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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 읽지않음(Unread)

Part. 1

Part. 2


0.



창문을 열 만큼 걷어올린 블라인드 아래로 햇살이 부서져 들어온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들어오는 바깥 공기가 코에 낀 묵은 공기를 씻어냈다. 정체된 것 처럼 묵직한 공기가 짓누르고 있던 병실에 약간의 숨이 트였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습성, 기운이 무기물에도 혼을 불어넣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정말로 빌어먹을 일이라고 타치바나 타키는 자조했다. 원래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존재감.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봄을 몰고 오던 그 기운은 온데 간데 없이, 진정제에 취해 잠이 든 그녀의 몸엔 생기가 없었다. 창백한 피부 아래로 도드라진 혈관과 얕게 내쉬는 숨이 아니었다면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인형.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단어에 헛웃음이 터져나온다. 정말로 인형같다. 이런 상황이 되었어도 그녀는, 미야미즈 미츠하는 원래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중세 귀족들의 변태적인 취미처럼, 핏기를 뺀 체 보존된 것 같은 그 모습이 평소의 단아함에 묘한 신비로움까지 더하고 있었다. 



집어치워 빌어먹을. 지금은 중세도 뭣도 아니야. 이건 그냥 빌어먹을 일의 결과일 뿐이야. 신이라는 작자가 존재한다면 따지고 싶을 정도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날이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에 그녀가 살짝 두통을 호소한 것 말고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기에, 회사에서 돌아오면 괜찮아져 있겠지 하고 약간의 염려만 품었었다. 설마 그게 점심 도시락을 열기도 전에 폭발할 시한 폭탄인줄도 모르고.



뒤늦게 받은 연락에 허겁지겁 도착한 병원에선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면역계의 이상, 유전 질환일수도, 슈퍼 박테리아일수도 있고 콜리스틴을 써도 내성이 있어 듣지를 않는다는 둥. 그 의미 모를 단어 나열의 결과가 이 모습. 겨우 3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언젠가 신타와 츠카사 녀석과, 우스갯소리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앞 일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아느냐고, 지금 당장이라도 오토바이에 치여서 머리가 82조각이 난 채 죽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철없는 소리나 지껄이던 과거의 자신에게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방정맞게 떠들어댄 입의 결과가 이거라면 정말로…




"…미츠하"



행여나 눈을 뜨는 일이 없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뻗은 손이 삼단 같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지금은 허락된 시간이 아니었다. 요츠하가 마음을 가다듬고 돌아올 때 까지, 대타로서 자리를 맡고 있을 뿐. 




조금 더 욕심을 내는 게 어때? 몇 번을 봐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그녀잖아. 원래라면 오지 않았을 기회인데. 하늘이 돕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음 속 인영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해온다. 기억 속 그녀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이, 교태로운 손짓을 하며 정신을 좀먹어 들어왔다. 조금은,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저 가늘게 떨고 있는 혈관도, 창백하지만 틀림없이 감미로울 입술도.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있잖아. 그동안 참아온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



주먹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간다. 맞는 이야기야. 하나도 틀리지 않아. 그렇지만, 만약에라도 깨어난 그녀가 한 번 더 자신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정말로 그 때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위이이이이잉-




어느 쪽에 떨어져도 고통스러울 외나무다리 위의 서커스가 바지춤에서 느껴진 진동에 막을 내린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신경을 돌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본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신타냐."



[응. 타키. 요츠하가 저질렀다며.]



"조금.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예상은 하고 있었다. 분노는 금방 식기 마련이다. 그녀를 병원에 잡아둘 수 있을 만큼은. 그 뒤에 표류하는 감정을 잡아두기엔 연인만큼 좋은 닻이 없었겠지.



[미안하다. 아직은 어린 애니까]



"알고 있어. 그 어린 애랑 사귀고 있는 놈이 할 말이냐."



[할 말 없게 만드는구만. 아무튼, 잘 달래놨으니까 금방 돌아갈거야. 그 때 까지 잘 부탁한다.]



"말 안해도 그럴거야. 지금 미츠하 옆이니까 전화 길게 못한다. 끊어."



[아, 잠깐잠깐잠깐!]



최대한 소리를 낮춘 통화도 조심스러웠기에, 마치려던 손을 다급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있다가 저녁 8시 쯤에 츠카사랑 같이 좀 보자. 너 병원 가야되는거 아니까 그 주변에서.]



