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발 콘테스트 출전용 팬픽입니다.
* if 설정은 없습니다만.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은 있을 수 있습니다.
- 마음의 흉터 (上)
“비가 올려나..?”
날씨가 우중충하고, 구름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골든 위크도 이틀째로 접어든 오늘, 여기는 도쿄역. 신칸센 종착 플랫폼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눈이 빠져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내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미츠하를 말이다.
5월의 대형 연휴, 줄여서 골든 위크. 미츠하도 나도 회사를 일주일 넘게 쉬어 자연스레 둘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는 일년에 몇 안되는 기간이다.
첫날엔 일단 집에서 그동안의 피로를 풀고, 둘째날부터 오랜만에 도쿄 디즈니랜드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돈도 벌었겠다, 일주일을 미츠하와 함께 불태우겠다며 의지로 불타올랐던 나였지만, 나의 원대한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대고 말았다.
“미츠하, 어딜 간다고?”
“응, 나 좀 집에 갔다 올 일이 있어서.”
미츠하와 나는 동거를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즉, 미츠하의 집이 곧 내 집이고 그렇다는 소리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말하는 ‘집’은 우리 집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이토모리에?”
이토모리, 미츠하의 고향. 그러나 세상엔 혜성을 맞고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기적의 마을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재해 직후 집요하게 공과 사를 가리지 않고 들러붙는 언론 때문에 많은 곤혹을 치렀다고 했지만, 그 덕분에 관심 하나는 제대로 받아서, 중앙정부 지원하에 복구가 진행되었고, 십 년이 지난 이제 마을 주민들의 절반 정도는 다시 재건된 마을로 돌아왔다는 모양이다. 그 절반 중에는 미츠하의 집, 미야미즈 가문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뭐, 더 이상 신사는 안 한다는 모양이지만.
“요츠하가 마침 연휴고 하니 오랜만에 얼굴 좀 내밀고 가라더라. 미안해. 타키 군.”
미안해하는 사람의 교과서적인 표본이 있다면 딱 지금의 미츠하일 것이다. 그 진심이 가득한 표정은 볼 때마다 너무나도 데미지가 커서. 나는 급히 눈을 딴 데로 돌리며 손으로는 손사래를 열심히 쳤다.
“아니.. 아니야. 그래도 하나뿐인 가족이 부르는데 갔다 와야지. 암.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맘 편하게 갔다 와. 근데 며칠 정도 될 것 같아?”
이왕이면 짧게짧게 갔다 빨리빨리 왔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바람이었다. 그래야 미츠하와의 황금 같은 시간을 하루라도 더 챙길 것 아닌가. 맘은 그래도 들켰다간 미츠하가 더욱더 미안해 할 것 같았기에 나는 최대한 신경 안 쓰는 티를 내려고 용을 썼다. 그러나 실패한 것 같다. 저건 아무리 봐도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야.
“음. 거리도 좀 되고, 텟시네도 좀 만나고 해야 되니까, 3일쯤은 걸리지 않을까? 정말 미안해. 골든 위크라고 이것저것 많이 생각해 뒀을 텐데 나 때문에…”
미츠하의 친구, 테시가와라 카츠히코. 그는 얼마 전, 다시 가업을 이을 때가 왔다며 아내인 사야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엿한 건설사 사장이 된 지금은 마을 복구 사업 때문에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모양. 그렇지. 이왕 돌아간 김에 그 둘도 보고 와야겠지. 아주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니까. 좀.
“그러니까, 제발 좀 미안해하지 말래두!”
“그랬지, 헤헤… 미안.”
“아, 좀!!!”
그렇게 되어, 골든 위크 첫날에 미츠하는 바로 이 역에서 이토모리를 향해 떠났다. 또다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내 복장을 다시 한번 뒤집어 놓고선.
미츠하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사무치는 이 공허함. 마치 미츠하와 다시 만나기 전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허무함. 고작 하루도 안 되었건만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나는 오랜만에 아직도 옆구리가 시린 처지인 신타 녀석을 불렀다. 츠카사 녀석도 부르곤 싶었지만 역시 오쿠데라, 아니 미키 선배와 지내느라 바쁠 테니까 부르지 못했다.
그렇게 신타와 단둘이 동네 술집에서 남자 단 둘이 오랜만에 부대끼곤 술도 잔뜩 펐다. 서로 거나하게 취해가지곤, 근황 보고부터 시작해서 각종 할 말 못할 말을 다 했다. 미츠하와 함께 보내는 하룻밤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외롭지 않은 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거기까진 썩 괜찮은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있지도 않은 미츠하의 이름을 부르며 베개에 머리를 막 묻어버리려던 참에 미츠하로부터 날아온 짧은 문자 한 통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타키 군, 나 내일 돌아가.’
