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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 내리는 비는 왠지 싫지는 않네.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비 오는 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체격이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나지만 우산은 그런 내 몸마저도 완전히 가려주지 못했고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항상 티셔츠와 바지를 잔뜩 적신 채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비 오는 날도 나름대로 분위기 있지 않냐는 친구의 말은 언제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었다. 그건 네가 비 오는 날 만날 애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부러움과 질투심이 반씩 섞인 듯한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볼멘소리를 내뱉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비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오히려 길고도 길었던 스무 살 여름의 끝매듭을 짓겠다는 듯이 내리는 비가 내심 반갑기도 했다. 이 비가 끝나면, 여름도 끝나겠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얇게 친 커튼 너머로 비치는 아침 햇빛과 끊임없이 들려오는 빗소리를 뒤로 하고 핸드폰을 체크했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고 구독하던 유튜브 채널에 새 영상이 게시되었다거나 어플리케이션 업데이트를 알리는 시시한 알림뿐이었다. 왠지 맥이 빠졌다. 태양이 마지막 여름을 불태우겠다는 기세로 이글거리던 지난 며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아침이지만 사람들의 하루하루까지도 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아니면 비 오는 날이든, 학생들은 학교에 가고 직장인들은 직장에 간다. 그 뿐이다. 차라리 비보다는 시간의 흐름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무슨 날씨든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들도 오늘 같은 주말만큼은 집에서 쉴 수 있으니.


아-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켠 뒤 핸드폰을 매트리스 위에 던져 버렸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멍청한 표정을 한 채 대충 몸을 씻었다. 조금 젖어도 괜찮을 법한 복장을 챙기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냥 발이 닫는 대로 걸어볼 작정이었다. 방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야 비를 맞으며 걷기라도 하는 게 낫다. 어쩌면 오늘 그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2년 전부터 갑자기 나를 지독하게 옭아매온 그 이상한 느낌이다. 어디 있는지, 나와는 무슨 관계인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


아마도 그 날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어느 날, 아무런 기억도 없이 히다 산맥이라는 곳의 어느 동굴에서 갑자기 깨어나버린 적이 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장소를 왜 찾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짚히는 구석이 전혀 없다. 같이 히다로 왔었던 츠카사와 오쿠데라 선배에게 질문해 보아도 만족할 만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 두 사람이 나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은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 해도 찾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정보가 전혀 없는 이상에야 사막에서 바늘 찾기밖에는 더 되겠는가. 결국 그 날의 여행은 아르바이트 시간을 바꿔준 신타에게 핀잔을 듣는 것으로 끝났다. 말 그대로 끝나 버렸다.


아직도 기묘하게 느껴지는 지난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현관 문턱에 앉아 풀린 신발끈을 묶었다. 흰 운동화가 때를 많이 타서 조금 거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바깥 세상의 회색빛으로 만연한 먹구름의 행렬이 나를 맞아주었다. 순간 나른하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가기가 조금 망설여지는가 싶었는데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타키냐? 나 신타인데."


"어. 아침부터 뭔 일이냐."


"우리 알바하던 레스토랑 근처에 새로 카페 개업한 거 아냐? 저번에 그 근처 지나가다가 발견했는데. 타나카랑 스즈키가 전에 갔었다는데 인테리어가 괜찮다더라. 할 일 없으면 한 번 가볼까 싶어서. 예전에 하던 그거 있잖아."


고등학교 때 나는 방과 후 부활동이 없는 날에는 친구들과 학교 주변의 카페들을 돌아보는 취미가 있었다. 아마 그걸 말하는 것 같았다.


"난 괜찮은데. 지금 집에서 나가는 중. 넌 어딘데?"


"거기로 가고 있어. 장소는 전화 끊고 문자로 쏴 줄 테니까 빨리 와."


아무래도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냥 끌고 갈 생각이었던 게 아닐까. 전화를 끊자마자 그 카페의 위치 정보가 수신되었다. 지하철로 금방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 * *


오늘은 오랜만에 언니의 자취방에 놀러가는 날.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자주 놀러갔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갈 때마다 '오랜만에'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어른이 된 이후로 가뜩이나 많지 않은 말수가 더 줄어들고 가끔은 우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언니지만 그래도 나는 언니가 좋다. 솔직히 말하자면 언니가 그렇게 변해버린 것을 보며 그게 '어른 티'가 나는 거라고 생각해서 조금의 동경심을 가지기도 했다. 섭섭한 점이 있다면 언니가 나에게 어떤 고민도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예전부터 늘 그래왔다.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지하철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편하게 앉아서 가고 싶었지만 치마를 입었으니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최대한 오므려야 했다. 게다가 거리는 꽤 떨어져 있지만 같은 칸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까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꽤 잘생긴 것 같기도. 삐죽삐죽한 머리스타일이 마치 언니의 보물, 고슴도치 인형들을 떠올리게 했다.


