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완성한 글은 별로 없고, 세계관 만들고 설정놀음만 한참 한 사람이야. 한심하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말하건대, 설정놀음도 잘 하는 요령이 있단 말이지.

못 하는 사람은 어디서 본 듯한 세계관(대부분 소드&소서리), 일관성 없는 작중 종교의 교리, 스토리와 상관없는 설정 짜느라 시간낭비 등등...
결국 본인 설정을 감당 못하고 포기하기까지 하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판타지/SF 세계관을 만드는 내 방식을 대강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예시로 쓰기 위해서, 내가 동아리에서 릴소 쓰기용으로 만든 창작 세계관을 좀 써먹어볼게.




0. 소재 조사


사실 나 자신은 딱히 어떤 세계관(사이버펑크, 리보펑크, 에픽 판타지, 로우 판타지 등등...)을 생각하고 이 요령을 써먹어 본 적이 별로 없다.
나는 원체 머릿속이 사방팔방으로 뛰는 사람이고, 내 세계관 대부분은 샤워하다가 불현듯이 떠오르는 것에 가까운 거라서...
하지만 여기서 이런 글들 찾는 사람들은 프로 지망생인 경우도 많고,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 어떤 장르가 꽂힌 사람도 있겠지.
때마침 내가 예시로 든 것도 릴소라는 특성상 모두의 의견을 모았었다.

투표를 통해 대충 소재로 모인 것들은, 'D&D식 마법', '초능력 배틀', '산업혁명기 스팀펑크'. 이렇게 세 가지였다.
...사실 그 때, 나도 정말 당혹스러웠다. 각각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는 소재들 세 개를 한 세계관에 우겨넣자는 소리였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독창적인 세계관을 만드는 데 있어 초심자에게 가장 쉬운 접근법이 이거인 거 같긴 하다. 복수의 세계관을 합치기.
특히 여기서 상정하는 것처럼, 상업성 등을 위해 특정 세계관의 요소들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경우에는 더더욱.

유명한 예시를 들어보자면, Warhammer 40k 세계관은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에 고딕펑크/종교적/암울한 분위기를 섞어넣어, 굉장히 독특한 테이스트를 가진 설정을 만들었지. 그리고 사실 내부의 각 진영들도 '이집트+언데드+로봇(네크론)' 같은 식으로, 크로스오버적인 접근법으로 만들어져 있단 말야.
이 방식은 다양하게 접근 가능해. 단순하게는 '무협 세계관에 각종 몬스터와 마법들이 도입된다면?' 같은 것에서,
'일본 전국 시대의 사회상을 능력자 배틀물에 도입한다면?', '불교 사상과 D&D 세계관을 합친다면?' 같은 좀 더 복잡한 것들도 가능해.

물론 이런 방식은 쉬운 만큼,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나올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 하지만 그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사실, 어떠한 문학도, 장르도 0에서부터 시작하지는 않거든. 네가 해야 할 건, 여기서 너만의 독창성을 찾는 거다.

그걸 위해서 다음 단계가 필요해지는 거지.



1. 세계관의 '핵심' 정하기.

사실 이거만 읽어도 내 요령의 전부는 파악되는 셈이야. 그냥 이거 설명하고 싶어서 쓴 글이기도 하고 ㅋㅋ

일단 뭔가를 쓰고 싶다, 어떤 걸 쓰고 싶다는 게 대강 머릿속에서 갈피가 잡히면, 그냥 계속 머리를 굴려라. 뭔가 기발한 생각이 날 때까지.
여기서 중요한 건, 역시 뭘 참고하거나, 일상의 작은 일을 소재로 하거나 하면서, 황당한 아이디어를 결코 버리지 않는 것에 있다. 다 메모해둬.
그리고 또 도움이 되는 기술. 어떤 소재가 있다면, 그것의 특성과 작중에서의 클리셰적 묘사를 분석해 봐. 특히 소재를 정해뒀다면 이게 유용해.

우리가 했던 과정을 말해볼까. 일단 우리는, 초능력과 마법과 스팀펑크라는 소재를 분석하기 시작했지.
일단 스팀펑크는 가제트의 디자인이 강렬한 장르고, 마법과 스팀펑크를 엮은 작품들은 워낙 많으니까 별 걱정을 하지 않았어.

나는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RWBY의 영향을 꽤나 강하게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팀펑크적인 마법사를 구현하기 위해서
'마법에 어떤 물질적 시료(석탄의 대응물)가 필요해서, 마법사는 이런 시료를 '장전'해 주는 복잡한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지.

엄청 식상한 아이디어였지만, 이 식상함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다들 생각했다. 참신한 다른 요소를 넣으면 될 문제니까.

그리고 나서 문제가 된 것은, '마법'과 '초능력'이 공존하는 세계관이라면, 둘은 어떻게든 차별화가 되야 한다는 것.
다행히 여기서도 클리셰의 분석이 가능했지. 마법은 배우는 것이고, 마나나 시약 같은 것이 필요하며, 다양한 마법을 한 사람이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초능력은 선천적이고, 자신의 정신력만으로 작동하며, 한 사람에게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보통 이런 클리셰가 정착되어 있잖아?

