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의 부탁으로 커뮤니티와 애니 등등의 기타 취미는 끊기로 했기 때문에 작별인사 겸 첫 글을 이렇게 써본다.


사랑을 하는 데에는 상대에게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더라. 중요한 건 내가 상대에게 얼마나 줄 수 있는지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가난해도, 상대가 이성과의 경험이 많아도, 상대가 좀 모자라고 바보 같아도 그런 부분조차 내가 품어주고 채워줄 용기가 필요한 거다. 내가 가난하고 내가 이해심이 딸리면 어쩔 수 없겠지. 그건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내게 있는 다른 게 부족한 거니까. 


사람은 저마다 결핍을 가지고 있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서로 그 결핍을 무조건 채워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을 다른 이가 채워주는 걸 보면서 그 사랑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우리 부모님께선 대학 졸업 직후 결혼하셔서 세 달 뒤에 나를 낳으셨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배려해주신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고 있다.

아버지께선 의대에 다니는 기초생활수급자셨고, 어머니께선 교수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앞둔 부유한 집안의 사랑받는 둘째딸이었다. 당시에 아버지께선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외갓댁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한다. 외가댁이 아버지의 미래 소득만을 보고 기초생활수급자인 집안과 사돈을 맺을 만큼 돈이 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절반 정도가 의사나 변호사 혹은 연봉이 억 단위인 집안이었으니까.

그래도 두 분은 결혼하셨다.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뿐이었다. 혼수도 전부 어머니께서 혼자 다 해가셨고, 금슬이 좋으셔서 내 뒤로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는 바람에 내 양육까지 외가댁에서 도맡아 하셨다. 감사하게도, 나는 양쪽 집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단 한 번도 내가 짐이 된다는 눈치를 보지는 않았었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는 몰라도 나는 우리 가족을 정말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 연애 경험은 꽤나 화려한 편이다. 중학교 시절, 아이돌 지망생이었던 친구 동생을 알게 되었는데 맨날 집에서 보다보니 정이 들었는지 사귀었었다. 연애 금지 규칙도 있고 내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헤어졌는데, 그 이후로 다른 여자애와 몰래몰래 잘 만나고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은 첫사랑을 만나 3년을 연애도 하고 헤어지고 재결합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장거리 이슈로 헤어지게 되었다. 남친이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내가 서운한 마음에 막말을 했었다. 아마 서로에게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더 괜찮은 이별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기만 하다.

대학에 와선 같은 과에 대기업 대표의 장남이 있었는데, 키도 정말 크고 잘생긴데다 굳이 말하자면 얼굴이 내 취향이었다. 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이라 다툴 일도 거의 없었고, 모솔이면서 주변 친구들 덕분인지 연애 센스가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완벽한 상대이지만 결국 헤어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서로 안 맞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남자친구는 이들과 비교해서 남들 눈에는 조건이 좋아보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도 평균보다 조금 더 큰 수준에, 콩깍지 때문인지 얼굴이 잘생겨보이긴 하지만 집안도 심각하게 가난하고, 알바도 내가 막아서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내 자취방에서 내 돈으로 먹고 사는 중인, 남친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한량 인생을 살고 있다. 보통은 이러면 욕을 먹지만, 내가 괜찮은 이유는 내 쪽이 경제적으로는 정말로 많이 여유로워서일 뿐이다. 아니, 정확히는 여유가 되는데 이 여유를 남자친구가 이용해도 괜찮기 때문이겠지.


지금의 남자친구도 대학에서 만난 상대이다. 내가 나온 학교는 한국에서 명문대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곳이었다. 우리 아버지께선 기초생활수급자이셨지만 독학으로 의대를 가셨다. 게다가 지금은 의사 중에서도 유능하셔서 환자 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으시기에, 나는 노력파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가난한 집안에서 학업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면서 대학에 입학하고,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어떻게든 학교를 졸업하려 하는 그 모습이 기특했다.

나도 어머니도 연애 경험이 적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께선 예쁜 걸로도 유명하셨고, 아버지께서도 그 소문 덕분에 어머니를 만나셨다. 그만큼 어머니께선 연애 경험도 많으셨고, 구질구질한 관계로 고생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그만큼 예쁜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한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남친에게 똑같이 들은 날은 짜고 친 것 같아서 신기할 지경이었다. 남친도 아버지도 연애가 처음이라 질투를 할 법도 한데 전부 이해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이 점도 내가 남친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중고등학교 졸업 앨범이나 대학교 때 찍은 단체사진들을 보면 전남친들이 나온다. 남자친구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 외모가 부족할까봐 걱정하곤 했는데, 물론 전남친들이 못생겼다는 건 아니지만 내 눈에는 지금 남자친구가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제일 잘생겨 보인다. 만난 지가 5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방구 소리가 귀엽게 들리니 내가 미친 것 같기도 하다. 연애 초보다 살이 쪄서 말랑해진 것마저 사랑스럽고, 한껏 꾸미고 나오는 것도 좋지만 그냥 아무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나 입고 있어도 잘생겨 보인다.

내가 하루종일 붙어있으려고 하면 피곤하더라도 꼭 내 자취방에 와서 나를 끌어안고 자고, 나보다 먼저 일어나면 항상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둔다. 이게 연예인이 될 만한 얼굴이나 대기업을 소유한 부와 능력보다 나에게는 더 중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게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상을 꿈꾸게 해준 사람이 지금의 남자친구이다.


지금까지 만난 전남친들도 분명 내게 과분할 만큼 좋은 사람들이었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줄 수 있는 것과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달랐고, 내가 줄 수 있는 것과 그들이 바라는 것이 달랐기에, 단지 그 이유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어떤 미움도 원망도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해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그들도 각자 소중한 사람을 만나서 아름다운 사랑을 하길 바라고 있다.


한때는 나도 나보다, 우리 집보다 무능한 쪽은 만나지 말아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외모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나를 잘 모르면서 겉모습만 보고 접근하는 속물로 보인 적도 있었으며, 나처럼 모든 조건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본인)을 차고 미국으로 가버린 첫사랑을 원망하기도 했다. 나를 가질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 이에게 젊음을 주기 싫어서 일찍 결혼하기 싫다는 생각도 했었고, 남자는 다 짐승이라는 생각에 첫경험도 누구에게도 주기 싫었었다.

하지만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보니 내가 보는 세계가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알 것 같다. 내 멋대로 세상을 재단하고 상대를 판단해왔다니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으며 부끄러운 태도인가... 요즘 많은 반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사랑을 가장 소중하게 받아주는 상대를 만나서 내년에 결혼을 한다. 나의 가장 소중한 처음을, 가장 소중한 젊음을, 나의 미래를 그 사람에게 선물할 것이다. 그 사람에게 갖다바치는 게 아닌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다들 언젠가 자신의 세상을 넓혀주는 그런 이를 만나서 행복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하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무리한다. 좋은 저녁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