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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묵은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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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
언젠가 둘이 힘을 합쳐 만들었던 이토모리 통나무 카페, 테시가와라는 그곳에서 홀로 타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같이 있던 사야카가 없는 건 오랜만이었기에 타키는 간단하게 행방을 물었다.
“사야는?”
“집에 갔어.”
하긴 사야카가 들어도 좋은 내용이라면 진작에 물어봤을 것이다. 테시가와라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이제 막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에 앉으려는 타키에게 테시가와라는 말없이 방금 뽑은 따끈한 캔커피를 내밀었다.
“고맙다.”
손에 들어오는 따뜻함에 고마움을 표하는 타키. 여전히 테시가와라는 무겁게 고개만을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가 가진 커피캔만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커피캔을 반쯤 비운 타키가 캔을 탁 하고 탁자에 놓았다. 커피도 좋았지만 오늘의 용건이 무언지는 슬슬 알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텟시? 나에게 묻고 싶은 게 뭐야?”
직접적으로 찔러보는 타키였지만 여전히 테시가와라의 입은 무거웠다. 용건에 대해 말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계속 커피만 마시는 테시가와라가 갑갑해져 타키가 더 이상 참지 못할 때쯤, 커피를 다 비운 테시가와라가 캔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무렇게나 던졌지만 놀랍게도 커피캔은 구석의 쓰레기통으로 쏙 들어갔다. 쓰레기통 쪽으로는 눈조차 돌리지 않은 채 테시가와라는 낮의 그 화제를 다시 꺼냈다.
“너, 미츠하가 아니라 했지?”
“뭐야, 아까는 믿는 척 하더니 이제 와서 의심하기냐?”
낮에 보여줬던 신뢰와는 백팔십도 달라진 태도에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끼는 타키. 그 배신감이 그대로 드러나 말투에도 점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이제 막 한소리 하려던 타키에게 그는 서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냥 한 번 더 확인해두고 싶었을 뿐이다. …타키.”
마치 눈앞에 있는 자가 미츠하가 아님을 스스로의 마음에 새겨 넣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중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타키는 재차 용건을 물었다.
“그래, 난 타키다. 앞으로도 그렇게 부르면 돼. 근데 설마 이게 내게 묻고 싶다던 용건이었냐?”
“그럴 리가 있겠냐.”
타키의 추측을 간단히 일축하며 테시가와라는 살짝 웃어보였다.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 같으면서도, 각오와 의지가 서려있는 웃음이었다.
“못 믿는 것처럼 보였다면 미안하지만, 난 꼭 한 번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왜냐면, 지금부터 물어보려는 건 절대로 미츠하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용건이거든.”
“그 녀석에게는 물어볼 수 없다고? 왜지?”
“그건 내 말을 들어보면 알게 될 거야.”
지금까지 줄곧 타키를 제대로 마주보고 있던 테시가와라의 시선이 처음으로 다른 곳으로 향했다. 타키 또한 그를 따라서 시선을 돌려 봤지만, 그가 무언가 특별한 걸 보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결론밖에는 얻을 수 없었다.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는 툭 던지듯이 무언가를 내뱉었다.
“과연 나란 놈이 미츠하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순간적으로 타키는 귀의 성능을 의심해야 했다. 항상 장난기 있고, 호쾌하고, 자잘한 고민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것만 같았던 테시가와라에게서 나온 말이라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잘못 들은 거 아니다.”
확인 차 다시 물은 타키에게 또다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타키도 더 이상은 말의 진위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곰곰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팔자에도 없던 이토모리 생활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테시가와라와 사야카는 항상 그와 함께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변한 친구조차 마음 넓게 받아들여 주었던 친구들. 원래 미츠하와의 관계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우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가 사람이 변하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친구들이라면 세상에 둘도 없을 귀한 친구들이다. 인생 경험이 얼마 안 되는 타키였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좋은 친구들 중 하나인 테시가와라가 스스로의 자격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타키는 지금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지?”
질문은 분명히 들었을 터. 하지만 테시가와라에게선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혼자 애가 탄 타키가 먼저 자기 속을 털어놓고야 만다.