술에 거나하게 취한 주정뱅이도 문자 한 통으로 깨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난 처음 알았다.
원래 예정은 3일쯤 있다 올 예정이라고 미츠하는 그랬었다. 물론, 더 빨리 온다면 나야 좋다. 좋지만…
그동안 만나온 나의 미츠하는 겉으로는 일견 부드러운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한 여자였다. 무언가 스스로에 대해 말을 꺼냈다 하면 절대 어기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 자신만은 절대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미츠하가 보내온 문자다. 그냥 ‘타키 군이 보고 싶어서’ 정도의 가벼운 이유일 리는 없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저런 가벼운 변덕이라면 차라리 좋은 상황이겠지만.
지금도 그녀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면서도, 혹시 마주친 그 얼굴이 슬픈 얼굴은 아닐까 하고 걱정해버리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삿일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알려드립니다. 알려드립니다. 이 역까지 운행하는 도카이도 신칸센 노조미 열차가 타는 곳 9번으로 곧 도착합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곧 그녀가 탄 열차가 도착한다는 알림이 나를 상념으로부터 강제로 끌어낸다. 그녀가 이제 오는구나. 신칸센의 그 많은 문 중 어디로 내릴지는 듣지 못했지만. 어차피 그녀도, 나도 서로를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기에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건 열차가 도착하고 나서나 생각해 보자. 잠깐 일어났던 나는 다시 엉덩이를 벤치에 붙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나와 사귄 지 반 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내게 단 한번의 어리광을 부린 적이 없다. 내 앞에서는 의연한 모습만. 강한 모습만 보이려고 애써 노력하는 그녀가 항상 안쓰러웠다. 그럴 필요 없는데. 좀 더 기대도, 응석부려도 되는데. 난 얼마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데, 왜 내게 기대주지 않는 걸까.
혹시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남자인 걸까. 미츠하 옆에 서 있기에 나는 너무도 부족한 남자인 게 아닐까.
그녀의 어리광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찝찝함, 자괴감. 그리고… 이렇게 생각이 폭주할 때면 나는 마음 속으로 되뇌이곤 했다. 그래도 내겐 그녀밖에 없어. 라고. 그래. 그녀도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분명히.
어설펐던 나의 고백에 웃음과 함께 돌아왔던 미츠하의 그 한 마디는 아직 사회인으로서도, 남자로서도 초짜인 내게는 너무나도 크나큰 위안이었다.
“타키 군?”
“으악, 미, 미츠하?”
미츠하다! 아직 열차는 오지 않았을 텐데? 나는 미츠하의 등 너머를 슬쩍 본다. 그리고 어느 새 열차가 들어와서 멈춰 있음에 경악했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타키… 군?”
“어, 어 미안! 생각 좀 하고 있었더니 열차가 온 줄도 모르고…”
“그래?”
허둥지둥,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츠하가 왔다. 내 사랑 미츠하가. 보고 싶었다. 이제는 볼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미치도록 기뻤다.
나는 시선을 위로 옮기며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기기 시작했다. 그래, 가냘픈 다리도, 잘 빠진 허리도, 도담한 가슴도. 모두 내가 아는 사랑스러운 미츠하의 모습 그대로. 그리고…
서서히 올라가던 시선은, 거기서 딱 멈추고 말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마침내 드러난 그녀의 표정은, 전혀 웃고 싶지 않은 게 눈에 보이는. 간신히 쥐어짜낸 약한 웃음.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려 들지만, 그녀의 여린 본모습이 내 눈에 너무 선명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언제나 그녀의 꽃다운 얼굴을 더욱더 빛나게 해 주던. 삼단같이 긴,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
그것이. 거짓말같이 어깨 위에서 잘려 있는 채로.
미츠하는 옆머리를 비비 꼬며 말했다.
“조금… 이상하려나?”
분명히 무슨 일이 있던 게 틀림없다. 내가 여자들의 심리는 그렇게 잘 알지 못해서 쑥맥 소리도 듣고 살았지만, 여자들이 머리를 함부로, 아무렇게나 자르지는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나는 그 점을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미츠하 또한 한 고집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 들더니, 오늘의 내 고집이 예사는 아니라 판단했는지 어느새 나보다 조금 더 앞서가더니, 그저 잔뜩 찌푸린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 채 걸어가고 있었다. 잠깐. 위험해!