우리는 이 구도를 유지하면서, 마법과 초능력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서사가 생길 가능성을 궁리했어.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초자연 현상의 근원은 초능력이며, 마법은 초능력을 흉내내는 어떤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볼까?"

라는 아이디어가 나왔어. 그리고 그걸 본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월야환담의 사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

"그렇다면... 마법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초능력자들에서 그 힘을 '탈취'할 필요성이 있다!"


그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 다음부터는 그냥 설정 통일을 위한 수다였어. 사실 어떻게 되어도 별 의미없는 거였지.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세계관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실마리, 세계관의 '핵심'을 만들어낸 상태였으니까!


"마법을 구사하는 데 필요한 초능력자의 신체를 소재로 만든 결정, '에센스'를 차지하기 위하여, 초능력자들을 사육하거나 사냥하는 디스토피아"

우리는 이 핵심 문장 하나만으로, 세계관을 이루는 모든 소재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세계관의 독창성이라는 것은 세계관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 풍습과 언어, 기후, 단위 같은 것을 모조리 갈아치워야 생기는 것이 아냐.
그 정도로 현실이나 독자들에게 익숙한 작품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면, 오히려 읽을 때 당혹스러움만 느낄 공산이 크지.
거꾸로, 같은 세계, 같은 인물들이 걸어가는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요소만이 바뀐다면, 그 변화가 일어난 여파가 더더욱 강렬하게 느껴질 거야.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독창성'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리고, 세상에는 수많은 인과관계가 숨겨져 있기에, 사실 단 한 가지를 바꾸어도 세상은 엄청나게 변해.
우리는 저 한 문장에서 '마법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건 국방에서 엄청난 가치를 가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마법사들의 동력원이나 다름없는 에센스라는 걸 확보하기 위해, 국가는 인정사정 안 가리겠군',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위험한 초능력자들을 게토에 가둬 놓고, 계속해서 피나 머리카락 같은 걸 수거해 가는 거겠지?'
'물론 그런 대우에 반발하는 무장 단체도 있을 거고, 거꾸로 그런 무장 세력들을 찾아 죽이고 시체를 회수해서 에센스로 바꾸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작품의 핵심이 되는 모든 설정들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어.

이제 '핵심 설정'이 무엇인지 알겠지?
핵심 설정이란, 아주 간단하게 요약되는 이 세계관이 현실이나 다른 세계관과 구별되는 개성/특질임과 동시에,
그 구별되는 다른 개성들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내는, 세계관의 가장 근본적인 기반을 말해.


그리고 내가 예시를 든 것처럼, 단순히 깔끔한 핵심 설정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작품 내부 세계의 상황은 물론,
심지어 대략적인 스토리라인까지도 어느 정도 구상해 낼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계관을 짤 때 먼저 한 문장짜리 핵심 설정부터 만들어내고 나서, 여기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상황을 묶어 세계관을 완성해.

이게 나에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더라고. 저 '핵심 설정' 하나만 잘 만들어두면 자연스럽게 세계가 완성될 수 있으니까.


말하자면, 핵심 설정이라는 개념은 SF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만약 ~~라면?' 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구성과 동일해.
그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살들을 덧대면,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거지.
물론 이런 '덧붙이기'를 위해서도 어느 정도 요령이 필요한데... 글이 너무 길어졌네. 그건 다음 편 되면 올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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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낮동안 뻘글 좀 올라오고 '필력이란 무엇인가' 같은 뒤늦은 토의 좀 했다고, 망갤이라고 하는 게 속상해서, 역시 작법 관련 글을 올려야 하나 싶어서 과제도 제쳐두고 한밤중에 글을 썼다 ㅋㅋ
하지만 말야, 모든 사람이 이렇게 장문의, 유용한 글만 써야 하는 걸까? 개인적으로는, 나는 사람들이 여기서 이런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생각나는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할 기회를 갖고, 모르는 것은 서로 물어보고, 그리고 웃고. 그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함부로 망갤이라고 말하지 마, 여기를 쓰레기라고도 하지 말고 ㅜ. 나름대로 여기 살리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말 들으면 우울해져...

그리고 여혐글은 그냥 무시해. 아니, 저 말이 진지하게 하는 걸로 들려?

거꾸로 여혐이네 뭐네 하면서 싸우니까 일부러 떡밥을 계속 돌리는 거잖아.
디씨는 기본적으로 병신이 굴러다니는 곳이고, 그걸 일일이 지적하다 보면 스스로가 가장 힘들 거야. 그냥 신경쓰지 말고, 기분 풀어.
내가 대신 사과할테니까...

그리고 오덕인 건 어쩔 수가 없다. 미안 ㅜㅜ
그...그래도 난 모쏠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