“미츠하와 네 관계가 어떤지는 잘 몰라. 하지만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사야도 그랬지만, 내가 미츠하가 아니라는 걸 모를 때도 너는 내게 잘해주었고, 나를 그대로 친구로서 받아들여 주었지. 솔직히 이제 와서 그런 고민을 하는 이유가 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
“미츠하와 나의 관계를 모른다면 그럴 만도 하겠네.”
길게 털어놓은 본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뚱한 투의 테시가와라. 무뚝뚝한 태도가 타키의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고, 그대로 소리의 형태로 변해 튀어나오고 만다.
“그럼 알려줘. 어디 들어나 보고 생각하자.”
목소리에 잔뜩 묻어나온 심통에도 불구하고 테시가와라는 미소를 지었다. 직설적이고, 자기의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 역시나 타키의 성격은 과거의 자신을 꽤나 닮아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주어 말했다.
“알았다. 다 말해주지. 그 전에.”
말을 잠시 끊으며 테시가와라는 바로 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윽고 그의 눈이 조금씩, 조금씩 먼 과거를 향하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테시가와라가 약간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미츠하를 어떻게 생각하냐?”
“무, 무슨?!”
“딱히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미야미즈 미츠하라는 인간에 대한 감상을 묻는 이야기야.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하면 돼.”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려던 타키를 테시가와라가 간단히 진정시켰다. 솔솔 피어오르는 당혹감에 홍당무처럼 볼을 붉히면서도 타키는 들은 말을 성실히 따랐다. 떠오르는 인상 그대로라, 타키는 고개를 한껏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어휴, 말도 마. 정말로.”
“무슨 의미지?”
“아까 내가 우리는 서로 몸이 바뀐다고 그랬지? 그럼 지금 걔는 어디 있을 것 같냐?”
“아, 그럼 지금 미츠하는 도쿄에 있겠군.”
과연, 지금은 타키의 몸속에 있다는 말인가.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테시가와라는 조금씩 속에서 끓어오르는 은은한 질투를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놓았다. 그런 속도 모르고 타키는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맞아, 너 도쿄에서 걔가 어떻게 다니는지 모르지?”
“당연히, 그래서? 어떻게 다니는데?”
생각지 못한 흐름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테시가와라, 그를 향해 타키는 장난스레 씩 웃어보였다. 그는 살짝 볼멘소리로 되물었다.
“뭐야, 그 웃음은?”
“아마 들으면 미츠하라는 애가 이런 애였나 싶을 걸?”
“들어보고나 생각하자. 그래서 뭔데?”
약간의 튕김에도 홀라당 넘어가, 이제는 잔뜩 안달이 나서 치근대는 테시가와라. 그건 과연 단순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타키 역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다 말하자면 오늘이 다 가도 안 끝날 테니 대충 요점만 말하자면, 그 녀석 때문에 요즘 내 지갑이 남아나질 않는다.”
“지갑? 왜?”
확실히 돈 문제라고 하면 미츠하에게도 있긴 있었다. 정반대의 의미였지만, 이토모리 고등학교에서 미츠하는 소문난 짠순이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고야 마는 테시가와라.
“걔가 하도 카페, 카페하고 노래를 불러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카페도 만들어 줬었지?”
“내가 만들자고 한 건데 당연히.”
“그래, 그런데 그런 애가 눈만 돌리면 카페가 잔뜩 있는 도쿄를 갔단 말이지. 어땠을 것 같냐?”
“설마…. 아니겠지.”
신음성을 흘리며 조심스레 부정해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타키는 간단하게 쐐기를 박아버리고 말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몸이 바뀔 때마다 카페 가는 거 하나는 안 빼먹는 지극정성이라니까. 간단하게 구경만 하고 오느냐면 그것도 아니야. 하나에 몇천 엔씩 하는 디저트도 아주 거리낌없이 시킨다고.”
“믿을 수 없어, 미츠하가 고등학생 돼서 지금까지 쓴 돈을 다 합쳐도 만 엔이 채 안 될걸.”
