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저번에 순문학과 장르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좀 돌았던 모양이네.

어떤 의미에서 어그로 덕분에 웹갤은 떡밥이 계속 순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어그로가 몰려드는 건 사양이지만...



아무튼, 저번에 보면 장르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쓰는 데 왜 철학이 부재하다는 자격지심을 가져야 하냐'는 말이 있더라고.


근데, 난 좀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묻고 싶음.

'장르문학이 재미 위주고, 철학이나 메시지는 뒤쳐진다'는 건 어디의 법칙이야?
그리고 소위 '순문학'이 재미 없다는 건 어디의 법칙이고?


일단, 순문학이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건 다들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인생에서 하나쯤은 있잖아? 나는 카프카의 '소송'이 당장 생각나네.



그렇다면 장르문학의 '메시지'를 볼까.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비슷한 스토리텔링 장르인 만화를 먼저 이야기해 보자.
다들 '데스노트' 정도는 들어봤지?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중 하나야.

기본적으로 데스노트의 장르는 판타지+추리물이다. 완벽하게 판타지적인 작품의 핵심 소재인 데스노트가 등장하고,
사실 L이라는 캐릭터도 작품이 판타지 만화니까 성립 가능한 등장인물이지, 현실성하고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는 캐릭터야.

자, 그렇다면 데스노트는 '메시지성이 없는', '철학이 부재한' 만화인가?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데스노트보다도 메시지성이 대놓고 드러나려면 그건 소위 '빨갱이 프로파간다' 정도는 되야 할 거다.(...)

데스노트는 '키라'와 '데스노트'라는 근본적인 소재에서부터 공리주의나 법에 대한 의문을 품고 쌓아온 만화지.
이런 만화가 단지 현실에 기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장르적 클리셰(천재 명탐정 등등)을 활용했다고 해서 메시지성이 없다고 할 수 있겠어?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사실, 문단에서도 그 메시지성을 인정받은 장르 작가는 적지 않아.

국내에는 사회풍자적 SF 작가이자 순문학에서도 인정받은 배명훈 작가가 있고, 해외에는 심지어 톨킨학, 김학(신필 김용) 까지 있지.
그리고 둘 사이의 경계가 그리 엄격한 것도 아니고. 필립 K. 딕은 순문학도 많이 썼다는 거 들어봤어?


심지어 난 장르소설이 '재미를 우선시하는' 소설이라는 것도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소설을 쓰면서 먼저 가장 근본적인 설정 하나를 잡고,

거기서 파생된 '메시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거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작품의 철학'이라는 건, 소재나 스토리를 이끄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는 거야.

그리고, 그런 기반이 충실하게 되어 있으면, 심지어 당장 읽을 때는 힘들더라도 읽고 나서는 깊은 만족감이 들더라고.

작품의 숨겨진 메시지를 파악하고. 작가의 철학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이런 과정이 너무 재미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좋은 장르소설'이라는 건 장르적 도구를 충실히 사용하여,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만족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

장르소설과 순문학의 차이는, 그저 사용하는 수단이 리얼리즘인가 상상력인가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비단 작가가 엄청난 철학을 담으려고 용쓰지 않더라도, 잘 쓴 작품들을 보면 뭔가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게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아?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무언가를 울리지 않고서야, 수많은 장르소설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소년 점프 만화에서 '우정, 노력, 승리'를 외치고, 로맨스 소설에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철학이고 주제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어.


물론 나 자신은 그게 좀 과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역시 에반게리온이랑 필립 K. 딕이 너무 인상에 깊었어 ㅜ 



P.S. 디씨에서 글을 쓰면 뭔가 좀 이상하다... 줄을 바꾸고 나서 쓰려고 하면, 첫 글자의 종성을 쓰는 순간 글자가 통째로 위로 간다.
그러니까, 줄을 바꿔서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여기서 엔터 치고 '이렇게 쓰인다'라고 적으려 들면, 일이렇게 쓰인다. 해결 방법 혹시 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