 최초의 살인자의 종족이 얻은 업보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피의 힘을 얻고 천사들의 위협에서 벗어난 카인은
인간에게서 배척받는 괴물들을 모아서 살 수 있도록
최초의 도시인 에녹을 자신의 손에 넣었어.(알다시피 에녹 또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야. 패러디지.)
또한 에녹을 비롯해서 이라드, 질라 총 3명을 흡혈(포옹)해서 자신의 자식세대인 2세대 흡혈귀로 만들어.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2세대 3명 또한 흡혈충동이 있으니 자신의 자식세대를 만들었어.
이들이 바로 후일 3세대, 안테딜루비안이라고 불리며 세상을 멸망시킬 공포의 마왕급 흡혈귀들이야.
근데 이렇게 강력한 고대의 흡혈귀가 드글거리게 되니까 문제가 생겼어.
최초의 도시인 에녹, 그 자체가 흡혈귀의 도시가 되어버린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신은 분노했지.
그래서 대홍수(Flood)를 일으키게 돼.
에녹은 물에 쓸려서 전멸하게 되고 카인은 이게 자신의 업보이자 죄라고 생각해서 자취를 감춰.
여기서 문제가 생겼어.
2세대와 3세대 흡혈귀들도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들이라서 대홍수에서 살아남았고,
그들은 생존자를 모아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지.
근데 3세대의 약 13명의 흡혈귀들은 자기들 위에 군림하는 2세대 3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어느날 반역을 일으켜 2세대를 모조리 죽여버리고 자신들이 군림하게 돼.
카인은 도시가 재건되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해서 돌아와 봤더니 기가 막힌 거지.
손자들이 아들들을 죽인 셈이니까 이게 무슨 패륜이야.
그래서 카인은 자신의 권능으로 3세대들에게 영겁토록 이어질 거대한 저주를 내려.
이 저주는 혈족인 이상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영원히 삶의 업에 괴로워할 정도였지.
재밌는 건 이 저주에는 동시에 혈족의 특화능력인 디시플린과 연관이 되어있어서
이후 흡혈귀들이 분화된 단체인 클랜(Clan)을 만들게끔 하는 계기가 돼.
이 클랜은 총 14개 정도로 나뉘는데
쥐 같은 동물과 닮아가게 되는 갱그렐
하수구에 숨어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추악한 외모를 지닌 노스페라투(이것도 흡혈귀 전설 패러디야)
허풍선이에 도박꾼에 도둑놈 근성을 저주로 받은 라브노스
거만하고 잔혹한 라좀브라
모조리 미쳐버린 대신 일말의 예지력을 얻는 말카비안
흡혈귀클랜의 집대성인 카마릴라(kamarila)를 이끄는 왕좌의 일족, 벤트루
반항적이고 전투적이고 광란에 빠지기 쉬운 브루하
악의 신을 추종하는 세트의 추종자들
중동 산중노인의 원류가 된 암살자 일족 아싸마이트
사령술을 주특기로 삼는 이탈리아출신 지오반니
뼈와 살을 진흙처럼 조종하며 일반클랜보다 전투능력이 월등히 높은 쯔미쉬
예술과 아름다움에 심취한 토레도어
원래 메이지(mage)의 일파였으나 승천에 실패하고 강제로 흡혈귀 일족이 된 트레미어
그 외의 쩌리스러운 카이티프...
딱 보면 알겠지만
얘들의 특성은 현대 어반 판타지에서 '흡혈귀'라는 종족을 다룰 수 있는대로 다 특화시켜놓은 것들이야.
달리 말하자면 이 클랜특성보다 자세하고 탄탄하게 흡혈귀를 분화시켜놓은 세계관은 없어.
좀 극단적인 WOD 팬의 경우는, WOD 이후의 흡혈귀물은 모두 WOD의 아류라고 말할 정도야.
아무튼 플레이어는 이렇게 분화된 클랜의 흡혈귀 중 하나를 선택해서
어둠의 세계(World of Darkness)를 헤쳐나가는게
WOD 플레이의 진면목이야.
근데 위에서 겉멋이 중요하다고 했지?
저 클랜특성은 저주임과 동시에 중요한 캐릭터메이킹(character making)이기도 해.