그래, 나도 미츠하가 돼서 거의 한 달을 다 살아가는데 아직도 그걸 모를까. 계속해서 테시가와라가 자기 말을 믿지 않는 듯하자 심통이 나버린 타키가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거 뭐, 폰도 내 것이 아니라서 어떻게 내역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아무튼 난 오늘 사실만을 말할 거야. 그러니 그냥 믿어. 너도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날 부른 건 아닐 거 아니야.”
“농담은 아닌 모양이군, 그런가…. 거기에선….”
처음엔 정말로 믿을 수 없었지만, 거듭된 확답에 어떻게든 타키의 말을 수긍할 수 있었다. 마침내 테시가와라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구나. 거기서는 마음껏 자유롭게 사는구나. 살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나는 몇 년을 걸려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저 녀석은 그저 몸이 바뀌는 것만으로 해낸 것인가.
막 생각에 빠지려는 테시가와라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텟시?”
갑자기 돌아온 현실에 화들짝 놀라며 테시가와라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 미안.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미츠하가 그럴 거라곤 생각도 못해서 더 놀랐던 거야. 뭐, 이렇게 되면 얘기는 쉽겠군.”
“얘기가 쉽다고?”
이번에는 타키가 어리둥절해할 차례였다. 믿을 수 없달 때는 언제고 갑자기 얘기가 쉬워졌다니?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흐름에 타키의 머릿속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다행히도 테시가와라는 길게 끌지 않고 마저 설명해주었다.
“믿을 수 없다고는 했지만 걔가 그런 애일 리 없다는 식의 의미는 아니야. 그보다는 설마 또다시 그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또다시?”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타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머리가 조금씩 복잡해지려 했지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테시가와라는 그의 오래된 의문점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너, 혹시 여기서 들은 미츠하의 인상이 네 생각이랑 무지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냐?”
그렇다.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해묵은 의문의 실마리가 이제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여 대는 타키. 그 모습을 보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테시가와라가 씩 웃었다.
“그렇겠지. 10살 이후 보인 적이 없는 모습을 도쿄에서만 보인 셈이니.”
“10살 이후 보인 적이 없다고?”
“그리고 미츠하의 원래 성격이었기도 했지.”
쿵, 마치 해머로 내려친 것과도 같은 둔중한 충격이 타키의 머릿속에서 퍼져나갔다. 테시가와라는 아까부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다시 가지런히 통나무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와 미츠하가 처음 만난 건 초등학생 때였다. 건설회사 아들과 신사집 딸의 만남이 아닌, 평범한 그 나잇대 애들처럼 그렇게 만났지.”
서서히 긴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테시가와라의 시선이 또다시 먼 과거를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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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평소의 내가 어땠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장난을 칠 때만큼은 상대가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는 가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집안의 골칫거리였고, 교실의 천덕꾸러기였으며 친구들에게는 세상에 다시없을 장난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애라는 존재는 나에게 있어서도 꽤나 귀찮은 존재였다.
어떤 장난을 쳐도 뒤탈이 없었던 남자애들과 달리, 여자애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울어버리거나, 아니면 장난에 질려버린 나머지 두 번 다시 나와는 상대하려 하지 않는다든가. 때문에 나는 남자애들이랑은 꽤나 격의 없이 지냈지만, 그럭저럭이라도 지내는 여자애라곤 사야카가 유일했었다.
이쯤에서 스스로를 좀 변호해 보자면, 나는 장난은 마음껏 치더라도 치마를 들춰본다든가 하는 짓만은 하지 않았었다.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다. 뭐, 거창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남자애들한테 치지 않는 장난은 여자애들한테도 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나름의 신조였기 때문이었지만.
아무튼, 여자애들은 도통 나의 장난을 받아들이질 못했고, 사야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의 편견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다른 애도 아니고, 설마하니 완벽한 모범생으로 통하던 그 녀석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그 완벽지향이 그런 방식으로 드러났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해야겠지.