하~암. 하품이 나왔는데 무심코 입을 가리지도 않고 크게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너무 마음을 편하게 가진 탓이려나? 고슴도치 인형이 나에게 눈치를 주듯이 슬쩍 시선을 던졌다. 부끄러웠다. 그래도 난 다음 역에서 내리니까, 괜찮겠지. 다행히 고슴도치는 따라오지 않았다. 단지 나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졌을 뿐. 기분이 조금 미묘했다. 아는 사람은 확실히 아니었는데.


바깥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검은색이나 회색 같은 무채색 계열의 우산을 쓰고 있는데 혼자 유아틱한 노란색 우산을 쓰고 지나가려니 혼자 지나치게 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지금 비가 그쳐 버린다면 습하기 짝이 없는 공기에 덥기까지 하겠지. 그런 날씨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어제까지 많이 겪어오기도 했고. 그런 의미에서 비는 반가운 존재였다.


잠깐 어떤 연립 주택 아래로 쪼르르 들어가 우산을 접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잔뜩 낀 먹구름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소나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비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적당한 세기로 그저 가만히 내릴 뿐인 비. 감상에 젖다 보니 문득 언니 생각이 났다. 언제부턴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화를 끝맺는 버릇이 생긴 언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언니에게 전혀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슬펐다.


'가끔은 너무 꽁꽁 숨겨두지만 말고 털어놓는 것도 좋을 텐데.'


다시 우산을 펴고 거리를 걷다가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군것질거리라도 사서 갈 생각이었다. 연락은 안 했지만 아마 언니는 집에 있을 것이다. 주말 아침부터 밖에서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일단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남자친구도 없고. 애초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는 동년배의 남자가 텟시 오빠 말고 더 있었나? 전학 온 뒤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에서는 친구를 많이 만났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과자 몇 개와 언니가 좋아하는 캔 커피를 계산대에 올렸다.


"650엔입니다."


"여기요."


"담아드릴까요?"


"네."


담아주지 않는다면 저 많은 과자를 전부 손에 들고 가라는 소리야? 내심 점원이 스스로 말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리길 바랐지만 특별히 아차 하는 언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거스름돈으로 받은 50엔 동전을 지갑에 쑤셔넣는 동안 편의점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 * *


우산의 물기를 적당히 털어낸 뒤 편의점 문을 열었다. 계산대 앞에서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지갑과 핸드폰과 동전을 가지고 낑낑대고 있었다. 모자를 고쳐 쓰다가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그 아이가 먼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어딜 보자, 시계는 열한 시를 살짝 넘은 시각을 가리켰다. 츠카사와 만나기로 한 건 열두 시니까 아직 제법 여유가 있다.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거리도 잠깐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이렇게 일찍 길을 나선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과 만날 수 있을까. 슬슬 20대 중반으로 들어서고 있는 나지만 동시에 아직도 야무진 면이 없고 아이 같은 품성이 있는 나였다.


편의점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목적 없는 편의점 방문의 대가였다. 빈손으로 나갈 수는 없었기에 결국 별로 마시고 싶지도 않은 인스턴트 커피를 하나 사야 했다. 편의점을 나온 뒤 벽에 가만히 기대 서서 적당히 씁쓸하고 적당히 달콤한 편의점 커피 특유의 맛을 음미했다. 비가 내리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그러고 보니 그 날도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었다. 타키와 츠카사와 함께 히다의 어느 여관에서 하루를 묵은 뒤 타키를 홀로 두고 둘이서 도쿄로 돌아갔던 날. 정작 히다를 방문한 이유를 아직까지도 전혀 떠올릴 수가 없기에 더욱더 인상에 깊게 새겨졌던 날. 타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아도 자기도 모른다는 대답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타키에게 다가가는 일이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처음에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했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연심을 품게 되었다는 게 이상하기도 했지만 또래 남자애들(특히 신타)과는 달리 섬세한 면이 있는 아이다 보니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히다를 다녀온 날 이후부터는 타키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 생긴 것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장벽을 허물어보려는 시도도 물론 해 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얼마 후에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며 타키와의 접점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래도 이젠 전부 지나간 일이니까.'


