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합체>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뭘까?
인간이 뭐냐는 질문을 던지다보면, <의지>가 곧 인간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고 고로 존재한다>로 설립되는 코기토보다는, 그 이전에 본능처럼 존재하는 충동의 에너지에 주체를 놓아보자는 시도라고 볼 수 있는데―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으나―문제는 이들은 마치 그러한 의지 그 자체가 있는 것 마냥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생(生)의 의지>나 프로이트의 <리비도>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마치 본인이 의지를 다 파악하고 있고, 또한 그 자신만의 것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데, 그런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건 그냥 언어의 환상 같은 것이다. 대개 언어는 그 지시대상을 가지니까, <의지>라고 적었을 때 명확히 잡을 수 있는 지시대상이 구획 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거지. 의지가 뭐냐고? 기본적으로 그것은 감정의 다양함이다. 혼자가 가만히 있을 때 폭발하듯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상대방이라는 외부와 마주할 때 발흥하는 것이다. 누구를, 어떤 환경의, 어떤 분위기 속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의지는 달라진다. 이런 점에서 의지는 나의 것이 아니라, 차라리 환경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근육이 기억하는 습관들이 작용한다. 의지를 어떻게 느끼나?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을 때 머릿속으로 <저 남자와 같이 있고 싶다>고 인식하나? 아니, 그 이전에 얼굴의 홍조나 땀, 혹은 남자라면 발기 같은 신체적 반응으로 좀 더 빨리 인식된다―이런 걸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문제는 이런 신체적 반응이 반복적인 연습이나 충격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충분히 각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중세의 수녀들이 남자와 관련된 추잡한 일을 겪었을 때 받는 기절과 같은 충격은,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훈련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말이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습관, 내가 모르는 내 안의 타자성. 그건 누구지?
이 관점을 더 발전시키면 문화적 정서나 거대한 구조적 틀 같은 것들을 도출해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흔히들 의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명령하는 자>로서의 자아와 <복종하는 자>로서의 신체 따위의 이중적 도식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깝게도 이 맥락에선 <명령하는 자>가 내가 모르는 어떤 외부의 무엇이고, 자아는 <복종하는 자>에 불과한 노예 같은 것이란 점이다. 인간은 의지 그 자체는 고사하고, 그냥 단순히 자신만의 고유한 의지를 가진 적도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본인이 의지를 가진다고 믿는 환상은,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령과 복종이라는 <이 이중성을 무시하고 속여 알지 못하게 하는 습관>에 기초한 것일 뿐이다. 언어적 환상과 그 환상에 자신의 주체를 놓으려는 오만의 합작품.「자만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쾌락이다.」인간이 뭐냐고? 부모에게 학습된, 혹은 그 부모가 바라는 것이 곧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합리화하는 마음, 또래집단의 환심을 사기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취미들, 문화적 영향이나 내력들을 통해 강요되는 표정들의 종합체다. 몇 가지 정신병적 요소들을 무릅쓰고서라도 니체의 요약은 언제나 경청할만하다. <우리의 몸은 많은 영혼의 집합체일 뿐이다.>
소설쓰기가 뭐냐고? 그건 스스로의 몸, 혹은 몸의 관념으로서의 정신에 기록된 수많은 영혼들의 다양체를 나누는 작업이다. 여자에게 미친 돈 후안, 자신을 세상에 맞추려는 수많은 사회화된 인격들, 또 그 반대로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돈키호테들, 숭고함의 서사시를 믿는 아라곤, 악마가 되고픈 은밀한 욕망을 뇌까리는 지킬박사, 소리 지르는 엄마, 무기력하게 술 마시는 아버지, 범인의 눈을 보려는 매그레 형사…… 그 수많은 다양체들을 각기 따로 꺼내놓아 서사에 맞춰 배열하는 것이 개성적인 인물을 만드는 작업이다. 근본적으로 소설쓰기는 일련의 자아와 의지를 나누는 작업이다. 그래서 오만한 자는 소설을 못 쓴다. 쓰더라도 싸구려가 적힌다. 왜냐하면 스스로 안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뽑아내야 하는데, 이런 인물들로 만들어진 종합체가 스스로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전제군주들은 나눔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거든. 무슨 인물을 만들어도 죄다 똑같아 보이는 지루한 구성. 그런 것 따위를 1인칭시점을 통한 한 인간에 대한 심층적 탐구니, 의식의 흐름기법이니, 심리주의이니, 나발이니 하는 헛소리들로 포장하려들지 말라. 걔네들은 그런 거나 포장하라고 만들어진 기법들이 아니니까.「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하느니라.」
그럼 소설을 쓰는 자들은 뭘까? 그들은 왜 스스로의 영혼을 나누는가? 스스로의 몸에 달라붙은 타자의 영혼들을 모두 떼어내어 소설 속에 하나하나 박제하다보면, 결국엔 남아있을 진짜 <자아>같은 걸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일까? 그런데 그런 게 없으면 어떻게 하나? 그 자리에 무(無)와 공허가 있으면 어쩌려고? 염화미소를 지으며 열반(涅槃)이라도 드시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곧 세계라는 범신론적 위안을 얻으려는 종교적 의례 같은 것인가? 반짝이는 별, 환희, 떨어지는 눈물, 허무를 지향할지라도 계속해서 타오르는 열망, 끈적한 정액, 달콤한 목소리, 분노, 이빨 째 뜯어먹으려는 야만, 지루한 관료주의들…… 그리고, 그리고, 그래서 내 안의 우주. 그 속을 산책하는 누군가. 끝.
아직 조회수 10밖에 안됐어! 늦지 않았어! 지워!
왜 갑자기 색깔이 바꼈어. 너무 철학쪽인데?
어머, 나는 철학이랑 문학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 주의라서.
좋은데? 근데 좀 어렵네
좀 더 친절해져봐
독자가 어려움을 느꼈다면, 그건 내가 자기만족식 글을 적었다는 뜻이지. 미안하이. 다음엔 좀 더 풀어서 적어보겠음.
이번건 나도 별로인거 같다. 내가 수준이 낮아서 그런거인지 모르겠지만 - DCW
문학으로 철학을 하려는 무지함이란...
dd
의지가 곧 감정의 다양함이라고 하는 2문단 때문에 반발감을 느끼는게 아닐까요? 상투적인 사전적 의미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정립한 의미를 설파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하는 주장에 따라와야하는 마땅한 근거를 저는 찾기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