놀랍게도 나의 장난에 미츠하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패배감마저 안겨주었다. 어설프게 장난을 걸었던 나는 녀석의 화려한 반격에 완전히 나가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당하고도 어안이 벙벙해서 한참을 멍해있었던 것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나는 결국 분루를 삼키며 미야미즈 미츠하라는 인간에 대한 정보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게 간단히 당해버렸던 게 분했고, 또 분해서 그 다음날도 나는 녀석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리고 또 깨졌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 이러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서야 나는 어설픈 장난질로는 녀석을 절대 어찌해볼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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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무슨 느낌일지 알 것도 같네. 확실히 지금 미츠하도 내가 뭔 말을 하든 도통 들어먹질 않으니까.”
음, 그럼 그럼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타키였지만, 그에 반해 테시가와라의 고개는 가로로 움직였다.
“그런 거랑은 조금 느낌이 달라. 아무튼, 마저 이야기를 계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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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뭐, 그런 데에 별 관심이 없지만, 최소한 옛날의 나는 지고는 못 사는 인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느 장난꾸러기들처럼 머리가 안 좋은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를 이 세상 누구에게도 무엇 하나 꿀릴 게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있어 미야미즈 미츠하라는 존재는 내 정체성 자체를 박살내버리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혹시 이 세상에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처음엔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게 아니게 되었다. 한 번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녀석을 이겨보겠다고 나는 정말이지 온갖 걸 다 해봤다.
가벼운 장난질부터 시작했지만 줄창 깨지기만 했던 나는 주제에 방법이라고 하나를 고안해냈는데, 그게 바로 공부로 그 녀석을 이겨보자는 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각종 잡다한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기계들에 대한 사용법 같은 걸 공부하는 데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지와는 달리 평소에도 성적이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성적이 나빴으면 우리 아버지에게 불려가서 치도곤을 당할 몸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공부에 주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공부에 힘만 쏟으면 저 요망한 여자애 하나 정도 이기는 건 일도 아니다. 그 땐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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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 녀석 공부 잘하더라.”
“그걸 타키 너가 어떻게 알아?”
“내가 수학 시험 한번 말아먹어서 선생님한테 불려갔을 때 알았지. 선생이 걔 이전 성적들 좍 불러주는데 엄청 미안해지더라고. 내가 정말 엄청난 민폐를 끼쳤어.”
“뭐, 너무 그러진 마라. 너 중2잖냐.”
“걔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야.”
새삼 다시 미츠하에 대한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어버린 타키를 테시가와라가 말없이 다독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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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야카로부터 느껴지는 시선이 많이 따가워졌다. 뭐, 물론 평소에도 그렇게 좋은 시선을 받지는 못했지만 근래 더 안 좋아졌다는 소리다.
주변으로부터도 조금씩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끔은 선생님한테 불려가서 야단도 맞곤 했다. 그래도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는 거라곤 오로지 단 하나. 오늘도 그 녀석에게 졌다는 그 사실 하나뿐이었다.
일 년도 이제 반이 넘게 지나갔을 그 때서야 나는 또다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로도 저 녀석을 이기기는 힘들 거라는 걸. 물론 나 또한 머리가 굳어있지는 않아서 공부하면 분명 성적이 늘었지만, 그건 저 미츠하도 매한가지였다. 저 녀석과 나의 시작점은 분명히 달랐고, 그 거리는 좁혀질 듯 말듯 하면서도 결국은 좁혀지지 않았다.
또다시 약이 오를 대로 올라버린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장난을 쳐야 저 얄미운 미츠하 녀석이 눈물을 흘리며 패배를 선언할지 생각해보기 시작했지만, 이내 폐기처분해 버렸다. 그런 건 이미 다 시도해 봤단 말이다.
돌파구는 없고, 약은 미칠 듯이 오르고, 결국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던 돌파구는 바로 체육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었다,
솔직히 좀 찔리긴 했다. 남자애가 돼서 여자애랑 몸 쓰는 대결을 해야 되나? 불공정한 거 아냐? 이겨놓고도 졸렬하다 소리나 듣겠지, 싶으면서도 그래도 어떻게든 이겨보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나는 기꺼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처음으로 농구 자유투로 미츠하에게 도전을 했을 때 사야카의 뜨악해하던 얼굴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안 받아주겠지 싶은 마음에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지만, 놀랍게도 그 녀석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내 도전을 받아주었다.