"알았어, 끊는다."



답을 듣지 않은 채 급하게 통화를 끊는다. 혹시라도 그녀가 깨 버리면 지금까지의 인내가 다 아무 소용 없는게 되어 버리니까.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것을 알려오듯, 진한 주황빛으로 물든 빛이 좁은 틈새로 비산했다. 회사는, 사실상 해고나 다름 없다. 서류가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 두 종류 뿐이었다. 자신과 그녀 사이 유대의 깊이가 어떻든, 타인을 위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낙오자를 놔 둘 정도로 사회가 녹록할 리 없었다. 



이래서야, 정장만 입었다 뿐이지 완전 건달이네.

자조의 바늘에 찔린 마음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맺힌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당장 떨어져 나가는 나의 것들도 지키지 못하면서 그녀를, 미츠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안 돼."



목적 없는 말이 목적지 없이 흘러나갔다. 외나무다리 위의 서커스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쪽으로 뛰어 내리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쉬이 내릴 수 없는 결정 앞에서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요츠하가 돌아올 떄 까지, 병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자리를 지켰다.



1.



"여-"



구석 테이블에서 아는 체를 하는 얼굴에 건성으로 답하며 앉았다. 미츠하가 입원한 뒤로 본 적이 없던 얼굴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익숙한 모습들이기에 언제까지고 같이 변해갈 줄 알았지만, 적어도 자신보단 더 신수가 훤한 모습에 조금 위기감을 느꼈다.


위기감을 느낄 것도 없나. 애초에 사회에 나가던 순간부터 나와는 출발점이 다르던 녀석들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예상은 했지만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있는 모양이네. 괜찮냐?"



"어, 그럭저럭. 할 말이란게 뭔데?"



"자식, 뭐가 그렇게 급해? 미야미즈 씨 옆엔 동생도 있으니까 지금만이라도 긴장 좀 풀어."



말을 마치며 턱 끝으로 몇 번 가리켜진 신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금새 진동과 함께 울리는 녀석의 핸드폰엔 요츠하의 얼굴과 함께, 잠겨져 알아볼 수 없는 메세지가 와 있었다. 



다행이구나 요츠하. 그렇게라도 환하게 웃어주고 마음을 풀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그게 나나 미츠하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래. 회사는 어떻게 됐어?"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안 됐겠네. 아버지는?"



때로는 너무 오래 안 친구기 때문에 위로를 바랄 수 없다던가. 어찌 보면 매정하게 결론을 내려버리는 츠카사의 모습에 오히려 납득한 듯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자도 아니고, 땀내나는 남자 사이의 우정이란게 다 그런 거겠지. 



"별 말씀은 없으셨어.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라는 것 정도."



"그나마 다행이군."



말을 마친 츠카사가 종업원을 불러 맥주를 주문했다. 배가 그렇게 고픈 상황도 아니었고, 취하고픈 마음도 전혀 없었기에. 가게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외면하던 야끼니꾸와 꼬치구이의 냄새를 기어이 눈 앞에 가져와야만 속이 풀릴 모양이다. 


그 뒤로는 성격 상 억지로 먹일 녀석들도 아니었고, 의외로 가볍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에도 잔의 맥주가 목을 축이는 일은 없었다. 약간 먼 광경을 보는 것 처럼, 회사에서의 푸념이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답했다. 오쿠데라 선배의 이야기나 신타의 입으로 듣는 요츠하의 이야기는 조금 신선하면서도, 가슴이 쓰려왔다. 그걸 아는 듯 말을 아끼는 녀석들이 고마울 정도로.



"야 타키. 핸드폰 잠깐만 줘 봐."



"갑자기 왜?"



"일본인이지만 소니 핸드폰 답답해서 못 쓰겠다. 너 아이폰이잖아. 바꿀 예정이라 좀 만져보게."



"…그런 거라면야 뭐."



실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어짜피 전해지면 안 될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 훔쳐보거나 못된 장난을 칠 녀석이 아닌 걸 알기에 잠금을 푼 핸드폰을 건네 줬다. 그러면서 확인한 시간이 어느 새 10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츠카사가 볼 일을 마치면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타키"



"응?"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네오는 신타가 아직 꽉 찬 잔을 내밀었다. 마실 생각 없다니까 이 녀석은 왜 갑자기…



"힘 좀 빼라. 요츠하도 걱정하고 있어. 우리들 앞에서도 그러고 있는데 평소에는 오죽하겠냐."