물을 머금어 색조가 조금 짙어진 보라색 우산을 땅에 내려놓고 핸드백 안을 더듬었다. 따지고 보면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도 그 날부터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치익-. 하안 연기가 비 내리는 거리의 풍경 속으로 퍼졌다. 제법 멀리 퍼져나가는 듯하던 연기들은 떨어지는 무수한 빗방울의 정경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덧없이 사라져 갔다.


거리는 한산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때문에 아침치고는 다소 어둑어둑해서 전체적으로 심하게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였다. 데이트 약속을 잡기에 좋은 날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에는 나 역시 다시 우산을 받쳐들고 천천히 걸으며 그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녹아들었다. 건물 안에서 바라보는 비는 낭만적일지 몰라도 직접 비를 맞으면 차가움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몸소 깨닫는다. 그나마 여름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는지 빗물은 완전히 차갑다기보단 살짝 미지근한 정도였다.


여전히 열한 시 삼십 분을 넘지 않은 시각,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츠카사는 아마 약속 시간 10분 전쯤에 올 것이다. 꼭 그 정도의 여유를 두고 만났었으니. 카페 앞에서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한숨을 쉬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혹시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 * *


카페의 첫 손님은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젊은 여자였다. 꽤 꾸미고 온 것으로 보아 아마 여기서 남자친구와 만날 예정인 게 틀림없다. 그런 목적이 아니고서야 여자 혼자 아침부터 카페에 올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는다. 바지 주머니가 직육면체 모양으로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었는데 크기와 형태로 보아서는 담뱃갑인 듯했다. 그럴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바깥 공기는 빈말로도 도저히 상쾌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더운 것보다는 비가 오는 게 낫기는 하지만 대신 비 오는 날 특유의 냄새와 습기가 그 약간의 상쾌감을 전부 상쇄해버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내 주변을 온통 감싼 연기 때문에 오래 있다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질 것만 같았다.


담배를 피우며 늦여름의 비를 감상하는 일은 그럭저럭 서정적이라면 서정적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지루하기도 했다. 행인이라도 많이 지나다닌다면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토요일 아침에다 비까지 내리니 걸어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마저도 전부 우산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방금 카페 안으로 들어간 여자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반쯤 억지로 억눌렀다. 아마 그냥 핸드폰을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거나 화장이라도 고치고 있겠지. 저 여자가 내 지루함을 해결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던 도중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한 번 진동했다. 사야카의 메시지였다.


[미안, 좀 늦을 것 같아. 그래도 기다려줄 수 있지?]


초등학교 때부터 내려온 저 유서깊은 버릇을 어떻게 해야 고쳐줄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온 만큼 그런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게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와]


아마도 또 너무 무뚝뚝하게 보내지 말라는 핀잔을 들을 듯한 딱딱한 문자를 전송한 뒤 바로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벽면에 아슬아슬하게 기대 두었던 검은색 우산이 조금씩 미끄러지더니 끝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린 시절이라. 확실히 나와 사야카, 그리고 미츠하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었다. 손바닥만한 시골 마을에다 태어난 집안들도 각각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필연적으로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는 나 혼자 남자라는 점 때문에 다소간의 거리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 셋은 떼놓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이토모리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그 날부터 우리는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그 이전부터 두 사람에 대해 조금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학교 수업이 끝나면 버스 정류장 옆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 따위를 뽑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때 항상 튀어나오던 이야기 주제가 마을에 대한 불평이었다. 물론 나도 이토모리 마을에 대해 염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좋게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의견에 쉽게 동조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마을,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미츠하와 사야카는 자주 이렇게 입을 모으곤 했다. 하지만 그 마을이 정말로 사라져버릴지 누가 알았을까.


유일하게 혜성의 피해를 입지 않은 이토모리 고등학교를 임시 피난처로 사용하며 주민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나갔다. 미츠하는 우리에게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정장이었던 아버지의 손에 끌려가 버렸고 며칠 뒤 사야카가 뒤를 따랐다. 임시 피난처에서 지낼 동안 우리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거대한 재해의 충격은 그저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우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열일곱 살의 나는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마을을 떠나면서도 창문 밖으로 정들었던 고등학교의 모습을 끝없이 눈으로 쫓았다. 그 모습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 * *


"타카기!"


