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을 고르라고 하면 졸업식이나 결혼식 등, 어느 중대한 일이 있는 날을 선택하고는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아름답게 간직하는 추억은 의외로 평범한 날들 중 하나일 때가 있다. 훗날 돌이켜보면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날의 초상. 몇 년, 몇 십 년이 흘러도 마치 그림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 날을 떠올리며 미츠하는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도쿄는 여름이면 땅에서 열기가 올라올 정도의 무더위를 앞두고 쾌청한 날들이 잠깐 있다. 7월과 8월, 장마철과 무더위의 경계에 위치한 그 며칠 동안은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햇볕이 비치면서도 그다지 덥지는 않은 이상적인 여름 날씨가 이어진다. 그 날도 그 환상적인 날씨가 지속되는 며칠 중 하루였다. 마침 전날 땅을 약간 적실 정도로 내렸던 비는 햇볕에 달궈진 육지를 식혀주었고, 하늘에 적당히 낀 구름은 따갑게 쏟아지는 한여름의 햇살을 가려주었다. 바깥에서 찌르르 지저귀는 새들은 미츠하에게 나가자며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이상적인 날씨 속에서도 그녀의 기분은 축축 처졌다.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요 며칠 동안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걸까. 충분히 쉬었는데도 피로함이 몸 속에 퇴적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면 미츠하는 대게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다시 잠을 청했다.
미츠하는 침대 위에서 가만히 엎드린 채로 새까만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와 같은 그것에는 그녀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어딘가 무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빤히 쳐다보다 다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로. 누군가가 연락해오길 기다리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띠링 소리가 났다. 그 사람으로부터의 온 문자임을 확인한 미츠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지금 뭐해?’라는 평범한 네 글자에 우울한 기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얼굴에는 잔뜩 화색이 돌았다. 토독토독.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휴대폰 화면의 자판을 두드렸다. 한껏 들뜬 미츠하의 기분만큼이나 휴대폰 화면과 그녀의 손가락이 마찰하며 나는 소리 또한 경쾌했다.
음, 난 그냥 집인데. 왜?
그냥. 오늘 볼 수 있을까?
나도 그 말 하려 했는데. 지금 올 수 있어?
응, 지금 바로 출발할게.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고 서둘러 집을 나올 타키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츠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평범하게 지나치는 하루 속의 소소한 대화조차도 가끔은 얼마나 반가운지. 그녀는 그도 그녀와 같은 마음일 것일 거라는 생각에 붕 뜬 마음은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 부풀어 올랐다.
그로부터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미츠하는 입을 옷을 고른 다음, 정성스레 손질한 머리를 늘 쓰던 그 끈으로 묶었다. 그녀가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치자 선반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여보세요?」
「나 지금 밖이야.」
「벌써? 빠르네...」
미츠하가 타키의 말을 듣고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오른쪽 팔에 가방을 메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의 부스스한 머리를 한 여자는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적어도 단정한 모습을 한 자신의 모습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미츠하는 현관문을 나섰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니 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타키가 보였다.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뾰족뾰족한 저 머리. 그의 머리카락은 미츠하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인 고슴도치를 연상시켰다. 미츠하 자신에게만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지 않는 고슴도치. 그래서 그녀는 유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편 타키도 미츠하를 발견한 듯,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다 내려간다는 신호를 보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키와의 만남에 대한 약간의 설레임이 실린,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미츠하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그녀의 등 뒤에서 스르르 문이 닫혔다.
5층, 4층, 3층. 네모난 상자 속 짧은 시간의 기다림은 초조함보단 문이 열릴 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워졌다. 문 위의 붉은색 숫자가 1로 바뀌자 문이 열렸다. 미츠하는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이름을 외치며 뛰어나갔다. 그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녀를 보며 손짓했다.
「타키.」
「미츠하.」
「오랜만이야.」
「그러게, 거의 일주일 만인가?」
「요즘 얼굴 보기 참 힘든 것 같네...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응, 이런저런 일로 회사 일이 많아져서...」
그 말을 하는 타키는 미안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멋쩍거나 미안할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 입던 갈색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온 걸로 보아하니 회사에 급하게 다녀온 모양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의 습관이나 말투,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감정 등 예전이라면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미츠하의 눈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잘 몰랐었던 그런 것들이.