…차라리 실없는 장난이었다면 모를까. 이 녀석이 이렇게 진심으로 나오면 거절하기가 힘들다. 마실 기분이 아니라는건 여전했지만. 



쨍, 하고 부딪힌 잔을 들이붓자마자 미적지근한 탄산의 느낌이 목구멍을 찔렀다. 채워만 놓고 마시질 않았던 탓인지 시원한 맛이 없는 맥주였지만, 나름 뭔가가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에 살짝 묵은 숨이 터져나왔다.



힘 내 임마. 어깨를 두드리는 신타의 격려와 핸드폰을 돌려주는 츠카사의 손이 동시에 뻗어졌다. 받자 마자 일어선 몸을 잡을 생각이 없는 듯, 다음에 보자 하고 인사를 나눈 뒤에 제 몫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가을의 끝을 향해 가는 바람이, 조금 차게 느껴졌다.





2.





"…안 들키겠지?"




"제대로 지웠어. 너야말로 안 어울리는 짓 하면서도 용케 잘 해냈네."



바쁘게 움직였던 손의 감촉을 떠올리며 츠카사는 다시금 핸드폰을 확인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단 한 점의 문제도 없는 핸드폰의 액정에 방금 전송받은 사진의 목록이 주르륵 나열되고 있었다.



"20장… 타키 이 자식. 연애 하면서 대체 뭘 한 거야?"



"엥? 진짜 그것 밖에 안 된다고?"




믿기지 않는 사실에 놀란 신타가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배경에서부터 맞아주는, 하트를 날리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잠시 접어둔 채 갤러리의 '그녀' 폴더를 확인한다. 500장. 두 달 남짓한 연애 치곤 살짝 살벌한 통계였다.



"너는?"



"묻지 마라."



너는 애인이지만 난 부인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화면을 들여다보는 츠카사의 눈에 풋풋한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도 빛이 나는 여인과 도쿄 꽃미남의 하모니. 쑥맥인 것도 너무 닮아서, 하나같이 서로 발그레한 얼굴로 찍힌 두 사람의 모습에 살짝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아무튼 여기까진 문제 없고. 동생 양은?"



"해보겠대. 원래 아까 타키가 병원에 갔을 때 말했어야 했는데 일이 좀 터져서."



그런가. 후, 하고 한숨을 내뱉는 츠카사의 숨에 취기가 살짝 어렸다. 미키한테 혼나게 생겼네. 생각하면서도 이유가 있는 술기운이라고 속으로 변명하는 그였다. 그녀도 모르는 일도 아니고, 또 이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려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미야미즈 씨의 친구인 그녀라면, 자기 일처럼 아파했던 그녀라면 틀림없이.



"타키 이 녀석. 예나 지금이나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3.




불이 꺼진 병실에서 감각만으로 뻗은 손이 차가운 피부에 닿았다. 자신이 알던 그녀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거칠거칠한 느낌이 상처를 내듯 손등을 스친다. 물도 정말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고 했던가. 죽지 않을 만큼만.



그녀가 보고 있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인간의 존엄인지, 생에 대한 실낱같은 집착일지, 아니면 뭔가에 대한 미련인지. 그 날 이후로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채 거부당한 내가 함부러 추측할 수는 없었다. 그저 지금 이 병실에 내려앉은 어둠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미치도록 슬플 뿐.



그녀가 쓰러졌던 날. 새하얗던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저지른 것은 미친 듯한 저주와 갈 곳 없는 폭력이었다. 왜, 왜 하필 그녀였냐고. 이미 우리는 한 번 당신이 준 빌어먹을 운명도 뛰어넘지 않았냐고. 그런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한 번도 겪지 않을 일들이 그녀에게만 일어나는 거냐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임계점을 넘은 정신이 아예 터져버리고 나서는 애원을 했었던 것 같다. 아직 그녀에게 하지 못 한 말이 있다고, 해주지 못 한 것이 있다고. 내 안의 뭔가가 홀린 듯 쏟아내게 만든 감정의 결과가 지금 눈 앞의 그녀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장난감이라도, 팔다리는 남아 있는 지금의 모습이.