별 생각 없이 약속 장소인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선배?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츠카사랑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어. 너는?"


"이 카페가 얼마 전에 새로 생겼잖아요.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혼자 오긴 그래서 타키도 끌고 오려고요. 좀 있으면 도착하겠죠."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선배의 대각선 맞은 편에 앉았다.


얼마 전 선배와 알콩달콩한 연애를 시작한 츠카사는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염장을 지르곤 했다. 그리고 속 타는 내 심정은 왜 알아주지도 않는 거냐며 화내는 시늉을 하면 폭소로 대답하는 게 평소의 레퍼토리였다. 그나저나 난 평소에 선배가 타키 쪽에 더 마음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선배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지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다.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세 사람이 여행을 다녀온 날에 모종의 사유가 있었을 거라고 근거 없이 추측해보는 정도가 고작이다.


더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타키의 성격 변화였다. 원래부터 특별히 수다스럽다거나 시끄러운 녀석은 아니었지만 여행 이후로는 평소보다 말수가 줄어들고 약간 우울해보이기까지 했다. 장난을 걸어도 발끈하던 예전과는 다르게 힘없이 웃거나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조금 이상했다. 타키 문제에 대해 츠카사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라면 있긴 하지만 이미 신혼부부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싱글거리는 그 녀석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받아줄 리가 없었다.


'벌써 2년이나 흘렀네, 그러고 보니.'


어쨌든 (나만 모르는) 히다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세 사람 모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궁금증은 점차 사라져갔다. 던지듯이 건네는 선배의 말이 기억을 돌이켜보는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타키가 여기 온다고 했었지?"


"네. 아마 타키네 방에서는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츠카사 쪽이 먼저 오지 않을까요?"


"타키네 방이라... 그러고 보니 레스토랑 알바 그만둔 이후로 타키랑은 거의 안 만났었네. 요즘 어떻게 지낸대?"


"뭐 특별한 일은 없겠죠. 저도 그 녀석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에요."


그렇구나, 하고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다음 달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낙엽의 거의 다 지고 거리의 행인들이 코트를 껴입기 시작한 11월 중순 무렵이었다. 그 때 같이 일하던 아르바이트생들끼리 작은 송별회를 열어 주었었다. 그 날의 기억 속에 없는 것은 자기 말로는 다른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모습을 보이지 않은 타키뿐이었다. 이전에 타키와 선배는 당일 일정이 끝나면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역까지 함께 걷는 등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사적으로 만나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히다의 일 이후로는 항상 따로 귀가하곤 했다.


물음표로 끝맺은 2016년이 그렇게 지나가고 새해가 밝았다. 나와 타키와 츠카사는 수험생이 되었고 4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함께 아르바이트생 생활을 청산했다. 방과 후의 카페 순례도 점차 횟수가 뜸해졌고 여름 즈음에는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뒤로 우리 셋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서로의 안부를 물을 일이 있으면 대체로 전화나 메일로 해결했고 직접 얼굴을 맞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카페에 앉아 타키와 츠카사를 기다리는 것은 나에게 일종의 향수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생활 중에 친구들과 함께 느꼈던 즐거움, 그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선배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말이 없었다. 살짝 열린 선배의 핸드백에 들어 있는 조그만 라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금연은 성공하셨어요?"


선배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다시피. 그 때 이후로는 계속 피우고 있어. 쉽게 끊어지질 않더라구."


"한 번은 성공하셨잖아요."


"두 번은 힘든 법이야. 너도 피워보면 알아."


아니요, 하고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선배는 비웃음과 괴로움이 섞인 미묘한 웃음 나에게 흘리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창문 방향으로 돌렸다.


아까부터 문 앞에서 서 있던 깎은 머리의 남자가 아직도 똑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비 내리는 날을 풍경 삼아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 그는 마치 겨울 바람을 맞아 꺾인 갈대처럼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남자의 옆에는 검은색 우산 한 자루가 쓰러져 있었다. 저 남자는 자기 우산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하려나.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비가 온 게 언제였더라. 신발장 어딘가에 처박아 둔 내 남색 우산을 찾아내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으니 꽤 오래 전의 일일 것이다.