조금 뒤, 사야카는 남자가 돼서 뭐 하는 짓이냐며 나를 힐난했지만, 뭐 그래도 오늘 이기면 마지막이니까. 하고 나는 사야카를 설득했다. 꽤나 지긋지긋했는지 사야카는 영 마뜩찮아 하면서도 마지막이라는 단 한 마디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가 주었다. 그래, 정말로 마지막이다. 진짜로 그 때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몸 쓰는 일조차 미츠하를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니 점점 내 이미지는 유쾌한 장난꾼에서 추잡한 놈에 가까워져갔고, 사야카의 시선 또한 점점 싸늘해지더니 급기야는 항상 함께했던 하굣길조차 같이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쯤 되면 포기할 법도 했지만 여전히 나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아니, 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제든지 그만두면 그만인데, 왜 이러는 걸까. 나조차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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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랬냐? 내가 봐도 좀 집착 같다야.”
“그래, 지금 내가 봐도 그렇다. 아니, 어쩌면 진짜로 집착이었을지도.”
“뒤에 뭐라 그랬어?”
“아냐!”
헛기침으로 대충 상황을 무마한 테시가와라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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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냥 한낱 망집이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 짓을 계속해야 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만둘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계속해서 도전했고, 또다시 비참하게 깨졌다. 이제 관성으로만 지속되는 도전에 나 또한 지쳤고, 어느새 나는 그녀가 내 도전을 거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날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더는 네 무의미한 놀이에 어울려줄 수 없다며 그녀가 날 쫓아냈던 날, 분명 홀가분해졌어야 할 터인데도 나는 왜인지 미칠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야카와 함께였던 하굣길에서도 그 외로움만은 전혀 덜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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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
“그래, 여러모로 사람 마음엔 깜깜했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착각은 아니야. 그건 확실히 외로움이었어. 다른 것일 수가 없었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마친 테시가와라는 잠시 가방을 뒤적이더니 곧 커피를 한 캔 더 꺼내서 타키에게 던졌다. 누가 전직 농구선수 아니랄까봐 타키는 능숙하게 캔을 받아냈다.
“마셔라.”
“고맙다.”
권커니 받거니 하며 두 사람은 또다시 커피를 땄다. 이번엔 가볍게 한 모금만 마신 테시가와라가 다시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그 때의 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설명이 좀 힘들어, 나로서도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던 면이 너무 많았으니까.”
“너도?”
“응?”
매도와 힐난은 예상했어도 공감은 예상하지 못했던 테시가와라는 그만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타키 또한 얼마 전의, 조금은 쓰린 기억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미츠하랑 엮이고 나서부터는 그런 생각이 좀 들었거든, 가끔 나도 설명 못하는 충동이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 같은.”
“그래? 그럼 역시 미츠하가 문제인 건가.”
“그렇지? 하하.”
심각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그렇게 두 남자는 잠깐 동안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사는 곳부터 성격까지 많은 차이가 있는 두 사람. 그러나 가끔이지만 진정한 문제는 내부에 있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진리조차 아직 자각하지 못한 바보들이라는 점만은 같았다.
작은 웃음의 시간이었지만, 그 또한 오래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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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사라질 줄로만 생각했던 그 원인 모를 외로움은 몇날 며칠이 지나도록 나를 꾸준하게 괴롭혔다. 그걸로도 모자라 생애 처음으로 겪어보는 무기력증이라는 놈까지 나를 찾아왔다. 발생 원인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는 미지의 존재들이 연이어 나를 괴롭혔고, 대처법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미츠하를 찾아갔지만,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더 당황할 게 남아있었음에 놀라야 했다.
두 번째로 거절당하는 순간,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의 크기가 더 커지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꼈다. 이게 왜 이렇게 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츠하에게 도전을 거부당하면 내가 외로워진다는 것만은 확실해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는 놈이 이렇게까지 승부욕에 미쳐 사는 놈이었나 싶어서, 애써 부정해 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현실을 인정하고 돌파구를 찾아보는 것뿐이었다.
결국, 내가 찾아낸 돌파구는 이번에도 동일했다.