이제는 거의 다 탄 듯 잠잠해진 감정이 이끄는 대로. 얼굴을 만지던 손을 왼손으로 뻗었다. 피는 통하고 있지만 굳어 딱딱해진, 고무를 만지는 느낌에 살짝 오한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느낌 때문에, 아무리 만지고 느껴도 그녀가 깨어날 일이 없다는 사실에 작은 애증을 느꼈다.


혼이 담겨있지 않은 약지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 얼어붙은 땅에도, 생명이 깃들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새로운 약속을 새길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믿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될 테니까.



고요한 병동의 문 너머로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더 끌어주길 바랬는데 신타 녀석… 



하룻 동안 내게 주어진 시간. 그녀가 잠들어있을 밤에 잠깐이나마 얼굴을 보고 갈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너무 짧았다. 곧 요츠하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게 되면, 당연한 듯 서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만약에. 세상 어디에나 붙일 수 있는 그 말이 이렇게나 끔찍하게 다가올줄은 몰랐다. 만약에 그녀가 깨기라도 한다면, 깨어나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타키 오빠."



들어올 줄 알았던 요츠하가 살짝만 문을 연채 조심스럽게 부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미츠하를 뒤로 한 채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모르는 것은 아니니 분명히 뭔가 일이 있는 거겠지. 


문을 앞에 둔 복도에서 요츠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아까의 일 이후로 쭉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나가려던 위로의 말을 삼켰다. 총명한 아이니까. 내 몸이나 잘 챙기란 타박이나 들을 것이 뻔했다. 그건 신타가 알아서 잘 했겠지.



“아빠가 오빠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예상치 못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는 분이기도 했고.

적어도 그 이야기들이 나에게 긍정적인 이야기였다면 좀 더 숨통이 트였을 텐데.



“…언제?”



“급하신 모양이에요. 언니 쓰러진 뒤로 병원에 찾아오는 것도 내일이 처음이지만… 내일 바로 만나고 싶으시다고.”



…커다란 벽이 갑자기 생겨난 기분이다.

미야미즈 씨. 현직 의원에 형상화 한 것 같은 굳건함과 완고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들었다. 업무 때문에 계속 도쿄에 안 계셔서, 내일이나 되야 돌아오신다고.


미츠하와 가진 교제 기간 중에도 어찌어찌 뵙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이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알았어야 했다. 들려오는 얘기 속의 미야미즈 씨는 완고할지언정 매몰찬 아버지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분이, 당장 나를 보고 싶다는 건가.



“알겠어.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혹시라도 결례 되지 않도록 잘 좀 전해줘.”



“네. 저… 타키 오빠.”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시선이 갔다. 미츠하와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른, 조금 더 당돌하고 총기 있는 눈동자가 복도의 불빛 아래 빛난다.



“들어가서 제발 푹 쉬세요. 내일 아빠 뵈신다는 분이 몰골이 그게 뭐에요. 옷도 좀 다려 입으시구요. 정장도 잘 안 어울리면서.”



…한 방 맞은 기분이다. 돌이켜보니 근 일주일간 내 몸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몰려드는 피로감을 애써 감춘 채, 당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동생에게 웃어보였다.



“꼬맹이가 못 하는 말이 없어.”





4.



“꺗! 변태야!”



음악 듣기에 열중하고 있던 미츠하의 가슴을 뒤에서 살짝 쥐었다. 음… 몇 번을 만져도 질리지 않는, 내 손에 딱 맞춘 것 같은 느낌. 바보! 변태! 찰싹 찰싹 팔을 때리는 손바닥을 엄살과 함께 받아내다 그녀의 몸을 안은 채 소파에 드러누웠다. 몇 번이고 해온 스킨쉽에도, 처음처럼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은 늘 소년 시절 같은 장난기를 돋구곤 했다. 지금처럼 좀 더 얼굴을 가까이 해서 이마를 맞대면, 그녀는 뭔가를 기대하듯이 살포시 눈을 감곤 했다.


이마를 살짝 튕겨줄까 아니면 가벼운 키스를 해 줄까 고민하던 귀에, 처음 듣는 멜로디가 흘러 들어왔다. 이어폰에서 새나오는 소리의 편린 정도였기에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의아한 표정을 눈치챈 듯 살짝 미소지은 그녀가 한 쪽을 내 귀에 꽂는다.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들어본 적은 있는 언어로, 아마 애절한 노래인 것 같은 선율의 발라드가 귀를 메운다.


