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과학동아에서 행사에 초대해주셔서 SF 강연을 처음 하게 되었다. 10년쯤 썼으면 이제쯤 할 말이 쌓였을 것 같아서였는데 정작 준비하고 보니 그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 많이 안 쓴 작가여서인지도 모르겠다. 강연 중에 나는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은 운동과 같다. 들인 시간만이 답을 준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다 하고 내려와서야 강연을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구나 하고 혼자 웃었다.
처음 쓴 글은 망할 수밖에 없고 초안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양 제 실패와 마주하는 작업이다.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어떻게 해야 글이 망하지 않을지도 잘 모른다. 그저 계속 고민할 뿐이다.
그 고민 중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렵다는 것, 그리고 틀린다는 것에 대해서.
1. 어렵다는 것
‘과학기술 창작문예’에 당선된 이후로 내 일상은 크게 변했다. 1년만 해 보고 안 되면 재취직하자고 생각했던 내 인생의 경로는 완전히 방향을 틀었고, 저게 철이 없지 하면서 혀를 차던 주변 인물도 일시에 칭찬과 격려로 태도를 바꾸었다.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녀석을 보고 걱정이 태산이던 부모님도 가슴을 쓸어내리셨고, 기쁜 마음으로 내 소설을 집어 드셨다. 다 읽어보신 뒤에는 이렇게 질문하셨다. “그런데,얘야, 이게 다 무슨 소리니?”
그런 말은 칭찬과 격려 속에서 일정한 주기로, 반찬에 섞인 청양고추처럼 간간히 들려왔다. 그래도 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상도 타지 않았는가. 상 탔으면 잘 쓴 거겠지.
‘크로스로드’는 내게 처음으로 소설 의뢰를 해 준 곳이다. 중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를 다 쓰고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없던 무렵이었는데, 의뢰가 들어오는 바람에 계속 그 방향의 삶이 이어지게 되었으니, 나름대로는 두 번째 계기였던 셈이다. ‘땅 밑에’의 원고를 써서 보낸 뒤에, 나는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하는 요지의 메일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편집의원들이 토론하던 메일이 실수로 내게 날아온 것이었지만, 나는 꽤 초조해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소설을 한 달간 더 수정했는데, 교정고에는 여전히 빼곡하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가 적혀 있었다. 출간할 때 출판사에서 보내온 새 교정고에도 여기저기에 화이트로 지운 흔적이 있었다. 불빛에 비춰 보니 역시 ‘대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라는 질문이 쓰여 있었다.
스포일러를 좀 하자면 그 소설의 세계는 인공구조물인데, 이를 알아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많은 독자들이 내가 반전이라고 써 놓은 부분을 주인공이 보는 환상이나 내면의 세계로 해석했다(내면의 세계라니!). 뭐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그걸 왜 못 알아봐요?”라고 해 주는 착한 독자들이 있었으니까.
단편 ‘우수한 유전자’의 반응은 좀 더 특이하다. 그 소설에는 반전이 있는데, 독자의 정확히 반수가 이를 눈치 채지 못한다. 이 통계는 한 대학 강사 분이 알려주신 것이다. 그분은 수업에서 종종 ‘우수한 유전자’를 교재로 쓰시는데, 학생의 반수가 결말을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재미있어서라고 하셨다. 절반은 반전을 들으면 놀라고, 절반은 어떻게 그 반전을 못 알아보는지 몰라 놀란다고 한다. 그분은 ‘땅 밑에’도 강의 자료로 써 보셨는데, 그 소설은 90%가 반전을 눈치 채지 못하는 바람에 재미없어 안 쓰신다고 하셨다.
아무리 SF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고 해도, 반수가 넘는 일반인이 반전을 알아채지 못하는 소설이라면 어느 지점에서는 실패일 지도 모른다. 혹시 두 소설을 보고 실망하신 독자 분들(‘땅 밑에’를 읽은 90%의 독자들과 ‘우수한 유전자’를 읽은 50%의 독자들)은 혹시 모르니 재고해 봐 주시기 바란다.