막 다른 아저씨와 부딪히려던 미츠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제서야 미츠하의 시선이 하늘이 아니라 내 쪽을 보기 시작한다.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한 허무한 표정이 내 마음에 큰 말뚝이 되어 박힌다.
“타키 군?”
“너, 부딪힐 뻔했어. 위험했다고.”
“정말? 몰랐어… 고마워.”
나를 바라보며 은은히 웃어보이는 미츠하. 하지만 알맹이라곤 없는. 빈 껍데기와도 같은 웃음. 차라리 울음이고 절규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 울라고. 마음껏. 넌 더 이상 혼자가 아닌데. 너와 함께 걷는 내가 있는데. 울고 싶으면 언제든지 울어도 되는데.
“타키 군?”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눈가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그 감촉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미츠하는 나를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오른손으로는 손수건을 내 눈가에 대고 무언가를 닦아주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울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바보 같은 나. 울어야 하는 건 미츠하인데. 왜 내가 먼저. 이래서야 미츠하가 날 못 믿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손으로 새어나오는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진정해야 돼.
나는 괜찮다.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은 내 기대를 무참히 배신하고 만다.
“참지… 말아 줘.”
“응?”
의지와는 상관없이 튀어나온 말이 내 가슴을 더 깊게 후벼판다. 깊게 후벼파인 마음의 틈새에서 간헐천마냥 감정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줄줄 흐르는 감정을 참을 생각도 못한 채. 나는 미츠하에게 마음으로 외쳤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잖아? 울어. 그래도 돼.”
“타키 군… 나는 괜…”
“괜찮지 않아!”
또다시 괜찮다고 하려던 미츠하의 말을 나는 거세게 틀어막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는 내 엉망진창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추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 안다. 그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왜 억지로 괜찮은 척 하려는 거야? 전혀 괜찮지 않잖아. 힘들어하고 있잖아. 다 보인단 말이야.”
“타키 군, 나는 정말로…”
“괜찮다고 거짓말 하고 싶으면 그 혼이 나간 표정부터 어떻게 좀 해!”
미츠하는 오른손을 들어 벌어진 입을 틀어막는다. 그런 미츠하의 얼굴에 대고 나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입으로도 외치기 시작한다.
“좀 더, 나에게 기대라고. 내 품에 안겨 울어도, 약한 모습 보여도 돼. 나는 언제든, 어디에서든, 널 받아줄 준비 따윈 진작에 되어 있단 말이야! 그래, 사귀게 된 그 날부터, 아니, 너를 다시 만난 그 날부터, 언젠가 너를 처음 만난 그 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라도!”
입을 막던 손이 한 손에서 두 손으로. 변화라곤 그것뿐. 여전히 말이 없는 미츠하. 그래, 이렇게까지 말해도. 나로는 안 된다는 거니? 너라는 거대한 존재를 감당하기엔 나로는 부족하다는 거니? 그래서 나의 존재가 너의 버팀목이 아니라, 감정 하나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짐짝이 되어가고 있는 거고?
“나라는 놈이 믿음직하지 못한 건 알고 있어.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정도도 못 받아줄 정도로 허약하지 않아. 좀 더 나를 믿어 달란 말이야. 너에게 있어 내 존재가 그 정도 믿음도 못 줄 정도라면, 나보다 더 좋은, 너를 받쳐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아가! 물론 나는 미츠하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래도 나 때문에 너가 힘들어한다면, 언제든지 놔 줄…”
“타키 군.”
내 외침을 한 마디로 끊어버리곤, 미츠하는 또다시 말없이 뒤돌아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아까보다 더 시커매진 하늘에서 이제서야 물방울이 한두 방울씩 슬슬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도 미츠하도, 우산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 모두 거기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 여전히 뒤돌아선 그대로. 미츠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런 말,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줘. 그 날 했던 그 말. 한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야. 나는 너 없인 못 살아. 타키 군이 아니면 안 돼.”
“미츠하…”
툭.툭. 빗방울의 밀도가 점점 조밀해져 간다. 마침내, 우수수 하고 구름은 그간 참아 왔던 모든 빗방울들을 아낌없이 도쿄에 펼쳐놓았다. 그 자리에서, 비가 오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우리들은 한참 동안이나 선 채로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깬 건 얼마 뒤 미츠하가 꺼낸 한마디였다.
“우리, 모처럼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홀딱 젖어버렸네.”
“그러게.”