K-pop이야. 가사는 잘 모르지만. 납득하고선 다시 이마를 맞댄 채 같이 음악을 들었다. 그녀는 음악 감상의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었다. 음악을 들을 땐 클래식이든 엔카든, 락이든, 어떤 것도 이토모리에서 직접 접할 수 없던 것들이라고, 자칫 탐욕스럽게 보일 정도로 쓸어 담아 듣곤 했다. 그래도 일반 팝이 아닌 다른 나라 노래도 들을 줄은 몰랐지만.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슬픈 선율만이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듯 지그시 감긴 그녀의 눈을 본다. 음악을 즐기는건 좋지만 나는 아직도 너와 이렇게 맞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설레는데. 너무 찬밥 신세로 두는 거 아닌가요 미츠하 씨?


감은 눈의 가느다란 곡선을 뒤로 하고 시선을 좀 더 내렸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비너스상같은 존재감을 뽐내는 코. 지금도 내 목 언저리를 간질거리도록 얕은 숨을 뱉는 입술은 꿀을 바른 듯 탐스러운 빛을 띄고 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오롯이 나의 것인 탐스러운 과실을 그대로 두고 볼 이유가 없었다. 생각할 필요 없이 입술을 가져다 대








"허억!"



벼락이 치듯 각성한 정신과 함께 거친 숨을 토했다. 반사적으로 일으켜 세운 상반신에 천천히, 현실감이 스며들어 왔다.



구겨진 소파의 감촉. 늦은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등을 가득 적신 식은땀.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전화기의 불빛 말고는 어둠만이 가득한, 익숙한 공간.



"꿈…인가."



몸이 현실감을 되찾자마자 약간의 구토감이 올라왔다. 우악스럽게 쑤셔넣은 역함을 달래기 위해 냉장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정표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길앞잡이처럼 앞서 안내하는 익숙함이 낮설었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집에서 제 정신으로 있었던 시간은 두어 시간도 되지 않았으니까.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퍼지는 역한 냄새에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평소에는 덜렁대는 주제에, 집안일과 먹는 것 만큼은 타협이 없었지. 남긴 음식을 다시 데운다거나, 보존식을 만든다거나 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그녀의 자취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타키 군이 먹을 거잖아. 아버지와의 생활로 인스턴트에 길들여져 있던 내 입을 다물게 했던 한 마디. 그 말 이후로 한 번도 나보다 늦게 일어난 적이 없던 그녀였다. 변색된 채 썩은 내음을 풍기는 저 생선 토막도, 그 날의 저녁에 올라올 예정이었을 터다. 그리고… 


물이 담긴 페트만 꺼낸 채 냉장고의 참상을 외면하며 문을 닫았다. 터벅 터벅 소파에 던진 몸에 기름을 먹이듯 물을 쑤셔넣었다. 입을 벗어나 반쯤 타고 흐른 찬 줄기가 강을 이루고, 목 언저리에서부터 땅을 적셨다. 축축해진 셔츠의 느낌을 외면하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22시 50분. 집에 들어오고 나서 내팽개치듯 마의를 벗어던지고 소파에 쓰러진 지 겨우 10분이 지났다. 홀린 듯 스트리밍 앱을 켜고 그녀와 공유하던 재생 목록을 뒤졌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노래들 틈새로,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보였다. 재생하자마자 핸드폰의 스피커 사이로, 한 번은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금도 이렇게나 속이 타는데, 이런 짓을 해봤자 한 순간의 변덕이고 자기 만족일 뿐이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불빛이 그녀의 메세지를 밝히기 전에 닫아야 했다. 빌어먹을 구토감이고 뭐고간에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버렸어야 했다. 



[당신을 위한 선물. -맥주만 마시면 몸이 차가워져서 안 돼!]



그냥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사케 한 병일 뿐인데, 붙어 있는 그녀의 메세지를 보자마자 요동쳤던 속내가 눈을 찔러온다. 냉장고에 언제까지 놓여있을지 모를 구보타 만쥬의 처지가, 날개가 꺾인 채 스러진 그녀와 다를 바 없다고 잠깐이나마 생각해버린 내 심장을 후벼 파고 싶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집어든 핸드폰의 메신저를 켜자마자, 바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눌렀다. 14일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낸 메세지 옆의 1은 여전히 그대로,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겠다는 듯 오롯히 선 채로 있었다.