나는 처음에 그 ‘어려움’이 과학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상한 생각이기는 했다. 나는 그렇게 어려운 과학을 쓰지 않으니까. 하지만 기초적인 수학이나 기초적인 영어도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과학의 수준을 낮춘 작품들을 시도해 보았는데, ‘어렵다’는 반응은 그대로였다. 소설 ‘스크립터’를 본 한 편집자는 “이 소설에는 무슨 말인지 모를 용어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면서 설명이 좀 더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나는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분이 지적한 용어는 ‘NPC', ‘로그인’, ‘IP', ‘퀘스트’ 같은 단어였으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처음 듣는 말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편집자는 일반 독자보다도 더 내 소설을 어려워했다. 그들은 내 소설을 ‘생전 처음 보는’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솔직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를 통과할 수 없다면 설사 좋아해주는 독자가 있다고 해도 출간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다 쓰다 슬슬 숨통이 막히던 차에 크로스로드에서 두 번째로 의뢰가 들어왔다. 나는 그날 수첩을 펴서 ‘무조건 하드 SF’라고 크게 써 두었다. “크로스로드라면 적어도 어렵다고 싫어하지는 않겠지!” 그때 나는 ‘0과 1사이’를 쓰면서, 과학을 있는 대로 때려 넣고 시간여행 이론에 양자역학까지 집어넣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들 그 소설을 너무 잘 이해하는 것이다! 아무도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는다! 아니, 저기요, 세상에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사실 최근에 그 답은 엉뚱하게도 정희진씨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다가 찾은 편이다. 정희진씨는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마다 어렵다는 말을 들어왔고, 그래서 혹시 자신이 너무 어려운 용어를 쓰는 건가 생각하며 조심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야,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페미니즘은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상식과 편견을 뒤집어야만 가능한 학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뇌는 아는 것만을 본다.
초등학생 무렵에 엄마와 함께 TV에서 ‘터미네이터’를 본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본 ‘스타워즈’, ‘에일리언’과 마찬가지로 내 인식 전체에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다. 내가 흥분과 감탄에 젖어 엔딩의 여운을 만끽하고 있는데 옆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대체 다 무슨 소리니?”
나는 어리둥절해서 답했다. “저 사람이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로 가서 아들을 낳았잖아…….” “시간여행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니?” 나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지만 엄마는 시간여행이 무슨 뜻인지, 시간을 거슬러 인과율이 역전된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 영화는 엄마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괴이한 영화였을 뿐이다. 당시 내 지식이 엄마보다 나을 리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영화의 어려움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엄마와 함께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던 중이었다. 한참 재미있게 보시던 엄마는 후반에 사루만이 마법을 쓰는 것을 보고 놀라서 내게 질문하시는 거다. “이 영화 뭐야?현실이 아닌 거니?”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디를 어떻게 봐서 이게 지금까지 현실로 보였는데?”
비슷한 사연을 한 SF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일반인 친구와 함께 ‘스타워즈’를 보았는데,영화를 다 본 뒤 일반인 친구가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기가 혹시 지구가 아닌 거야?”
“어디가 어떻게 하면 저게 지구일 수 있는데?”
SF의 특징을 <경이감>이라고 한다.