진심으로 이기고 싶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에 진심이 될 수도 없는 주제에 함부로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꾸짖는 미츠하에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른 놈도 아니고 내가 그럴 줄은 몰랐는지 그녀는 당황해버리고 만다. 첫 날 이후 처음 보는 그녀의 당황, 하지만 좋아할 겨를도 없이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꼭 이렇게라도 나는 너에게 도전해야겠다고, 그러지 못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억지 같아도 한 번만 받아달라고, 이기든 지든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너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간절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나는 매달렸고, 실랑이 끝에 결국 미츠하는 나의 고집을 못 이겨 내 요청을 받아주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종목은, 지금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의 체력 대결. 룰은 간단했다. 산 중턱에 있는 바위그늘 쉼터까지 누가 먼저 도달하는가. 그것뿐.
위험하다며 미츠하는 연신 다른 걸로 바꾸자고 했지만, 나는 계속 밀고 나갔다. 사실 다른 거 다 제치고 이미 다른 건 다 해봤기 때문에 남은 게 없기도 했다.
만일 미츠하가 내 요청을 무시했다면,
바꾸자고 했을 때 내가 고집부리지 않았다면,
조금은 다른 결말을 맞게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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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아무리 타키라도 이쯤 되면 알 수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심지어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까지도.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타키 대신에 테시가와라가 나섰다.
“그래, 네 생각대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츠하는 날 한참 앞서서 저 멀리 가버렸고, 그 와중에 나는 혼자 무리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제대로 굴러버리고 말았던 거야.”
“….”
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타키 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테시가와라는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으로 처리해 버렸다.
“깨어나 보니 병원에 있더라고, 구르는 것도 잘 굴렀어야 됐는데 나라는 놈은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어디 돌부리에 제대로 머리라도 박은 모양이야. 여기 보이냐?”
말하면서 테시가와라는 머리 한쪽을 타키 쪽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손가락으로 머리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걸 본 타키의 입에서 신음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건….”
테시가와라의 머리를 가리킨 채 굳어버린 타키, 그의 겉을 이루는 미츠하의 얼굴을 테시가와라는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너도 그 때는 저런 심정이었을까. 아니지, 고작 저 정도가 아니었겠지.
“그래, 가죽이 찢어져서 거의 열 바늘 넘게 꿰맸다. 거기까지면 다행이었는데 하필 뇌진탕 증세까지 와서 낫는 데 좀 시간이 걸렸지. 다행히도 장애가 남거나 하지는 않았다마는.”
“그건 정말 다행이네. 머리를 잘못 다치면 정말 큰일 날 텐데.”
“의사도 그러더라, 운이 좋았다고. 그 무뚝뚝하고 한 성깔 하는 우리 아버지도 그 때만큼은 날 붙잡고 우셨지, 근데 말이야. 좋은 건 거기까지였어.”
싫은 기억을 잔뜩 떠올리는 테시가와라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구겨져 갔다. 타키는 그 괴로워 보이는 얼굴을 그저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더 싫은 기억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어떻게 거기서 끝났지. 하지만 미츠하는 어떻게 됐을 것 같냐?”
“… 어떻게?”
“너, 이미지, 또는 인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아냐?”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고, 타키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대답과는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요즘 세상에 신사라는 곳이 무슨 거창한 일을 하겠냐, 그저 형식적인 일만 하고,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로부터 기부금 받아먹고 사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 만큼 신사란 곳은 이미지가 중요해. 미츠하는 내가 누워있는 사이에 바로 그 부분을 공격받아버리고 만 거야.”
“뭐야? 미츠하가 뭘 잘못했다고? 걔는 아무 것도…”
막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려는 타키를 그는 말로 가로막는다. 벌써부터 흥분할 때는 아니었으니까. 아직 해야 할 말을 다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 걔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어. 애초에 시작도 내가 했고, 적당히 상황 봐서 끊은 것도 걔였고, 다시 무리하게 매달린 것도 나였지.”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테시가와라의 표정은 자책감에 갈수록 일그러져만 갔다. 보는 사람마저 절로 가슴이 아파올 만큼.