5.



알고 있어. 

당신이 조금 전 까지도 옆에 있었다는 걸. 


그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었던 감촉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당장이라도 날 안아달라고, 조금 더 바보같은 나를 품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어. 좀 더 손에 얼굴을 부비고, 당신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어.



"윽… 히극… 흑…"



옛날이나 지금이나 난 솔직하지 못 한 여자야. 내가 먼저 타키 군을 거부했으면서, 내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이젠 현재도, 미래도 없는 나에겐 타키 군을 사랑할 자격 따위 없다고 단정지으면서도, 마음 속에선 타키 군이 지금이라도 달려 와서 날 붙잡아주길 바라고 있어.



매일 밤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이 타키 군의 것이란 것도 알고 있어. 미치도록 보고 싶은데, 당신의 마음과 접하고 싶은데. 내 남아있는 삶 동안엔 불가능하겠지. 이제 난 내 두 팔로, 두 다리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너에게 솔직해지는 것도, 너에게 닿는 것도.



매일 밤 나를 내버려 둔 채 어딘가로 떠나는 너의 뒷 모습을 봐. 지독한 꿈이라고 펑펑 울 때 마다 난 조금씩, 조금씩 더 위선자가 되어가. 정말로 내가 널 떠나 보냈다면 그런 감정조차 없어야 하는데. 내 마음을 속이고 참는 건 이토모리에 있는 동안 더 없이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내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거니.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준 만큼, 벌을 받고 있는 걸까?



"타키 군… 흐윽… 타, 타키 군…"



매일 아침 된장국을 만들고, 너의 넥타이를 매 주고, 네가 좋아하는 반찬은 뭘까 하고 고민한 도시락을 쥐어 주는 아침을 꿈꿨어. 너의 생각을 하며 시간을 죽이기도 하다가, 무조건 너보다 먼저 퇴근을 해서 저녁을 준비하고 같이 밤을 맞는 하루가 계속될 거라고 믿어왔어. 이런 건… 이런 건…









"…왜 이렇게 솔직하지 못해 바보 언니야. 그냥… 그냥 조금만 더 욕심 내도 되잖아… 지금까지 맨날 참고 양보하면서 살기만 했잖아…"



"요츠하…"



나와 같이 물기 어린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새 침대 가까이 다가온 몸이 감각이 남은 부분을 부드럽게 덮었다.



"타, 타키 오빠가 언니 버릴 사람 아닌 거 알잖아… 흑, 나보다… 히끅, 나, 보다 더… 잘 알면서… 왜, 왜 자꾸 고집 부리는데… 언니 바보야… 끅, 진짜 바보야…" 



"미안해… 흑… 미안해 요츠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떨리는 몸이 만나서 뒤섞였다. 배게맡에 얼굴을 묻은 채, 보여주지 않는 표정을 대신하듯 아프도록 안아오는 몸을 안아줄 수 없다는게 미치도록 야속했다. 팔을 움직이려고 몇 번이고 시도하고, 절망했던 부질없는 노력이 지금에라도 작은 빛을 발했으면 했다. 



그리고 끝내 움직이지 않는 수족을 보며 다시금 깨우쳤다.

미야미즈 미츠하는,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이제는 더 이상 무녀도 아니지만 신이시여. 듣고 계신다면


이 작은 아이가 더 이상 슬프지 않기를,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더 이상 나로 인해서 고통받지 않도록, 차라리 제 남은 생명을 지금 거둬 주신다면. 몇 번이고 당신의 앞에서 춤을 추고 발에 입을 맞추겠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그에게서 나에 관한 기억을 지워 주시기를. 제 멋대로 살다가 떠난 바보같은 여자에 관해서는 조금도 기억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바랍니다.


부디 신이시여.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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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식 시발럼아 또 짤라먹어라.


아무튼 이걸로 상편은 끝.


무엇이든 좋으니 감상평은 핫산에게 큰 힘이 됩니다!


노래는 소설 읽는 흐름에 따라 1절만 들어도 좋고 다 들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