아마 그것도 내가 널 알아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다음부터는 내가 보러갈까?」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는데...」
「미안할 게 뭐 있어. 다음에 내가 힘들 때는 타키가 오면 되는 거지.」
「그렇네. 고마워.」
타키는 그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미츠하도 그 미소에 응답하듯, 환하게 웃으며 타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살짝 마주 잡은 그의 손은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마주 쥐었다. 바깥에 내놓아 조금 식어있던 손도, 그날따라 축 처져있던 마음도 그에게서 나오는 다정한 온기에 점차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좋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미츠하가 타키와 처음 데이트했을 때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와 같은 대사를 내뱉던 그 사람은 어디 갔는지, 왠 순박하고 어설픈 청년 한 명이 미츠하의 앞에서 쭈뼛대고 있었다. 학교 생활이랑 무녀 일에나 바빴지, 연애라곤 꿈도 꿔 적 없던 미츠하도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몰라서 우물쭈물하기가 일쑤였던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서로에게 익숙해지자 가끔은 서툴렀던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며 상대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까 봐 맘을 졸여야 했던 그 시절이.
어느새 그들이 만난 시간은 1년이 넘어갔다.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긴장감이나 두근거림은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서로에게 익숙해짐에 따라 타키를 만나면 편안하게 느껴지고, 힘들 때는 일로 인해 쌓인 피로나 우울함 같은 감정들은 증발하듯 날아가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힘든 일도 종종 있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는 형태에 가까워졌다.
한편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미츠하 집 근처의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결국엔 습관처럼 미츠하의 집에서 여섯 블록 정도 떨어진 인근의 공원으로 향했다. 한가한 주말의 낮이면 가족이나 연인들이 그 공원에서 산책을 나오곤 했고, 그들은 주로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거나 아이들이나 강아지와 함께 놀았다.
사람들이 가득한 초원에서 떨어져 타키와 미츠하는 그 옆에 난 가로수 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길 위에 엷게 비쳐 드는 햇빛은 가로수 길을 초록색으로 물들였다. 그와 그녀는 주말이면 황금빛과 초록빛으로 물든 그 길 위를 한적하게 이야기를 하며 거닐곤 했다. 그날따라 사람이 적고 한적했던 그 공원의 가로수길을 걸으며 그들은 평소처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는 사야가 말이야ㅡ
정말? 그랬대?
응응.
아, 그러고 보니 테시랑 사야 곧 결혼식 한다며? 그건 언제래?
아마... 다음 달쯤? 아직 언젠지는 안 정해진 것 같아.
그래? 나도 초대 받을 수 있으려나.
당연하지. 누구 남자친군데.
고마워.
회사 이야기, 가족 이야기, 주변 사람들 이야기. 혹은 아침밥을 뭐 먹었는지, 그 주 동안에 어떤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는지. 주변에도 널리고 널린 흔해빠진 이야기들. 딱히 특별한 주제 없이도, 일상적인 이야기들만으로 대화에는 이상할 정도로 생기가 돌았다.