다시 말하자면 클랜이 창세기때부터 숙명처럼 짊어지고 있는 이 저주를 캐릭터의 성격에 맞춰서
자기만의 해석,
자기만의 삶,
자기만의 개똥철학을 읊으면서 어둠의 세계를 광기와 함께 누비는 것.
거기서 새어나오는 일말의 중2병(...)이야말로
WOD 플레이의 참맛이자 겉멋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지.
물론 중2병이라고 해놨지만
실제 플레이는 닥치고 핵앤슬래쉬(Hack&slash)로 게임하듯이 초능력써서 적들을 박살내는 내용이 결코 주가 될 수 없어.
위에서 캐릭터 연출과 서사가 중요하다고 했지?
어차피 플레이어는 흡혈귀로 치면 약 13~14세대, 약쇠해질대로 약쇠해진 흡혈귀 클랜의 신입으로 시작하는 게 보통이야.
그리고 이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파워보다는 고도의 눈치, 운, 정치능력, 인맥도 개입하게 되지.
WOD의 흡혈귀들은 안정적으로 흡혈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의 도시에 프린스(Prince)라고 불리는 지배자급 흡혈귀를 배치해 두며
흡혈귀들끼리 싸우지 않도록 각자의 사냥터를 배정해 줘.
그리고 분쟁이 생기거나 회의를 해야 할 경우 가면을 쓰고 서로의 정체를 은연중에 숨긴 채 해결을 하지.
이게 바로 가장무도회,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Vampire the masquerade)이기도 해.
주인공은 지성과 야만이 교차하는 뱀파이어의 사회에서
자신의 완력, 운, 인맥, 카리스마를 총동원해서 자기만의 철학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거야.
그 와중에 자기만의 겉멋을 찾아나가는 것도 완전 꿀잼인 거지 ^^
여기까지 WOD에 대한 대충의 설명이 끝난 거 같아.
사실 WOD의 세계관을 지금까지 설명하면서, 고작 흡혈귀 하나 설정의 오리지널리티를 손에 넣었다고
이 WOD란 세계관이 그렇게 찬양받을 만 한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건 WOD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어둠의 세계에 살아가는 주민들은 흡혈귀 외에도 아주 많이 있어.
늑대인간, 마법사, 헌터, 가이아, 웜, 셀레스틴 등등...
그 중에서도 메이지(Mage)라는 설정은 지금 설명했던 흡혈귀 설명이 그저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혁신적이야.
그건 다음에 시간이 되면 따로 소개하기로 하고
관심이 있다면
https://namu.wiki/w/월드 오브 다크니스
이 링크를 참고하길 바래.
웹소갤러들아 즐거운 하루 돼!
옛날에 orpg로 마스커레이드했던 거 기억난다. 흡혈귀 메인의 룰북인 마스커레이드 룰북 펀딩이 끝난지 꽤 된 거 같은데 판매는 아직인 거 같네. 개인적으로 마스커레이드도 좋지만 디 어센션이 룰북으로 나오면 펀딩 참가하고 싶네. 구owd 말고도 신판에선 데몬을 메인으로 하는 룰도 있던데. 아무튼 주인공이 뱀파이어든 늑대인간이든, 헌터든 마법사든, 요정이든 데몬이든 wod 시리즈는 처절한게 매력..
그치만 wod의 마스커레이드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기도하고 오리지날의 느낌이라기보단, 그 이전까지 있었던 뱀파이어 설정의 총체로 보는게 더 타당할듯. wod 이전에 trpg에 대한 설명도 필요할지도.
저 정성이 후덜덜. 처절하단게 매력적이네....월야환담시리즈도 이거 느낌 난단말 들은거 같기도 하고
월야환담이 영향 많이 받았음. 홍정훈은 더로그의 경우 디앤디 표절건도 있고. 자기가 trpg플레이어다보니까 영향을 깊게 받는듯.
와 꽤 긴 글+설정 이야긴데도 재밌게 읽었다. 언더월드 좋아하는 영화인데 영향 많이 받았다고 하니 관심간다.
월야환담도 언더월드도 도시무대로 뱀프가 노는 거 빼면 의외로 WOD와 별로 공통점이 없음. 언더월드가 고소이야기에 오른거는 언더월드 1의 시나리오가 뱀프와 늑대인간 뱀프(어보미네이션)의 연애가 나오는 WOD 소설 시나리오와 유사해서였고, 실제로 고소되진 않고 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