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결핍된 자가 바라보는 <완성>의 고루함
내가 생각건대, 글쓰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나는 <완성>형이고, 또 하나는 <변화>형이다. 오늘은 전자인 <완성>형에 대해서 짧게 써보려 한다. 이 유형의 작가군이 사로잡히는 것은 단연 자신에 대한, 혹은 자기 글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어떤 <결핍>이다. 이 결핍의 종류는 여러 가지 인데, 떠올리는 소재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서사전개의 세련미, 혹은 고혹한 문장력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작가는 자신이 적은 작품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며, 계속해서 퇴고를 거듭하려고 하거나, 혹은 아예 몇 줄 적지 못하고 소설을 중단하기 부지기수다. 전자의 경우는 프로가 되고, 후자의 경우는 아마추어가 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 작가군이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라는 점에는 서로 다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결핍>의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어떤 완성된 무언가를 상정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때워서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최대맹점은 애초부터 상정하는, 혹은 무의식적으로 어렴풋이 그려보는 저 <완성된 무언가>라는 기준 자체이다. 무슨 플라톤식의 이데아도 아니고, 이 <완성 그 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 대개 이 기준은 기존의 작가군이나 문학사조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위, 권태로운 과거의 망령, 끝나지 않은 황혼 속에 있는 우상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작가에게 어떤 결핍됨을 강요하며, 그리하여 작가에게서 결핍이 발원하도록 만든다. 결핍은 창조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건 결핍이 아니다. 결핍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이 점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생각할만한 단초가 생겨도 그 끈을 따라 감히 내려가 볼 생각을 못한다. 하늘 위에서 신이 말한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경배하자.「아멘.」
스스로를 쌓아올려야 할 작가들이 스스로가 아닌, 이들이 부르짖은 결핍을 메우려고 노력하게 되는 현상은, 엄마의 신경질에 원하지도 않는 피아노 학원에 가는 아이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제대로 놀 수 있을 리가 없지. 체르니 앞에 의기소침해진 아이가 중얼거린다.「나는 예술적 재능이 없어. 나는 너무 모자라. 아무것도 만족시킬 수가 없어…….」더 슬픈 것은 이런 사고방식은 처음부터 도달해야할 어떤 지점을 강렬히 의식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조금 비약을 해서, 사회적으로 가장 많이 잃은 자들이 가장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것과 진배없는 현상이다. 부족함에 고착된 자의 사유는 모두 이 지점에서 눌어붙어있다. 스스로의 욕망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기에, 또한 그럴 능력이 거세당했기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권위뿐이다. 생각들은 근본적으로 회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루한 원반을 그리며 진행된다. 주제의식, 문제의식, 문체, 서사스타일, 그리고 하다못해 주인공 성별을 뭐로 할 건지조차도 자기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한다. 아이는 부모를 찾고, 선생의 지침을 찾고, 학원의 배치표를 찾고, 또, 그리고 또, 또, 하여간 또 뭔가를 찾겠지. 끝.
전에 썼던 이야기와 흡사한 이야기 같다고 느껴지네요.(제가 잘못 이해한 건지는 몰라도) 너무 완벽주의적 성향이면 소설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문장력에 자학하고 그런다는 내용으로 이해했습니다. 후자인 <변화>는 무엇인지가 궁금하네요..
아아, 그렇긴 해. 7번 글에서 나온 주제를 <보수성>부분으로 잔가지를 쳐봤지. 그쪽으로 늘 경계하고, 또 고민하거든. <결핍>에 대한 생각들을 더 심화시키려 노력 중이기도 하고. <변화>는 떡밥 같은 거지. 글 쓸 날들이 많으니, 어딘가에선 풀리겠지. 잘 읽어줘서 고마워.
가능하다면 <변화>에 대한 걸 앞당겨 줬으면 좋겠다.
완벽은 없음. 완벽이라는 목표는 계속 변함. 멈추지 않음. 따라갈 수 있지만, 붙잡을 수 없음. 파멸의 인도자와 비슷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