그들이 즐겁게 수다를 떨며 천천히 걸어가던 중의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티없이 맑던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해를 가리고, 하늘에서는 차가운 빗방울들이 하나 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공기에서는 촉촉한 비 냄새가 났다. 곧 소나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앗, 차가워.」
「지금 비 오는 것 같은데.」
「타키, 혹시 갖고 있는 우산 없어?」
그 말을 듣고 타키는 불안한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그는 급히 가방을 들여다 보았다. 타키는 고개를 들어 미츠하를 향해 모종의 의미를 담은 시선을 던졌다. 측은한 표정의 그에게 미츠하는 자기도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기예보조차 오늘 흐리기만 할 거라고 했고, 그들 또한 비가 내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푸르기만 했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울 줄은.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러면 좀 곤란한데.」
「그러게.」
「근처에 우산 살 만한 곳은 없나?」
「응, 어쩌지...?」
타키와 미츠하는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우선 비를 어떻게든 피하기로 한 그들은 각자 손에 들린 가방을 급히 집어 들고는 그걸로 머리를 가렸다. 그러는 사이 시커먼 하늘은 성을 내며 한층 굵어진 빗방울들을 땅 위로 마구 뿌려댔다. 조그만 가방으로 더욱 거세진 비를 피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어디로 비를 피해야 할 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던 차에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작은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타키는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츠하, 저기 보이지?」
「저기?」
「내가 신호하면 곧장 저리로 뛰어가는 거야.」
「응.」
「하나... 둘... 뛰어!」
타키의 신호와 함께 그들은 정자 쪽으로 뛰어갔다. 비로 뒤덮여 미끌거리는 바닥 때문에 미츠하는 잠깐 중심을 잃은 채 허우적거렸다. 그걸 본 타키가 급히 팔을 뻗어 미츠하의 어깨를 꽉 잡았다. 타키의 가방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괜찮아?」
「응, 고마워. 그런데 가방이...」
타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는 미츠하가 다시 넘어질세라,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정자 쪽으로 뛰어갔다. 빗물에 젖은 손이 미끄러웠지만 그는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정자 아래서 잠시 한숨을 돌리며 옷에 스며든 물을 짜내려 애를 썼다. 솜처럼 물을 잔뜩 먹은 옷은 아무리 물을 짜내도 여전히 무겁고 축축했다.
엣취.
차가운 빗물 때문에 자꾸만 재채기가 나왔다. 문득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타키의 모습이 미츠하의 눈에 들어왔다. 타키의 갈색 정장은 잔뜩 물을 먹어 뻣뻣한 가죽 같았고, 뾰족뾰족 튀어나온 머리 또한 축 처졌다. 뭐랄까, 그는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괜히 그 모습이 처량해 보이면서도 우습게 느껴져서 입 밖으로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하하, 그게 뭐야. 다 젖었잖아.」
「사돈 남말하시네.」
타키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그는 볼멘소리를 내며 흠뻑 젖은 정장 자켓을 벗어 남은 물을 털어내었다. 그는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자신의 정장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옆에서 미츠하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문득 입고 있는 옷을 슬쩍 내려다보자 자신도 타키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괜히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와서 미츠하는 입을 막으며 키득댔다. 그걸 보며 타키는 자기를 비웃는 거라 생각이 들어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냥. 나도 그렇고 타키도 그렇고 쫄딱 젖었잖아.」
옆에서 키득거리고 있는 그녀의 몰골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괜히 그 상황이 우스워져 그의 입에서도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미츠하와 타키는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다 다시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렇게 그들은 뭐가 우스운지, 서로를 보면서 한참을 소리 내어 웃어댔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미츠하는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웃는지를 모르겠어.」
「나도.」
「혹시 웃음 바이러스 같은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최초 감염자일지도.」
「뭔가 로맨틱하네.」
「어딜 봐서.」
계속 낄낄거리다 지친 그들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정자 안의 벤치에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밖을 바라보아도 거세지는 비바람은 금새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미츠하는 말없이 옆에 있는 타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타키는 미츠하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 안으며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슬며시 갖다 대었다.
「집에 가고 싶다.」
「그러게.」
곁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 공기 중에 그의 체취가 은은하게 떠돌았다. 하늘에서 수도 없이 떨어진 빗방울들이 우리 몸을 흠뻑 적셨지만 그 내음은 어딘지 모르게 달콤했다. 비 냄새와 그의 냄새가 뒤섞여 하나의 냄새처럼 되었다. 비에서는 어쩐지 그의 냄새가 났다.
미츠하는 가만히 타키를 바라보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도 아무 말 없이 미츠하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겼다.
여전히 하늘은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끊임없이 빗물을 땅으로 들이부었다. 옷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조금 추워졌지만 그가 옆에 있어 한기가 덜했다. 이대로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그녀는 내심 바랬다.
