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백내전종결 후 소련은 심각한 경제난에 휩싸였다.

애당초 그들이 타도했던 제정러시아의 산업구조는 놀랄 정도로 빈약했고 3년 넘게 지속된 혁명과 내전은 그나마 있던 경제기반 마저 파괴되었다.

게다가 내전 이후, 무력으로 소련을 몰락시키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서구 열강은 소련을 굶어죽이기로 결정했고 모든 거래를 봉쇄했다.


모든 것이 모자랐다.

거의 모든 도시에서 식량난에 시달렸고 식량을 요구하는 전보들이 크레믈린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부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전시공산주의를 표방했다,

모든 사적 거래를 즉각 중단하고 모든 경제의 급속한 국유화를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모든 생산물들을 정부의 통제에 귀속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뒤따랐다.

가장 크게 저항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사실 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들이 원한 것은 과거와 같은 귀족들에 의한 농노제 내지는 준 농노제 상태에서 벋어나 사유지를 갖고, 그 경작물을 자신들이 소유하는 것뿐이었다.―오죽하면 혁명당시 ‘농민들의 표어가 노동자에게 권력을! 그러나 토지는 농민들에게!’ 옅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소련이 전시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토지와 그 경작물마저 국유화시킨 것이다. 결국 농민들의 전국적인 반발이 이어졌다. 1921년 2월 한 달 동안만 118건의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게다가 전시공산주의는 경제난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21년 2월, 페트로그라드 인근의 해군요새 크론슈타트 섬에서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당혹시킨 봉기가 일어났다.

<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의 지도, 가운데 보이는 섬이 크론슈타트다.>


사건은 1921년 2월말 경, 크론슈타트의 병사 소비에트에서 노동자들의 자유, 전시공산주의의 페기, 새로운 농민 정책, 소비에트 내에서의 자유선거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시작됐다. 보기에 따라서는 소련자체를 뒤흔들 제3의 혁명과도 같은 이 결의안을 칼리닌은 병사 소비에트의 해산과 주모자 체포로 응수했다.

흥분한 병사들은 ‘볼셰비키의 폭정’타도를 외치며 볼셰비키 인민위원을 체포, 투옥시켰다. 마침 제10차당대회가 진행 중이던 소련은 당황했다. 소련은 3월 5일 이들을 설득하기위해 트로츠키를 크론슈타트에 파견했다. 트로츠키는 그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지만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에겐 불가능한 요구였다.

협상 이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다. 그들의 선배 전우들이 혁명을 위해 헌신했던 것에 비해-러시아 혁명, 1905년과 1917년혁명에서 수병들의 역할은 컷다.―(농촌에서 새로 징집된)그들은 혁명의 단물만을 요구한다.”

<1905년 러시아 혁명중 전함 포템킨의 선상 반란을 다룬 영화 전함 포템킨, 1917년 전함 오로라가 재증명하듯 러시아혁명에서 수병들의 역할은 무시할수없었다.>

결국 소련은 강경진압을 결정한다.

이제 내전이 막 끝난 시점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혁명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이 볼셰비키들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백군의 위협이 사라진 것도 아니지 않는가? 백군의 잔당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브랑엘장군이 7~8만여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등의 지원을 받으며 터키에 주둔 중이었다. 그런 판국에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이 백군과 손잡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핀란드만의 얼음이 녹기 전에 크론슈타트를 점령하라!



<크론슈타트를 점령하기위해 진격하는 적군들>



트로츠키는 투하체프스키에게 크론슈타트봉기의 진압을 명령했고 대규모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때부터 해군기지로 조성되어 온 크론슈타트를 점령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적군 병사들이 빙판위에서 사라져야 했다.

공세가 좌절된 후, 적군의 사기는 급속히 저하됐다. ‘혁명동지’들에게 총을 겨눠야한다는 점과 경제난의 원인인 ‘전시공산주의’체제를 위해 싸운다는 점 역시 적군의 사기를 낮추고 말았다.

볼셰비키들은 초조했다. 이대로 핀란드만의 얼음이 녹아내린다면, 정말로 백군의 지원이 크론슈타트로 쏟아져 들어올지 모른다. 아직 상륙전도 공수부대도 그 개념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요새화 된 섬, 크론슈타트는 더욱더 난공불락이 될 테고 나아가서 소비에트 자체를 뒤흔들게 될것이다.

결국 말 많고 탈 많은 전시공산주의는 3월15일, 레닌이 신경제정책(NEP)를 제시하면서 폐지되었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 명분 성을 되찾았다고 판단한 투하체프스키는 다시 공격을 명령했고 얼어붙은 핀란드만을 덮어버린 우라돌격 앞에 크론슈타트는 함락되었다.

봉기에 참여했던 수병들 중 800명이 사망했고, 2500명이 구속되었다. 봉기 주모자였던 페트리첸코를 비롯한 8000명은 핀란드로 망명했다. 볼셰비키 쪽의 사상자, 실종자는 150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하엘 투하체프스키.크론슈타트봉기진압당시 사령관. 훗날 49세로 소련군 최연소 원수가 되기도 했지만 스탈린에게 숙청당한다.>



그렇다면 크론슈타트봉기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필자도 연구 초기단계다 보니 확정짓긴 힘들다. 게다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입장 차이로 인해 사건에 대한 정론이 존재 하지 않는다.

소련이라는 국가를 어떤 식으로라도 인정하는 학자(레닌주의든 트로츠키주의든, 스탈린주의든)들은 크론슈타트봉기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한다.

그들은 크론슈타트봉기가 혁명에 대해선 무지몽매하고 이기적인 농민출신의 수병들이 아나키스트들의 유혹에 빠져, 헌신적이고 혁명적인 선배전우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일으킨 폭동으로 폄하한다.

게다가 이들이 백군세력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었고 이들이 성공했다면 혁명은 좌절되고 제정러시아사회로 되돌아갔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립하던 볼셰비키 내 모든 분파들이 모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에 찬동을(심지어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이 지지를 표한 파업 중이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도!)표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사실 스탈린 집권 후, 발생한 소련 내 문제는 스탈린에게 떠넘기면 끝이지만, 크론슈타트봉기는 명백히 레닌과 트로츠키의 집권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레닌, 트로츠키주의자들도 크론슈타트봉기를 폄하할 수밖에.>


그렇다면 서구 우파학자들의 시각은 어떨까?

그들의 기본 시각은 다음과 같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잔학성을 여지없이 보여준 사건이다.’

그것뿐이다.
(국내 번역서적 기준이니 이외의 자료를 아시는 횽들은 아낌없는 지적을...)


이런 두 주장과 달리 크론슈타트봉기를 높게 평가해 주는 것이 아나키스트들이다. 이들은 크론슈타트봉기가 소비에트라는 체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볼셰비키 독재에는 저항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3의 러시아 혁명이라고 추앙한다. 그리고 이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결국 소련도 폭압적인 국가권력이라는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사실상 크론슈타트봉기는 국내에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국내의 어떤 러시아역사책에서도 2페이지 이상 할애하지 않았다(장담하건데 2페이지 이상 할애했다면 그 책은 이념서다.)

구미가 당기는 사건이긴 하지만 국내에선 너무나도 자료를 찾기 힘든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