집에 들어온 우리는 창 밖을 보며 간단한 소감을 나누었다. 창 밖에는 이제 폭포수 같은 장대비가 도쿄 전체를 적시고 있었다.
“누가 보면 헤엄이라도 친 줄 알겠어.”
“응. 기다리면서 비가 올 거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미츠하를 보니, 아래부터 위까지. 모두 젖은 채. 블라우스도, 가디건도 모두 젖어 몸 안이 조금씩 비쳐 보인다. 쇄골도, 배꼽도, 그리고.. 그 사이에 볼록 튀어나온. 도담한 가슴까지. 살짝. 정말 살짝.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미츠하의 몸이지만, 이렇게 옷 너머로 언뜻 비쳐보게 되는 건 또 처음 해 보는 경험이다. 나는 잔뜩 붉어지려 하는 얼굴을 억지로 돌렸다.
“아, 샤워부터 해야지! 미츠하, 들어가!”
눈을 돌린 채, 나는 억지로 미츠하를 샤워실로 밀어 넣었다. 역시 미츠하답게 나보고 먼저 들어가라고 고집을 부렸지만, 마침내 그녀도 포기했는지 샤워실 문 너머로 샤워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나는 안심한 채 방 바닥에 몸을 누인다. 소파가 있었지만,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내가 거기에 앉았다간 소파를 다 버리게 될 테니까. 잠시 엄한 생각으로 가득찼던 머리가 다시 조금씩 맑아지며 마음 또한 조금씩 평정을 찾아간다.
역에서 내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애타게 외쳤었다. 나를 믿어 달라고. 내게 응석부려 달라고. 내 품에 안겨 마음껏 울어 달라고. 그 말에 대한 미츠하의 답은, ‘술 한잔 하자’ 였다. 그래서 우리는 들어오는 길에 잠깐 편의점을 들러서 – 물론 미츠하의 젖은 모습을 마구 보여주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나만 들어가서 – 맥주를 잔뜩 사왔다. 나는 이 정도면 됐다고 했지만, 미츠하가 자꾸 고개를 저었기에 결과적으로 두 손으로도 다 못 들 정도의 양이 되었고. 둘이서 손잡이 한 쪽씩 사이좋게 들고 집까지 들어와야 했다.
미츠하가 말한 술 한잔 하자는 의미가 남자들의 그것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여자들만의 다른 의미가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지기 싫어하고,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그녀가 내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별 말없이 그녀가 바라는 만큼 술과 안주거리를 샀고, 함께 집에 들어왔다. 원래는 술집이라도 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젖어가지고 그런 데를 갈 수는 없었으니까.
“타키 군, 나 다 했어. 빨리 들어가서 샤워해.”
“어, 응.”
샤워도, 옷 갈아입기도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원래 하기로 했던 일을 하는 것.
하지만 그래도 대낮부터 빈 속에 음주를 할 수는 없는 법. 우리는 마침 집에 남아있던 간단한 먹을거리로 요기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나도, 미츠하도 별 말이 없었다. 가끔 서로를 힐끗힐끗 바라보기만 할 뿐.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식탁 위에 술과 안주를 잔뜩 늘어놓는다. 오징어, 땅콩, 가벼운 간식거리. 맥주 또한 아사히부터 시작해서 산토리, 기린, 삿포로, 아마 어지간한 브랜드 맥주캔은 거의 하나씩은 사 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미츠하랑 술을 마셔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집에서 단 둘이 마셔본 건 또 처음이구나.
꿀꺽. 꿀꺽.
술을 먹는데 조용하다니. 이게 얼마만인가. 기억을 가볍게 되짚어 본다. 언젠가 아직 미츠하를 만나지 못했을 적에 츠카사랑 먹었던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물론, 내가 기억하는 건 그 자리가 조용했다는 것까지다. 이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 녀석이 내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는 아직까지 모른다. 그 얘기만 꺼내면 그 자식은 나를 무슨 글러먹은 자식처럼 취급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 때도. 지금과 같았지.
아까부터 우리의 흐름은 그 때와 완전히 같았다. 미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은 맥주캔을 족족 잘도 비워대고 있었다. 그러면 나 또한 딱 미츠하가 마신 만큼 따라 마신다. 술은 줄어들지만 안주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마치 1초라도 빨리 취하는 것만이 지상과제라도 되는 듯 그녀는 캔을 비우고, 또 비웠다. 그러고도 그녀의 꽉 다문 입은 열릴 줄을 모른다.
