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의미의 연쇄: 소설의 재미는 어디서 비롯될까?
소설의 재미는 어디서 비롯될까?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이다. 우선은 <재미>는 <관심>과 다른 듯하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취업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토익단어장을 외우는 데에 재미를 느끼지 않으니까. 고로 이 재미는 실용적 무언가를 떠나서 존재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이것이 거추장스러운 교훈주의를 일갈하는 꼰대류 소설들이 지루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 <재미>는 어디서 발원하나? 프로이트는 뭐든 인간이 꼴림을 추구한다고 했으니까, 단순히 성적코드들을 집어넣으면 재미있어지나? 확실히 야설이 보여주는 높고도 은밀한 수익성이 이를 증명해주는 듯하지만, 이게 전부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하루는 24시간인데 전세계적으로 평균 성관계 지속시간은 15분에 불과하니까. 이 모든 게 섹스를 위한 전주곡이라고 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 아닌가?
단순히는 사건들이 빠른 속도로 연쇄되면 재미가 느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것도 너무 난잡하게 엮이면 안 되고, 어느 정도 개연성과 함께 버무려져야하며, 동시에 이 개연성이 향하는 방향, 즉 사건의 궁극적 목적지에 대한 신선함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속도>과 <신선함>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말인가? 영화판에서 스릴러가 꾸준히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일견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히치콕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영화란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인생이다.> 지독한 소설-지상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소설역시도 이와 크게 다른 게 아니라는 점에 다들 동의하리라 본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은 다시 원점을 맴돈다. 그렇다면 그 <속도>있게 전개되는 <신선함>을 가진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무언가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이걸 물어보고 있지 않았나? 히치콕은 여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영업비밀이므로.
그렇다면 결국 <소재>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너무도 답이 많다. 그 시대의 흥미에 대한 기준을 결정짓는 요소는 얼마나 다양하고, 가변적이던가? 중세에서나 먹힐 성탑에 갇힌 공주를 구출하는 정통-기사물을 오늘날 적었다가는 지루함으로 매도 받을 것이며, 동시에 중세시대에 이계로 차원 이동한 기사에 대한 이야기(거기서 무림무술을 익힌다는 설정으로)를 적었다가는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질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어떤 고정적인 답변을 기대해볼 수 없다. 그럼 우리가 기대해볼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 <속도>있게 지향해야할 소재나 스토리에 대해서 알 수 없다면, 결국엔 <속도> 그 자체, 이야기의 컷들이 연쇄되는 그 자체의 운동만이 남는다. 혹시나 여기에 대해선 몇 마디 나눠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히치콕의 저 말을 좀 더 음미해보자. <지루한 부분>이 아니라 <커트된>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결국 이 말은 각자의 컷들, 소설의 장면들이 반드시 어떤 사건에 대한 다음 사건을 말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서사에 맞지 않는 군더더기를 잘라낸다는 것인데, 이말인즉 항상 그 다음 등장할 사건이 존재한다는 말이자, 동시에 그 장면은 서사와 연결이 될 거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 된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하나의 <사건>으로서 의미를 갖게 될 장면들, 그것이 바로 소설적 장면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네들이 각자의 삶에서 원하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 주제의식이 뭐가됐던 간에 일단은 지금 이 순간들이, 비록 지금은 별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나중에 서사가 끝났을 때는 의미가 있었던 장면으로 재평가받기를 바라는 마음. 삶이 의미로 충만했으면 하는 바람. 매순간을 <사건>으로서 살아가는 역동적인 활력에 대한 예찬. 소재나 주제의식을 떠나 소설이 가지는 <재미>의 궁극적 원천이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근본적인 형식에 똬리를 틀고 있지 않을까. 끝.
기다렸습니다. 생일 선물로 받아가요.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생일이야? 축하한다. 이건 너 생일인지 모르고 썼으니, 그냥 넘기고. 자정 넘어가기 전에 선물로 하나 더 써서 올려야겠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소설을 많이 써보고 고민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얘기들을 해주시네요.
나야말로 잘 읽어줘서 고마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생각나네요. 또는 프랙탈 이론.
기하학엔 조예가 없어 프랙탈은 모르겠고,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좀 엮어볼 수 있는 주제이긴 하지. 그나저나 <시학>을 떠올릴 수 있으면, 재미난 글도 좀 적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적어봐, 궁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