“하지만 그걸 제대로 설명해줬어야 할 내가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질 못했고, 그 사이에 쏟아지는 욕은 모두 걔가 감당해야 했지. 애가 얼마나 경솔하면 그런 걸 생각도 없이 받아 주냐, 저렇게 키운 애 부모는 누구냐. 어라, 그러고 보니 쟤 신사네 딸 아냐? 요즘 신사는 자식 교육을 저렇게 구식으로 시키나? 뭐 이런 것들 말이야.”
“뭐야, 그게…. 말도 안 되잖아!!”
끓어오르는 다혈질이 마침내 폭발하고 만 타키가 탁자를 두 손으로 쾅 쳤다. 그런 타키를 그는 조용히, 마음으로 이해했다. 자신 또한 처음 알았을 때 저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어른들이란 것들은 필요하다면 어떤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인간들이라더라. 학교에서 배운 거랑은 좀 다르지?”
씩씩거리면서도 타키는 말의 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떤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필요하다면’
“왜? 대체 왜 그런 게 필요했다는 건데?”
꾹꾹 눌러 담은, 갈 데도 없는 분노. 그나마 목소리로라도 담아내는 것이 타키로서는 최선이었다. 속으로는 정말이지 미치도록 그에게 공감하면서도 테시가와라는 애써 태연한 척 설명해 주었다.
“우리 집이야 이미 뭐, 비리니 뭐니 하면서 마음껏 의혹을 받던 입장이라 내가 좀 그런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었지. 하지만 걔네 집은 달랐어. 이 동네에도 다른 마을에 비해 이상하게 위상이 높은 미야미즈 신사를 시샘하는 이들은 있었고, 그런 인간들에게 이런 사건은 물어뜯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던 거야.”
처음 듣는 추악한 진실에 타키의 말문은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결과를 말하려는 그의 목소리 또한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떨려왔다.
“미츠하 그 녀석, 자기 자신이야 아무리 귀찮게 해도 견딜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그렇게 끈덕지게 들러붙는데도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던 거지. 하지만 나는 너무 늦게 알았어. 그 녀석은, 자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해를 입는 건 죽어도 못 견디는 성격이었던 거야. 자기 때문에 집안이, 부모님이 욕을 먹는다고 생각한 걔는 그만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고 말았고.”
“극단적이라니? 설마?!”
최악의 생각을 떠올렸는지 타키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지만, 착각은 곧 테시가와라에 의해 보정되었다. 착각이었는지는 애매했지만 말이다.
“그런 건 아니야. 인생마저 도피할 정도로 약한 애는 아니니까. 단지…. 다른 걸 피했을 뿐. 그 사건 이후로, 그 녀석의 성격은 완전히 변해버렸어. 원래도 조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건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인간관계라는 걸 기피하게 되어버렸지.”
왜, 왜 쟤한테 그러는 거야, 잘못은 내가 했는데, 나를 욕해, 나를 욕하라고. 결국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공허한 외침.
마침내 그의 목소리마저 짙은 회한에 잠기고 말았다. 거기엔 오갈 데 없던 타키의 분노마저 사그라들게 만들 정도의 슬픔이 담겨 있었다.
“깨어나고 나서, 나는 어떻게든 그 녀석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탓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서, 마음은 완전히 닫혀버린 채였어. 조금이나마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래, 꼬박 1년이 걸렸지. 시간이 약이라고, 나와 사야카라도 조금은 친구로서 받아들이게 됐지만, 녀석의 한계는 거기까지였어. 더 이상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 들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지.”
“그래서 친구가 너희 둘뿐인 거였나….”
오랜 궁금증 중 하나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타키는 조금은 맥이 빠져버리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빠진 자리에는 공허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쓰게 웃으며, 테시가와라는 마침내 길고 긴 회상을 마쳤다.
“지금까지는 그 정도로 만족하고 살았다.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는 것으로 좋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즘 들어 너를 보고 있자면 그렇지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단 말이야.”
“나?”
“그래, 너.”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으면 거기서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잊고 있었던 진정한 친구 사이. 그게 뭔지를 다시 깨우치게 해 버린 너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책임지라고, 친구.
