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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중계인> 없는 웹소설의 즐거움



어디서부터 엇나간 것일까? 문단의 사정은 그 병폐가 고착화되어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를 가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하루키류의 겉만을 핥아 너무도 쉽게 허무주의와 감상주의에 빠져들었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문제인 것일까? 소련이 무너지며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나고, 그 다음 시대를 향한 상상력이 고갈되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순수/장르를 나누며 고매한 문화엘리트주의에 빠져서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했기 때문일까? 알 수 없구나, 문단아. 허나 확실히 너는 그 자리에 위태롭게 서있다. 어쨌거나 독자들과는 괴리되어있다. 평론가와 작가는 골방에 뒤집어 누워 서로를 빨아댄다.「69」


작가는 등단이 되고 작품을 낸 뒤에, 또 다른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수>가 된다.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공모전의 심사위원이 되고, 그러다보면 문학원로가 된다. 공모전은 평가체계, 어떤 식으로든 기준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기준은 곧 권력이 된다. 여기에 스탈린의 <투표하는 자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투표를 집계하는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명언을 얄궂게 구겨 넣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교수>가 된 자들에게 변명이 없는 건 아니다. 소설로 먹고 살 길이 없어 시간강사를 뛰다가 교수가 된 게 어찌 규탄 받아야할 잘못일 수 있겠는가? 여기엔 생계형범죄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안타까운 시선이 녹아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이 모든 게 악순환의 고리를 계속 돌아가게 만든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건 악순환이 아니라, 그냥 원래 문학이 그런 것이라는 허무주의자와는 나눌 말이 없다.


기준은 곧 문화가 된다.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글이 기준이라고 배운 지망생들에겐, 대개는 헐벗은 몸으로 이 권위에 대항할 수 없기 마련이다. 잃을 게 없는 자는 무서울 게 없다고 하지만, 지망생들에게 미래에 쟁취해야한다고 여기는 <평판>이라는 재산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기준에 고개를 숙인다. 공모전 제도는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구조다. 문이 여러 개라면 문지기가 곧 권력일 수 없다. 막힌 길이 있다면 다른 길로 가면 되니까. 하지만 통하는 길이 하나라면, 그 문을 지키고 있는 자는 어떤 식으로든 권력이 될 수밖에 없다. 본인이 권력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심사위원>들의 맹목은 이 지점을 바라봐야 비로소 성찰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뽑은 작가는 무럭무럭 자라 <교수>가 될 것이고, 곧 좀 더 좁은 문을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다. 상아탑은 남근이 아니라 딜도다. 따라서 상상력만 뛰어나다면 즐기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는 일도 <소설쓰기>가 아닌가? 완벽한 조건이다.


문제의 핵심은 뭔가? 그건 비대해진 <중계인>이다. 평론가, 심사위원, 교수, 꼰대선배, 꽉 막힌 편집자, 권위를 덮어놓고 경배하는 문인종교집단…… 작가는 독자와 1:1로 만나야 한다. 여기에 중계인이 끼이면 중계인의 취향과 선택에 이 관계가 일그러진다. 일그러진 권위는 서로를 보지 못하는 장막 속에서 생성된다. 독자가 아닌 중계인을 만나는 작가는 딱히 낙타도 아닌데 바늘구멍 같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려 제 몸뚱이를 줄이기 바쁘고, 독자는 중계인의 도장이 찍힌 작품들만 만나게 된다. 이 교리문답이 지루하니, 눈을 일본으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유럽으로, 그리고 남미로 돌리게 된다. 그리하여 이곳엔 남한의 절대적 인구수의 부족, 번역되기 어려운 한국어의 폐쇄성, 신자유주의적 풍토, 그리고 이 모든 걸 뭉뚱그려 말하는 <책 읽지 않는 한국인> 운운하는 변명들만 가득하게 된다. 이 허무주의는 악순환의 대미를 장식하며, 한 번 더 바퀴를 돌린다.「플레이볼. 좋아, 다시 한 번 더!」


무엇보다 조명되어야할 웹소설의 가능성은, 권위의 직접적이고도 과격한 타파다. 웹소설은 현재에 제기되는 수많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가능성 하나만으로 주목되어야 한다. 아니다, 이런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미 문단 빼고 다 주목하고 있으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