그 때 빗속에서 여자 한 명이 카페 쪽으로 걸어왔다. 문 앞의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뭐야, 여자친구라도 기다리는 중이었나. 김이 팍 새서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더니 어느새 우산을 함께 쓴 채 사라져 버렸다. 선배는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 * *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와]


텟시는 언제나처럼 딱딱하기 짝이 없는 문자를 전송했다. 나 참, 그래도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친구한테 살갑게 좀 대하면 안 되나. 물론 텟시가 그만큼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라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실격이다. 아무래도 오늘도 만나자마자 핀잔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알았어. 지금 출발. 그리고 문자 너무 딱딱하게 보내지 마!]


바깥에는 간만에 비가 내렸다. 늦여름에 내리는 비라 생각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을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 비유하자면 탄산음료를 마실 때와 비슷한 청량감이었다. 신발장에 넣어 두었던 굽 낮은 구두를 꺼내 신고 집에 있던 몇 가지 우산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아이보리색 우산을 선택했다. 우산을 잃어버릴 때마다 새 우산을 하나씩 사고 며칠 뒤에는 잃어버렸던 우산을 되찾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 결과 집에는 다양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대여섯 자루의 우산이 현관에 쌓이게 되었다. 몇 년 뒤에는 잃어버리고 되찾은 우산들로 가게를 차릴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가는 길이 심심해질 것 같아 이어폰도 챙겼다.


보도블럭을 세차게 때리는 빗소리, 그 빗소리들을 밀어내고 귀에 가득 퍼지는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의 노랫소리.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나는 (기다리고 있는 텟시에게는 미안하지만) 좀 더 천천히 걸으며 비 내리는 날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무로는 왜 데뷔 25주년에 갑자기 은퇴를 선언한 걸까. 먹구름은 어째서 저렇게 검은 걸까.


정신없이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오래 지나지 않아 텟시가 기다리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페 안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서로 대각선 반대편이라는 미묘한 포지션을 잡고 앉아 있었다.


"미안! 늦었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정말로 아무 감정을 담지 않고 생각 없이 던지는 말. 다르게 말하면 소꿉친구들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아마 텟시가 아니라 다른 남자가 저런 말을 나에게 던졌다면 적잖이 상처입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럴 땐 웃음으로 때우는 게 최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텟시는 웃는 얼굴에 거리낌없이 침을 뱉을 수 있을 만한 녀석은 아니니까.


"헤헤, 미안.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버릇은 정말 고쳐지질 않아. 초등학교 때부터 이랬지만."


"...뭐 아무튼."


"그러는 너도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 피웠잖아."


"이건 의지로 해결될 만한 문제가 아니야."


"담배 냄새 나. 금연해!"


오늘도 어김없이 티격태격거리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러나 저러나 오랜만에 비가 온다는 둥, 무슨 노래 듣고 있었냐는 둥,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면서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나름대로 성실하게 말벗이 되어 주는 텟시는 언제나 마음 편한 상대다.


"어디부터 갈까?"


"글쎄, 별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일단 걸어 보자."


커다란 검은색 우산과 작은 아이보리색 우산이 발을 맞추어 걸었다. 둘 다 점심 식사를 하지 않아서 우리는 우선 근처 음식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 시간에 간단히 먹을 만한 곳이라고 해 봐야 결국 편의점 아니면 라멘 가게 정도겠지만. 낮이 되면 길거리가 조금은 붐빌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거리는 더 한산해져서 안경 낀 남자 한 명을 빼고는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요즘 미츠하랑 연락하고 지내냐?"


잠깐 동안 말이 없던 텟시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 아니, 그, 미츠하랑 연락?"


"왜? 무슨 일 있냐?"


"음, 별 일 없어. 그게 문제지만. 원래는 가끔 만났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거의 못 만난 것 같아. 그래도 가끔씩 문자는 하고 지내."


"그런가..."


텟시는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다.


"너야말로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요즘 통 모습을 안 보이길래 궁금했을 뿐인데. 나랑은 연락 안 한 지 꽤 돼서 진짜 뭔 일 있나 싶었지. 아무 일 없다면 다행이고."


'연락을 안 한다...라.'