경이감은 우리가 겪지 못한 것, 지금까지 생각해보지는 못했지만 내 지성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하지만 지금까지는 무심함과 편견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한순간에 깨닫게 해 주는 감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경이감을 느낄 수 있는 주체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경이롭게 느끼려면 그것에 너무 익숙해도 안 되고 너무 낯설어도 안 된다. 적당히 익숙해서 톡 건드리는 정도로 생각이 열릴 준비가 된, 하지만 우연히도 아직은 안 열린 사람들만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런 사람의 숫자는 적을 수밖에 없다. ‘익숙함’이란 사람이 살아온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동일한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진부해서 평범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히 내 작품에 대한 ‘어렵다’는 평 이면에는 평범하고 흔한 이야기를 한다는 평도 존재한다. 사실 내 감각은 후자에 가깝다. 당연히, 나는 내게 익숙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좋아하고 많이 보아왔고, 그래서 내가 재생산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어쩌다보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은 이런 문화적 단절이 수직은 물론 수평 간에도 큰 편이다. 고작 한 세대 안에 농경문화에서 IT문화로 이전해 왔다. 한 가정 안에서도 부모와 자식이 같이 즐긴 것이 없고, 같은 세대 안에서조차 같이 즐긴 것이 없다. NPC라는 용어를 일상처럼 말하는 집단이 있는 반면에 그런 말을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집단이 동일한 공간에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소설을 이중구조로 써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편이다.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부분은 아예 인지조차 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 부분을 전부 보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중의 스토리라인을 만들면 될 것이다. 구성을 한 줄이 아니라 두 줄로 짜는 것이다. 아주 최근의 작품은 이 생각을 적용해서 쓰고 있다.
그 생각은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더 분명해진 편이다. 그 영화는 내가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어려웠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인 온갖 최신과학이론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그 어려운 영화가 관객을 동원하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엄마도 그 영화를 보고 오셨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터미네이터도 에일리언도 반지의 제왕도 이해 못하신 분이!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떤 이야기였는데?”
“아버지가 딸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 아냐?”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엄마에겐 그런 이야기였다. 내게는 인류를 구하고 블랙홀의 내부를 탐사하는 이야기였는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 딸이니 아버지니 하는 건 거대한 우주에 압도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해할 것도 같았고 그 영화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영화에 두 개의 스토리라인이 동시에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둘 중 하나만 받아들여도 영화를 이해할 수가 있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든 아니든.
이렇게 생각해보면 왜 ‘땅 밑에’는 어렵고 ‘0과 1사이’는 쉬운지 감이 잡힌다. (둘 다 ‘크로스로드’에 실린 작품이고 웹상에 공개가 되어 있다.)
‘땅 밑에’의 구조는 한 줄이다. 소설 내부의 세계관과 과학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면 결말도 이해할 수가 없다. 반면 ‘0과 1사이’는 구조가 둘이다. 마침 그 소설을 쓸 당시 나는 플롯을 두 종류로 만들어 놓고 어느 쪽을 택할 지 고민하다가, 아예 둘을 하나로 합쳐 이야기를 만들었다. 덕분에 구조가 이중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자세히 보면 시작도 둘이고 결말도 둘이다. 과학적인 부분을 아예 읽지 않아도 남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실 이제 와서야 많은 SF작가들이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왔다는 것을 깨달은 편이다. 대중과 소통하는 작가들은 본능적으로 이 원리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좀 늦을 뿐이지.
2. 틀린다는 것
한국에서 SF를 지원하는 곳은 문학계가 아니라 과학계다. 10여 년 전 ‘과학기술 창작문예’를 주최한 곳도 동아사이언스였고, 10년간 SF지면을 유지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매체인 ‘크로스로드’도 아태이론물리센터에서 주관하는 과학웹진이다. 비정기적으로라도 SF를 실어준 곳은 ‘과학동아’, ‘뉴턴’ 같은 과학 잡지였고, 2015년에 현존하는 SF관련 공모전을 주최하는 곳은 한낙원 SF 문학상을 제외하면 과학창의재단,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이고, 2회째를 맡고 있는 SF어워드의 주최 역시 과천과학관이다.
그러다보니 SF작가에게는 “어렵다”고 불평하는 독자들과 별개의 고민이 있다. “틀렸다.”고 불평하는 과학자들이다.
소설책이나 보고 사는 우리들은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고도의 지능과 최신 과학이론으로 무장한 초엘리트 박사님들 말이다. 내 생각에는 이거 다 빅쓰리3(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잘못인 것 같다.
이런 꿀잼 글을 놓치고 있었다니..! 땅밑에 대해서 말하자면 10% 안에 속한다는 생각에 우쭐해지네. 이것도 내가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똑똑하게 이해하는 독자가 생각외로 적다는 건 작가에겐 난제
좋은글이네요
잘 읽고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