얼마나 두꺼운 빗장이 그녀의 마음에 걸려 있는지. 애인일지라도 결국 타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저렇게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그 빗장을 어떻게든 열어보려는 저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내면의 고통을 나눌 수 없다면 하다못해 취기라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맥주캔을 기울인다.
마침내 꽉 다문 그녀의 입이 열린 건 바닥에 굴러다니는 맥주캔이 도합 8캔이 다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타키 군은, 아버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취기 때문인지 약간은 꼬여 있는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 속에 담긴 의지만은 아직 취하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나 또한 조금은 꼬부라진, 그러나 확실한 의지로 되묻는다.
“아버지라면, 우리 아버지 말이지?”
“응.”
“으음…”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 본다. 그러나 인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은 친구 같고. 가끔은 엄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좋은 부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 이상의 생각을 요구하는 것 같은 미츠하에게 도통 돌려줄 말이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미츠하. 난 솔직히 우리 아버지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응. 말해봐.”
“그게, 알지? 내가 어릴 때 우리 부모님은 이혼하셨어. 나를 키우기로 한 쪽은 아버지였지. 철이 든 뒤부터 나는 계속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크게 남아있진 않거든.”
“그렇구나.”
“그래도 그게 좋은 거라 생각해. 어머니가 없는 공백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가 부모로서 충실했다는 소리일 테니까. 그래. 부모님 때문에 누굴 부러워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이게 내 대답이야.”
“타키 군 아버님은, 좋은 분이시네.”
미츠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또한 미츠하를 따라 고개를 돌려 봤지만 그다지 특이한 건 없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미츠하에게 묻는다.
“미츠하, 혹시 아버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미츠하가 하는 말에는 항상 뼈대가 있다. 말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아도, 하나하나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미츠하의 말. 그렇게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녀라면 술을 좀 먹었다고 아무 의미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아버지에 대해 물은 것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내 짐작이 맞는다는 사실은 미츠하가 곧 확인시켜 주었다.
“응. 나 있지. 아빠한테 심한 말을 해 버렸어.”
번쩍. 하고 명멸하는 빛과 함께, 곧이어 울리는. 쿠르릉. 하고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미츠하는 또다시 그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나쁜 여자에겐 그에 어울리는 연출이란 건가. 하나님도 참 섬세하셔라.”
“미츠하, 넌 나쁜 여자가 아니야. 절대로.”
“과연 그럴까?”
말과 함께 눈앞의 캔을 싹 비워버리는 그녀. 그에 따라 나도 캔을 비운다. 땅바닥을 세차게 때리는 장대비가 자아내는 시끄러운 소리. 그 와중에도 술이 목으로 넘어가는 꼴딱 소리는 아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비워버린 캔을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던져버린다. 방구석에 쌓인 캔의 숫자가 하나 늘어난다. 나도 뒤질세라 하나 더 늘렸다.
“사실은 말이야. 타키 군은 내게 있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일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어.”
“미츠하…”
난데없는, 생각지도 못한 내용의 고백에 마음이 기꺼워지는 것도 잠시.
“하지만 내가 지금 이 말을 해버리면 타키 군이 나를 못 믿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무서웠어. 이렇게 나쁜 여자애를 무작정 믿어달라는 것도 죄악이겠지. 그렇지만 타키 군이 나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더라고. 그래서 말하지 못한 거야. 너는 스스로가 추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했지? 아니야.”
“말로만?”
“응?”
미츠하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건 기뻤다. 기뻤지만, 결국 그녀의 말에는 마음 어딘가 한구석에서 나를 믿지 못했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그녀. 나는 그 부분을 용서없이 파고들었다. 그게 가능했던 게 취기 때문인지, 노기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네가 어떤 모습을 보인대도, 내가 너를 믿지 못할 일은 없어.”
“...”
미츠하는 또다시 말이 없다.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기에 나는 입을 멈추지 않는다.
“나에겐 있잖아. 미야미즈 미츠하를 싫어한다는 선택지 따윈 존재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된다거나, 믿지 못하게 된다거나 그런 일은 없어. 너는 내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 말 자체가 나에겐 너에 대한 내 확고한 마음을 부정당하는 거나 다름없는 거야.”
