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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간-로맨스>에 대한 한 장 고찰



<강간-로맨스>는 미래가 밝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로맨스의 주된 플롯은 놀랍게도 초반에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해, 종국에는 둘이 사랑에 빠져 잘 산다는 내용으로 끝맺음이 난다. 이들 소설이 강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강간을 사랑으로 착각해버리는 정신착란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쓰는 작가도 강간은 강간이고, 읽는 독자들 역시 강간은 없어져야할 강력범죄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잘 읽혀왔고, 잘 읽히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잘 읽힐 것이다. 왜냐하면 만족감을 주니까. 여기서 이 만족감이 <좋은> 만족감이든 <나쁜>거나 <뒤틀린> 만족감이라는 둥의 가치평가는 접어두자. 어차피 예술은 도덕이랑 거리가 멀고, 또한 여기가 그런 거 얘기하는 자리도 아니니까.


그럼 왜 미래가 밝을까? 우선 강간은 <폭행 또는 협박 따위의 불법적인 수단으로 사람을 간음>하는 행위다. 단순히는 힘으로 한다는 말이지. 바로 이 점이 여성들에게 로망을 준다. 생물학적으론 보다 강력한 수컷을 원하는 암컷의 본능이 강간으로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정신분석적으론 제압당하는 마조히즘적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어쨌거나 여기엔 로망이 있다. 그래서 <강간-로맨스>에서 강간범은 대개 재벌3세나, 정치인, 연예인, 본부장과 같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위치의 미남들로 설정된다. 대개 현실에서 강력범죄는 계층이 낮은 곳에서 더 많이 벌어지는데, <강간-로맨스>를 이런 세계관에 맞춰 작성한다면 여성독자들의 외면을 받을뿐더러, 더 심하게는 여성혐오주의자로 내몰릴 수 있다. 대개 여자는 그런 남자와 사랑에 빠지길 원치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건 야동에 걸맞은 형식이다. 꼭 적고 싶다면, 그런 세계관은 추리소설에서나 사용하도록.


그런데 왜 현대사회에서 그냥 첫눈에 반한 전통적이 로맨스 틀을 따라가도 될 것을, 하필이면 강간과 같은 극단적인 행위로서 표현하기를 바라는가? 내 생각에 이는 다분히 사회적인 현상이다. 현대사회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계층 간 소통은 더욱 차단되기 마련인데, <강간-로맨스>독자가 바라는 상류층과의 만남은 더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밖에 진행될 수 없는 형국이다. 더 잔인하게는 <강간-로맨스> 여성독자 일반은 사회 피라미드에서 중간이나 하층을 구성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상류층의 입장에서 이들이 가진 보잘것없는 전셋집이나 저축통장, 혹은 몇 가지 자질구레한 자격증 같은 건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남는 건 무엇인가? 비극적이게도 몸뚱이뿐이다. 소설이라는 허구적 형식을 아무리 빌리고자 하더라도, 재벌과의 만남은 오로지 남성의 성욕을 매개로만 가능한 셈이다.


따라서 <강간-로맨스>는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지닌다. 강간이 합리성을 지닐 정도로 떨어진 세상을 산다는 게 환멸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강간-로맨스>의 역사는 문학이 처음 시작된 고대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이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강간-로맨스>에서 강간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상당부분 강간은 초반부에서 잠깐 벌어지는 일이며, 그 이후부터는 보통의 로맨스 소설에서 보여주는 패턴을 따라간다. 비록 비뚤어진 성욕과 섹스가 전부지만, 점차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빠져 들어가며 사랑으로 발전한다는 스토리. 이는 강간으로 인해 구겨진 여성독자의 자의식을 어루만져주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주체성을 가지고 싶어 하니까, 여자주인공은 강간범을 사랑에 목매는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주체성을 회복할뿐더러, 강력한 능력을 지닌 남자주인공도 획득하는 셈이다. 일종의 야수 길들이기. 신문을 보니 당분간 사회가 적당히 아름다워질 날은 먼 것 같다. <강간-로맨스>는 번창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