마침내 비가 그치자 먹구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저 편으로 물러갔다. 그들이 있는 정자의 그늘 밑으로도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다. 빗물이 개인 웅덩이에 반사된 햇빛은 맑은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내었다. 정자 지붕 위에 매달린 물방울들은 웅덩이 위로 떨어지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그 길로 타키는 미츠하의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축축한 옷을 말렸다. 옷은 미츠하의 집에 있는 토시키의 옷을 빌려 입었다.
딱 맞네.
그러게. 이사할 때 섞인 아빠 옷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물론 이걸 알게 된다면 화내겠지만. 미츠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킥킥 웃었다.
아, 맞다. 뭐 마실래?
아무거나 괜찮아.
그럼 커피로 한다?
응.
미츠하는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둔 뒤, 찬장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잔 두 개와 커피통을 꺼냈다. 조금 지나자 포트 안에서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곧 전원을 끄고 필터에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은은한 커피 향이 방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자, 커피.
고마워.
그래, 고마우면 결혼식 꼭 와.
나도 초대해 준대?
응, 방금 문자 왔어. 대신 축의금도 꼭 가져오라네. 얘들도 참...
그렇게 미츠하와 타키는 커피를 마시며 아까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옷이 말랐는지 확인하려고 잠시 시계를 보니, 시계바늘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핸드폰에서는 미리 맞춰둔 알람이 울렸다. 그는 옷을 갈아 입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타키가 준비를 마치자 미츠하가 그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맑게 갠 하늘에선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석양은 그들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엷게 드리웠다. 타키도, 미츠하도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현관 앞에 서서 발을 떼지 못했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뭔가 아쉽다.
그래도 오랜만에 아버지 만난다면서.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미안. 며칠 전에 했던 약속이라 바꿀 수도 없어서...
괜찮아. 그럼 내일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그래, 내일 봐.
타키는 그렇게 말하며 미츠하를 껴안았다가 다시 팔을 거뒀다. 못내 아쉬운 눈빛을 하며 발걸음을 돌리자, 뒤에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키, 잠깐만.
왜?
그가 그녀에게 무어냐 물으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는 찰나, 볼에서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를 깨달은 그의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 저녁의 노을만큼이나 붉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오늘, 고마웠어.
뭐가?
그냥, 여러 가지로.
그래.
미츠하는 어떤 말을 내뱉으려다 다시 삼켰다. 타키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잘 가라는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그는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그를 보며 미츠하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나 사실 오늘 좀 이유 없이 우울했거든. 네가 이렇게 불러주고 여기까지 와줘서 좋았어. 네 덕분에 너무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어. 정말로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미츠하가 이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던 이유는 타키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이 웃고 떠들며 정자 밑에서 비를 피했으며, 커피를 나누어 마셨다. 비에서 느껴진 그의 체취처럼 그녀의 생각도 그 냄새를 따라 이어진 것을 그녀도, 그도 잘 알고 있다. 서로가 이어졌던 순간이니만큼 기억에 더 오래 남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집으로 들어갔다. 노을이 완전히 지고 난 하늘에는 구름 사이로 별이 떠 있었다. 별빛이 비치는 곳에서 타키는 지하철역을 향해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무리가 조금 어설픈 듯 하네요
지난번엔 너무 급하게 끝났고 이번엔 질질 끈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일상물이나 달달물을 너무 안 읽어봐서 그런가요
이런 것일수록 마무리가 항상 힙듭니다
어릴 때 읽은 장편 소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라곤
한국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젊은 날의 초상, 마당을 나온 암탉, 미나
외국 작품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죄와 벌, 멋진 신세계, 1984, 태양의 아이 등등...
대체로 어두운 내용의 소설들이네요
정말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중점인 소설들과는 와는 거리가 매우 먼 것 같습니다
제가 쓰는 글들도 그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네요
저도 사실 달달하고 아기자기한 내용의 글들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있답니다..
언정 콜라보네 - 누구보다도 다정한 느갤러입니다.
좋은 작품 고맙습니다 ^.^
뭐랄까 문장들이 굉장히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 dc App
우욱 씹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