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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와 진심



 <클리셰>는 판에 박은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문학용어를 이르는 말이다. 처음에는 상용문이나 시 비평에서 시작된 말로, 백과사전에 예시로 첨부된 알렉산더 포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예술에 재능이 없으면서도 그럴듯하게 멋을 부리려는 사람들>이 간신히 운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몇몇 진부한 표현들에 대한 조소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단다. 물론, 곧바로 이 용어가 굉장한 유행을 탄 관계로, 어떤 표현을 클리셰라고 비판하는 것 자체가 클리셰가 될 만큼의 상황이 되었고, 그런 이유로 우리 시대에는 단순한 문구를 넘어 진부한 스토리에 대해서 <클리셰스럽다>라고 말할 만큼 방만하게 사용되고 있다. 용어의 엄밀한 사용 따위는 결벽증에 걸린 철학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그냥 대세를 따르도록 하자.


 클리셰의 직격탄을 맞은 것은 당연히 장르문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장르문학에는 특정한 서사공식 같은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추리소설의 경우에는 <추리>라는 딱지 붙은 만큼 문제를 해결하는 탐정의 서사가 들어가야 한다. 물론 장르문학에서 이런 클리셰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다. 가령 <괴도 루팡>같은 경우가 그런데, 얘는 종래 정통추리소설의 서사주체인 탐정의 자리에 과감하게 범인을 놔두었다. 최근작품으로는 요시다 슈이치의『악인』같은 경우가 좀 그런 편이다. 또 다른 시도로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이 있겠는데, 핵심을 추리 그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닌, 범인이 그런 범죄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분석해 들어감으로써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이다. 아니면 로베르토 볼라뇨처럼 처음엔 추리소설 냄새를 풍기면서 독자를 유인해놓고, 그냥 추리소설과 별 관련이 없는 순수문학적 내용들을 풀어내는 법도 있고…… 어쨌거나 이때까지 추리소설에 대한 여러 가지 변형시도가 있어왔다는 말이다. 모든 장르불문하고 뻔한 건 지루하니까.


 문제는 이런 변형의 가짓수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바로 그런 이유에서 유행이 돌고 도는 것처럼 추리소설도 적당히 유행 따라 돌고 돈다(일본의 경우처럼, 사회파추리소설의 지루함이 정통추리의 복원을 부르는 예시). 이 한계는 <추리>라고 하는 추리소설의 큰 주제 자체를 버릴 순 없다는 점에 기인하는데, 누가 추리를 하던 간에 어쨌거나 범죄는 터질 것이고, 그러면 그걸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란 점은 변함없다. 하지만, 이쯤 왔을 때 드는 생각은 <이게 문제인가?>하는 생각이다. 이건 마치 추리소설에서 추리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꼴이랄까? 그렇게 따지면 순수문학에서도 인물-사건 구도를 갖고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건 소설 자체가 클리셰스럽다고 비판받아야 하는 대목인가? 어짜라고, 그러면 우리도 누구처럼 독자들 앞에서 4분 33초 동안 백지만 넘겨야하나?


 결국 극단까지 밀고나갔을 때 <클리셰>로부터 자유로운 건 없다. 오죽하면 우리 공자님도「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라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런 점에서 클리셰와 마주한 장르문학의 태도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클리셰의 원래 어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포프의 말을 다시 적어보자면, 클리셰는 <재능이 없으면서도 그럴듯하게 멋을 부리려는>표현들의 총체다. 여기서 <재능>을 진심어린 내면의 토로나 고뇌의 산물정도로 이해한다면, 클리셰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은 그럴듯한 멋부리기가 아닌 온몸으로 돌진해서 적은 문장과 서사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형식이 아닌 그 형식에 담기는 진실성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성유물의 진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으며, 그는 성물에 입을 맞추면서 신비스러운 향기를 느낀다고 했다. 요컨대 성유물이 신앙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그 유물을 만든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들의 변덕으로 대표되는 운명적 파멸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 것인가를 보여준 수많은 그리스비극의 영웅들, 그리고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 운명이 과학물을 먹고 <역사>같은 개념으로 대체되며 표현된 역사적 흐름 앞에 휩쓸리는 인간군상을 표현한 문학적 인물들, 그러다 나중엔 이것도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실존주의적 부조리 같은 얘기들이 나오면서 등장한 실존문학의 배고픈 캐릭터들…… 여기서 솔직히 말해 노인이 큰 고기 잡다가 파멸하는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서사에 특별함이 뭔가? 노벨상 받아서 특별한 거냐? 헤밍웨이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서사 그 자체만 본다면 저 소설은 문학사적 클리셰 그 자체다. 정말이지 문학사조만 달리했을 뿐, 주제의식이나 서사구도 자체는 2천년도 넘는 세월에 걸쳐 덧칠해져온 부분이 아니던가?


 하지만『노인과 바다』에선 감동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몇 년 후 자기 머리를 권총으로 날려버린 헤밍웨이의 고뇌가 느껴지니까.「하지만 그들에게 저 고기를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아냐, 그럴 자격이 없어. 저렇게도 당당한 거동, 저런 위엄을 보면 저놈을 먹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어.」자신이 이 얘기를 왜 적어야 하고, 왜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호소력. 이건 그 작품이 가진 철학적 깊이나 수사의 위용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고? 너는 편지 받아봤냐? 혹은 친구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해보거나, 혹은 받아봤냐? 그렇다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거라고 본다. 꼭 특별하거나 휘황찬란하지 않아도, 사람이라면 진심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반대로 알맹이 없는 지적담론의 공허함과 비루함에 대한 건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본다.


 여기서 작가가 담아내는 말하는 이의 눈빛 떨림, 목소리에 묻은 울음기 같은 건 세부사항일 뿐…… 중요한 건 진심이다. 낭만주의가 끝난 지 2세기도 넘어가는 시점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낯간지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부분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 부분이 불가능하다면, 사실 문학 같은 건 별 의미가 없는 짓거리일지어니…… 그렇다면 소설을 쓸 바엔 차라리 안락사의 보편화를 위해 투쟁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