“타키 군, 그래도…”
“어떤 충격적인 일이 너와 아버님 사이에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뻔한 말로, 있지도 않은 가능성을 말하려 하는 미츠하. 그런 미츠하를 더 확실히 부정해 주기 위해. 나는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간단하고. 그러면서도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하는. 그런 단어를.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선언해. 나는 네가 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다 받아들이고, 도와줄 수 있어. 물론 나조차 받아줄 수 없는 일은 세상에 많겠지. 나도 사람이니까 솔직하게 그건 인정해. 그렇지만 미츠하에게 벌어지는 일 중에 그런 일은 없어. 그럴거라 나는 믿어.”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 그럼 정확히 말해봐! 내가 듣고 판단해 줄 테니까! 아니, 내가 어디까지 너를 사랑할 수 있는지 이 참에 마음껏 시험해 봐도 상관없어. 어디 시험해 보시지!”
취기에 몸을 맡긴 채, 나는 마음껏 고함을 지른다. 평소 같으면 다른 사람도 아닌 미츠하를 상대로 이런 말 따윈 절대로 못한다. 아무리 내가 다혈질이고 혈기왕성하다 해도 말이다. 결국, 할말을 찾지 못한 미츠하는 그녀로선 드물게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정말이야?”
상처받은 토끼가 간신히 용기를 짜내 앞발을 내밀듯 건네어진 한 마디. 이럴 땐 확실하게 보여줘야겠지. 나는 힘차게 웃으며 맹세의 한 마디를 외쳤다. 으음. 좀 특이하게 해 볼까.
“이게 거짓말이면 내가 이토모리 호수에 코를 박고 죽고 말지!”
“죽는다니. 농담으로도 하지 마. 타키 군!”
“하하하하하!”
깜짝 놀란 미츠하가 나를 말리고, 조금은 평소같아진 미츠하의 모습에 절로 가슴이 시원해져 웃음으로 그것을 나타낸다. 미츠하 또한 그런 나를 보더니. 드디어 그 혼이 나간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짓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기꺼워서 나는 계속 웃었다. 미츠하 또한 그런 나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그렇게 주정뱅이 남녀는 한참을 함께 웃었다.
웃음이 그치고, 여전한 장대비 속에서 미츠하는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해 주면, 어쩔 수 없네. 말해 줄게. 어제 하루, 이토모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준비는 필요 없어. 언제든지 선방이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들어주지.”
내 대답과 함께 미츠하는 살포시 웃었고. 그와 함께 미츠하 마음 속의 실타래가 생애 처음으로 바깥 나들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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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콘 출전을 위해, 그제 생각나서 급하게 쓰기 시작한 팬픽입니다.
사실, 제가 과거에 썼던 2부작인 폐허 속에서 피어나다의 짜가 후속작쯤 되는 물건입니다. 왜 짜가냐면, 저기서는 상황이 2부작에서 바로 끝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을 상황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이왕이면 저 과거작을 읽고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R-18은... 아마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올리고 마저 하편 쓰러 갑니다. 분량 조절은 오늘도 대판 실패했습니다. 헤헤.
아침에봐야지
댓글이, 없다...
와 쩐다
진짜 무슨 일 있었는가 조마조마하면서 봤어
설마 미츠하가 타키보고 대를 이으라는 토시키랑 대판싸우고 머리자른건 아니겠지 그런 플롯밖에 생각이 안나네
어서 하편을 보고 싶은 마음뿐...!
그리고 비오는 날을 배경으로 둘이서 방에서 도란도란 술 까마시는것도 좋았어. 되게 신선했음 ㅋㅋ
토시키랑 싸우고 머리를 자른 건 맞습니다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하하. 이미 서두에 신사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도 적어 뒀지요?
그러니까 어서 하편을 써오도록! 이 두근거림과 찝찝함을 날려줘!
오 괜찮다
퍄퍄
하편은 오늘 자기 직전이나 내일 점심쯤에나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아 글쿠나 미안 ㅎㅎ
아 그냥 폐허속에서 피어나다를 봐라는 의미구나. 이 녀석 홍보 잘하는데...?
미친 존나 재밌잖아 이거 머랴
와 덕분에 폐허 읽음. 진짜 재밌네. 이거 하편도 저기서 해결 안되었을때의 상황이구나? 기대할게
아직 패허 읽기전이지만 무슨 일이 있는것인지 궁금하네 빨리 다음편 써와라
하편 올라왔습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yourname&no=624658
언어의 정원이 떠오르는 대사가 있었다. ㅋㅋㅋㅋㅋ 이번에도 토시키는 빌런인가요
ㄴ 언어의 정원에서 따온 게 맞습니다.
이제야 보게됐는데 필력이 엄청나시는군요ㄷㄷ - dc App
몰입감 개쩐다 - dc App
오 이걸 왜 못봤었지 내용 좋네요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