“난 너야말로 내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갑자기 터져나온 테시가와라의 선언, 타키의 생각은 순간 마비되고 만다. 뭐? 나를? 타키가 미처 정신을 차려 볼 틈조차 없이 테시가와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미츠하도, 사야카도 분명 내 친구가 맞지만 그 둘은 여러 가지 일도 있었고 해서, 마음을 터놓고 살기에는 조금 힘든 친구들이였지. 성별도 다르고. 우오즈미 형 같은 회사 사람들이랑도 친하게는 지내지만, 어디까지나 친구는 아니야. 인생 선배 같은 느낌이지.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가 또 다른 미츠하라는 생각에 조금은 주저했지만, 오늘 그렇지 않다는 사실마저도 알아버렸지. 이제 난 말할 수 있어. 내게 친구라고 할 만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너뿐이라고.”
자신의 속을 거의 다 털어놓은 테시가와라는 이제 마지막으로, 타키에게 다시 한 번 힘든 문제를 던지려 한다. 비겁한 떠넘기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너는 내 친구니까.
“그래서 곤란한 친구 미츠하가 아닌 친한 친구 타키에게 묻는 거야. 이런 못난 내가 그 녀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난 네 솔직한 대답을 알고 싶다. 뭐라고 말해도 나는 좋으니까. 그저 생각대로만 대답해 줘.”
마침내 테시가와라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이. 확실하게. 이제 배턴은 타키에게 넘어갔고, 그는 지그시 생각에 잠겼다.
-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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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바가 살아있는 세상의 이야기.
2주 동안의 재검토 기간 동안 21화까지의 모든 글을 크고 작게 손봤습니다. 특히 18화가 수정사항이 많습니다.
내용 자체는 아주 크게 변한 부분은 없습니다.
이번 22화는 아직 다 완성하지 못했지만, 분량 폭주가 우려되고 너무 오랫동안 쉬었기에 일단 완성된 부분이라도 올렸습니다. 내용상으로 완전하지 못한 부분은 일단 하편을 기다려주세요.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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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안짤렸다 쎅스다 씨발
안 짤림추
ㄷㄷㄷㄷ - dc App
짤릴까봐 무서워서 후기에 수정 관련한 사항 보충하자면, 초반부는 주로 묘사의 부족함을 보강한 부분이 많고, 후반부는 묘사의 과함을 덜어낸 부분이 많습니다. 내용 자체는 아주 크게 변한 건 없습니다만, 다시 읽어주신다면 아주 감사드리는 부분입니다.
제꺼 올리는 동안에 먼저 올라왔네요 ㅋ 일단 속독으로 쭉 읽었는데 자세히 읽어볼게요. 흥미진진하네요
하 편이 기대되네
예상했던것처럼 산까지 달리기엿고 거기서 사고가 나는것였네요 어린 시절의 텟시의 심리 상태나 마지막에 텟시가 타키를 진정한 친구라는 생각하고 미츠하의 관계를 어떻게 했으면 대해서 물어보는것 좋았습니다 나중에 시간 내서 전에것 읽었야 겠네요
다음편...!
전에 도입부 달리기 딱밥이 여기서 나오는군.
ㄴ 정작 수정하면서 그 도입부는 다 날려버렸지만요ㅋㅋㅋㅋ
달리기가 이거였나... 그런데 텟시가 타키한테 너무 쉽게 자기 과거를 말하는 것 같기도... 본인한테도 큰 상처였을텐데 뭔가 아쉽다고 해야 될까나... 그나저나 텟시는 왠지 작가님 경험이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ㄴ 사실, 타키와 텟시 간의 일상은 거의 다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미 원작이나 외전에 어느정도 나와있기 때문에... 타키를 매우 친근하게 느끼는 텟시에 대해서는 특히 외전 2화에서 참고를 많이 했습니다.
타키가 괴로워하는 텟시의 손을 잡아줄 성격일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착하고 같이 고민을 해줄 성격은 맞을 것 같지만 손까지 잡아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보통 남자가 남자 손을 잡아주는 일은 없으니까요. 츠카사는 그럴 것 같지만 ㅋㅋㅋ 재미있게 잘 봤어용
ㄴ 억? 왜 갑자기 기억나지 않지? 좀 봐야겠습니다 그 부분은. 지적 감사합니다.