언젠가부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예전보다 더 멀어진 듯한 느낌이 있었다. 눈치가 그다지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나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으니 본인들이 느끼기에는 그 거리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텟시에게서 이런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예전부터 미츠하를 대하는 게 조금 불편해졌다고. 텟시 본인은 혜성의 일도 있고 성별 차이도 있으니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는 거겠지, 라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 '간단하지 않은 문제'가 무엇인지는 두 사람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간섭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애매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저 내가 알지 못하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 문제로 인해 멀어지는 두 친구를 다시 가깝게 해 주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고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2013년 10월 4일, 그 날의 기억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 동시에 기억해내고 싶지만 잊어버리고 만 기억도. 언젠가 미츠하가 나에게만 살짝 말했던, '찾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실낱같은 기억까지.


"무슨 생각하냐."


텟시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나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야."


개미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자 텟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다시 몸을 돌려 계속 걸었다. 나는 아주 잠깐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텟시의 뒤를 따랐다.


* * *


카페에는 있어야 할 사람과 있을 줄 몰랐던 사람이 한 명씩 있었다.


"왔어~ 어?"


"왔냐. 오랜만이다."


"신타? 여긴 무슨 일이냐?"


"만나기로 한 건 아니고 그냥 우연히 장소가 겹친 모양이던데? 타키도 오기로 했어. 일단 앉아라."


신타는 싱글거리며 오쿠데라 선배의 옆자리를 쿡쿡 찌르듯이 손으로 가리켰다. 선배도 얼굴에 약간 짓궂은 듯한 미소를 옅게 띠고 있었다. 일단 앉으라는 대로 얌전히 앉았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초록색 우산은 선배의 것으로 보이는 보라색 우산 옆에 던져 두었다.


"자세히 설명해봐. 타키가 오기로 했다는 건 뭔데?"


"아아, 우리가 고등학교 때 하던 거 있잖아. 이 카페 새로 개업했다길래 오랜만에 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혼자 오긴 좀 그래서 타키보고도 오라고 했는데. 문제 있냐?"


"나한텐 왜 전화 안 했냐?"


"넌 연애하느라 바쁘잖아."


"야!"


낄낄거리는 신타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여 주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데. 녀석은 한 대 맞고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얄밉기도 했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서 조금 들뜨는 느낌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늘 붙어 다녔던 세 사람이 다시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우리 세 사람이 만난 것은 아마 많아 봐야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정도일 것이다. 세 사람이 가진 꿈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달랐고 그래서 지난 겨울 우리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각자의 길을 또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대신 그만큼 선배와 만나는 시간을 늘리며 우리는 최대한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가려고 노력했다. 아직까지도 '미키'보다는 '오쿠데라 선배'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긴 하지만.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자주 불러서 익숙하기도 하고, 나이 차이가 난다는 점도 있고. 가족이 아닌 연상의 여성을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는 건 조금 어색했다. 또 선배는 나보다 서너 해 일찍 태어났을 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나보다 몇 배는 성숙한 사람이기도 했다. 언제나 침착하고 깊게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교제를 시작한 뒤로 매일 새삼스럽게 느끼는 사실이다.


창 밖의 빗줄기는 많이 약해져서 그칠 듯 하면서도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히다를 방문했던 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선배에 대한 내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 그 날의 기억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츠카사, 무슨 생각해?"


잠깐 멍하게 있었던 내 모습이 신경쓰였는지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아니에요.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언제? 나도 아는 거야? 그리고 이제 슬슬 반말로 해도 되잖아, 괜찮으면. 애인한테 계속 존댓말 들으니까 기분 이상해."


"그게... 음."


아침에 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어딘가로 떠났던 타키는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도쿄로 돌아왔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을 한 채로. 히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기억이 전혀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2년 전에... 히다에서... 그거요."


"아하... 음,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 날도 비가 왔었지?"


"아마도..."


무언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곧 단념했다. 신타는 옆에서 눈을 깜빡이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저 녀석에게는 졸지에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급하게 수정하게 되었던 기억밖에는 없겠지.


히다에서의 일을 계기로 타키와 선배는 멀어졌다. 히다 시의 한 여관에서 잠들기 전 선배와 휴게실에서 나눈 대화로 미루어 봐도 이유가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느낌이 아니라 원래는 알고 있었던 사실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왜 잊어버렸지? 어째서 기억나지 않지? 나는 '기억을 잃어버린 이유'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카페 안에 잠깐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조용한 시간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타키가 언제 올까,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긴장감으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선배가 먼저 입을 뗐다. 독백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 녀석도... 이제는 이야기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제 2년이나 지났고,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티가 나는 거짓말이었다. 선배는 간파했다는 듯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그건 타키가 결정할 일이겠지. 그리고 반말로 하라니까."


"...노력해 볼게요."


* * *


비가 내린다.


아침에 눈을 뜨자 빗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마음이 진정되는 후두둑 소리. 커튼을 쳐 둔 탓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마 이 비가 그친 뒤에는 스물세 살의 여름이 지나가고 다시 가을이 찾아오겠지. 지금까지 겪어 왔던 스물두 번의 여름이 그랬듯이.


커튼 밖에서 빛 한 줄기가 살며시 들어와 방 안을 살짝 밝혔다. 평소보다는 조금 어두운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디스플레이의 익숙한 위치를 여러 번 터치해 나갔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결국 오늘도 평소와 같은 하루가 되겠구나. 묘하게 심술이 나서 조금 거칠게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깥 세상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며 빗소리가 증폭되어 들려왔다. 잠깐 동안 눈을 감고 빗소리를 감상했다.


자연스럽게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종종 있는 일이다. 기억나지 않는 꿈, 무언가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아..."


입에서 한숨 섞인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날 내가 했던 행동에 대한 기억, 만났던 사람에 대한 기억,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상실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한 그 느낌뿐이었다. 어쩌면 오늘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실낱같은 단서에 의지한 채로 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늘은, 오늘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침대를 박차고 나와 간단히 씻었다. 나른한 주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집에 가만히 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 때문에 밖이 약간 서늘하니 얇게 외투를 걸치고 머리를 빗어내린 뒤 간단히 묶었다. 그러고는 살구빛이 감도는 분홍색 우산을 챙긴 뒤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때 누군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언니!"


요츠하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란색 우산을 든 요츠하가 반팔 차림으로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동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쩐 일이야? 갑자기?"


동생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언니, 어디 나가려던 참이었어? 오늘은 집에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으응, 나가려고 한 건 맞지만 별 생각은 없었어. 그냥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해서. 들어갈까? 추워 보여."


"...그러자.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춥지는 않아."


괜찮아. 그렇게 대답하고 우산을 도로 접은 뒤 방금 전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걸어 올라갔다. 요츠하는 간식거리를 사 왔는지 편의점 비닐 봉투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요즘은 자주 만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였다. 그 마을에서 지낼 때도 요츠하는 귀여운 동생이자 동시에 마음 놓고 대할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혜성이 떨어진 뒤 도쿄에서 새로운 삶을 보내게 되었을 때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도 동생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래서 자취방에서의 첫 날 밤은 외로움으로 가득 채워졌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중학생 티가 나고 키가 많이 자란 동생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들어가자."


"응. 실례하겠습니다."


우리는 동생이 준비해 온 간식거리를 먹으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는 어때?"


"음, 초등학교 때보다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공부도 할 만하고."


"다행이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동생과의 대화는 물론 즐거웠지만 동시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나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기도 했다. 동생은 이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니는 어때?"


"평소랑 비슷해. 별 일 없어."


"재미없어."


"후훗, 미안해. 재미없는 언니라서."


나는 힘없이 웃으며 거실 창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들었던 빗소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찾고 있는 무언가가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혹시 나와 함께 빗소리를 듣고 있지 않을까.


"언니, 그런데 의외네."


"뭐가?"


"웬일로 이런 비 오는 날에 밖에 나가려고 하고. 언니 원래 비 오는 날 싫어하지 않았어?"


동생의 말대로 나는 원래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우산은 조금 쌀쌀하게 부는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로부터 나를 지켜주기에는 너무 작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는 찝찝한 기분이 드는 데다 세탁물도 늘어나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지금 내리는 이 비, 너무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이 비를 내가 찾고 있는 사람과 함께 맞는다면. 이 비가 운명의 실이 되어 그 사람을 찾아주지는 않을까- 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허무맹랑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시간에서만큼은, 그 사실을 믿고 싶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동생에게 대답해 주었다. 볼이 살살 간지러웠다.


"오늘 내리는 비는 왠지... 싫지는 않아."


창 밖의 비가 서서히 그쳐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동생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뒤로 하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채색의 거리를 배경으로 하나 둘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